151화 S급 던전 (2)
“그놈 추정 레벨이 270이야. 말이 돼?”
한석훈이 질린 얼굴로 고개를 젓다가 얼레, 하며 나를 쳐다봤다.
“이놈이 놀라지도 않네. 하긴, 믿어지지가 않지?”
믿는다. 아마 진짜일 거다.
어쩌면 더 높을지도 모르고.
하오란이 한 팔을 잃었어도 시스템의 선택을 받은 놈이니까.
시스템은 자신이 선택한 인물에 한해서, 쪼잔하지 않다.
과하리만치 퍼준다.
물론 그 과정에서 뼈를 깎는 고통이 뒤따르지만, 그럼에도 시스템이 없었다면 나나 하오란이나 여기까지 올 수 없었을 것이다.
“나도 처음엔 몇 번이나 되물었어. 하여튼 오래 살고 볼 일이라니까. 이제 겨우 10년 차 조금 지난 헌터가 S급 각성자라니.”
문득 한석훈이 표정을 굳혔다.
“그러니까 괜한 맘 먹지 마라. 경고든 뭐든. 그놈 칼질 한 방이면 너도 나도 끽. 뒤지는 거야.”
한석훈은 마지막으로
“옛날에 그 하오란이 아니다. 좋은 거 있으면 같이 좀 처먹을 것이지. 쯧.”
이렇게 말하며 혀를 찼다. 그러며 내 눈치를 슬그머니 살핀다.
나는 겁먹은 표정이라도 지어야 하나, 하다가 내 연기력이 엉망이라는 걸 떠올렸다.
“그래서 그놈 위치는요?”
“이게 그래도. S급 던전 들어갔다는 말 못 들었어?”
“S급 던전이 한두 군데여야죠.”
몬스터의 침공이 점점 더 거세지고 있는 세상이다. A급 던전은 심심하면 나타나고, S급 던전도 빈번하게 보인다. 문제는 이러한 현상이 가속화되고 있다는 것.
“그리고 저도 그놈 위치를 알아야 대비할 거 아닙니까.”
“때 되면 내가 알려줄 테니까 넌 뭐냐, 던전이나 공략해라. A급 한 번 실패하더니 기가 죽은 거냐?”
“언제는 쉬라더니.”
“너무 쉬었어. 안 봐도 네놈 칼 녹슨 게 보인다. 혹시라도 말하는데, 나 몰래 하오란 뒤 캐낼 생각은 하지 말고. 이거, 협회에서도 모르는 정보니까.”
“협회에서도 모르는 걸 팀장님은 어떻게 아는데요?”
“잘.”
얄밉게 말한 한석훈이 어깨를 으쓱했다.
“나랑 내기할까?”
“갑자기 무슨 내기요.”
“내 A급 던전 레코드가 6일이거든? 이거보다 빨리 공략하는 날이 오면, 그때는 알려줄게. 그놈 뭐하고 다니는지.”
“A급 던전. 6일이요.”
“왜, 못하겠어? 인마. 그 정도는 돼야 하오란 발가락이라도 따라갈 수 있는 판에…….”
“아뇨. 해보죠, 뭐. 몇 개 기준입니까?”
“뭐가 몇 개야?”
“던전이요. 6일 안에 던전 몇 개를 깨야…….”
말하다 말고 아차했다.
순간 이 양반이 내 레벨을 알고 있는 줄 착각했다. 그래서 A급 던전 스무 개 정도를 6일 안에 클리어하라, 그런 난이도로, 뇌에서 강제로 인식해 버린 것이다.
빠르게 고개를 저은 나는 바로 정정했다. 아니, 하려 했다.
이 양반이 갑자기 박장대소를 터트리는 바람에 기회가 물 건너 가버렸다.
한석훈이 낄낄대면서 내 어깨를 잡았다.
조롱의 시간이었다.
“개그하냐?”
“…….”
“방금 건 상당히 역겨웠어. 그 진지한 표정으로 몇 개 기준입니까? 하는 거. 애들한테도 알려줘야지. 다시 말해봐. 녹음하게.”
“…….”
“의욕은 좋다. 의욕은 좋아.”
나를 위아래로 훑어보던 한석훈이 고개를 저으며, 애들이 있는 곳으로 다시 갔다.
아마 한동안 저 방에서는 웃음이 끊이지 않을 것이다.
***
“그래서 A급 던전을 간다고요? 또 이 멤버로?”
“기대가 되네요. 그래서 보수는 얼마죠? 저놈들은 밥만 먹여줘도 좋아해서요. 돈은 저한테 다 입금해주시면 됩니다. 고객님.”
“저 여자는 필요 없을 것 같은데.”
“영광입니다. 팀장님.”
각각 박지현, 음지 3인방 중 조영은, 임한나, 김태평의 말이었다.
굳이 파티원들을 이렇게 많이 부른 이유는, 다름 아닌 협회 때문이다.
손정연의 죽음으로 인해 잔뜩 민감해져 있을 협회다.
용의자 중 한 명으로 나를 지목했을 가능성이 아주 높고.
손정연도 없는 지금 협회가 무섭지는 않다. 감히 나를 도모하지 못하게끔, 먼저 눌러버릴 수도 있다.
하지만 주위 사람들이 문제다. 예컨대 김세린 같은 녀석이 협회에 무슨 짓을 당할지 모를 노릇이다.
그리고 한석훈에게 한 방 먹이려면, 이편이 더 수월하기도 하고.
나는 박지현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나저나 박지현 씨는 오라고 한 적 없는데요?”
“……지금 그게 할 말이에요?”
팀원들이 마음에 안 든다며 혀를 차던 박지현이 문득 정색했다.
“내가 그쪽 때문에 협회에서 짤린 거 몰라요? 어떻게 남자가 이렇게 책임감이 없지?”
박지현이 한 손으로 머리를 넘기며 말했다.
“책임을 져야 할 거 아니에요. 책임을. 일성까지 관두고 협회 들어갔다가 짤렸으면, 그쪽이 나 먹여 살려야 할 거 아니야.”
먹여 살린다는 부분에서, 임한나가 눈썹을 까딱거렸다.
“그쪽 책임을 왜 우리가 져?”
“그쪽? 어머. 말하는 것 좀 봐. 그리고 왜 우리야? 니가 이태진이야? 너보고 먹여 살리래?”
“우리 팀 부팀장이 누군지 몰라? 끼워주는 것도 감지덕지해야지.”
“웃기고 있네. 나 같은 힐러가 어디 흔한 줄 알아?”
또 시작이다. S급의 몬스터들은 하나도 안 무서운데, 어째 저것들이 기싸움 하는 걸 보면 피가 빠져나가는 기분이 든다. 나는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박지현 씨는 같이 가는 걸로 합시다. 그냥.”
내 말에 임한나는 어깨를 축 늘어뜨렸고, 박지현은 쾌재를 불렀다.
“대신 무급으로.”
“뭐요?”
“그렇지!”
다시금 전세가 역전됐다. 임한나가 기세등등하게 박지현을 바라본다.
“이봐요! 제가 왜 무급이에요?”
“협회에 들켰으니까. 그것 때문에 우리 작전이 다 날아간 거, 몰라?”
“……!”
이 두 사람.
가만 보면 사이가 좋은 건지 나쁜 건지 모르겠다.
임한나부터가 박지현을 그렇게 싫어하는 것 같지도 않다. 저번부터 우리 팀에 영입해야 한다고 몇 번 말하기도 했고.
결국 어깨를 축 늘어뜨린 박지현이 다음 타깃을 찾아 눈을 휙휙 돌렸다.
“어이.”
“저, 저요?”
“이름이 뭐라고?”
“김태평입니다.”
“내가 저 여자까지는 인정, 그런데 그쪽은 나보다 계급으로도, 실력으로도 안 되는 거 알지? 내가 이 팀 초창기 멤버야.”
“여, 열심히 하겠습니다!”
“열심히는 다 해. 잘하는 게 중요한 거지. 지켜볼 거예요.”
“옛!”
***
공간이 나를 뱉어내는 것과 함께 던전에 입장했다. 던전 유형은 이미 파악해뒀다.
A급 중에서 체급은 높되 던전 자체의 괴이함은 가장 낮은 오크던전.
즉, 힘으로 몰아붙이기 딱 좋은 던전이었다.
한석훈 너한테는 그런 것이 딱일 거라며, 낄낄대면서도 심혈을 기울여 골라줘서, 뭐라 거절도 못 했다.
옆을 돌아보자 임한나가 열심히 브리핑을 하고 있다.
저번과 같이 돌아가는 일은 절대 없을 거라며, 굳게 주먹을 쥐는 모습이 꽤 다부져 보인다.
“이번에는 성공해야지.”
S급도 아니고 A급 것들은 나를 막으려야 막을 수 없을 테니까.
대신 관전자의 입장에서 이들을 지켜봤다. 어쨌든 내 팀인 만큼, 녀석들을 강하게 만들어 주고 싶었다.
“마침 잘됐네.”
A급 던전답게 들어가자마자 방의 끝부분에 오크 놈들이 떡하니 서 있는 모습이다.
김태평과 임한나에게 턱짓했다.
“저놈부터 잡아봐.”
“저놈이라 하심은?”
“바로 앞에 있는 오크.”
아직 어둠에 적응하지 못한 팀원들이 잠시 눈을 부비다가, 이내 오크를 발견했다.
“레인저만큼 눈이 좋으시군요.”
음지 3인방 중 조영은의 말이었다.
“역시 사장님이십니다.”
“김수정한테 제 정보를 팔았다던데. 설마 또 찍고 있는 건 아니겠지?”
“히익!”
저 여자가 그러면 그렇지. 찔리는 게 있으니 내게 아부성 멘트를 하는 것이다. 반면 아무것도 모르는 나머지 음지 2호, 3호는 머리만 긁적이고 있었다.
“대가로 이번 던전은 무급인 거. 인정하죠?”
“……감사합니다.”
돈에 미친 여자인 조영은도 지금만큼은 한 마디도 못한 채 고개를 푹 수그렸다.
오히려 무급에서 끝나는 것을 다행으로 여겨야 할 판이지.
몰래 다른 헌터의 스킬 사용 장면을 찍었다가 죽는 경우도 왕왕 있으니까.
그때 김태평이 전류를 휘날리며 오크에게 날아갔다. 임한나의 화살이 놈에게 박힌 것도 동시였다.
예상했듯, 임한나의 화살은 튕겨 나왔으며 김태평의 전격은 놈에게 통하지 않았다.
“마나 분배가 중요합니다. 김태평 씨. 주먹에만 스킬을 집중하다 보니까 그런 거예요. 전신에 골고루 마력을 집중하세요.”
“옛!”
콰앙!
내 말을 들은 김태평이 다시 한번 오크에게 달려들었다. 아까와는 소리부터 달랐다. 번개처럼 날아간 김태평의 주먹 끝에 맺힌 뇌력.
“말은 성요한이 따로 없네.”
박지현이 그렇게 빈정거렸다. 얼굴에는 나도 한 방 먹였다는 승리감이 엿보인다.
“이럴 게 아니라 학원 차리는 게 어때요? 선생은 잘할 것 같은데.”
“돈 안 준다니까 화가 많이 나셨네요.”
“제가요? 그까짓 돈 때문에?”
화난 거 맞는 것 같은데.
“목숨 걸고 싸워야 하는 A급 던전에서 이게 무슨 장난질이에요? 이봐요. 그쪽 부하들 교육은 연무장에서나 많이 시켜요.”
잘됐다는 듯 박지현의 잔소리가 이어졌다.
“그리고 당신이 지금 이럴 때야? 안 그래도 A급 던전 공략 실패해서 언론들이 쥐어뜯을 기세던데. 여유 부려도 되는 거냐고요.”
“뒤에.”
“뒤에 뭐요.”
“오크 있다고요.”
아까부터 기회만 노리고 있던 놈이었다. 어둠 속에서 살금살금 이동하던 녀석이 노린 것은 박지현이었다.
녀석의 육중한 팔이 휘둘러진다. 첫 번째 구간인 만큼, 더군다나 팀같지도 않은 팀인 만큼 아직까지 제대로 된 전열을 가다듬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박지현이 오크의 팔에 고스란히 노출됐다.
“어?”
뒤늦게 박지현이 오크를 발견하고 황급히 고개를 숙였을 때.
서걱-
내 칼이 놈의 주먹을 포함한 상반신을 가르고 지나갔다.
와르르 쏟아지는 놈의 내장을 뒤로하고 한 번 더 도약했다. 남은 오크의 숫자는 총 열다섯.
“조심해! 주술사도 있어!”
“어어! 이봐요!”
“사장님!”
뒤이어 들려오는 목소리도 모두 지나쳤다.
“취륵!”
서걱-
바로 앞에 있는 놈이 칼질 한 방에 쓰러진다. 다음 놈도, 그다음 놈도 마찬가지였다. 확실히 테스트해 보니까 알겠다.
스킬과 특성을 정리하니까 몸이 더 가벼워졌다.
자질구레한 스킬은 마력으로, 혹은 마법으로 똑같은 효과를 낼 수 있다.
그러던 문득 아드레날린 부스트의 효과를 강화할 방법까지 생각해낸 때는.
내 주위에 있는 것들이 모두 사라져 있는 상태였다.
아차했다. 한 마리 잡으면서, 김태평에게 시범을 보여준다는 게 이렇게 된 것이다.
고개를 돌리자 사람들이 귀신보듯 나를 보고 있었다.
에라 모르겠다.
“이렇게 하는 겁니다. 김태평 씨.”
“예, 예!”
***
“오늘이 며칠째지?”
“6일째요.”
“그런데 저것들은 벌써부터 진을 쳐?”
한석훈이 던전 게이트 앞에 몰린 기자들을 째려보며 말했다. 백인호가 실실 웃으며 대답했다.
“이태진이 저번에 한번 실패해서 그렇죠, 뭐.”
“실패가 아니라 상황이 어쩔 수 없었다니까.”
“알겠어요. 알겠어. 누가 부모 아니랄까 봐. 형도 좀 들어가 있어요. 언제 나올 줄 알고. 앞으로 열흘은 더 걸릴 텐데.”
“아니야. 그 새끼 눈빛이 수상했어. 뭔가, 진짜 나올 것 같은…….”
“어어!”
때마침 기자단이 웅성거리고 있었다. 기자 한 명이 플래시를 터트린다.
한석훈이 인상을 찌푸리며 카메라 쪽으로 시선을 가져간 순간.
쩌저저적.
“던전이 붕괴되고 있다!”
“깬 거야? 깬 거야?”
“어떻게 된 거야. 6일 됐다며!”
“몰라, 일단 찍어!”
분명히 던전이 완전히 공략될 때나 나는 효과였다.
그때만큼은 한석훈과 백인호도 얼굴을 마주 보며 고개를 갸웃할 수밖에 없었다.
이윽고 던전의 입구가 완전히 사라졌을 때.
이태진이 나타났다. 멀쩡한 모습으로, 다친 곳 하나 없이.
자신을 보며 씩 웃는다.
“아슬아슬했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