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9화 뒤바뀐 미래 (6)
고수들에게는 좁은 공간도 드넓은 대지가 되는 법이다. 특히 지금처럼 가상의 방어막이 설치돼 있고, 앞뒤 잴 것 없는 상황이라면 더더욱 그렇다.
과연 손정연과 네로드는 각자의 방식으로 피 터지게 싸우는 중이었다.
원래라면 근거리 딜러와 정신계 각성자는 일대일이 성립하지 않는다. 각기 맡은 역할이 다르기도 하거니와, 정신계 각성자가 근거리 딜러의 상대가 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S급과 S급의 싸움은 달랐다.
손정연은 자신이 자랑하던 그 무시무시한 검술을 펼칠 수 없었다. 그가 검을 휘두를 때마다, 네로드의 끊임없는 저주가 이어졌기 때문이다.
가까이 다가갈수록 그 현상은 더욱 도드라져 보였다. 손정연의 동작 하나하나가 툭툭 끊겼다.
그렇다 해서 네로드가 멀쩡하냐 하면 그것도 아니지만.
“가관이군.”
피를 철철 흘려가며, 두 S급 각성자들이 악을 쓰며 싸우는 모습이 왠지 모르게 낯설었다. 지어 두 명은 나를 신경도 쓰지 못하는 모습이었다.
나는 조용히 놈들의 전투를 지켜봤다. 충분히 무르익을 때까지.
그들이 나를 발견했을 때는, 어느덧 승부의 추가 한쪽으로 기울기 시작했을 때였다. 걔 네로드와 눈이 마주치자마자였다.
-이태진! 나를 도와라!
쓰러진 네로드로부터 전음이 날아왔다.
-많은 걸 바라진 않는다. 조금만 시간을 벌어라! 또한, 내가 죽으면 너도 죽는다는 걸 잊지 라!
-하오란을 만난 적 있나?
-……뭐?
네로드가 눈을 깜박거리며 나를 쳐다봤다. 그러기도 잠시, 순간적으로 놈의 눈에서 마력이 일어났다.
이 와중에도 나를 세뇌시킬 힘은 남겨둔 모양이었다.
물론 헛수고였지만.
나는 그것을 무시하고 다시 한번 놈에게 물었다.
-하오란을 만난 적 있느냐고 물었다. 놈은 어디있지?
그와 동시에 놈의 머릿속을 파고들었다.아니, 파고들려고 했었다.
꽤나 놀라웠다. 놈의 정신체계가 내 생각보다 더 두터웠다.
내가 놈의 뇌로 직접 의지를 전달했을 때, 혹은 하오란이라는 단어를 끄집어냈을 때 무너질 줄 알았는데.
네로드의 정신세계는 꽤나 단단했다.
“저놈이 말을 걸고 있구나.”
손정연이 숨을 고르면서, 힘겹게 말을 이었다.
“도와주면 콩고물을 나눠준다고 하더냐? 그러더냐?”
뚜벅뚜벅.
손정연이 내 쪽으로 천천히 걸어왔다. 엎어진 네로드는 이미 안중에도 없는 모습이었다.
“우리 두 명이 공멸하길 바랬겠지.”
천천히 다가오던 손정연이 내 앞에 뚝 멈춰 다. 헐떡거리는 늙은이의 숨소리가 불쾌했다.
“어떠냐. 네 뜻대로 일이 풀렸는가 한 번 보거라.”
그때쯤 나는 네로드의 정신 세계를 붕괴시키는 것을 포기했다.
이놈. 이미 방어막을 수십겹이나 머릿속에 둘러놨다. 다른 건 몰라도 정신 마법에는 절대 당하지 않겠다는 뜻이 확고했다.
이런 것을 하나하나 뚫으려고 했다가는, 자칫하다 나까지 놈의 스킬에 당할 수 있다.
하오란에 대한 정보야 다른 놈에게서 구하면 될 일.
나는 그쯤하고 아직도 불쾌한 숨을 뿜어내는 손정연에게 말했다.
“유언은 그것으로 끝이냐?”
“애송아. 네 장난질을 받아주는 것도 이걸로 끝이다.”
손정연이 검을 휘둘렀다. 정확히 내 오른팔을 향해서였다.
네로드와 싸울 때와 달리, 가볍게 내리그은 그 검에는 어떠한 의심도 없었다. 당연히 잘려야 한다는 확신만 가득했다.
그렇게 손정연의 검이 목표지점에 도착하기 직전.
까앙!
맑은 검명이 울려 퍼졌다.
동시에 손정연의 눈썹이 말려 올라갔다. 찰나간에 고민에 빠진 손정연이 콧방귀를 뀌기 까지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아드레날린 부스트. 그걸 생각 못했군.”
혀를 찬 손정연이 다시금 검을 내리긋는다. 그러나 그것을 맞이한 건 역시나 똑같은 힘으로 맞받아친 내 롱소드였다.
손정연은 인상을 찌푸리지도, 의문을 표하지도 않았다. 그가 천천히 숨을 들이켰다.
생각에 빠진 얼굴이었다.
생각보다 금방 결론에 이른 그였다.
“언제부터지? 언제 힘을 기른 것이냐.”
“유언은 그게 끝이냐.”
“내 질문에 대답해라.”
그렇게 말한 손정연이 천천히 마력을 끌어올렸다.
네로드에게도 보이지 않았던 그의 전력이었다.
“최태성? 최태성이 네놈에게 힘을 물려줬나? 그럴 리가. 방법은 차치하고, 놈이 그런 짓을 할 리가.”
“아쉽게도 네로드와 달리 너에게 궁금한 건 없다.”
“성요한을 만난 건 아니겠지? 그 힘을 어디서 얻었는지 말해라. 말해!”
흡사 산을 벨 기세로, 손정연의 검이 다시금 휘몰아쳤다. 허나 이제부터는 나도 가만히 두고 볼 생각이 없었다.
지면을 박차고 뛰어올랐다. 곧장 따라붙는 손정연의 기세가 예사롭지 않았다. 그의 검이 강한 풍압을 동반하며 꿈틀거렸다.
S급을 넘어서서, 완전히 그 힘을 해제한 검신의 축복이 손정연의 검술을 파훼해내기까지 걸린 시간은 찰나의 찰나의 찰나다.
“역시 이제 와서 쓸만한 건 없네.”
네로드의 정신 세계를 붕괴하는 것에는 애를 먹었지만, 물리적으로 S급 각성자 하나를 처리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그런면에서 내게는 손정연이나, 네로드나 비슷하게 다가왔다.
공중에서, 정확히는 나는 위에서, 손정연은 아래에서였다.
쉐에에엑!
예리한 기운 하나, 곧 손정연의 오러가 내 뺨을 스쳐 지나갔다. 고개를 트는 것이 조금만 늦었다면 내 머리통이 으깨진 수박처럼 박살이 났을 테지만, 거기까지도 이미 내 예상 안에 있었다.
채찍처럼 휘둘러진 나의 오러가 손정연을 휘감았다.
두껍고 기다란 오러 가닥이 생생하게 느껴졌다.
손정연이 짓던 회심의 미소가 날아가던 것도 그때였다.
“어떻게……!”
손정연의 전신을 사정없이 묶은 오러 채찍이 그를 꽉 조였다. 힘을 가할 때마다 늙은 검사의 몸이 허물어져 갔다.
“어떻게 그리 강해진 것이냐아아아악!”
콰드드득!
그것으로 끝이었다.
주저앉은 손정연의 죽은 모습은 형용하기 힘들 정도로 망가져 있었다.
대한민국 헌터 협회장이 남긴 최후라기에는 비참하기 그지없는 모습.
비록 내게 하려 했던 짓이 용서 못할 짓이라는 것은 변함없지만, 그럼에도 부릅뜬 두 눈을 마주하기 힘들었다.
저 모습이 내 마지막이 되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없어서.
대신, 나는 천천히 네로드 쪽으로 걸어갔다.
녀석은 이미 실성한 듯 낄낄대고만 있었다.
“네로드.”
“헛수작 부리지 마라. 너는 나를 죽일 수는 있어도, 나의 어떠한 것도 가져갈 수 없다. 킥. 오시리스의 지팡이나 먹고 떨어지거라.”
네로드는 이미 죽음을 각오한 모습이었다.
“그나저나 나도 궁금하긴 하군. 대체 어디서 얻은 힘이지? 단기간에 얻었다고 하기에는, 믿기 힘들 정도인데.”
“알 것 없다.”
“크큭. 하오란. 만났냐고 물었나? 그래. 만났다. 그리고 놀랐지. 아마 너도 놀랄 거다. 어떠냐. 내가 가진 정보와 네 정보를 교환할 생각은?”
“없다.”
“그렇다면 네게 남은 것도 죽음뿐이겠군. 그게 네 전력이라면 넌 하오란에게 죽는다.”
“조언은 고맙게 받지.”
“자, 그럼 죽여라.”
어떠한 저항도 의미 없다는 것을 아는 건지, 아니면 목숨을 구걸하는 네로드의 방식인 건지.
어쨌든 결론은 하나였다. 허무하지만, 그래서 각성자다운 최후였다.
서걱-
떨어진 네로드의 머리 앞에 섰다. 죽은 그, 아니, 그녀를 능욕하고자 함이 아니다.
아직 할 일이 남았기 때문이다.
손을 앞으로 뻗기 무섭게.
쏴아아아-
죽은 손정연과 네로드의 몸에 남아있는 기운이 내 손끝으로 모이기 시작했다.
슬며시 경험치가 차올랐다. 또한가지, 내게는 선택권이 생겼다.
경험치 대신, 네로드와 손정연이 가진 특성과 스킬을 골라 가질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거절했다.
네로드의 스킬은 온통 정신계에 치중돼 있었고 그것은 마법이 완성돼가며 풀릴 숙제에 불과하다.
손정연의 경우는 더하다. 그의 젊음이 담긴 검술은 지금의 나에게는 한낱 잔재주에 불과했다.
다음 순간, 공간을 방호하고 있던 베리어가 깨져 나갔다. 전투가 끝난 것을 직감한 아이언이 스킬을 회수한 것이다.
과연 죽은 두 S급을 본 사람들이 웅성대기 시작했다.
“이태진 씨가 들어가고 나서부터 안이 안 보이던데,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겁니까?”
“약속과 다르지 않소! 구경시켜준다던 전투 장면은 제대로 보지도 못했는데!”
이 사람들은 이 상황에서도 구경 타령이나 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하나같이 이게 어떻게 된 일이냐며, 눈빛으로 설명을 요구하고 있다.
어떻게 손정연이 죽었는지, 네로드가 죽었는지 설명하라는 것이다.
나는 사람들의 눈을 하나하나 마주치면서, 조용히 중얼거렸다.
“너희들은 오늘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
그 한마디면 됐다. 이들 중 내 정신 계열의 흑마법에 저항할 수 있는 이는 단 하나도 없었다.
S급 방어구를 줄줄이 두르고 있는 붉은 천의 남자 또한 예외일 수 없었다.
나는 경매품으로 내놓은 두 S급 아이템, 충무공의 검과 오시리스의 지팡이를 챙겨든 다음 현장을 빠져 나왔다.
한걸음 도약했을 때.
-퀘스트 완료!
-보상 : 시스템이 더더욱 이태진에게 집중하게 될 것입니다. 그의 뜻에 따라, 세상을 구원하십시오.
메시지가 들뜬 시스템의 마음을 대신 전달했다.
나는 애써 속내를 삼키며, 그러지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예전에는 내 생각까지 읽던 시스템이다. 과연 지금도 그런지 궁금하다.
시스템에게도 내 연기가 먹혀야 할 텐데.
***
안전하다고 판단되는 곳, 그러니까 내 집무실에서도 한참동안 감각을 확장시켜놓고 있었다.
혹여나 손정연, 네로드가 준비한 또 다른 S급 각성자들이 있나 싶어서.
동이 틀 때까지 기다렸지만 다행히 그런 것은 없었다.
손정연이 죽었으니 당분간 협회는 안팎으로 시끄러울 것이다. 힘을 잡아두던 구심점이 사라졌으니 당연하다.
남은 것들을 어떻게 처리할지까지 생각을 마친 때였다.
똑똑.
노크를 하고 들어온 사람은 김수정이었다. 그녀가 불안한 얼굴로 재잘재잘 떠들었다.
“아침 댓바람부터 제가 필요하다고요? 무슨 일로? 아무리 제가 팬이라고 해도 이건 좀 곤란한데.”
“김수정.”
“반말까지?”
“지금부터 네 스킬을 S급으로 만들어줄 것이다. 그러고 나서 다시 내 검술을 파악해라.”
“…뭘 잘못 드신 건가요?”
“단, 앞으로 허투루 능력을 사용했다가는 바로 너를 죽이고 그 스킬을 회수할 수밖에 없다는 걸 염두에 두고.”
부디 그러지 않기를 빈다. 진심으로.
김수정이 얼빠진 얼굴로 나를 바라보던 그때, 그녀의 몸에서 빛이 뿜어져 나왔다.
“우왓!”
이미 축출해둔 충무공의 검의 경험치를 김수정의 몸에 집어넣은 효과였다.
다만, 여기서 끝나버리면 김수정의 레벨만 올라가게 될 뿐, 내가 바라는 결과로 이어지지 않는다.
나는 서둘러 김수정의 어깨를 잡았다. 그녀의 내부를 빠르게 관조했다. 곧, 혈류가 이동하듯 경험치가 흘러 들어가는 곳이 잡혔다.
이곳이 김수정의 시스템이 자리잡은 곳이다. 이미 몇 번의 실험으로 터득한 곳.
“이제 내 스킬도 삭제할 수 있겠군.”
“그게 무슨 불안한 말씀이세요?”
김수정의 말을 무시하고 경험치를 한 곳에 몰아넣었다.
여기까지 온 이상 이제 긴장할 곳은 없다. 이미 성공이니까.
[곰팡이의 시선(B)이 강제 숙련을 반복합니다!]
[곰팡이의 시선(B)이 헤라의 시선(S)으로 스킬을 상향 조정합니다!]
강제로 김수정의 스킬 중 하나만을 성장시키는 것에 성공했다.
타인에게 가능하다면 나 자신에게 하는 것은 더 쉽다는 말이다.
망설일 것 없었다.
얼른 쓸데없는 스킬부터…….
-시스템이 당신을 경계합니다!
-시스템의 허락을 구하지 않고 행동하지 마십시오!
날아오는 메시지를 무시하며 슬며시 웃었다.
마치 내가 신이 된 기분이었다.
어쩌면 절반쯤은 신이 된 걸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