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8화 뒤바뀐 미래 (5)
노을이 지고있는 저녁, 한강의 요트 선착장에는 거대한 파티가 시작됐다.
참석하는 인원들은 고르고 고른 사람들이다. 세계적으로 헌터계에 유명한 인사들, 혹은 정재계를 주무르는 사람들.
하나하나가 거물급이다.
그럼에도 하이라이트는 따로 있었다. 협회장 손정연.
“요즘 날이 바짝 섰다던데.”
“헌터들 돈으로 긁어 모으는 것만 봐도. 일 하나 치를 기세지.”
그는 약속을 지켰다. 수행원을 대동하지 않은 채, 홀로 나타난 것이다.
거기에는 내 자그마한 협박도 있었다.
혹시라도 협회 내 다른 각성자의 파동이 느껴진다면 그 즉시, 아이템을 파괴해 버릴 거라고.
엄포는 통했다. 손정연은 인도 주술사까지도 떼어놓은 채로, 느긋하게 선착장으로 걸어왔다.
그게 죽는 길인지도 모른채로.
본격적으로 경매가 시작됐다. 그럼에도 경매 자체에 관심을 기울이는 사람은 없었다.
“첫 번째 물품부터 시작하겠습니다. 헤르메스의 팔찌, 시작가는 칠백만 달러입니다.”
A급 아이템이 튀어 나왔음에도 경매를 진행하는 진행자도, 선상에서 손을 드는 참가자들도 아무런 감흥이 없어 보였다.
그도 그럴 것이 이번 행사를 주관한 윤보라는 오는 사람에 맞춰 경매에 출품한 아이템까지 신경썼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A급 아이템은 길가의 쓰레기처럼 넘치도록 본 것.
“팔백.”
“구백.”
“천만.”
쉴새 없이 숫자가 올라갔다.
이곳에 참가 한 건 중동의 석유부자들, 즉 왕가의 사람들도 있었다.
그들에게 돈은 종이 쪼가리일 뿐이다.
특히 머리에 붉은색 천을 걸친 저 남자는 숫자를 올리기 무섭게 바로 따라붙었다.
“천이백만.”
“이천만.”
“…….”
“이천만! 이천만! 이천만!”
탕탕탕.
“헤르메스의 팔찌는 이천만 달러에 낙찰됐습니다.”
파티의 스케일을 알리는, 요란한 시작이었다.
***
구석진 곳에서 현장을 지켜보고 있을 때쯤이었다. 슬금슬금 내 쪽으로 다가오는 자들이 있었다.
“요즘 경사가 있다고 들었습니다.”
“A급 던전에는 언제 다시 들어갈 예정입니까?”
“파티원을 구하고 있는 거라면 저희 쪽에서 지원해 드릴 수도 있습니다.”
“어허. 이분은 명실상부 일성 팀장인데. 못하는 말이 없습니다.”
“자고로 호랑이는 누구 밑에 들어가지 않는 법입니다. 아시지 않습니까. 이태진 씨가 조만간 독립할 거라는 걸.”
그런 소문이 떠돌고 있기는 하다. 내가 일성을 나와 새로운 회사를 차리거나, 길드를 만들 거라고.
그 또한 내가 퍼트렸다. 모두 네로드와 손정연에게 입질을 넣기 위해서였다.
나는 그들을 무시하고, 한쪽으로 걸어갔다.
협회장은 경매에 조금도 신경 쓰지 않고 있었다. 그가 바라보는 것은 오로지 나뿐이었다.
손정연이 마침 잘됐다는 듯 말을 걸었다.
“속셈이 뭐지?”
“무슨 말씀이신지.”
“충무공의 검을 달라 해서 주고, 이 같잖은 잔치에 오라고 해서 왔다. 이제 네 속셈을 말해라.”
협회장 손정연이 서늘하게 말했다.
“여기 있는 서른 명. 일부러 이런 놈들만 초대했더군. 내가 컨트롤 할 수 없는 인간들만.”
“네.”
“충무공의 검이 팔리면 다시 회수할 수 없게끔. 그런 거겠지?”
“죽기 싫으니까요.”
“……?”
“이 사람들이 있는한, 협회장님은 저를 죽이지 못합니다. 원한다면 한번 테스트해 보십시오. 몇 명이나 저를 구하러 올지, 저도 궁금하니까.”
“무슨 소리냐.”
“여기 있는 사람들 중 협회를 경계하는 헌터는 몇이나 될까요. 이 상황에서 저를 건드리면 명분을 주는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명분?”
“궁금하지 않습니까? 전세계의 헌터들이 한국으로 처들어오는 모습이.”
문득, 손정연이 껄껄거리며 웃었다.
“단단히 오해하고 있나본데. 나는 너를 죽일 생각이 없다.”
손정연이 푸근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어디서부터 오해를 풀어야할지 모르겠군. 혹시 최태성이 말했나?”
“죽일 의도가 없었는데 A급 헌터를, 그것도 무려 여섯씩이나 보냅니까?”
“전달 방식에 오해가 있었다.”
“오해.”
“그래. 오해. 나한테 이태진이 얼마나 필요한지 알면, 죽이니 마니 같은 소리는 하지 못하겠지. 따라오거라. .”
“네로드를 불렀습니다.”
“……뭐?”
손정연이 얼떨떨한 얼굴로 되물었다.
“누구를 불러?”
“네로드요.”
“…레인 우버?”
“네.”
덤덤하게 대답했더니, 손정연이 어처구니 없어한다.
“그놈을 왜 불러?”
“이번 경매에 출품한 아이템이 두 개인거. 모르셨어요?”
몰랐을 수밖에. 내가 일부러 손정연에게는 정보를 극구 통제했었다.
손정연이 머리를 쓸어넘겼다.
“아이템은 받았다고 들었는데.”
“정확히는 빌려달라고 했습니다.”
“도통 감을 못 잡겠군. 대체 네 목적이 뭐냐.”
그때쯤, 두 번째 아이템의 낙찰 소식이 들려왔다. 이제껏 가만히 숫자만 부르던 사람들이 점점 동요하기 시작했다.
오늘의 하이라이트가 다가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저를 가지고 싶으시죠?”
나도 모르게 말에 웃음기가 묻어나왔나 보다. 손정연이 눈썹을 꿈틀거렸다.
“인도에서 온 그놈. 이름이 뭐더라. S급 정신계 각성자까지 끌어들일줄은 몰랐는데.”
“……!”
“그런데 그건 네로드도 마찬가지더라고요.”
그때쯤 손정연은 내가 무슨 말을 하려는 것인지 눈치챈 모양이었다.
“너, 너 설마.”
“네로드와 싸우세요. 이기면, 협회에 들어가 드릴 테니까.”
“하! 이제 알겠네.”
문득 손정연이 묵은 찜찜함을 털었다는 듯 개운한 얼굴이 됐다.
“나랑 네로드랑 싸워서 공멸하길 바라는건가? 그런거야?”
“그래주면 고맙죠.”
“둘 중 하나가 살아남아도 피투성이일 테니까.”
“마무리 정도는 제가 할 수 있지 않을까요.”
“어림없는 소리. S급이 왜 S급인지, 네놈은 아직 모르는구나. 쯧. 가진 재능이 아깝다.”
잘됐다는 듯 손정연이 손을 털었다. 손정연이 아무것도 없는 허공을 향해 말했다.
“듣고 있는 거 다 아니까 나오너라.”
“큭.”
바닥에서였다. 그림자가 솟아나듯 인영 하나가 튀어나왔다.
놈을 직접 보는 건 처음이다. 심지어 이게 놈의 진짜 얼굴인지도 모른다.
네로드.
160cm는 될까 한 작은 키에, 로브를 뒤집어쓴 여자의 형상이었다.
손정연이 껄껄거리며 말했다.
“네놈이 제 발로 찾아오는구나.”
“협회장. A급 헌터 하나에 속는 꼴이 우습다.”
“그러는 네놈이야말로 아이템도 갖다 바치면서 여기까지 찾아온 것 아니냐.”
“그것들을 찾으러 왔도다. S급 아이템과 이태진을 얻었으니, 내 발걸음이 헛되진 않았나 보군.”
손정연과 네로드의 같잖은 대화를 흘려들으면서, 네로드의 힘을 가늠했다.
예상대로였다. 네로드는 손정연과 엇비슷하다.
당연히 성요한과 그들의 차이는 아득하다.
한때나마 그들을 동일선상이라 여겼던 내가 부끄러워질 만큼.
그럼에도 두 명이 동시에 내게 덤빈다면, 그 또한 승부를 짐작할 수는 없다.
그랬기에 지금 이 짓을 하는거고.
그때였다.
“다들 이쪽으로 오시오!”
손정연이 한창 경매가 진행중인 선상 쪽에다 외쳤다. 여전히 시선은 내게 콱 박혀 있는 채였다.
“머리는 너만 쓸 줄 아는 게 아니지. 이태진.”
안 그래도 아까부터 참석자들은 귀를 열어놓고 이쪽에 기감을 집중시키고 있었다.
사람들이 우리 쪽으로 다가왔다. 하나같이 재밌다는 듯 저들끼리 대화를 주고받으면서였다.
“가타부타 길게 말하지 않겠소. 여러분 중, 지금 나를 도와 네로드를 죽이는 데 동의하면, 오시리스의 지팡이를 선물로 주겠소.”
“……!”
“손 회장. 그게 무슨 말이지? 아이템은 경매에 올려져 있다 들었는데.”
“경매놀이는 여기서 끝이오.”
손정연이 혀를 찼다. 그는 순식간에 좌중의 분위기를 사로잡았다.
“ S급 아이템을 돈으로 살 수 있다는 생각은 누구 머리에서 한건지 원.”
“자세히 말해보세요!”
걔 중 한 명이 흥미가 동한 듯 손정연을 턱짓했다.
“기회를 주겠다는 거요. 치기 어린 젊은 헌터에게 속은 걸 만회할 기회. 어차피 내가 깽판 치기 시작하면 여러분들은 아무도 이 밖으로 나갈 수 없소.”
“감당할 수 있겠어요? 여기 손 회장 말에 휘둘릴만한 사람은 없어 보이는데.”
“똥개도 제집 안방에선 한 수 이기고 들어가는 법.”
그 말과 동시에 손정연이 칼을 뽑았다. 충무공의 검에 비할 수는 없지만, 그 또한 A급이 넘는 것이 확실해 보였다.
“감당은 내가 알아서 하는 거고, 선택은 여러분의 몫이오. 어떡하겠소. 나를 따라 네로드를 죽인 다음, 명성과 아이템을 얻을 거요, 아니면 이대로 집에 돌아갈 거요.”
사람들이 웅성대기 시작했다. 그때 내가 나섰다.
“사전에 약속드린 대로, 경매보다 재밌는 것을 보여드리겠습니다.”
“약속?”
손정연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여기 온 사람들이 바보도 아니고. 진짜 S급 아이템을 사러 왔겠습니까.”
손정연이 눈가를 좁혔다. 생각에 잠긴 모습이었다.
“S급 각성자들의 목숨 건 사투. 돈 주고도 못볼 구경거리죠.”
“크하하하!”
붉은색 천을 머리에 두른 남자가 크게 웃었다. 그가 통역 마법이 걸린 이어폰에 손을 얹은 이후 말했다.
“혹시나 했는데. 진짜 약속을 지킬 줄이야.”
그가 박수를 쳤다. 다음 순간, 두건을 겹겹이 쓴 남자들이 배에 올라탔다.
하나하나가 A급 이상이었으며, 놀랍게도 그 중 하나는 S급이었다.
“손 회장. S급 아이템이라면 내 창고에 발에 채이듯 있소. 그런 아이템따위보다야, 당신네들, 각성자들의 결투가 더 보고싶다만.”
“당신부터 죽일 수 있소.”
“해보시오. 네로드가 과연 그걸 두고볼지 모르겠다만.”
다시 한번 붉은색 천을 두른 중동 왕가의 남자가 웃어댔다. 그쯤되자 배에 올라탄 나머지 참석자들도 얼굴에 호기심이 폈다.
그들도 S급 각성자간의 전투가 궁금한 것이다.
나는 거기에 화룡점정을 찍었다.
“두 분 중 이기는 사람에게, 각자의 아이템을 드리겠습니다.”
“네놈. 너 이 새끼!”
“기회를 드리는 겁니다. 협회장님. 참고로 도망은 생각하지 않는 게 좋을 겁니다. 등에 칼이 꽂히기 싫으면 말이죠.”
내 말을 들은 네로드가 피식 웃었다.
“손 회장. 아무래도 우리가 저 놈의 미끼를 물어버린 모양이오.”
네로드가 인벤토리 속 잠든 아이템을 하나씩 장착했다. 그럴수록 손정연의 표정이 짜증으로 물들어갔다.
“이놈이나 저놈이나….”
손정연의 말이 끝나자마자였다. 그의 신형이 사라졌다. 또한, 바로 직후 퀘스트가 떴다.
-퀘스트 발생!
-임무 : 당신에게 위협이 되는 두 S급 각성자를 죽여, 그들의 힘을 취하십시오!
-보상 : 시스템은 더이상 하오란에게 미래를 보여주지 않을 것입니다.
직후.
꾸아아아앙!
요트가 출렁거렸다. 곳곳에 보호막이 펼쳐졌다. 그럼에도 S급 각성자들의 충돌은 배를 산산조각으로 만들 것이다.
“방어막은 제가 설치하겠소. 여기 초대받은 이유도 그 때문인 듯 하니.”
미국에서 온 S급 각성자, 헌터 네임 아이언이 손을 썼다.
네로드와 손정연이 충돌을 일으킨 그곳을 중심으로 돔 모양의 방어막이 만들어졌다.
외부와 완벽히 차단된 공간에서, 빛이 번쩍거렸다.
사람들이 눈을 크게 뜨며 그곳을 바라봤다. 허나 그들이 볼 수 있는 것은 잔상일 뿐이다.
안력을 집중했다. 손정연이 웃고 있다. 반면, 로브 속 네로드는 찌그러진 채 피를 흘리고 있고.
“확실히 근접이 유리하군. 그래도 네로드에게 비장의 한 수 정도는……. 이봐요! 이태진 씨!”
나는 아이언의 말을 무시한 채, 배리어 안으로 들어갔다.
사냥을 시작할 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