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헌터는 미래를 본다-147화 (147/170)

147화 뒤바뀐 미래 (4)

“뭘 달라고?”

손정연이 어처구니 없는 듯 되물었다. 옆에 있던 비서도 마찬가지였다.

“들었으면서 왜 못 들은 척이에요? 충무공의 검이요. 이태진이 달래요.”

“…왜?”

“경매에 내놓게.”

“경매?”

손정연이 힘빠진 손길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지금 그게 무슨 물건인지!”

“알죠.”

박지현이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선택하세요. 이대로 레인 우버에 이태진 넘길지, 아니면.”

“그딴 개수작질!”

“에 넘어가야 할 거예요. 네로드한테도 똑같은 제안 했으니까.”

“…뭐?”

옆에서 얼빠진 채 지켜보던 비서가 고개를 털었다. 재빨리 손정연에게 말했다.

“확인해 보겠습니다.”

비서가 말한 확인에는 긴 시간이 필요 없었다. 복도에서 전화를 받고 온 비서가 침통한 표정으로 보고했다.

“블랙마켓에서 네로드와 접촉이 있었다고 합니다.”

손정연이 다시금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확인결과, 네로드 쪽에서 S급 아이템을 이태진에게 건네는 것으로 합의를 본 상황입니다.”

“거봐요. 맞잖아요.”

박지현이 의기양양한 얼굴로, 손정연을 턱짓했다.

“어떡하실래요? 참고로, 제 털끝이라도 하나 건드렸다가는 그 즉시 협상은 결렬이에요.

***

음지에만 있는 서비스가 있다.

고객의 요구에 따라 이것저것 잡일을 담당하는 곳을 말하는데, 홍주연이 내 요구조건을 듣자마자 그곳 중 한곳을 소개했다.

“주현 씨나 홍 팀장님은 안된다고요?”

“아무래도 음지에 가까운 일처럼 들려서요. 아, 음지 일이라 싫다는 게 아니라, 전문 분야가 다르다는 뜻이에요.”

“겨우 경매물품 좀 올리는 건데요? 애장품 경매, 연예인들도 많이 하잖아요.”

“많이 하죠. 그런데 그런 곳에는 끗발 높은 사람이 잘 안 가죠. 그리고.”

홍주연이 곤란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연예인 애장품 경매랑 이 팀장님이 판매하려는 건, 결이 좀, 많이 다르죠. 많이.”

듣고 보니 그랬다.

“아끼는 곰 인형이랑 모나리자 같은 느낌이랄까.”

이후 홍주연은 명함 하나를 내게 줬다.

“아는 언니인데, 이 분야에서 이 언니보다 나은 사람을 구하는 건 어려울 거예요. 특히 지금처럼 조용히 일을 처리하고 싶다면, 규모가 작아도 확실한 곳이 좋죠.”

명함을 건네면서도 얼마나 아쉬운 눈빛을 보내던지, 입맛을 다시는 홍주연을 떼놓느라 고생 좀 했다.

어쨌든 받은 번호로 전화를 걸자마자였다.

홍주연에게 배운 대로, 나는 재빨리 요구사항부터 말했다.

“본론부터 말하겠습니다. 무기 두 가지를 경매로 내놓고자 합니다.”

-번호의 출처부터 확인 바랍니다.

“일성의 홍보팀장 홍주연.”

-…….

“확인 됐습니까?

-헌터 네임과 판매하실 무기를 알려주세요.

기계처럼 딱딱한 말투였지만, 그랬기에 신뢰가 갔다. 홍주연의 선택은 이번에도 틀리지 않았다.

“이름은 이태진이고, 무기의 종류는 검과 스태프입니다. 각 S급으로 충무공의 검, 오시리스의 지팡이로 불리는 것들입니다.”

말을 끝내고 대답을 기다렸다. 하지만 수화기 너머로는 숨쉬는 소리 하나 들리지 않았다.

잠시 뒤.

-정말 실례지만, 확인 절차를 거친 이후에 다시 연락드려도 되겠습니까?

“그렇게 하시죠.”

-조속히 연락 드리겠습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아까와 같은 사람이 맞나 싶을 정도로, 급변한 태도였다. 이해할 수 있었다.

난데없이 나타난 놈이 S급 아이템 두 개를 팔고 싶다고 하니, 사실 여부와 상관없이 충격이 클 수밖에.

잠깐이나마 떨리는 목소리에서 그 심경이 어떨지 유추할 수 있었다. 아마 그런 생각이 들었을 것이다.

‘혹시라도, 만에 하나라도 지금 들려오는 말이 진짜라면.’

-이해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빠른 시간 내에 연락 드리겠습니다.

달칵.

전화가 끊기는 소리까지 조심스럽다.

S급이 경매로 나오는 일이 극히 드물다 보니, 이런 반응이 이해가지 않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깟 S급 아이템을 얻은 것보다, 나는 뒤바뀐 입장에 대한 것이 더 기분 좋았다.

원래라면 사방에서 공격당할 처지에 놓여 있었다.

왼쪽에는 손정연과 협회, 오른쪽에는 네로드와 레인 우버.

놈들의 합공에 정신 차리지 못하고 펑, 터져 버렸을 것이다.

가만히 있었다가는 반드시 그렇게 됐었겠지.

그런데 상황이 뒤바뀌었다. 나는 나를 미끼 삼아 놈들을 끌어들였고, 놈들의 핵심 무기부터 빼앗았다.

놈들의 방심이 그 이유였다.

이태진은 A급 헌터일 뿐이며, 언제든 마음만 먹으면 죽일 수 있다는 착각. 그것이 놈들을 죽음으로 내몰 것이다.

***

윤보라는 얼떨떨한 심정을 지우지 못한 채 통화를 끝냈다.

확인 결과, 방금 전 통화 내용은 사실이었다.

미친놈의 장난이라면 음지 녀석들을 고용해서라도 번호를 추적하려고 했는데.

“사실이라니.”

홍주연의 검증까지 끝냈다. 확실했다. 방금 전 통화의 당사자는 이태진이었으며, 이태진이 내놓은 물건 두 개는 모두 S급이 맞았다.

윤보라가 눈을 질끈 감았다. 청심환을 입에 털어 넣으며 심호흡했다.

그러고도 쿵쾅대는 심장과, 부르르 떨리는 두 손은 진정될 기미가 없었다.

‘이건 기회야!’

왜 자신에게 이런 기회가 찾아온 것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윤보라는 그래봤자 업계에서 이제 막 태동하고 있는 중이었으니까.

홍주연과 대학 동기였다는 게 그 이유일까?

이태진은 경매를 진행시킬 수 있는 인물이라면 누구든 상관없었던 걸까?

윤보라가 눈을 번쩍 떴다.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지금 삼키는 것이 독이 들었다 할지라도, 그녀는 웃으며 삼킬 수 있었다.

그녀는 벌떡 일어난 그대로 대표실을 빠져나왔다. 한가롭게 모니터를 보던 직원들이 보였다.

윤보라가 직원 한 명을 꼬집어 말했다.

“경매 예정 중인 곳 중에, 제일 핫한 곳이 어디야?”

“아무래도 이클립스겠죠. 한강에서 열리는 요트 경매장. 대현에서 매각한 아이템 중 대부분이 그쪽으로 흘러 들어갔으니까요.”

“협회 비자금이겠지?”

“예. 그런데 그게 왜요?”

“거기에 물품 두 개 끼워넣을 자리 있나 봐 봐.”

“어떤 거요? 거기, A급 이하는 받지도 않을 텐데.”

“S급 두 개. 아니다. 내가 전화할게. 넌 지금부터 아는 기자들한테 전화부터 쫙 돌려. 부장급 이상으로.”

“……예?”

“포인트는 두 개로 잡자. 이태진, S급 아이템 충무공의 검, 오시리스의 지팡이.”

“저, 대, 대표님.”

“상상력은 기자들한테 맡기면 될 테고. 어차피 알아서 떡밥 물 테니까, 너무 얕보이지 말고.”

“…….”

직원이 떨떠름한 얼굴로 윤보라를 바라봤을 때였다.

“알아들었으면 뭐해. 안 움직이고. 우리 바빠!”

***

길이 백 미터, 스무 명의 승무원이 운항하고 있는 이클립스 요트.

원래는 소수의 부자들만 참석하는 헌터 경매장이었다.

혹은 A급 이상 각성자들이 후원자들을 등에 업고 나타나거나.

협회로부터 허가되지 않은 물품들도, 비밀리에 판매되는 곳이 이곳의 정체다.

“사실이군요.”

이클립스의 이번 경매를 맡은 주관인이 눈썹을 찌푸리며 말했다. 윤보라가 침착한 어투로 관련 서류를 내밀었다.

“여기 협회 쪽 직인이에요.”

“확인했습니다.”

“물품은 두 가지 모두 당일 전달될 예정입니다.”

“그렇군요. 이해했습니다.”

“또, 참가 리스트는 저희 쪽에서 다시 짤 것이고요.”

“이해했습니다.”

“자리가 자리이다 보니, 민감하게 굴어서 죄송합니다.”

“아닙니다. 당연히 그러셔야 하죠. 물건이…그것들인데.”

주관인이 그것들이라는 단어에 특히 힘을 주며 말했다. 그의 눈가에는 놀람과 황홀이 뒤섞여 있는 상태였다.

원래는 이런 식이 아니다.

이클립스의 경매물품에 들기 위해 많은 로비가 수면 아래에서 이루어진다.

이클립스의 관계자에게 뇌물을 주는 것은 기본 중의 기본이고.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정반대가 됐다. 목이 뻣뻣하기로 유명한 이클립스가 자신에게 고개를 숙이지 않는가.

윤보라는 생애 이런 쾌감을 느낄 줄은 몰랐다.

‘반년 전만 해도 고개부터 굽신댔는데.’

윤보라는 포커페이스를 유지한 채로 주관인에게 악수를 건넸다.

“아무쪼록 잘 부탁드려요.”

그녀는 그 길로 약속장소로 갔다. 이클립스와 협상하는 것은 애초에 가벼운 발걸음이었을 뿐 오늘 일정 중 진짜는 이것이었다.

의뢰인을 만나는 것.

으슥한 곳에 위치한 주점이었다. 음지에 반쯤 발을 걸친 그녀답게, 익숙하게 문을 연 윤보라가 좌우로 시선을 가져갔다.

‘이런!’

윤보라의 얼굴이 구겨졌다. 있어서는 안 될 녀석들이 주점을 깔고 앉아 있었기 때문이다.

각기 각층의 VIP들, 그 VIP 중에서도 그들의 수행을 맡고 있는 각성자들.

그것들이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다.

마치 기다렸다는 듯.

그녀는 심호흡을 한 뒤에, 또각또각 구두 소리를 내며 약속된 자리에 앉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주점의 문이 한 번 더 열렸다. 자신에게 쏠려 있던 시선이, 그쪽으로 향하기까지는 찰나였다.

후드를 뒤집어썼지만 그를 못 알아 챈 사람은 이곳에 아무도 없었다.

그렇겠지. 미리 언질을 받았을 테니까. VIP의 수행원들은 하나같이 긴장된 기색을 띠었다.

포커페이스가 수행원의 기본 중의 기본이라는 것을 인지하고 있을 텐데도.

“원래 사람 만날 때 동네방네 소문을 다 내는 편입니까?”

이태진이 자리에 앉자마자 한 말이었다. 감정 없이 툭툭 내뱉은 말인데도, 윤보라의 귀에는 그것이 스릴러처럼 다가왔다.

“죄송합니다. 위치를 추적당하는 줄 몰랐습니다.”

“홍 팀장님한테 들은 것보다, 일처리를 느슨하게 하는 편인가 봅니다.”

“죄송합니다.”

윤보라가 고개를 숙였다. 그녀는 자신이 잠시나마 들떴던 것이 부끄러워졌다.

그러니까 지금은 면접이라 할 수 있었다.

자신이 S급 아이템 두 개를 조용하되, 시끄럽게 경매장에 넘길 자격이 되는지를 묻는 자리.

윤보라는 또 한 가지를 확신했다.

매스컴은 믿을 게 못 된다는 것.

광고에서 초코바를 맛있게 먹던 이태진은 그의 진짜 모습이 아니다. 무정하고 차가운 눈길로 자신을 바라보는 저 모습이야말로 진짜다.

이태진의 입술이 열렸다.

“행사에 오는 사람들은.”

“예.”

“기본적으로 대한민국 각성자협회장의 입김이 닿지 않는 자여야 합니다.”

“그렇다는 말씀은.”

“돈 많은 외국인이 될 수도, 아니면 우리나라 4대 각성자가 될 수도 있겠군요. 가능하겠습니까?”

“해내겠습니다.”

그만한 인사들을 불러 모으는 것은 쉽지 않다. 하지만 물건이 물건이다.

윤보라는 주최자가 원하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갖다 바칠 기세였다.

“다음에 보는 일은 경매 당일이 되겠군요.”

“그때까지 문제없이 일처리 하겠습니다.”

“그럼.”

이태진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가 주점 주인과 눈인사 하는 것을 마지막으로, 홀연히 주점 밖으로 떠나갔다.

그때까지 이태진을 붙잡는 사람은 없었다.

분명 VIP들의 명령을 받고 온 그들일 텐데도 이태진과 눈 한번 마주치고 나면, 다시 자리에 앉기 바빴다.

‘A급 각성자들일 텐데도.’

대신 그들이 타기으로 삼은 사람은 윤보라 자신이었다.

벌컥하고 일어선 사람이 한둘이 아니었다. 그들이 서로를 바라보는 것도 잠시였을 뿐, 윤보라를 향해 스스럼없이 다가왔다.

“윤보라 씨. 잠시만요.”

“윤보라씨에게도 나쁘지 않은 제안일 겁니다. 잠시 이쪽으로.”

“이봐요. 순서 지켜요!”

“윤보라 씨!”

윤보라는 빠르게 그들을 스캔한 다음, 손뼉을 치며 말했다.

“이 이상 가까이 다가오면 초대장은 없을 거예요. 자신의 소속이 담긴 명함을 한 장씩 주고, 가세요. 따로 연락 드릴 테니.”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