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6화 뒤바뀐 미래(3)
가정 1.
손정연이 단독으로 나를 찾아오는 경우.
이것만큼 좋은 게 없다. 사막의 초인이 그러했듯, 지금의 손정연은 절대 나를 이길 수 없다.
원한다면 협회 내 모든 정보를 빼낼 수도 있다. 가장 이상적인 상황이자, 내가 그 엿 같은 연기를 한 이유이다.
하지만 가장 가능성이 희박하기도 하다.
가정 2.
손정연과 아닐 암바니가 급습하는 경우.
정신계 각성자와 근거리 딜러의 궁합이 좋다는 걸 제외해도, S급에 각성자들의 합공을 버텨내는 것만 해도 버겁다.
내가 살 수 있는 방법은 두 명이 보이는 즉시 도주하는 것뿐.
도주 방법은 아락투스의 비밀 창고 열쇠를 통해서, 또다시 이계로 도망쳐야 한다.
가정 3.
가장 최악인데, 손정연, 아닐 암바니, 레인우버의 네로드까지 한 번에 들이닥치는 경우.
레인 우버가 협회장과 어떤 사이인지는 몰라도, 그때만큼은 손을 잡을 확률이 높다.
거기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다. 심지어 도주조차도.
무더기로 달려오는 S급 각성자들은 상상만 해도 끔찍하다.
더 끔찍한 것은, 이 가능성이 제일 높다는 것이다.
-레인 우버는 꾸준히 추적 중이야. 분명 한국에 들어온 것까지는 확인됐는데.
“됐는데?”
-어디로 갔는지 모르겠어. 중국에 있다는 말도 있고, 하오란이 한국에 들어왔다는 말도 있고.
“중국? 하오란.”
-그냥 찌라시일 뿐이야. 신경 안 써도 돼.
다 말해놓고 무슨. 이럴 거면 말을 하지 말든가.
그러고 보니 하오란도 있었지.
녀석이 아직까지도 미래를 보고 있다면, 그것만큼 곤란한 경우도 없다.
-다른 소식 들으면 바로 전달해주지.
화이는 낄낄거리다가 전화를 툭 끊었다. 나는 고개를 젓다가, 다시 정면을 바라봤다.
내 개인 연무장을 샅샅이 뒤지는 김수정이 보였다. 내 시선을 눈치챈 그녀가 머쓱한 듯 볼을 긁적였다.
“굉장하네요. 사람들이 일성, 일성. 괜히 노래를 부르는 게 아니네. 이거 하나만 가져가도 되는 건가? 요? 직접 썼던 거면 더 좋은데.”
“한 손 검사 아니었습니까? 그건 대검인데. 그것도 팬 활동의 일부인 건가?”
“오우. 자의식 과잉. 제가 그쪽 팬이긴 해도, 돈보다 사랑하진 않거든요. 이태진의 손때묻은 롱소드. 딱 봐도 마켓에 내놓으면 어마어마하게 가격 뛸걸요?”
“마켓?”
“네. 마켓.”
나는 잠시간 머리를 굴렸다가, 그녀를 쳐다봤다.
김수정의 동공이 커졌다.
“설마 마켓을 몰라요?”
“한 번도 참여해본 적 없으니까.”
“화이가 왕자님, 왕자님 하더니. 진짜였잖아? 하긴, 머리부터 발끝까지 일성에서 다 챙겨주니 마켓을 갈 필요가 있나.”
들어만 봤다. 블랙 마켓, 그중에서도 VIP만 참여하는 경매시장. 각기 고위층부터 온갖 헌터들도 참여한다고 들었다.
나는 조잘대는 김수정의 입을 틀어막은 뒤 다시 본론을 꺼냈다.
“이제 일 좀 해볼까 하는데.”
“아 맞다. 해야죠 일. 그런데 제가 할 일이 정확히 뭐라고요?”
“그전에, 김수정 씨가 가진 특성과 스킬을 모두 알아야 합니다.”
“…선택사항은?”
“여기 들어온 이상 사라졌죠. 뭣하면 제가 알아내는 방법도 있습니다.”
“고문 말씀하시는 거죠? 들어 본 적 있어요. 일성의 고문이 얼마나 잔인한지.”
김수정이 제 가슴을 두 손으로 막으며 몸을 돌렸다.
그때였다.
“쟨 또 누군데요?”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까랑까랑하고, 거침없는 목소리.
누가 들어도 박지현이었다.
또각 또각 소리를 내며 들어오는 박지현은 한껏 꾸민 상태였다.
“이제는 막 여자도 부르나 봐요? 신성한 연무장에.”
“여길 오면 어떡합니까.”
“제가 못 올 곳 왔어요? 왜요. 둘이 찐득하게 뭐 하려고?”
“손정연한테 뒤 밟히면, 받기로 했던 돈 다 받을 줄 아십시오.”
“제가 최태성도 속였어요. 협회 애들 따돌리는 건 일도 아니라고. 그래서, 진짜 뭐하려고 했는데요?”
대화가 어지럽게 돌아갔다. 나는 손을 한번 저은 후, 어버버대는 김수정에게 말했다.
“고문도 아니고, 협박하는 것도 아닙니다. 아까 들어왔던 비서한테 연락하면 10분 내로 알 수 있다는 거니까.”
“아하! 미리 말씀드리는 게 좋겠네요.”
김수정이기에 눌린 채로 자신의 스탯을 나열하기 시작했다.
다른 건 다 제쳐두고.
그녀를 불러온 이유는 스킬 하나 때문이었다.
“곰팡이의 시선, 스킬은 B등급이고 상대방을 관찰하여 약점을 파악할 수 있어요.”
“약점을 파악할 수 있다?”
“말은 거창한데, 사실 효과가 크지는 않아서…….”
“스킬 이름만 들어도 그렇게 보여. 곰팡이가 뭐니, 곰팡이가.”
박지현이 이죽거리며 조롱해도, 김수정은 헤헤 웃으며 말뿐이었다. 그런데 그게 효과가 있었다.
박지현이 눈썹을 꿈틀거리며 싸가지가 있니 없니 했으니까.
나는 소란스러운 분위기를 다시 한번 정리했다.
“한 번만 더 시끄럽게 굴면 내쫓을 겁니다.”
“와. 이제는 아예 저쪽 편만 든다 이거지? 누구는 협회 가서 정보 빼 오고 개고생하고 있는데.”
그래도 말만 그렇게 할 뿐, 얌전해진 박지현이 연무장 구석에 가서 털썩 주저앉았다.
나는 다시 한번 김수정에게 스킬 설명을 들었다.
그리고 확신했다.
이거, 레벨만 좀 높이면 나한테 무조건 도움이 된다.
“말은 쉬운데, 저는 천재가 아니라서, B등급까지 올리는데도 5년은 걸렸어요.”
“그건 걱정 안 해도 됩니다.”
뭣하면 협회 녀석들의 경험치를 김수정에게 주는 방법도 있을 테니까.
“일단 테스트부터 합시다.”
검을 들었다.
“지금부터 천천히 검술을 보여줄 겁니다. 김수정 씨는 거기에 맞춰 저를 분석하세요.”
“제, 제가요?”
“더 게임에서는 자신 있게 하더니.”
“그렇긴 한데. 미리 말해두지만, 환불은 없습니다!”
뒤에서 박지현이 “환불?, 돈까지 줬어요? 미치겠네.” 하는 소리를 무시하며, 검을 휘둘렀다.
화악!
검무가 시작된 직후부터 김수정은 정색하며 나를 관찰하기 시작했다.
저거다. 더 게임에서 내가 봤던 그 눈빛.
다만, 검술이 이어질수록 김수정의 동공에 지진이 일어나고 있다는 게 다르다는 것 정도.
끝에 다다랐을 때는 혼란스럽다는 듯 고개를 여러 번 좌우로 흔들기까지 했다.
그쯤에서 동작을 멈추고 말했다.
“어떻습니까?”
“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죠?”
기다렸다는 듯 그녀가 입을 열었다.
“분명 A급 던전 들어갔을 때는 이러지 않았던 것 같은데. 리저드 던전 말이에요.”
“A급 던전? 그걸 니가 어떻게 알아?”
박지현이 불쑥 끼어들었다. 물론 나도 묻고 싶었던 거였다. 내 행적은 일성 내에서도 극히 기밀로 취급되는 자료인데.
“언니한테 샀거든요. 이태진 씨 검술 휘두르는 영상 자료.”
“조영은?”
“네.”
“대체 어떻게?”
“아. 던전에서만 작동되는 마력 영상 송출구가 있어서요.”
“그걸 샀다고?”
“네. 비싸게 주고 샀어요. 3억 들었나?”
김수정이 당당하게 말했다. 뭐 문제 될 거 있냐는 듯.
나도, 박지현도 너무 어처구니가 없어 뭐라 반박도 못 했다.
저 광기 서린 눈을 보자 하니, 뭐라고 했다가 더 이상한 말이 튀어나올까 봐 입도 못 열겠다.
“어쨌든 그때랑 비교해도 너무 다른데요? 마치 다른 사람이 된 것 같아요.”
“자세히.”
“분명 그때 영상에서 봤을 때는 정교한 바느질 같았거든요. 한번 휘두를 때도 한 땀 한 땀 집중하는 느낌?”
그때를 회상하듯 김수정이 고개를 위로 들었다.
“그런데 지금은, 아니, 더 게임에서부터 그랬어요. 대충 휘두른다고 해야 하나? 손 가는 대로 내지르는 느낌?”
역시 감이 좋다. 사막에 있는 동안, 나는 가진 검술을 대대적으로 손봤었다.
거기서는 지금껏 해왔던 대로 정교한 검술만 사용해서는 살아남을 수 없는 곳이니까.
“그런데 그게 나쁘지 않아요. 아니, 제가 보기엔 더 좋아요. 겨우 B급 주제에 평가하는 게 웃기기는 한데, 솔직한 제 감상…이에요.”
김수정이 더듬거리며, 눈을 빛내며 감상평을 말했다.
그런데 내가 궁금한 건 그게 아니고.
“그래서 보완할 점은?”
“…예?”
“제 검술에서 어떤 걸 보완해야 좋겠냐는 겁니다.”
“그걸 제가 어떻게 알겠어요?”
돌연 어처구니없는 얼굴이 됐다.
“아무리 돈이 좋다고 해도 그렇지. 초등학생이 교수한테 수학 가르치라는 소리잖아요.”
김수정이 뒷걸음질 쳤다. 겁에 질린 듯 고개까지 가로젓기 시작했다.
“화, 환불할래요 그냥! 돈 다시 돌려 드릴게요.”
어떻게 찾은 힌트인데, 여기서 김수정이 도망쳤다가는 나도 곤란하다.
나는 최대한 싱긋 웃으면서 진정하라는 제스처를 취했다.
“정정하겠습니다. 감상평 정도라고 해두죠. 지금처럼, 언제 찌르고, 언제 베고. 내 습관은 또 어떻고.”
슬금슬금 물러나는 김수정이 걸음을 뚝 멈췄다.
기세를 타고 말을 이었다.
“원한다면 월급도 줄 수 있고요. 물론 조건은 최상으로 맞춰줄 거고.”
월급이라는 말에 구겨졌던 김수정의 얼굴까지 펴졌다. 음지 애들이 저렇다.
“저는요?”
대뜸 박지현이 손을 번쩍 들었다.
“저도 그쪽 때문에 뼈 빠지게 일하고 있는데, 저는 뭐 없어요?”
혹시 내가 돈 귀신이 들러붙었나?
여기나 저기나 돈 달라는 것들이 왜 이리 많아?
그때였다.
불현듯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손정연.”
“또 왜요. 들킬 걱정 없다니까 그러네. 내가 얼마나 깨끗하게 세탁해서 협회로 갔는데.”
“블랙 마켓에 손정연을 불러야겠네.”
“예? 그게 무슨 말이에요?”
“안 올 수 없게끔, 미끼도 하나 깔아두고.”
나는 그 길로 화이에게 다시 전화를 걸었다.
“네로드한테 말 좀 전해. 못한다고 하는 건 아니겠지?”
-…말 전하는 것쯤은 가능할 것 같은데. 왜 그래? 살벌하게.
“손정연한테 넘어가는 꼴 보기 싫으면 찾아오라 그래. 기회를 줄 테니까.”
***
“데이터 상으로는 전과 다른 점이 없습니다.”
“내가 봐도 그래. 그런데 이 찜찜한 기분은 뭘까.”
손정연이 볼펜으로 보고서를 툭툭 두드렸다. 이태진의 최근 동향부터 박지현이 누구의 명령을 받고 협회로 들어온 것까지.
빠짐없이 적혀 있었다.
“박지현을 빌미로 이태진을 부르는 건 어떨까요?”
“박지현? 이태진한테 박지현은 아무것도 아니야. 임한나라면 모를까. 최태성은?”
“화신 와해 건으로 중국 출장 중에 있다고 확인됩니다.”
“잘됐네. 타이밍도 좋고.”
손정연이 이를 까드득 악다물었다.
“회장님. 그보다 국회에서…….”
“캔슬해. 이게 제일 중요하니까. 그놈 위치 어딨어?”
“일성 본사 내에서 숙식을 모두 해결하는 것으로 파악됩니다.”
“겁은 많다 이거지.”
“회장님. 아무리 생각해봐도 일성 쪽 움직임이 심상치 않습니다.”
“또 뭐가?”
“그놈들이 작정하고 밀고 들어오면….”
“최태성도 없는 지금 일성이 뭐가 무섭다고.”
“확인 된 바로는 블랙마켓쪽에서도 이태진과 연결고리가 있다고…….”
“그놈들은 돈만 주면 해결될 애들이고. 또 뭐!”
비서가 입을 오물거리다가 다물었다.
애초부터 손정연은 들을 생각이 없었다.
그의 머릿속에 지금 이태진 말고 다른 게 있기는 한걸까?
때마침 협회장실의 문을 벌컥 열렸다. 황급히 무기를 꺼내든 비서가 고개를 갸웃했다.
“박지현?”
“이 타이밍에 이런 말 하긴 좀 그런데. 이태진이 네로드랑 손잡는 거 보기 싫으면, 자기 말 들으라는데요?”
“뭐?”
“그리고 하나 더. 저 무시하지 말아줄래요? 나름 이태진이 아끼는 사람일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