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5화 뒤바뀐 미래 (2)
오래전, 협회에 갔었던 기억이 떠올랐다. 거기서 봤던 훈련도 함께. 몬스터 대신 사람을 대상으로 한 합진은 내게 그만큼 충격을 줬었다.
그리고 오늘, 내가 끔찍하다 말했던 그 합진이 내게 향하고 있었다.
앞, 뒤, 좌, 우, 위, 아래.
겨우 여섯밖에 안 되는 놈들이 모든 방위에서 쏟아져 들어왔다.
놈들의 수준이 S급이었다면, 나는 꼼짝없이 한 칼에 썰리고 말았을 것이다.
“참 다행이지.”
그 말과 동시에 옆에 있던 놈이 칼을 휘둘렀다.
서걱!
어깨를 스치고 간 놈의 검이 한 번 더 움직였다.
서걱!
피 분수가 터진다. 왼 팔이 잘릴 듯 덜렁거렸다. 이렇게까지 연기를 해야하나 싶지만, 손정연, 그놈을 도모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었다.
나머지 다섯이 이때를 놓칠 수 없다는 듯 공격에 박차를 가했다.
휙! 휙!
퍼버벅!
나는 놈들의 공격을 있는 그대로 당해줬다.
직접 당해보니 합진의 악랄함이 더욱 잘 보인다. 땅따먹기하듯 대상을 천천히 갉아 먹으니, 그 누가 됐든 이 안에서 생존을 장담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런데도 놈들의 표정은 풀릴 줄을 몰랐다. 이상하다 느끼면서도 멈출 수 없을 것이다.
아슬아슬하다.
분명 유효한 공격은 많이 들어가는데, 치명적인 한 방이 부족하다.
내가 아니라, 놈들이 하고 있는 생각이다.
그러나 놈들은 프로다웠다. 초조해야 할 타이밍에 그러한 감정을 드러내지 않았다.
[저주 : 누군가 저주를 시도합니다.]
[마법 저항력이 극도로 높습니다.]
[마법 저항력을 제한합니다. 제한하시겠습니까?]
[저주 : 앞이 보이지 않습니다.]
유일하게 전투에 끼지 않은 원거리 딜러가 뭘 하나 했더니.
“지금이야!”
여자의 목소리와 함께 합진이 재정비됐다. 일제히 들어오는 도검을 보며 생각했다.
이제 슬슬.
아까 전 피분수를 뿜어내게 했던 놈이 먼저였다.
목까지 칼을 들이민 녀석이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그러던 놈의 얼굴이 와락, 구겨지기까지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옆에서 보기에는 마치 내가 놈의 검에 휘말려 죽음을 자초하는 모습이었다.
“으어엇!”
캉!
미끄러진 내 롱소드가 놈의 칼을 막았다.
반작용으로 인해 몸이 회전한다. 내 롱소드의 궤도가 이상했다. 그러니까 이번에도 놈들 입장에서.
절묘한 우연 같았다. 혹은 놈들의 실수처럼 보였다. 뒤쪽에서 창을 들이미는 놈이 한순간 대열에서 이탈한 틈을 노렸다.
서걱-
“크악!”
한 놈은 쓰러졌고. 나는 최대한 어안이 벙벙한 표정을 지었다.
“이게 어떻게 된 거지.”
“설마…?”
대장으로 보이는 놈이 입을 열었다. 놈의 눈에서는 지진이 일어나고 있었다.
뻗어오는 칼끝에도 당혹감이 그대로 묻어나오는데, 나야말로 짜증 났다.
당해주느라 얼마나 고생했는데.
“합진을 파훼한…!”
내 연기가 이렇게 쓰레기였나?
놈이 기겁하며 몸을 물리려던 것을, 내가 앞으로 이동하며 속도를 맞췄다.
카앙! 서걱-
이번에도 우연처럼, 절묘하게 돌아간 칼이 다른 한 놈을 베어 넘겼다.
이 영상을 보고 있을 놈은 도저히 눈치채지 못하게끔.
캉! 서걱- 서걱-
도무지 빠져나갈 구멍이 없어 보였다.
이윽고.
“마, 말도 안 돼…….”
전형적인 대사를 뱉은 놈이 바닥에 엎어진 채 나를 올려다봤다. 다른 녀석들의 사정도 녀석과 다르지 않았다.
바닥에 엎어진 채, 믿을 수 없다는 표정.
패배의 절망보다는 황당함이 앞서 보였다.
“목숨은 살려주겠다.”
대번에 놈들의 표정이 밝아졌다.
“협회장님께는 분명히 말씀드리겠다. 약속한다. 다시는 이태진 너를 건드리지 않겠다고.”
“뭐, 말하는 거야 상관없는데.”
심장 속 마력을 천천히 끌어올렸다.
“비각성자 말을 들어줄지는 모르겠네.”
“비각성자? 무슨 소리지?”
“말 그대로. 그대로 가만 있어 봐. 시험할 게 있으니까.”
나는 놈들을 대상으로 테스트를 한 번 진행해 보기로 했다.
과연 놈들의 단전 안에 있는 마력을 내가 흡수할 수 있을 것인지에 대해서.
특성과 스킬을 흡수시키는 방법에 대해 연구 하다가, 우연찮게 발견한 마법이다.
과연 타인의 마력을 흡수하는 방법은 없을까?
무협지로 따지면 흡성대법 같은 마법.
결론만 말하자면 있더라. 지금의 나조차 다루기에 까다로운 마법임이 분명하지만, 나는 거기서 가능성을 엿봤다.
그전에.
저쪽으로 전달되고 있을 카메라부터 부쉈다.
“잠깐. 뭐, 뭐하는 짓이냐!”
“이게 다 너희들을 위해서야. 작전에 실패한 것들을 손정연이 가만두겠어?”
내가 이것들을 죽이지 않고 살려둔 이유.
[마법 : 마나 드레인을 시전합니다!]
덜그럭거리는 고리에서 기어코 마법이 발현됐다. 그 직후, 여섯 명의 마력이 일제히 내게 쏟아져 들어왔다.
“크아악!”
놈들이 고통스러운 비명을 질렀다. 놈들의 스킬, 레벨, 특성들이 하나하나 해체되고 있다.
실제로든, 아니면 정신적인 부분이든. 고통을 느끼지 않는다면 인간이 아니다.
그럼에도 한번 발현된 마법은 나조차도 돌이킬수 없는 것이었다.
여섯 놈 모두의 스킬, 레벨, 특성을 빨아먹기까지는 10분도 걸리지 않았다.
평생을 이룩한 놈들의 경지가 한순간에 사라진 것이다.
그럼에도 298레벨의 경험치 통을 만족시키기엔 턱없이 부족하고.
수치로 따지자면 2퍼센트쯤 올랐나?
볼이 앙상하게 파인 놈들이 바닥에 엎어져 덜덜 떨었다.
“일반인으로 살아라. 그게 더 나을 수도 있으니까.”
진심으로 하는 충고였다.
뭐가 됐든 죽는 것보다는 나을 테니까.
***
“A급 여섯에 B급 원거리 딜러 하나? 너무 오버하는 거 아닌가.”
협회장실을 둘러보던 인도인 한 명이, 그렇게 핀잔을 줬다.
“그 정도면 나도 생존을 장담하기 힘들겠군.”
“그만큼 공을 들여야 하는 놈이었다.”
손정연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스킬은? 준비됐겠지?”
“이걸로 빚은 없는 거다.”
“물론이지.”
“그 정도 A급 헌터 때문에 네가 이 정도로 안달이 나다니. 오래 살고 볼 일이군.”
“더 오래 살면 왜 내가 그런 말을 했는지 알겠지.”
손정연의 눈동자가 허공의 한 지점으로 향했다.
그는 미래를 그렸다. 자신의 손자가 세계 무대를 호령하고, 그 옆에 충실한 종이 된 이태진의 모습을.
“그것도 이태진이 얌전히 잡혀 왔을 때의 이야기고. 죽기라도 하면 달라진다.”
“걱정 마라. A급 힐러도 대동해놨으니까.”
“정성이 갸륵하군.”
그러던 때였다. 다급한 노크 소리와 함께 비서가 집무실로 들어왔다.
“…실패했습니다.”
“뭐가.”
“독수리 사냥. 실패한 것으로 보입니다.”
순간, 손정연의 정신이 멍해졌다. 작전명 독수리사냥. 이태진을 생포하라 했던 그 작전이었다.
“잘못 안 거 아니야?”
“갔던 인원들이 모두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그런데?”
빨리 말하라는 듯 손정연의 손길이 바빠졌다. 비서가 품 안에서 초소형 카메라를 꺼냈다.
“…원본 영상입니다. 직접 보시고 판단을…….”
훽 하고 낚아챈 손정연이 컴퓨터에 그것을 연결했다. 영상이 시작됐다.
며칠간이나 더 게임 현장 안에서 잠복하던 그들이, 모습을 드러내면서부터였다.
쏜살처럼 달려나간 협회의 헌터들. 펼쳐지는 대구궁합진, 토끼눈을 뜬 채 꼼짝없이 이곳저곳을 베이는 이태진까지.
여기까지는 무엇으로 보나 작전 실패를 상상할 수 없다.
그런데 상황이 역전되는 것은 한순간이었다.
합진이란 무릇 모든 인원이 손발이 되어 동작을 수행해야 한다. 작은 실수만 해도 상대에게 기회를 주고 마는 것이다.
지금 영상에서 보이는 것이 딱 그러했다.
한 명이, 그것도 작전의 리더라는 놈이 약속된 동작을 수행하지 않았다.
우연에 우연이 겹쳐져, 어어 하는 사이 이태진의 검이 뒤쪽의 놈을 찔렀고, 그 틈을 타서….
손정연이 영상을 멈췄다.
“어이가 없으려니까. 이런 실수를 해?”
“무조건 성공한다며.”
옆에 있던 놈이 재밌다는 듯 이죽거렸다.
황당하기는 자신도 마찬가지여서, 손정연은 거기에 대고 가타부타 말을 하지 않았다.
“그래도 신기하긴 하군. 무려 A급 여섯을 때려눕히다니.”
“생포를 최우선으로 둬서 그런 거다. 암살을 목적으로 뒀다면 한 합이 끝나기도 전에 저놈의 모가지가 떨어졌겠지.”
“어쨌든 실패는 실패. 이제 어떻게 할 거냐. 참고로 난 시간이 별로 없어서.”
“재촉하지 마라.”
손정연이 이를 까드득 깨물었다. 그때, 가만히 지켜보던 비서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회장님. 이상한 점이 있습니다.”
“또 뭔데.”
“살아 돌아온 인원들의 상태가 심상치 않습니다.”
“죽지 않은 걸 다행으로 여겨야지.”
“그게 아니라.”
“또 뭐!”
“녀석들한테 마력 감지가 되지 않고 있습니다. 꼭 일반인처럼요.”
“뭐?”
“한번 확인해 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손정연이 벌떡 일어났다. 그가 재빨리 병동으로 달려나갔다.
거기에는 온갖 힐러들이 바쁘게 돌아다녔다. 말단부터 A급, 심지어 일성에서 막 들어온 박지현까지도.
손정연을 발견한 박지현이 한숨을 쉬며 고개를 저었다.
“몸이야 몇 달 요양하면 나을 텐데. 이것들. 더 이상 각성자가 아니에요.”
“각성자가 아니면?”
“일반인이죠 뭐.”
“자세히 말해봐.”
“자세히 말할 것도 없어요. 왜인지는 모르겠는데, 얘들 전부 다. 일반인이 됐어요.”
***
지금쯤이면.
협회장 손정연은 결국 직접 움직일 수밖에 없다는 걸 깨달았을 것이다.
나는 그러는 놈의 초조함을 이용하기로 했다. 또한, 거기서 비롯되는 방심도 함께.
“아닐 암바니. 인도 내 랭킹 4위에 위치한 정신계 각성자입니다. 자세한 사항은 보고서에 정리해 뒀습니다.”
김주현이 정리해 놓은 파일을 천천히 살펴봤다. 역시 내 예상이 맞았다.
아닐 암바니의 추정 레벨은 270.
손정연의 레벨을 280으로 잡았을 때, 손정연과 아닐 암바니. 두 놈이 동시에 덤벼들면 아슬아슬하다.
내가 거지 같은 연기력으로나마 손정연의 방심을 유도한 것도 그 이유 때문이다.
뭐든 승부를 가르는 건 작은 한 수다. 지금으로 치면 정보력이라 할 수 있겠지.
나는 손정연의 전력이 어느 정도 인지 알고 있지만, 손정연은 그렇지 않다. 놈이 나를 보는 시선은 운이 좋은 A급 헌터.
그 정보 하나가 놈과 나의 승부를 갈랐다.
“그리고, 1층 로비에서 손님 한 명이 찾아왔습니다. 자기 말로는 약속을 미리 했었다고…….”
“이름이 김수정입니까?”
김주현이 고개를 끄덕인다. 안 그래도 난동을 피우는 김수정의 목소리가 여기까지 들리는 지경이다.
“모셔오세요.”
***
“내가 성덕이 될 줄이야.”
“성덕?”
“그런 말이 있어요. 여기군요. 이 팀장님 일하는 곳이.”
김수정이 내 집무실을 기웃거렸다. 두 눈에 카메라라도 달렸는지 열심히도 담는다.
“우승 상금부터 정산할까요?”
김수정에게 딱밤을 먹이기 직전, 내게 찾아오면 더 게임의 우승 상금을 주기로 약속했었다.
돈으로 해결할 수 있는 것은 돈으로 해결하는 게 확실하고 편하다.
“계좌 보내 놓으세요. 그쪽으로 전달할 테니.”
“감사합니다!”
김수정이 고개를 꾸벅 숙였다. 굉장히 낯익은 모습이다. 음지 3인방 중 한 명이 떠오르는데.
“혹시 조영은과는 무슨 사입니까?”
“어? 그분을 어떻게 아세요? 제 멘토인데.”
“김수정 씨도 음지 출신입니까?”
“에이. 다 조사했으면서 왜 모르는 척이에요. 저 그 정도 감수는 하고 왔습니다.”
“이야기가 빨라서 좋군요.”
“그래서 원하시는 것이?”
“눈.”
“눈?”
김수정이 자신의 눈을 가리키며 물었다.
그래. 저 눈. 검신의 축복마저 놓친 내 습관을 낱낱이 파헤친 저 재능이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