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4화 뒤바뀐 미래 (1)
“대현도 완전히 흡수한 거고?”
“예.”
“끌어모은 A급 헌터 애들이 몇이야.”
“총 서른넷입니다. 회장님 그런데.”
손정연이 태블릿에 시선을 둔 채로 턱짓했다. 손현욱이 곤란한 얼굴로 보고를 이어갔다.
“며칠 전 미국에서 경고장이 날아왔습니다.”
“경고장.”
“예. 레인우버를 끌어들였다는 명목으로 청문회를 열 예정이라고 합니다.”
“그건 핑계고. 진짜는 뭐야?”
“아무래도 A급 헌터들을 그러모은 걸 문제 삼은 것 같습니다.”
손정연이 웃음을 터트렸다.
“귀쟁이 놈들도 견제할 정도라는 거지.”
“회장님. 마냥 좋아할 일이 아닙니다.”
“로비 넣었던 상원들은 반응이 뭐래?”
“철저하게 당 차원에서 진행되는 일인지라, 막아줄 수 없다는 말만 반복하고 있습니다.”
“그래? 그렇단 말이지.”
상황이 심각하게 돌아감에도 손정연의 귀에 걸린 입꼬리는 떨어질 줄 몰랐다. 보다 못한 이사 중 한 명이 손정연에게 말했다.
“그놈들이 본격적으로 문제 삼으면, 저희들도 마땅한 조치를 취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늦었어.”
“……예?”
“늦었다고.”
“회장님. 외람되지만 지금이라도 저희가 가진 규모를 줄이면…….”
“우리가 아니라. 저놈들이 늦었다고.”
손정연이 손가락으로 관자놀이를 두드리며 말했다.
“코쟁이들 가진 A급이 얼마야?”
“이백이 조금 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S급은?”
“은퇴한 헌터까지 합치면 여덟입니다.”
“그것들로 지구 전체를 돌아가면서 지들 패권을 지키고 있다는 건데.”
“……예?”
때마침 고개를 든 협회장 손정연과 이사가 눈이 마주쳤다.
손정연의 얼굴에 미묘한 빛이 어렸다. 즐겁다는 건지, 불쾌함인지 알 수 없는 감정이 뒤섞인 표정이었다.
“지금이야 우리 잡자고 난리 피울 텐데, 작정하고 우리가 꼬장 부리면? 그때도 저렇게 나올 것 같아?”
손정연이 고개를 저었다.
“조용히 있겠다는 제스처만 취해도 저놈들 여론부터가 괜한 동맹국에 왜 참견이냐 할걸?”
장내의 모두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지금 뭐라고 반박했다가는 손정연의 저 살벌한 눈빛에 목이 떨어져 나갈 것 같았다.
협회의 이사 몇이 눈빛을 주고받았다.
“그러면 이태진은 어떻게 할까요?”
“그래. 우리가 이야기할 주제는 그거지. 이태진.”
이사들이 가슴을 쓸어내렸다. 며칠 전부터, 협회 내부회의에서 이태진이라는 단어는 그만큼 강력했다.
분위기가 안 좋게 돌아가도 이태진의 이름만 나오면 손정연의 얼굴이 밝아졌다.
지금처럼.
“난 그놈이 또 무슨 사고를 칠지 궁금해.”
손정연이 태블릿을 두드렸다. 이태진이 더 게임의 세트장 안에서 벌인 활약이 담겨있는 원본 영상이었다.
“그런데 회장님. 그놈이 저희 쪽으로 붙을까요? 아무래도 최태성부터가 가만 있지 않을 텐데.”
“오히려 잘된 일이지. 그놈까지 한 번에 싸먹을 수 있는데.”
“…그러면, 백인호 건으로 이태진부터 소환하겠습….”
“그럴 필요 없어. 이미 데리러 가라고 했거든.”
손정연이 비릿하게 웃었다.
“한 여섯 정도면 되겠지.”
“여섯이라면…?”
“영상 감식 결과 이태진 저놈. 조작한 거더라고. S급이 아니라면 납득할 수 없는 결과라고 하더라. 내가 봐도 그래. 겨우 딱밤 가지고 A급 헌터들을? 쇼하는 거지.”
“예?”
“방송국 놈들이야 조작 아니라고 하지만. 큭. 제 딴에는 발악하는 거겠지. 귀여운 놈.”
또다.
근래 들어 이태진 이야기만 나오면 저렇게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한다.
그럼에도 협회의 이사들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전에도 그랬지만 지금 손정연이 가진 권력은 무소불위에 가까웠기 때문이다.
“그러면 내가 안 잡아갈 줄 알고 말이야.”
***
“난 솔직히 이태진 무서웠거든. 그런데 초코바 그거 먹는 거 보고 마음 바뀌었다니까.”
“아 그거. 그 회사 주가 상한가 찍었다던데.”
“겨우 초코바 하나 먹는 것 때문에?”
“한창 더 게임 진행 중에, 그런 이미지를 가진 사람이 그렇게 먹으니까.”
“그래서 그게 광고야, 아니야?”
아니다.
그냥 주머니에 있던 걸, 주섬주섬 먹은 것뿐이다.
-안녕하세요 이태진 님! 청아제과 마케팅 부서 김주영 부장입니다! 이렇게 무례를 쓰고 문자를 드리는 것은 다름이 아닌…….
어제부터 제과회사가 보내오는 애달픈 메시지는 열통이 넘어가고 있다.
옆을 돌아보니 임한나가 그게 재밌다고 웃고 있다.
배꼽까지 잡으면서.
“동영상 저장 버튼에서 손 떼.”
서둘러 임한나의 휴대폰을 뺏어 수백 번째 재생되고 있는 내 영상을 삭제했다.
옆을 보니 임한나가 고심이 가득한 얼굴로 고개를 갸웃하고 있다.
“클라우드에 세 번 백업한 건 어떡하지?”
“그것도 지워.”
“실물로 액자 주문한 건?”
거기까지 들은 후, 나는 입을 다물었다. 왠지 더 들었다가는 소름이 돋을 것 같다.
표정을 바꿔 임한나에게 말했다.
“스태프 말 들어보니까, 오늘은 매니저가 있으면 안 된대.”
혹시나 의문을 더할까 봐 적당한 핑계를 만들었다.
“마지막 날이잖아. 비밀 엄수할 게 있다더라. 외부인은 출입금지래.”
주절주절 덧붙인 핑계 뒤로, 임한나가 순순히 고개를 끄덕인다.
“그럼 난 먼저 회사 들어가 있을게.”
“…그래.”
“꼭 우승하고.”
“난 참가자 아니라니까.”
“요새는 빌런이 이기는 게 유행이래.”
“내가 우승하면 남은 생존자들이 JBC에 고소할걸?”
“걔들은 그것까지 이용할 애들이야.”
그렇게 몇 번 더 시시한 농담을 주고받은 후, 임한나가 얌전히 돌아섰다.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역시 임한나에게 사람이 죽는 것을 보여주기엔 좀.
때마침 방송국 스태프가 가까이 다가왔다.
“이태진 씨! 현장 입장하실게요!”
스태프는 잔뜩 상기된 얼굴로 내게 주먹을 감아쥐었다.
“꼭 우승하세요!”
***
게임의 룰이 바뀌었다고 한다. 최종 생존자들이 벌이는 각축전에서, 나 하나를 잡는 것으로.
현장에 입장하자마자였다. 이곳저곳에서 파동이 강하게 느껴졌다. 나 하나를 잡기 위해 단단히 준비한 모양이었다.
감각을 조금 더 집중시키자 소곤거리는 대화 소리까지 귀에 잡혔다.
-그때는 실패했지만 지금은 달라요.
-지금은 달라? 뭐가 달라.
-분명 사과했을 텐데요. 미안하다고.
-사과로 끝나면 법이 왜 있어?
-우승 상금 분배도 8:2로 하기로 했잖아요. 그래서.
-그쪽이 한 번 더 배신하면 상금이고 뭐고 다 날아가는데 비율이 무슨 상관인데?
-그때와는 상황이 달라졌으니까요. 털복숭이 투정은 이 정도 받아줬으면 충분한 것 같은데.
-이번에도 배신하면, 넌 나가서도 뒤지는 거야.
-겨우 당신한테 질 것 같지는 않지만, 그런 셈 치죠. 며칠 전 분석한 이태진의 움직임이에요. 횡보다는 종으로 움직이는 걸 선호하고…….
나에 대한 본격적인 해부가 시작됐다. 본격적이라는 말이 맞았다. 영상으로 찍지도 않은 내 동작을 어떻게 기억하는지 낱낱이 분해시키고 있으니까.
-겨우 딱밤이라고 생각할 게 아니에요. 자존심? 그딴 건 개나 주라고 해요.
특히 저 여자.
이름이 김수정이라고 했던가?
가진 재능이 분석에 몰빵한 거 아닌가 싶을 정도로 나를 잘 안다.
내가 알고도 안 고치던 습관, 혹은, 정말 인정하기 싫지만 몰랐던 습관들까지도.
김수정이라는 여자가 궁금해졌다. 이용할 가치가 있다는 판단이 섰다. 물론 그전에 확인할 게 남았지만.
화악!
내 몸에서 강한 기풍이 날아갔다. 남은 생존자는 총 열 명.
시간이 지날수록 생존구역이 좁아지는 더 게임 세트장의 특성상, 생존자들은 모두 한곳에 모여 있었다.
“지금!”
김수정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털복숭이가 내게 달려왔다. 표정은 잔뜩 일그러진 채로.
“야이 개 같은…!”
“미안해! 우승하면 꼭 갚을게!”
“넌 나가서 보…!”
따악!
털복숭이가 딱밤 한 대에 저 멀리 밀려 나갔다.
목숨에는 지장 없게끔, 딱 기절할 정도의 힘이었다.
연이어 다른 무리의 녀석들이 합공을 시작했다.
위 아래에서 찔러 들어오는 창칼의 기세가 매서웠다.
“죽엇!”
아무리 그래도 죽어는 좀.
따아악!
조금 더 강한 강도로 위에서 짓쳐 들어오는 녀석을 날려버린 후, 연속으로 아래와 옆의 놈까지 이마에 불을 지펴줬다.
퍼어엉!
불현듯 연기가 솟아났다. 허연색으로 뒤덮인 세상 때문에 시야가 완전히 차단됐다.
“하지만 감각에 의존하고 있겠죠?”
여자의 목소리였다. 익숙하다. 김수정.
그런데 이상한 것은, 목소리가 사방위 모든 곳에서 퍼지고 있다는 것이었다.
“감각을 차단시키는 연막이에요. 각성자의 레벨과 상관없이, 탄소 기반 생명체라면 무조건 반응할 수밖에 없게끔.”
잘도 이런 걸 이제껏 숨기고 있었군.
방송 카메라에는 내가 어떻게 비칠까?
일부러 몸을 한번 비틀거렸다. 극적인 연출을 위한 것이 아니라, 숨어있는 놈들을 유인하기 위해서였다.
“제가 유난히 기억력이 좋거든요. 그쪽 팬인 것도 있지만.”
“팬?”
흐흐, 하며 웃는 소리가 들렸다.
“그냥 팬이 아니라 극성팬이요. 주소도 댈 수 있는데. 불러 줄까요?”
“악질이었군.”
“그쪽과 이런 대화를 할 줄은 상상도 못 했거든요. 사실 긴장돼요.”
따악!
안개 속을 파고드는 녀석 중 하나를 멀리 날려 보냈다.
남은 것은 세 명.
눈 돌아가는 소리가 들렸다. 김수정의 지휘에 따라 녀석들이 산개했다.
생존구역 끝까지 도약한 녀석들이 다시 이쪽으로 다가온다.
느린 발걸음에서 종래에는 빠르게.
나는 한 번 더 몸을 비틀거렸다. 취객과 비슷한 몸놀림이었다. 공중의 카메라가 나를 열심히 추적 중이다.
그놈들이 특히 더 잘 보이게끔 취한 연기를 했다.
심지어 내 옷이 잘려나가는 수모도 참았다.
흐릿한 안개 속 김수정의 웃음이 들렸다.
“제가 이기면 사진 한 번 찍어주시죠.”
“사진보다 더 좋은 걸 주지.”
“어, 어떤…….”
따악! 따악!
두 명을 해치운 뒤.
마치 우연인 척 흐물거리는 발걸음으로 김수정 쪽으로 다가갔다.
그런 다음 작게 속삭였다.
“끝나고 나를 찾아와라. 테스트는 통과했으니까.”
따악!
***
요즘 나의 최대 관심사는 단연코 SS등급에 관한 것이다.
과연 SS등급은 있는 것일까?
있다면 그 기준은 역시 300레벨인가?
그렇다면 나는 어떻게 남은 2개의 레벨을 채워 300레벨을 달성할 것인가.
예상했듯, 평범한 방법으로는 경험치가 오르지 않고 있다. 그것은 며칠 전 들어가 본 A급 던전에서 확인했다.
남은 것은 S급 던전에 들어가 보는 것인데.
그것만큼은 나도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지금에 이르러서도 단신으로 S급 던전을 공략할 수 있겠다는 확신은 들지 않았다.
결국 동료를 모아야 할 텐데.
나는 그 부분의 힌트를 두 군데서 얻었다.
첫 번째는 필요 없는 스킬과 특성의 삭제. 이것이 가능한지에 대한 고민은 진즉에 끝났다.
일정 조건만 갖추면, 무조건 가능하다. 더불어 삭제한 스킬과 특성이 경험치로 바뀐다는 확신까지 얻었다. 거기에 대한 증명은 조금 뒤로 미뤘다.
기다리던 손님이 찾아왔기 때문이다.
아직까지 이곳 더 게임 세트장에 남아있는 이유는 이것들 때문이었다. 며칠 전부터 나를 따라오던 협회의 각성자들.
걔 중 한 놈을 쳐다보자마자였다. 놈이 일시에 반응했다.
확실히 나를 죽이려는 의지를 담고 있는 녀석들이었다. 더 게임 생존자들과 달리, 움직임에 한 치의 망설임도 없다.
녀석들의 검 끝도 그러했다.
퍼엉!
또다.
안개가 퍼졌다. 김수정이 아까 퍼트린 그것과 같았다.
“귀엽긴.”
“몸에 칼이 박혀도 그런 말이 나올까?”
A급 헌터 여섯 명이 한 번에 나를 덮쳤다.
온갖 속박과 저주마법이 겹겹이 중첩된다.
나는 딱밤 대신, 인벤토리 안에서 롱소드를 꺼냈다.
“선빵친 건 너희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