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3화 일상 (4)
최태성이 저런 표정을 짓는건 또 처음본다.
늘 여유롭게 차나 들이켜서 초조함이나, 짜증과는 거리가 먼 사람처럼 느껴졌는데.
“할 거면 조용히 했어야지.”
“…….”
“모를 거라 생각한 건 아니겠지.”
“알고 계셨습니까?”
“그렇게 시끄럽게 일을 벌였는데.”
내가 방금 알고 있냐고 물은 건 백인호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다.
성요한에 대한 말이었다.
당연히 최태성도 내 말의 의중을 알아들었고.
당시의 상황을 기억해 봤다. 그때 최태성은 내게 가지 말라고 몇 번이나 경고했었다.
분명 그것은 성요한이 나타날 줄 알고 한 소리였다.
“제가 죽을 줄 알았군요.”
“아직도 내가 귀신을 보는 게 아닌가 싶다만.”
“어떻게 성요한이 나타날 줄 알고.”
“나도 비밀 하나쯤은 만들어 둬야지 않겠나. 그래도 열심히 자네를 말렸다는 건 기억했으면 좋겠군.”
최태성은, 늘 봤던 그 표정으로 돌아가 있었다.
침착하고, 여유로운 눈빛과 제스처.
“어떻던가? 성요한은.”
마치 괴물 이름이라도 부르듯, 최태성이 눈을 크게 뜨며 물었다. 표정을 보아하니 정말 궁금한 모양이었다.
“강하더군요.”
“그렇겠지.”
최태성이 손가락으로 의자를 툭툭, 두드린다.
그에게 성요한이란, 꽤 자극적인 단어였나 보다.
“그리고?”
“그리고.”
나는 망설이다가, 그냥 웃어넘겼다.
이계에서 배운 몇 가지 중 하나는, 상대가 원하는 걸 쉽게 주면 안 된다는 것이다.
특히 지금처럼 긴장되는 상황이라면 더더욱이.
“나는 자네의 특성보다, 그런 의심하는 자세가 좋아.”
“감사합니다.”
“부디 앞으로도 그랬으면 좋겠군.”
“무슨 뜻입니까?”
“말 그대로. 뭐든 의심하고 결정하라는 거지. 누구의 말이든 확신하지 말라는 거지. 그 어떤 믿음을 줬다 해도.”
대화가 어지럽게 흩어지는 기분이다. 우리 둘 다 구태여 할 말을 하지 않는 느낌이 든다.
왠지 최태성도 ‘시스템’에 대해서, 뭔가 알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어볼까?
생각했다가 곧장 접었다.
왠지 물어보면, 최태성과 적이 될 것 같았다.
안 그래도 사방에 적이 많은 이때 괜히 적을 늘려서 좋을 게 없…….
“아. 방금은 시스템에 관한 거였어. 의심하라는 말 말이야.”
깜짝이야.
“그렇게 놀라는 건 또 처음 보는군.”
“언제부터 알고 계셨습니까?”
“꽤 됐어. 나도 한때는 선택받았었거든.”
“선택?”
“그래도 자네만큼 공을 들이진 않았나 봐. 겨우 1년 만에 이 정도의 성장을 시키는 건 나도 처음 봐서.”
최태성은 참았던 것을 터트리듯 과감하게 말을 이어갔다.
“이제껏 저를 지키려고 했던 이유도 시스템 때문입니까?”
“음. 어느 정도는. 자네 옆에 있으면 콩고물이라도 떨어질까 봐 잘해줬던 것도 있고. 지금에 와서는 경쟁자 하나만 더 늘린 꼴이 아닌가 싶다만.”
“의심하라는 건 어떤 의미입니까?”
기왕에 말이 나온 참이다. 다른 건 몰라도 이건 짚고 넘어가고 싶었다. 이셀라의 마스터도 그렇고, 최태성도 그렇고.
대체 왜 이렇게까지 시스템을 경계하라고 나한테 말해주는 거지?
“이 말을 들은 게 처음이 아닌가 보지?”
“…….”
“자네만 시스템의 선택을 받은 게 아닐세. 자네 전에도, 앞으로도 그런 자가 나타날걸세. 마치 하오란처럼.”
최태성이 여유롭게 웃었다.
“이전에는 나와 성요한이. 지금 세대에서는, 하오란과 자네가. 시스템의 선택은 축복이 아니라 저주야.”
다른 건 몰라도 그 말만큼은 동의한다. 시스템의 선택은 저주에 가깝다고.
“독도 약에 쓸 때가 있다고 합니다.”
나는 그 말을 끝으로 일어났다. 순간이나마 시스템을 의심했다. 그렇게나 확신을 갖자고 사막에서 다짐해 놓고 또.
다시 말하지만.
시스템에 대한 의심은 끝났다. 지금은 그놈을 믿고 적들을 물리칠 차례다.
***
내 적들을 한번 점검해보자. 그것은 머나먼 과거처럼 느껴지는 화이와의 대화부터 시작한다.
화이가 들려준 녹음기에, 손정연이 한 말이 아직까지 생생하다.
-최선은 족쇄를 채우는 것이겠지만 그게 힘들다면 죽여야지. ……성도 마찬가지. ……달 안에 마무……!
지금 기준으로 한 달 안으로.
손정연은 나를 찾아올 것이다. 인도에 사는 S급 각성자와 함께.
손정연의 목적은 나를 제 부하로 만들거나, 죽이거나.
협회장 손정연을 죽이면 당연히 협회를 적으로 삼겠다는 소리다. 협회를 적으로 삼겠다는 건 대한민국 전체를 등지겠다는 말이고.
물론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협회장과 같은 목적을 가진 놈이 하나 더 있다.
레인 우버의 네로드. 놈이 한국에 들어왔다고 한다. 놈의 수하들과 함께.
남은 레인 우버를 생각했을 때, 네로드를 포함한 모든 녀석들이 S급이라 봐야 한다.
그것들 모두를 한번에 상대해야 한다고, 가정해야 한다.
줄줄이 이어진 적들에 대한 단상은 시타둠교와 하오란까지 이어졌지만. 이것들은 적으로 불리기에 애매하다.
전자는 내가 잘만하면 수족처럼 부릴 수 있는 것이며, 후자는 끈 떨어진 연 신세가 됐을 것이기 때문.
던전은 빼고 사람만 상대해도 이 정도인데. 여기에 몬스터까지 더한다면.
지금 누리는 평화가 얼마 남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때문에, 즐길 수 있을 때까지 이 일상을 즐겨놔야 한다. 언제고 다시 곱씹을 수 있게.
***
백화점의 대형 스크린에서는 내가 나오고 있었다. 조금 뜬금없지만, 초코바를 먹는 내 모습이.
“쟨 뭔데 저렇게 맛있게 먹냐.”
“무인도 3년 갔다 온 사람이 단 거 먹으면 저럴 것 같기도 하고.”
“그래서 저거 이름이 뭐라고?”
“여기에 파나?”
사람들이 지나가면서 한마디씩 한다.
거지같이 먹는다, 보름은 굶은 것 같다, 광고비 뽕 뽑겠다 등등.
긍정과 부정 사이 공통된 의견으로는 굉장히 맛있게 먹는다는 것이다.
“그 정도인가?”
“그 정도지.”
옆에 있는 임한나가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명품 매장 쪽으로 열심히 시선을 돌리면서였다.
“명품을 좋아했었나?”
“싫어하는 여자도 있어?”
임한나의 위아래를 살펴봤다. 물론 가진 외모가 워낙 뛰어난 바람에 입은 옷과 장신구 하나하나가 명품처럼 보이긴 한다.
심지어 지나가는 사람이 임한나에게 옷의 출처를 물어보기도 했으니까.
그러나 확실히 제품 자체가 명품은 아니다.
“사람이 명품이지.”
임한나가 한 바퀴 몸을 돌리면서 몇몇 포즈를 취했다.
가끔 보면 얘가 김세린보다 더한 면이 있다.
임한나는 귀 뒤로 머리를 넘기며 몇 번이나 고개를 이리저리 저은 뒤에 말했다.
“그래서 여긴 왜 온 거야?”
“매니저가 그런 것도 묻나?”
“매니저니까 묻는 거지.”
“가방 좀 사러.”
“가방?”
원래는 이렇게 말할 생각이 아니었다. 조금 더 친절하고 남자답게, 그러니까 드라마에서나 나오는 대사도 몇 개 치고 할 생각이었는데.
분명 사막에서부터 그렇게 생각했었는데.
이상하다.
자물쇠가 채워진 듯 입이 안 떨어진다.
“걷는 건 또 왜 그래? 왜 이리 뚝딱거려?”
나도 느껴질 만큼 보폭도 이상하고.
연습한 대로 웃어볼까?
아니다. 오히려 역효과만 날 것이다. 더 게임 댓글 보니까 저렇게 살벌한 웃음이 없다고 했다.
웃는 건 조금 더 연습을 한 뒤에…….
“어머나!”
바로 앞이었다. 선글라스를 낀, 적발의 여자가 두 손을 들고 있었다. 굉장히 어색한 연기톤으로 우리를 쳐다보는 젊은 여인, 아니, 여자가.
“굉장히 우연이네요! 이게 어떻게 된 일이죠?”
“우연은 무슨.”
적발의 여자, 박지현의 뚝뚝 끊어지는 말을 임한나가 가볍게 잘라먹었다.
“여긴 뭐하러 왔어요? 한나 씨?”
“한나 씨? 뭐지? 이 이상한 호칭은. 하던 대로 해.”
“지금 하던 대로 하고 있잖아. 요.”
임한나가 주위를 살폈다. 던질 게 있으면 뭐라도 던질 기세다. 그런데 그것도 박지현의 말 한마디에 뚝 끊겼다.
“데이트 중에 방해한 건가?”
“…….”
“…….”
소금 뿌릴 기세로 두리번거리던 임한나가 전원이 꺼진 기계처럼 동작을 멈췄다.
감 잡았다는 듯이, 기세를 몰아 박지현이 말을 이었다.
“한나 씨. 우리 화해할 때 안됐어요? 백인호도 그렇게 된 마당에.”
박지현이 선글라스를 치켜들었다. 주변의 이목이 단번에 우리 쪽으로 집중됐다.
나야 괜찮다만, 임한나도 헌터다. 그것도 커리어 욕심이 상당한 헌터.
괜히 이런 데서 파파라치한테 물렸다가는 어떤 기사가 나올지 모를 일이다.
“일단 조용한 곳으로 가시죠.”
“드디어 대화가 통하는 사람이 나타났네. 따라와요.”
기다렸다는 듯 박지현이 앞장섰다. 또각또각, 구둣발 소리가 다급하다. 무슨 빚 달아놓은 사람마냥.
“아. 기억났다.”
빚.
있긴 있었지.
던전 갈 때마다 그녀에게 다달이 주던 아이템과 돈.
그것들을 받아내야 한다. 백인호와 한 편을 먹을 줄은 꿈에도 몰랐으니까.
그제야 박지현이 뜬금없이 지금 나타난 이유도, 저 고고한 여자가 저자세로 나오는 이유도 알 수 있었다.
자연스럽게 명품관으로 들어간 박지현의 발은 한 번도 멈추지 않았다.
“오셨습니까.”
“VIP실로 갈게요. 적당히 차 좀 내오세요.”
“알겠습니다.”
명품 매장안의 VIP 전용실이었다. 일반인들에게는 공개되지 않은 상품들을 앉아서 구경할 수 있는, 그런 공간.
옆을 슬쩍 보니까, 임한나가 침을 꿀꺽 삼켰다. 얘도 꽤 잘사는 집안으로 알고 있는데, 이런 경험은 또 처음인가보다.
자연스럽게 자리에 앉은 박지현이 우리 눈치를 살폈다.
“앉아요.”
목소리도 떨린다. 분명하다. 긴장하고 있다.
나는 자연스럽게 맞은편의 의자에 앉았다.
“그러고 보니 정리할 게 있었군.”
“…뭐예요? 그 이상한 말투는?”
“말투에 딴지 걸 여유도 있고.”
“…….”
박지현이 입을 다물었다. 왠지는 모르겠는데, 임한나가 승자의 미소를 짓고 있다.
“계산부터 합시다.”
“무, 슨 계산이요?”
“할 게 없으면 난 일어나고.”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하자, 박지현이 서둘러 다시 나를 앉혔다.
“농담 한번 못하겠네. 왜 이리 사람이…, 알겠어요! 알겠다고요!”
“최태성, 나, 백인호. 세 사람한테 대체 얼마나 뜯어먹은 건지. 그것부터 말해봐요.”
“그래봤자 얼마 안 돼요. 그리고 뜯어먹다니. 아 다르고 어 다른데, 말 좀 바꿔주면 어디 덧… 알겠다고요! 앉아요!”
박지현이 이렇게까지 저자세로 나오는 이유는 간단하다.
최태성에게 잘 말해달라는 거겠지.
지금 이 사건이 바깥에 까발려지면, 아무리 A급 힐러라 해도 대외적인 이미지가 망가질 테니까.
“지급 받은 아이템은 전부 다시 돌려줄 생각이었어요. 그래서 장물로 팔지도 않았었고.”
“그리고.”
“던전 들어갈 때마다 받았던 전리품들. 그것도 다시 돌려줄 거고.”
그걸 다시 돌려준다고 할 줄은 몰랐는데.
예를 들어 리저드의 외껍질이나, 족장 오크의 어금니.
그런 연구가치가 있는 것들은 부르는 게 값이라, 어떤 면에선 동급의 아이템보다 높은 가치를 지닌다.
그런데 나는 그것들을 거절했다.
“왜, 왜요? 돌려준다니까요? 이미 판 것들은 돈으로 환산해서 줄 거고.”
“돈은 이미 충분해서.”
“그러면요?”
박지현은 아까보다 급한 얼굴이 됐다. 내가 저승사자라도 되는 것마냥, 두 눈에 지진이 일고 있다.
“박지현 씨 특기 한 번 살려봅시다.”
“트, 특기라면……?”
“협회에 잠입 좀 하세요. 거기 데이터가 좀 필요해서.”
하오란, 네로드, 손정연 중.
가장 첫 번째 타깃은 역시 협회였다.
손정연.
놈을 죽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