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0화 일상 (1)
정리할 것이 많았다. 먼저는 상태창부터였다.
이름 : 이태진
레벨 : 298
스킬 : 오러 블레이드(S), 아드레날린 부스트(S), 신성한 파괴자의 검술(S), 일점폭발(S), 집중(S), 도약(S)…….
특성 : 검신의 축복(S), 무아지경(S), 인내하는 자(S), 전사(S). 만독불침(A)…….
체력 : 338
마력 : 310
근력 : 447
민첩 : 365
보고도 믿을 수 없는 능력치였다.
298이라니.
S급 각성자들의 평균 레벨이 260으로 알려져 있다.
성요한을 제외한, 제일 높은 S급 각성자를 따져도 265를 넘지 않고.
레벨 하나하나가 승부를 결정짓는 S급 구간에서, 지금의 나는 생태계 교란종과 다를바 없다.
절로 헛웃음이 나왔다.
“하.”
또 한 가지 궁금한 점이 있었다. 과연 SS급이 있느냐는 것.
각성자들의 구간은 50레벨마다 달라진다. A급은 200레벨, S급은 250레벨처럼. 과연 300레벨에 도달하게 되면 SS급에 달하는 힘을 얻게 될까?
지구상에서 정답을 알고 있는 유일한 사람은 나와 원수 사이니, 결국 내가 도달해볼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거기엔 엄청난 고통이 수반될 테고.”
단 2레벨 차이일 뿐이지만 S급에 도달했을 때도 그랬다.
249레벨에서 한참 동안 멈춰있던 경험치는 나를 벼랑 끝까지 내몰았었다.
하물며 300레벨은?
단단히 각오해야 할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쓸모없는 스킬들부터 과감하게쳐내야 한다.”
시스템에 대해 깊게 이해하고 있다고 생각이 드는, 지금에서야 알게 된 것이 있다.
많은 스킬과 특성은 오히려 독이 된다는 것.
예를 들어 검을 휘두르면 검술 특성의 숙련도만 올라가는 게 아니다. 검과 관련된 많은 스킬들, 오러 블레이드부터 집중, 도약, 전사라 이름 붙은 특성까지.
검 한 번 휘두르는데도 저렇게 많은 스킬과 특성이 영향을 받는 것이다.
다른 말로 하자면 고급 스킬과 특성에 집중돼야 할 숙련도가 다른 곳에 분산되고 있다는 뜻이다.
집중이나 도약같은, S급이라 해도 급낮은 것들은 과감하게 쳐내야 한다.
많아 봤자 다섯 개.
그 외의 것들은 삭제시킨다.
그리고 이것은 내 추측일 뿐이지만, 삭제시킨 스킬과 특성을 경험치로 변환시킬 수 있지 않을까?
의문일 뿐이지만 그럴 것이라 확신한다.
두 번째로는 시스템이 보여준 미래에 대해서였다.
“그 전에 일상부터.”
지금껏 일상의 많은 것들을 잃어버렸다. 다른 것보다, 지금의 내겐 그런 것들이 필요했다.
***
머리를 잘랐다. 미용사가 기겁을 하더라.
“총각. 어디 산에서 살다 왔어?”
“사막에서요.”
“사막이면 외국인가?”
“그런 셈이죠.”
“이잉. 고생했네. 고생했어.”
“…….”
원래라면 무시했을 말인데, 애써 대답했다. 잃어버린 사회성을 찾으려고.
그러면서 미용사의 반응을 살피려 거을을 들여다봤다. 다행히도, 내 발음이 어색하진 않은 모양이었다.
다음으로 옷도 말끔하게 빼입었다. 거울을 보며 몇 번이나 표정 연습을 한 후에.
일성 본사로 갔다.
***
회사라는 말이 너무 낯설었다.
손에 들고 있는 사원증도 그랬고, 거대하게 솟아오른 빌딩은 더 그랬다.
정말 산에서 자연인처럼 살다 온 기분이다.
고개를 털고 사원증을 찍었다. 언제나 그랬듯 1층 로비는 사람들로 북적거리고 있었다.
“백인호가? 진짜야?”
“쉿! 이거 아직 엠바고라니까.”
“그럼 진짜 충격인데. 아니 누가? 설마 우리가?”
“모르지, 그건. 듣기로 음지 쪽 새끼들이 그랬다고는 하는데.”
“백인호가 음지랑 원한 살 일이 있었나?”
“아니면, 이태진 팀장이?”
“에이. 그건 너무 갔다.”
“둘이 사이 안 좋았던 거 아니었어?”
“그래도 그건…….”
현실 시간으로 어제. 내가 백인호를 죽였다.
그전에는 백인호가 협회로 이적했으며, 더 전에는 내가 A급 던전에 갔었다.
잊혔던 기억들이 서서히 떠올랐다.
로비를 지나쳐갔다. 사람들의 이목이 내게로 쏠렸다.
“방금 이 팀장님 아니야?”
“인상이 너무 바뀌어서 얼굴도 못 알아보겠네.”
“진짜. 뭔가 분위기가 차가워진 것 같은데.”
“안 좋은 일 있나? 백인호 그거. 진짜 아니야?”
“야. 말조심해. 들으면 너 모가지 날아간다.”
나로서는 티끌만큼도 신경 쓰이지 않는 말들이었다. 그보다는 내가 온 목적이 중요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14층을 눌렀다. 늘 그랬듯 녀석들이 연무장에서 훈련하고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역시나.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자마자 바로 앞에 사람들이 보였다.
한석훈부터, 전용철, 김세린, 박하영, 이지은, 김태평, 그리고 임한나까지.
그런데 조금 이상하다. 평소처럼 훈련하고 있어야 할 녀석들이 한곳에 모여 수근덕대고 있었다.
특히 나를 보자마자 찐득한 시선으로 쳐다보는 것까지.
“왔네요. 호랑이도 제 말하면 온다더니.”
김세린의 말이었다. 어디 잘 걸렸다는 표정도 함께였다.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로, 안도와 한숨이 뒤섞인 채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표정은 한 놈 죽인 거 맞는데?”
한석훈이 목을 좌우로 꺾으며 내게 다가온다.
뭐지?
“니가 백인호 죽였냐?”
“예?”
“예라고?”
“당황해서 물은 겁니다.”
나도 모르게 옛날 말투가 튀어나왔다. 표정을 관리하고 자시고 할 게 없었다.
“그런데 내가 들은 말은 뭐야.”
“뭔 말을 들었는데요.”
“니가 어젯밤에 백인호를 죽였다던데. 음지 애들이랑 같이.”
“이제 그런 헛소문도 믿으시는 겁니까?”
“예 아니오로만 답해.”
“아닙니다.”
얼떨결에 아니라고 답했다. 왠지 지금 예라고 했다가는 괜히 일이 커질 것 같았다.
다행히 내 연기가 통한 모양이었다. 사람들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팀장님 때문에 저희까지 피해받는 줄 알았잖아요.”
김세린이 농담조로 내 팔뚝을 철썩 치면서 말했다.
“쟤들은 무슨 말을 저렇게 한 대요?”
“질투 나서 저러는 거야. 우리 팀이 잘 나가니까.”
“하긴. 질투할 수밖에 없지. 나처럼 귀여운 애가 있는데.”
애써 분위기를 옅게 만들려 해보지만, 그러기엔 내 존재감이 너무 진하다.
어제 실컷 연습한 대로, 웃어봤다.
씨익, 하고.
“어우. 오빠. 아니, 팀장님. 표정이 왜 그래요?”
김세린이 정색한다. 박하영도 떨떠름한 얼굴로 손사레를 쳤다.
“스읍. 공포영화인 줄.”
“…조금 무서웠어요.”
가만히 있던 이지은과 옆에서 날 지켜보던 전용철까지 떨떠름한 얼굴이 됐다. 제일 끝에 있던 김태평도 미세하게 눈썹을 꿈틀거렸다.
“A급 던전 공략 실패했다며? 그래서 그런가. 표정이 아주 볼 만해. 이걸 사진으로 남겨야 하나.”
반면 한석훈은 낄낄대며 남은 한 손으로 휴대폰을 꺼내 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임한나는.
“난 귀여운데?”
잠시간 정적이 일었다. 그러더니 김세린과 박하영이 잘 걸렸다는 듯 정색하며 말한다.
“언니. 라식 수술이라도 받아야 하는 거 아니에요?”
“저게 귀여운 거면 세상 어떻게 살려고 그래요. 정신 좀 차려요.”
오랜만에 느껴보는 기분이었다.
나쁘지 않았다.
아니, 이보다 좋을 수 없었다. 비단 사막에서의 일 뿐만 아니라 이제껏 쉼 없이 달려온 피로가 풀리는 기분까지 들 정도다.
특히 임한나는.
멀뚱히 나를 바라보는 임한나에게 말을 하려던 차였다.
불현듯 나타난 김주현이 쭈뼛대며 걸어왔다.
“팀장님. JBC에서 손님이 찾아왔다는데 돌려보낼까요?”
***
“환장하겠네.”
JBC 예능국, 황 피디가 거칠게 머리를 털었다. 벽면에는 ‘더 게임’이라는 예능 포스터가 걸려 있었다.
반짝반짝 빛나는 그것은 황 피디가 작심하고 연출을 책임진
옆에 있는 조연출은 연신 눈치만 살펴댔다.
“야. 이거 우리 준비 기간만 얼마냐.”
“삼 개월입니다.”
“부장님도 이거 팍팍 밀어주겠다고 했지?”
“예.”
“그런데 촬영 첫날부터 이래?”
“김수정 쪽은 아직도 연락 안 돼?”
“예. 매니저한테 얘기는 했는데, 어제 술을 마셨다고…….”
“술은 무슨 술! 각성자면 숙취도 없을 거 아니야!”
“저번에 인터뷰 보니까 던전 들어갈 때 아니면 일반인처럼 살겠다고 하더라고요.”
“미친 새끼 아니야?”
조연출이 난색을 표하며 말했다.
“어떻게 할까요?”
“그 새끼 빼고 가야지 어쩌겠어. 김수정은 하차라고 전해.”
“진짜 전해요?”
“넌 그 눈치로 어떻게 조연출 땄냐.”
“…제가 적당히 잘 말해볼게요. 다음 촬영 때는 참석하라고.”
황 피디가 다시 한번 어깨를 떨궜다.
“야. 이거 첫 촬영부터 이러면 어쩌자는 거냐.”
“보니까 다큐 팀은 축제 분위기더라고요. 이태진 다큐로 대박나서, 팀 전체 세부 워크쉽 간다고…….”
“야 인마! 너 아까부터 내 염장 질러?”
“저희도 열심히 해서 가보자는 뜻이었죠.”
그때였다.
문을 박살 내듯 벌컥 열고 들어온 사람이 있었다. 연출팀 막내 작가 김정연이었다.
“피디님!”
“그래 가지고 문이 부숴지겠어?”
“너무 급한 일이라서요!”
헥헥대는 숨소리가 거칠었다. 두 눈은 지진이 난 듯 들썩거리고 있다.
“특종! 특종이에요!”
김정연의 말에도 황 피디와 조연출은 심드렁한 얼굴로 가만히 지켜봤다.
“내가 방송물 20년 먹었는데, 이렇게 오버 떤 경우, 진짜 특종인 적이 없었지.”
“정연아. 우리 지금 초상날이거든? 아직 못 들었어?”
“김수정 안 오는 거요?”
김정연이 당연히 알고 있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제가 김수정보다 더 괜찮은 사람으로 구해 왔다니까요?”
“뭔 말인가 했네. 기대한 내가 등신이지.”
“지금 예고까지 다 나간 마당에 새 출연진을 뽑자고? 알만한 애가 왜 그래.”
김정연이 답답한 듯 가슴을 퍽퍽 쳤다.
“이럴 게 아니라 밖으로 나가죠. 저녁 안 드셨죠?”
“지금 우리가 밥 먹을 때냐?”
“피디님. 일단 내일 세트장부터 취소할게요.”
“그래. 본부장님한테는 내가 말할 테니까 첫 주는 예고 느낌으로다가…….”
“아! 거참! 바로 말해주면 재미없는데.”
김정연이 혀를 차며 말했다.
“이태진이요.”
“이태진이 뭐. 너도 다큐팀 소리 할 거냐?”
“정연아. 아까 내가 세부 간다고 한번 써먹었어. 괜히 황 피디님 괴롭히지 마.”
“무슨 소리예요? 이태진 섭외했다고요. 제가.”
황 피디와 조연출이 잠시간 멍한 얼굴이 됐다.
그러더니 조연출이 고개를 갸웃했다.
“누구를 섭외해?”
“내가 지금 뭘 들었냐?”
한껏 기세등등해진 김정연이 황 피디와 조연출을 턱짓하며 말했다.
“그런 뻔한 리액션 말고, 실질적인 보상부터 주시죠. 제 입이 금이라.”
황 피디, 조연출은 아직까지도 멍한 상태였다. 멍한 얼굴 그대로 상석에 앉은 김정연에게 잘 구운 소고기를 갖다 바치며 물었다.
“그러니까 네가 이태진을 섭외했다고?”
“스페셜 게스트로 단 1회요.”
“1회고 자시고. 진짜 나온다고?”
“다섯 번째 물어보는 거 아시죠?”
“믿어져야 말이지.”
“계약서를 꺼내야 믿으시겠네.”
“계약서도 썼어?”
황 피디가 화들짝 놀라며 물었다. 아까보다 더 기세등등해진 김정연은 가방에서 주섬주섬 서류를 꺼내기 시작했다.
“그런데 출연료가 문제예요. 선조치 후보고 해서 죄송한데, S급 연예인 수준으로 맞춰준다고 했거든요.”
“야! 이태진인데 출연료가 중요해?”
“와. 진짜잖아.”
조연출이 신줏단지 모시듯 벌벌 떨며 계약서를 바라봤다.
“술! 술 시켜! 정연아. 고기 더 먹을래? 아니, 이럴 게 아니라 참치집으로 이동하자.”
“그보다 먼저. 어떻게 된 거야? 이태진 섭외를 어떻게 한 거라고?”
방송이라면 질색하던 이태진이었다.
잘 나가는 헌터들에게 써먹는 광고 촬영으로 목줄 쥐는 방법도 쓸 수 없었다. 이태진에게는 돈도 별로 필요 없어 보여서.
“대체 뭐로 구워삶았길래 이태진이 방송에, 그것도 예능을 출연해?”
“그게 말이죠.”
이제껏 당당하던 김정연이 처음으로 고개를 갸웃했다.
그녀로서도 의문이 들었다.
일성에 찾아갔고, 그중 이태진을 제일 먼저 보러 간 건 맞다. 단연 섭외 1순위가 이태진이니까.
허나 기대는 티끌만큼도 하지 않았던 게 사실이다. 심지어 미팅이 성사될 것이라고 생각지도 않았다.
이태진의 비서도 그렇게 말했으니까.
김정연이 그때를 회상하며 말했다.
“웃는 방법이 좀 필요하다고 말하던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