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9화 복귀.
공간에 몸을 맡겼다.
이쪽에서 저쪽으로. 차원의 틈새를 지나가는 기분이었다. 어지럽게 지나가는 형형색색의 물감들이 보였다. 이 경지에 도달하고 나서야 볼 수 있는 것들이었다.
이 기묘한 광경에 홀린 것도 잠시. 나는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준비했다.
상황의 마지막부터 기억해 냈다.
성요한의 사브르가 내 심장을 찌르고 있었다. 옆으로는 화이가 있었으며 일 장로가 내 어깨를 붙잡았었다.
나머지 잡다한 것들도 서서히 떠오르는 중이었지만, 중요한 하나를 제외한 모든 것들을 없앴다.
이윽고 기억 속에서는 성요한과 나만이 남아 있었다.
이전에도 수백 번이 넘도록 떠올렸던 상황이었다.
성요한이 어떤 식으로 검을 내질렀는지, 근섬유 한 올까지도 생생하다.
거기서 나오는 최선의 대책까지도 이미 수백 번이 넘도록 검토를 마친 것이었다.
그렇게 모든 준비를 끝냈을 때.
쏴악!
틈새가 벌어지며 내 몸이 튕겨 나가는 기분이 들었다.
거실에 모여 있는 사람들이 보였다.
온 신경을 집중했다.
귀가 멍멍해지며, 시간이 느려졌다.
A급 이상만이 들어올 수 있는 찰나의 영역이었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모자라다.
S급만이 넘어설 수 있는 찰나의 찰나의 찰나.
시간을 수백 번 쪼개고 쪼갠, 극한의 세계 속에서였다.
눈을 감고도 성요한이 어디 있는지 그려낼 수 있다.
역시나.
내가 상상한 위치 그대로 성요한이 서 있었다.
아무런 감정조차 없이 나를 바라보고 있는 놈이었다.
나는 상상 속에서 그랬듯.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검을 휘둘렀다. 좌에서 우로 휘둘러지는 검이, 느려도 너무 느렸다.
이래서는 안된다!
[아드레날린 부스트를 시전합니다!]
일순 검에 전해지는 힘이 대폭 늘어났다.
검이 지나가는 자리마다 공간이 갈라지고 있었다.
그제야 힘의 충격이 제대로 전해지지 않으면, 이 일대가 위험하리라는 것을 떠올렸다.
검을 타고 흐르는 오러가 어떤 것에 부딪히는 순간. 모든 것을 지워버릴 것이다.
오로지 놈을 죽여버릴 생각만 했지 놈과의 전투가 세상에 어떤 결과를 초래할지는, 추호도 상상하지 못했다.
그럼에도 검이 나아가는 방향에 어떠한 제동도 걸지 않았다.
지금 멈춘다 한들 이 세상에 넘어온 이상 놈과의 충돌을 피할 수는 없다.
지금 이 선택이 어떤 결과를 가져온다 해도 수긍하리라, 그렇게 생각했다.
성요한이 나를 발견한 것도 그때였다. 놈으로서는 심장이 찔린 놈이 한순간 멀쩡히 나타나, 아니, 강해진 모습으로 등장한 것처럼 보일 것이다.
성요한의 가라앉은 동공 사이로 파문이 일었다.
그토록이나 내가 원하던 반응이었다.
-사람이긴 사람이구나!
놈의 머릿속에 직접 목소리를 주입시켰다. 잠시라도 놈의 주의를 끌 생각이었는데, 성요한은 거기에 아랑곳하지 않았다.
앞으로 기운 놈의 몸이 빠르게 돌아왔다. 가공할만한 반응속도였다.
놈이 잠시 멈칫했다. 그것이 마치 고민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무엇을?
답은 다음 순간에 알 수 있었다.
성요한이 순식간에 내 검을 받아쳤다.
단순히 받아친 것에 놀란 게 아니다. S급 두 명의 힘이 충돌했다.
그런데 어떻게 자그마한 충격파도 터지지 않은 거지?
정확히 마력이 흐르는 타점을 공략하지 않고서야 그런 것은 불가능하다.
검에 쏟았던 마력이 단전 안으로 다시 돌아왔다. 즉, 성요한이 정말로 마력이 흐르는 타점에 검을 꽂은 것이다.
상황이 급박하지만 않았다면 깨달음의 파도에 몸을 맡겼을 것이다.
이런 수법도 있었구나, 하고.
어찌 됐든 내 절호의 기회가 넘어갔으니, 이제는 성요한의 차례가 맞았다.
회수된 마력과 검을 내 앞에 두고 방어 자세를 취했다.
그런데 이상하다. 성요한이 도통 움직일 생각이 없어 보였다.
대치가 길어지고 있었다.
내가 먼저 들어가야 하나?
그러던 때, 성요한이 검을 휘둘렀다. 그러나 거기에서는 한 줌의 마력도 느껴지지 않았다.
어째서인지는 몰라도, 놈도 세상이 파멸되는 것을 원하지 않는 듯했다.
순간 나라도 마력을 끌어올려야 하나, 고민했다.
안 된다.
모르면 몰랐지 안 이상, 더군다나 상대부터가 마력을 뺀 상태이지 않은가.
나 또한 꿈틀대는 단전을 잠잠히 한 뒤, 성요한의 뜻에 맞춰줬다.
쾅! 하는 소리는 없었다. 우리의 움직임은 음속을 아득히 초월한 상태였다.
때문에 우리들의 충돌은 그 자체로 힘의 덩어리라 할 수 있었지만, 서울의 파멸보다야 이편이 훨씬 나았다.
또한, 비록 마력 없이 싸우는 전투라 한들 이것을 가짜라 할 수는 없었다.
여기서 승리한 사람이, 진짜 승부에서도 이길 것이기에.
참으로 오랜만이었다.
이런 승부는.
***
성요한의 목숨을 끊어놓을 수 있는 검이 날아가다가, 똑같은 자세, 똑같은 힘으로 날아오는 성요한의 검에 주춤하며 물러났다.
물러나야만 했다.
방어를 도외시한 채 서로에게 그 검을 꽂아 넣었다가는 그 순간이 생의 마지막임을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몇 수나 교환했지?
이래서는 끝나지 않는다. 호흡이 거칠다.
반면, 성요한은 이런 식의 전투가 익숙해 보였다.
잠시라도 쉴 틈이 없었다. 성요한의 무릎 밑을 공략하려는 시도 뒤로, 어김없이 성요한의 주먹이 심장을 치려 들어온다.
-이태진.
성요한이 검을 휘두르며, 내게 의념을 보내왔다. 당연히 나는 그 말을 무시하며 성요한의 갈비뼈 아래 비장을 노리며 주먹을 뻗었다.
빠르게 다섯 번!
투두두두둑!
소리가 났다면 그런 허무한 느낌이었을 것이다. 성요한이 주먹을 막힘없이 처리해 내며 반대로 반격을 시도했다.
-결국 놈의 꾐에 넘어간 것인가.
놈과 나는 동수일까?
아니면 내가 조금 더 모자랄까?
그런 의심이 들었다. 분명 시스템이 내려준 모든 퀘스트를 완수했는데, 어째서 나는 성요한을 이길 수 없는 걸까.
-너는 그대로 죽는 편이 차라리 나았을 것이다.
또다시 의념이 전해졌다.
-네가 믿는 시스템은 위대하지도, 전지전능하지도 않다. 오히려 그 반대지.
이셀라의 마스터가 한 말과 일맥상통한 말처럼 들렸다. 압도적인 힘을 얻었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내게는 미지의 영역이었다.
-그게 무슨 소리지?
꾸준히 반격을 시도하면서도, 결국 나는 참지 못하고 놈에게 의념을 보냈다.
-네게 끝없는 힘을 준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느냐.
-너야말로 내가 바보라고 생각하나? 서로의 목적이 맞다면 손을 잡지 못할 이유가 없다.
-나도 너처럼 생각했던 때가 있었지. 부질없는 짓인 줄도 모르고. 결국 네 인생은 시스템에 의해 휘둘려질 것이며, 네 주변인들은 남김없이 죽을 것이다.
-당사자가 할 소리는 아니지.
-……?
성요한이 고개를 갸웃했다. 그것도 잠시, 성요한이 뭔가를 깨달은 듯 고개를 저었다.
-아무래도 단단히 속고 있는 모양이군. 무슨 미래를 보여줬는지는 모르겠다만. 그것은 거짓이다.
다시 한번 검과 검이 부딪혔다. 나도 모르게 마력을 넣은 모양이었다. 성요한이 똑같이 그것을 받아치면서, 뒤로 몸을 물렸다.
성요한이 처음의 얼굴로 돌아와 있었다. 무정하고, 아무 감정 없는 얼굴로.
-설득하는 것도 지겹군. 너 같은 놈을 내가 몇 번이나 죽였을 것 같으냐.
성요한이 자세를 잡았다. 이제까지와는 차원이 다른 중압감이 들었다.
곧이어 불어닥칠 충격에 대비했다.
그러나 성요한은 조였던 자세를 풀었다. 성요한은 아무것도 없는 허공을 바라보고 있었다.
곧, 성요한이 눈썹을 꿈틀거리다가 얼굴을 일그러트릴 수 있는 최대한으로 구겼다. 그러던 성요한이 몸을 돌렸다.
본능적으로 놈에게로 몸을 뻗었다. 지금의 기회를 놓칠 수 없었다.
하지만 내가 한 발 늦었다는 것은 달려가는 나부터가 알 수 있었다.
번쩍이는 빛과 함께 성요한의 신형이 사라졌다. 공중에 흩어지는 마력을 역추적하려 했지만 소용없는 일이었다.
지금 내가 느끼고 있는 좌표지점이 맞다면, 놈은 우주 한 공간으로 날아간 것이니까.
실제로 놈이 우주 너머로 도망갔다고 생각되지는 않는다. 추적을 방지하기 위한 스킬 중 하나겠지.
끝끝내 놈을 추적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한 끝에.
나 또한 긴장을 풀었다.
멈춰있던 시간이 흘러가기 시작한다.
콰과과과과!
뒤늦게 터져대는 충격파 때문에, 주변에 있던 사람들이 이리저리 쓰러지기 시작했다.
얼굴을 보고 나서야 기억나는 인물들이었다.
화이, 음지 3인방, 그리고 협회 감찰과장 손영혁. 굴러다니는 죽은 백인호까지.
죽은 놈이야 그렇다 치고.
산 사람들 눈빛이 심상치 않았다.
특히 화이와 손영혁의 얼굴은 괴이하다고 표현해야 했다.
“이봐, 친구. 머리를 기르는 마법도 있었던가? 그 옷은 또 뭐야? 그 꼴로 서울역 가면, 적선 걱정은 없겠는걸.”
화이가 애써 농담조로 말을 건넸다. 그러면서도 끊임없는 경계의 몸짓으로, 슬금슬금 뒤로 물러나고 있었다.
머리는 사막에 있는 동안 한 번도 자르지 않았으며 옷은 부족민들이 입는 로브를 가져왔다.
손영혁 쪽은 더했다.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지만, 분명 그의 동공 안으로 보이는 감정은 두려움이었다.
그나마 화이와 손영혁만이, 내 어떠한 변화를 눈치챘을 뿐, 나머지 음지 3인방과 협회의 직원들은 이 얼떨떨한 상황에 눈만 꿈벅대고 있었다.
나는 그것들을 지나쳐갔다.
“이태진.”
뒤쪽에서 손영혁이 한 말이었다. 머뭇거리는 손영혁이 다시금 입을 떼려던 순간.
내 몸은 이미 그곳을 벗어나 있었다.
그에게 지금까지의 일을 설명해줄 이유도, 여유도 없다.
임한나라면 모를까.
***
곧장 집으로 돌아왔다. 집으로 오는 길을 기억해낸 건 나도 불가사의처럼 느껴졌다.
현대 세상의 모든 것들이 낯설었다. 손에 잡히는 스마트폰부터가 그랬다. 이래서는 곤란하다.
거울 속을 들여다봤다.
깜짝 놀랐다. 내가 맞나 싶어서.
이런 얼굴이라면 성요한과 내가 다를 게 무엇인가.
억지로 웃어 봤다. 감정을 쥐어 짜낸 소시오패스 한 놈이 보인다.
허나 당장에 내 눈빛을 원래대로 바꿀 수도, 몬스터의 피로 찌든 몸에서 냄새를 지울 수도 없는 노릇이다.
체감 시간이 아닌, 현실에서의 시간이 필요하다.
웃고 떠들고, 그런 일상들.
웃는 것을 포기한 나는 자리에 앉아 금번의 전투를 복기했다.
“굳이 승패를 나눈다면.”
패배 쪽에 가깝다. 그러나 패배한 것과는 확실히 다르다. 분명 성요한이 본격적으로 마력을 쓰고, S급 스킬끼리 격돌했다면 나는 이 자리에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나 또한 놈에게 치명적인 일격을 먹였을 것이 분명하다.
놈이 전투 도중 자리를 피한 것도 그러한 이유 때문이겠지.
사실, 이 정도만 해도 기적이었다. 일성의 보고서에 적힌 성요한의 레벨은 거짓이다.
놈은 분명 300레벨이 넘었다.
한차례 고비를 넘긴 덕분일까.
힘이 탁 풀어졌다.
더불어 놈이 한 말이 기억났다. 시스템이 어쩌고저쩌고한, 내가 수없이 고민했던 부분들.
그래서 신경 쓰지 않았다. 지금까지 고민은 수도 없이 했다.
시스템을 믿기로 했으면, 끝까지 믿어야 한다. 놈과 시스템이 어떤 관계인지는 궁금하지 않다.
시스템을 믿고, 성요한을 죽인다.
처음에는 패배했으며, 지금은 동수에 가까운 실력을 뽐냈다.
“다음에 만나면 반드시 죽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