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8화 아락투스 (2)
잘못 들은 게 아니었다. 머릿속을 파고드는 목소리가 있었다.
마법의 한 종류였다. 그것이 어떤 원리로 이루어진지 깨닫기까지는 오래 걸리지도 않았다.
또한, 마법을 쓴 당사자를 추적하기 시작했다. 음성화된 마력을 분해한 뒤 마력이 어디서 흘러들어왔는지까지.
찰나간에 이루어진 일이었다.
마법의 발원지를 쳐다봤다. 여기서 족히 수 킬로미터는 떨어진 곳이었다.
“이봐. 날 두고 어딜 보는 거야?”
갈까마귀 부족의 전사가 나를 턱짓하며 말했다.
“이건 좀 기분 나쁜데.”
“미안하지만 다음에 상대해주겠다.”
“뭐?”
전사가 눈썹을 꿈틀거렸다.
잔뜩 자존심이 상한게 분명했다. 전사가 다짜고짜 검을 세우며 날아왔다.
손을 저었다. 한순간 일어난 기류에 의해 전사가 멀리 날아갔다.
그러면서도 전사의 몸에는 생채기 하나 나지 않았다.
본래 죽이는 것보다 제압하는 것이 어렵고, 제압의 종류 중에서도 다치지 않게 제압하는 것은 고수의 영역이라 할 수 있었다.
또한 전사와 내 수준이 얼마나 차이 나는지 보여주는 일이었다.
전사도 그것을 알기에 저런 식으로 나를 쳐다보는 거겠지.
경악스러운 눈빛들을 뒤로하고, 발을 굴렀다.
흙으로 만든 건물들을 빠르게 지나쳤다. 이제는 익숙한 붉은 사막이 나를 반겼다. 그중 한 점을 특정해 날아갔다.
콰앙!
땅에 내려앉자 모래가 비명을 지르며 이리저리 튀어댔다.
이윽고 먼지가 가라앉자 사방이 훤하게 드러났다. 그러나 내가 찾던 것은 보이지 않았다.
분명 여기가 맞는데.
하고 고개를 갸웃거릴 때였다.
“대단하군.”
머릿속에서 울렸던 그것과 똑같은 음성이었다. 고개를 돌렸다. 노인 한 명이 보였다.
수염을 길게 기르고, 손에는 나무로 만든 스태프를 쥔 노인이 뚫어져라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내가 놀란 이유는, 내가 그 노인을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이셀라의 마스터.”
“이것 참. 기억해줘서 영광이라 해야 하는가?”
오래전 내가 처음 이 사막에 떨어졌을 때 나를 구해준 노인이었다. 그가 어수룩한 미소와 함께 머리를 긁적였다.
“어느 날 사라졌다고 들었는데.”
“우리가 만난 건 비밀로 해주시게. 이셀라가 나를 찾겠다고 방황하는 건 보기 힘들거든.”
“저를 찾아온 이유가 뭡니까?”
“경고를 전하러 왔지.”
“경고?”
“원래 세상으로 돌아갔을 때 말일세.”
“……!”
“이런. 비밀인 줄은 몰랐네.”
마스터가 다시 한번 능청스럽게 말했다. 나는 그사이 마력을 끌어올렸다. 언제든 전투를 준비할 수 있게끔.
“진정하게. 자네랑 싸우러 온 게 아니니까. 오히려 자네에게 도움될 조언을 하려는 거야.”
“말씀하십시오.”
나는 신중한 눈길로 그를 다시 한번 훑었다.
“자네라면 잘 알겠지만. 루께서는 워낙 변덕이 심한 분일세.”
“루?”
“시스템 말일세.”
다시 한번 놀랐지만, 나는 애써 만든 굳은 표정으로 그를 턱짓했다.
“너무 그분을 믿지 않는 게 좋을 것일세.”
“그만두라는 말은 무슨 뜻입니까?”
“혹시나 그분의 종 노릇을 할거라면 멈추라고 말한 거지.”
“당신은 누구십니까.”
“자네 스승이라고 해두지.”
“제게 이런 말을 해주는 이유는?”
“세상의 평화를 위해서? 너무 편견을 갖지 말아 달라는 거지.”
“두루뭉술한 말을 할 생각이라면 더 들을 필요도 없겠군요.”
“나도 여기까지. 보는 눈이 많아서, 더 말했다가는 우리 둘 다 모가지가 날아갈 거야.”
“……?”
그가 미소지었다. 다음 순간 바람이 한차례 불었다.
눈을 한번 깜박이고 나자, 이셀라의 마스터가 종적을 감췄다.
***
요 며칠 노파 장로는 귀가 찢어질 듯 웃고 있었다.
속속들이 들어오는 사막 부족 때문이었다.
“이제 대전사를 부정하는 부족은 아무도 없습니다.”
노파 장로는 언제부턴가, 단둘이 있을 때도 존댓말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옆에는, 얼마 전 벌거벗은 채 마을 한 바퀴를 돈 장로가 헤벌쭉해져 있었다.
“열 부족 중 여덟 개가 저희 밑으로 귀속됐습니다. 이 부분은 각 부족의 장로들과도 합의가 된 부분이죠.”
“반발이 심했을 텐데.”
“각 부족 최고 전사들이 먼저 나서서 그들을 설득했다고 합니다. 각 부족원들은 목숨을 걸고 저희 부족으로 오고 있고요.”
“멀리서나마 대전사를 보기 위해서라 합니다. 일생일대의 영광이라 생각한다더군요.”
마지막 말은 벌거벗었던 장로가 한 말이었다. 한창 침을 튀겨가며 떠벌려대던 그는 나와 눈이 마주치자 헛기침을 하며 고개를 돌렸다.
“어쨌든 모든 일이 순조롭게 착착 진행되고 있습니다.”
“아무래도 부족이 하나로 통합되면, 같이 살 곳이 필요할 텐데 그건 어떻게 하죠?”
“전사고 아녀자고 할 것 없이 모두 집 짓는 일에 동원해야지.”
“세상에. 열 부족이 하나가 되다니. 이런 일이 제 대에 일어날 줄은 상상도 못 했어요.”
이셀라의 말이었다. 그녀는 감격을 감추지 못하고, 눈물이 글썽글썽한 채로 나를 바라봤다.
다른 장로들도 마찬가지였다. 모두들 한가득 기대를 담은 채 나를 우러러본다.
지금 이것들이 무슨 말을 하는지는 알고 있다.
따지고 보면 귀여운 수작이었다. 부족이 하나로 된 이후에도 떠나지 말고 남아달라는, 귀여운 수작.
-이셀라. 그분이 어떤 걸 좋아하신다고?
-저도 잘 모르겠다니까요. 처음 봤을 때, 말린 육포를 잘 드시긴 했어요.
-그런 거 말고!
-뭘 준비한다 해도 저 분의 마음에 차기나 할까요?
-할 수 있는 건 다 해봐야지. 가랑이 사이를 기어서라도.
-혹시 모르죠. 근래 들어 부족 전사들과 많은 대화를 나눈다고 들었어요. 생각보다 잔정이 많은 분인 것 같아요.
-잔정 많은 분이 마을을 발가벗고 뛰어다니라고 해?
내가 천막 안으로 들어오기 전, 그들이 한 대화였다. 내가 여기 남을 것이라는, 아주 약간의 기대를 품기는 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처음의 생각과 달라진 게 없었다. 나에게는 반드시 돌아가야 할 이유가 있다.
대신.
“제국의 병력 편제부터 알려주겠다.”
그 말을 들은 장로와 이셀라는 잠시 고개를 갸웃거렸다. 가장 눈치가 빠른 건 역시 노파 장로였다.
자글자글한 주름 위로 그녀의 눈이 함지막하게 떠졌다.
“먼저 사막에 주둔하고 있는 제 5기사단부터 8기사단까지 말해주지. 5기사단장의 수준은 야툼과 비슷하거나 조금 더 위, 부단장은 라반과 동수를 이루며…….”
내 설명이 줄줄이 이어질수록 사람들의 얼굴에 놀람과 경악이 뒤섞이기 시작했다.
내 말이 사실이라는 가정하에, 이 정보들은 천금을 주고도 사지 못하는 귀한 것이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다. 기사단과 병력들이 각자 어디에 배치돼 있는지, 귀족들의 거처가 각각 어디에 있는지, 심지어 정치적으로 문제 될 수 있는 그들의 치부까지.
내 입에서 막힘없이 말들이 쏟아져 나왔다.
그럴수록 부족의 장로들과 이셀라는 꿀 먹은 벙어리처럼 가만히 듣고만 있었다.
반신반의하던 장로들도 황성에 사는 황족들의 비밀까지 흘러나오자 더는 버티지 못했다.
“이, 이게 정말입니까?”
그렇게 물었지만 정작 대답을 듣고 싶은 눈치는 아니었다. 나는 이셀라를 쳐다보며 말했다.
“적어두는 게 좋을 텐데.”
“아차!”
이셀라가 빠르게 양피지를 꺼내 내가 말한 것들을 적기 시작했다.
이후로 장장 30분간 제국이 어떤 방식으로 사막을 정복할 예정인지까지 말해주고 나자.
장내에는 정적만 흐르고 있었다.
노파를 제외한 장로들은 입을 다물지도 못한 채 이셀라가 열심히 쓰고 있는 양피지만 바라보는 중이었다.
오직 노파만이 아까와 달리 침착하게 나를 바라봤다.
그러면서도 떨리는 손을 감추려 책상 밑으로 팔을 숨긴 것은, 어찌 보면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침을 꿀꺽 삼킨 노파 장로가 내게 말했다.
“이것들을 저희한테 알려주시는 이유가 무엇 때문입니까?”
“나한테는 쓸모없는 정보니까.”
“쓸모없는 정보요? 알고 계십니까? 말씀해주신 것들 중 하나라도 세상에 튀어나오면, 제국 기사단이 소문의 발산지를 세상 끝까지 추적할 겁니다.”
노파의 언성이 살짝 높아졌다. 대전사에게 하는 말치고 꽤 건방진 말투였다. 하지만 노파도, 다른 장로도, 이셀라도 그것을 신경 쓰는 분위기가 아니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녀의 말대로 내 입에서 나온 비밀들은 황제의 친형만이 알고 있는 기밀 중의 기밀이다.
“말씀해 주십시오. 대가는 어떤 것입니까.”
“없다.”
없다는 말에 이셀라가 눈물을 글썽거렸다.
반대로 노파의 표정은 풀어지지 않았다. 오히려 아까보다 더 굳어지면 굳어졌지.
그녀가 살아온 세월만큼 노파는 세상이 어떤 곳인지 알고 있었다. 이 정도 정보에 아무 대가가 없다는 것을 믿을 만큼 노파는 순진하지 않았다.
“그런 쓸데없는 것보다. 내가 떠난 뒤에 어떤 식으로 부족을 하나로 유지할지 잘 생각해 둬야 할 거다.”
“…….”
“다시 말하지만 번복은 없다. 사막이 하나로 통합되는 순간 나는 이 세상에서 사라질 예정이다.”
“대전사께서 사라지고 나면 저희들은 다시 뿔뿔이 흩어지고 말 것입니다.”
“거기부터는 너희들의 재량이겠지. 필요하다면 나를 어떤 식으로든 이용해도 좋다.”
“…명심하겠습니다.”
그 말을 끝으로 밖으로 나왔다.
늘 그랬듯이 각 부족의 최고전사들이 눈을 희번뜩 빛내면서 내 곁으로 다가왔다.
답지 않게 우물쭈물 눈치를 보며 나와 한 번이라도 대련을 부탁하는 모습들.
그런 자들을 빠르게 지나쳤다. 오늘이 마지막이다. 빠른 걸음으로 대련장에 도착하자 이미 많은 인파들이 거기에 모여 있었다.
“도착하셨다.”
“저분이 대전사라고?”
“혹시나 외지인으로 부를 생각이라면 당장 입을 다무는 게 좋을 거다. 그 즉시 각 최고 전사들이 네 목을 자를 테니까.”
소문을 듣고 찾아온 다른 부족의 전사들, 또는 부족원들이 앞다투어 연무장 주위를 둘러쌌다.
성지를 찾아온 순례자들처럼, 그들의 눈이 조금이라도 나를 담으려 애썼다.
급기야 허리를 숙이며 절까지 하는 것들도 있었다.
나는 그런 시선들을 한 몸에 받으며 천천히 연무장 위로 올라갔다.
내 마지막 상대는 연무장 끝에 가부좌를 틀고 눈을 감고 있었다.
그가 눈을 감은 채 말했다.
“대전사시군요.”
“증명이 필요하다면 기꺼이 상대해 주겠다.”
“이미 여덟 번을 증명하셨지요. 겨우 저 따위가 불경스럽게 당신을 시험할 수는 없습니다.”
“너희 부족의 장로들도 동의했는가?”
“그렇습니다. 붉은 매 부족은 진 님을 사막의 적합한 대전사로 인정하며 당신의 뜻에 따르기로 결정했습니다.”
남자가 번쩍 눈을 뜨고 일어났다. 그는 천천히 허리를 숙이고 무릎을 꿇었다.
주위를 둘러봤다. 언제부터인지, 연무장을 둘러싼 모든 사람들이 나에게 절하기 시작했다.
나는 천천히 그것들을 눈에 담았다.
모든 사람들이 무릎 꿇고 내게 엎드린 그 순간이었다.
마침내 기다리던 것이 찾아왔다.
-사막의 모든 부족이 당신을 경배합니다!
-퀘스트를 완벽하게 수행해 냈습니다!
-시스템께서 기뻐하십니다!
-보상을 획득합니다!
보상 : 차원이동문, 모든 능력치 +30, 아락투스의 창고로 가는 열쇠.
끓어 넘치는 힘이 내부에서부터 솟아올랐다.
레벨업으로 따지면 서른 개.
비정상적인 경험치가 한순간에 쏟아진 꼴이었다.
일순 감각을 통제하지 못한 건 당연했다. 예민해진 감각이 시간을 느리게 만들었다.
어느새 손에 쥐어진 것을 바라봤다. 금색 열쇠 하나가 들려 있었다.
보상으로 받은 차원이동문을 여는 열쇠였다. 1회성일 뿐이지만 무려 차원을 건드리는 영역이다.
거기에 담긴 마력이 어느 정도인지는, 감히 상상도 할 수 없었다.
마지막으로 사막과 그 부족을 눈에 담은 후.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 열쇠를 비틀었다.
끼이익!
-좌표를 설정합니다.
-좌표 설정이 완료됩니다.
오랜 세월이 흘렀다고 생각됐다. 돌이켜 생각해 보건대, 지금의 이 과정들은 모두 성요한을 상대하기 위한 준비였다.
여전히 상상 속의 성요한은 내가 대적하기 힘들 정도로 강하기 그지 없었지만.
그를 당황시킬 한 수 정도라면.
자신 있다!
-차원이 이동됩니다!
화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