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7화 아락투스 (1)
“이제 어쩌실 생각입니까.”
부족의 장로 중 한 명이 노파에게 물었다.
“낙타 부족으로 가야지.”
“가서 어쩌시려고요?”
“대전사가 오길 기다려야지.”
“장로님!”
“내가 아직 귀는 잘 들려.”
“아무것도 모르는 부족민들이야 그렇다 칩시다. 대체 저한테까지 속이는 이유가 뭡니까?”
“내가 뭘 속였다고.”
“답답하게 이러시기입니까?”
“안 답답하게 말 좀 잘해봐.”
“외지인이 우리 일에 끼어드는 이유가 뭐냐고요. 대체 저희가 뭐 때문에 피난길에 올라야 합니까?”
“외지인이 아니라 대전사이시다.”
“그러니까 그 말 같지도 않은 대전사 놀이 좀 그만하시라고요.”
답답한 듯 장로가 가슴을 퍽퍽 쳤다.
“제국의 다섯 초인 중 하나가 놈에게 볼일이 있다 했습니다. 이게 무슨 뜻이겠습니까?”
“무슨 뜻인데.”
“놈이 제국과 깊은 악연이라는 거죠. 저희는 그것도 모르고 그놈한테.”
“내가 그런 것도 못 알아볼까.”
“예. 못 알아봐서 일이 이 지경이 된 거 아닙니까. 저희는 이래저래 이용만 당하다 버려질 것입니다.”
“그래서?”
“그래서는 무슨 그래서입니까. 지금이라도 초인분에게 싹싹 빌고 살려달라고 말해야죠. 이미 늦은 것 같지만.”
“글쎄.”
“예? 뭐가 글쎄입니까?”
노파가 웃었다.
“우리 내기할까?”
“내기요?”
“나는 외지인이 제국의 초인을 박살 낸다에 걸지.”
“이 상황에 그런 말이 나옵니까? 아니면, 설마 이셀라의 그 헛소리라도 믿으십니까? 공간 마법이니 뭐니.”
“그래서. 할 거야, 말 거야.”
“예. 합시다. 제가 이긴다면 부족의 지휘권을 제게 주십시오.”
“그러지.”
노파가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이기면 넌 벌거벗고 마을을 한 바퀴 돌아야 할 거다.”
“예? 그게 무슨.”
“나는 부족의 지휘권을 걸었거늘. 왜, 네놈의 목이라도 바랄까?”
장로가 입을 다물었다. 노파의 말이 사실이기 때문이다.
초인이라는 인외적 존재가 등장한 이상 외지인의 생사는 정해진 것이나 다름 없었다.
입을 다문 장로는 그대로 뒤로 걸어가 야툼에게 다가갔다.
“야툼.”
“예. 장로님.”
“노인네가 노망이 든 게 틀림없다. 아무래도 계획을 앞당겨야겠어.”
“계획이라 하심은.”
“이놈이 알면서 왜 물어? 부족을 재정비하자는 거다. 너와 나. 둘이서.”
“장로님.”
야툼이 떨떠름하게 답했다.
“그때와는 상황이 달라졌지 않습니까.”
“상황? 무슨 상황.”
“대전사가 나타났습니다. 그것도 저희 부족에요.”
“뭐?”
장로가 어처구니없는 표정을 지었다.
야툼이 태연스럽게 말을 이어갔다.
“장로님은 못 보셨습니까? 라반의 검술을 거울처럼 따라 하고, 보완점을 알려준 것 하며, 저희들을 지키기 위해 초인을 데리고 홀로 나선 것까지. 그런 자가 대전사가 아니라면 무엇이겠습니까.”
“너까지 머리가 미친 거냐?”
“지극히 정상입니다. 오히려 장로님이야말로 상황을 직시하셔야 할 것 같군요. 이 야툼이 보증하건대, 그자는 대전사가 맞습니다.”
그 말을 끝으로 야툼이 걸음을 옮겼다. 장로가 넋이 나간 채 그것을 지켜봤다.
“이런 미친 것들. 단체로 저주라도 걸린 거냐? 악귀에 씌인 거야? 의지할 데가 없어서 그딴 외부인한데……!”
그때였다.
콰앙!
인식할 수 없는 속도로 무언가가 떨어졌다. 그 무언가는 말할 것도 없이 제국의 초인일 것이었다.
장로가 빠르게 외쳤다.
“이럴 줄 알았다니까. 모두 전투 준비!”
이곳저곳에서 호각소리가 들렸다. 전사들이 칼을 빼 들며 폭음이 난 곳을 향해 겨누었다.
그렇게 뿌연 먼지가 흩어지고 난 후.
예상대로 제국의 초인이 나타나긴 했다. 다만, 초인의 상태가 이상했다. 외지인의 손에 들려 있는데, 축 늘어져 있다. 마치 죽은 사람처럼.
“……죽은 거요?”
장로가 저도 모르게 그렇게 말했다. 지금의 이 상황을 이해할 수 없었다.
“저, 정말 죽은 거요?”
외지인은 물음에 답하지 않았다. 대신 초인을 자신 앞으로 던졌다.
미동 없는 초인이 널브러졌다.
곧장 전사들이 앞으로 나와 초인의 상태를 살폈다.
그들 중 하나가 고개를 저었다. 정말 죽었다는 뜻이었다.
그럼에도 장로가 곧장 수긍할 수 없었던 이유는 외지인의 상태 때문이었다.
전투를 치르고 왔다기에는 자그마한 생채기도 보이지 않았다. 더불어 호흡도 평소와 다름없었다. 죽은 초인보다도, 그런 외지인의 상태야말로 불가사의했다.
이윽고 외지인과 눈이 마주쳤다. 장로는 순간 고개를 아래로 숙였다. 본능적인 반응이었다.
눈을 마주할 자신이 없었다.
기분 탓일까. 장로는 외지인이 자신을 뚫어져라 쳐다보는 느낌이 들었다.
그렇게 슬쩍 고개를 들었을 때.
외지인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재밌는 내기를 했던데.”
“…예?”
“마을은 언제 돌 거지?”
***
사막이라 해서 말린 고기만 있는 것이 아니다.
가지각색의 요리들이 쏟아져 나왔다. 다음으로 온갖 술이 차례대로 상 위로 올라왔다.
생활 마법을 극도로 발전시킨 덕분이라고 했다. 그럼에도 이들이 내게 보이는 성의는 일국의 왕을 대하는 것과 다르지 않았다.
특히나 부족의 고위직급에 속한 녀석들은 하나같이 나를 뵙기 원한다고 했다. 그러면서도 내가 불쑥 화를 낼까 눈치만 본다고, 이셀라가 말했다.
개인의 물리적인 힘이 곧 법인 세상이다.
생채기 하나 없이 초인을 쓰러트렸으니 그들에게 나는 신이나 다름 없을 것이다.
노파가 나를 대전사로 취급하기 시작한 후부터는 그런 경향이 더 짙어지기 시작했다.
이셀라를 바라보며 말했다.
“다른 부족들은?”
“아직까지 큰 반응이 없는 것으로 압니다. 큰 장로께서 한 번 더 전령을 보낸다 하셨습니다.”
큰장로란 노파를 말한다. 나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부족의 지도자들은 지금 어디 있지?”
“큰 장로의 집에서 회의를 하고 있습니다.”
“그리로 가자.”
노파에게 가는 동안.
나를 힐끔힐끔 쳐다보는 시선이 적지 않았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의구심이 가득한 눈빛이었는데, 지금은 조금 다르다.
거기에 두려움이 잔뜩 섞여 있었다.
나쁘지 않았다. 이 세상에 오래 머무를 생각이 없는 만큼, 굳이 하나하나 이미지를 정정하기보다는 공포를 이용하는 게 더 수월할 것이다.
그렇게 부족 내 가장 아담한 집으로 들어갔다. 문을 열자 다섯 노인이 시끄럽게 떠들고 있었다.
그러던 소음이 내가 문을 열고 들어가자 뚝 멈췄다.
장로들이 삐걱거리는 시선으로 나를 바라봤다.
그러던 중 가장 먼저 입을 연 것은 노파였다.
“대전사를 뵙습니다.”
노파가 물꼬를 트자. 뒤를 이어 똑같은 말이 네 번 반복됐다. 개중에는 벌거벗고 마을을 돈 장로도 있었다.
그 장로조차 수치심이 들지언정 감히 내게 적의를 드러낼 수는 없었다. 그들 개개인뿐 아니라 사막 부족 전체의 운명이 내 손에 달려 있음을 모르지 않는 것이다.
나는 나조차도 놀랄 만큼 자연스럽게 상석에 앉았다.
본래의 목적인 퀘스트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이런 취급이 훨씬 수월하다는 생각에 의해서였다.
나는 노파를 바라보며 말했다.
“지금쯤이면 다른 부족들이 답장을 보냈을 텐데.”
“예상했던 대로, 낙타 부족을 제외하면 믿지 못하고 있습니다.”
노파가 다급하게 말을 이었다.
“하지만 계획에는 차질이 없을 것입니다. 대전사께서 조금 수고해 주신다면.”
노파가 말하는 계획이란, 내가 부족 하나하나를 돌아다니며 그곳의 최고 전사들과 한바탕 붙어 인정받으라는 것이었다.
“그 건은 없던 것으로 하겠다.”
“아.”
실망 섞인 감탄사가 들렸다. 이셀라의 입에서 나온 소리였다. 슬쩍 옆을 보자 이셀라가 입을 틀어막고 있었다.
“주제넘었습니다.”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얼굴 가득 먹구름이 끼어 있었다.
왜 아닐까. 부족의 통일을 위해서는 그 방법이 최선인 것을.
하물며 원래는 나도 그러려고 했다. 카다도스 노아, 초인의 머릿속을 헤집기 전까지.
“머지않아 제국의 병사들이 이곳을 쓸어버릴 예정이다.”
“그렇겠지요.”
“아니. 너희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더 빠르고, 강한 군대가 쳐들어올 것이다.”
이 행성에서 제국의 힘은 절대적이다. 가히 현대 세상의 미국보다도 더.
미국에 항공모함이 있다면 제국에는 다섯 초인이 존재한다.
그것들 중 하나가 내 손에 무참히 죽었다.
온 세상에 눈과 귀를 달고 있는 제국이 이 사실을 모를 리 없다. 총독을 죽였을 때 제국이 짜증을 낸 것에 불과하다면.
다섯 초인 중 하나를 죽인 것에 대해서는 분노를 느낄 것이다.
제국의 분노라니.
“이제 이 사막은 지도상에서 지워지겠지.”
남 일 말하듯 주절대는 내 모습에 모두들 황당한 얼굴이 됐다. 이제껏 뭔가 묘책이 있겠지, 하며 표정을 드러내지 않던 노파조차 마찬가지였다.
“내가 말을 오해하게 했군. 방식을 바꾸지 않으면 그렇다는 거다.”
“방식이요?”
“사막을 통일하되, 내가 찾아가는 게 아닌, 다른 부족이 나를 찾아오게끔. 시간을 단축하는 것부터.”
거기에 말을 덧붙였다.
“대전사가 탄생했다는 소문 뒤에 한 가지를 더 붙여라.”
“명을 받들겠습니다.”
“제국의 초인을 죽인 사내가 있다고. 그 힘이 궁금한 부족은 최고 전사 한 명씩을 내게 보내라고 전해라.”
실망했던 얼굴들이 삽시간에 밝아졌다. 특히나 노파의 얼굴은 더없이 환해졌다.
부족들을 하나로 합치는 데 걸리는 시간이 획기적으로 줄어들 것이다.
“비단 시간뿐만이 아니겠죠. 이것으로 도전하는 입장에서, 도전을 받는 것으로 입장이 옮겨졌습니다. 그것만으로도 절반의 성공이지만 진짜는 따로 있습니다.”
노파만큼은 내가 왜 이런 방식을 고안했는지에 대해 깨달은 듯했다.
“아홉 부족 중 진 님께 도전하지 않는 부족이 있다면 그곳은 겁쟁이로 소문날 것입니다. 때문에 제국의 앞잡이 노릇을 하고 있는 부족들도 이 제안을 거부하기는 힘들 것입니다.”
제국의 앞잡이 노릇을 할지언정 전사로서의 호승심을 버리지는 않았을 것이다.
부족 내에서 내 제안을 거절해도 그곳의 최고 전사들이 가만있지 않을 것이다.
최고 전사들이 나서면 그 밑의 부족민들이 동조하는 것도 당연하다. 나는 한 발자국 움직이지도 않고 사막을 통일할 것이다.
한 가지 걸리는 점이 있다면, 이 경우 이셀라가 끼어들 여지는 전혀 없다는 점이다.
퀘스트를 다시 한번 살펴봤다.
이셀라를 도와 사막 부족을 통일하라. 애매모호한 표현이었다. 하지만 늘 그랬듯이.
시스템이 그 무엇보다 내 성장을 우선시할 것임을 믿는 수밖에.
***
콰앙!
“크윽. 패배를 인정하겠소.”
이로써 다섯 명째. 사막 곳곳에서 전사들이 나를 찾아왔다. 하나같이 초인에 가까운 자들이었으며 부족의 최고전사라는 타이틀을 가질만한 자들이었다.
심지어 S급에 도달한 자도 있었으니, 나로서도 괜찮은 훈련 시간이었다.
한가지 문제라면.
“당신이 대전사라고?”
“그런데.”
“사실 대전사인지는 관심 없어. 당신이랑 검 한 번 맞대면 깊은 깨달음을 얻는다고 해서 왔지.”
“그쪽이 갈까마귀 부족의 최고 전사인가?”
“음. 들었던 대로군. 약속대로 내가 패배한다면 우리 부족은 당신을 대전사로 받아들이고 섬기겠소. 이를 어길 시 나는 그 즉시 루의 품으로 돌아갈 것임을 이곳에서 맹세하는 바요. 그러니까 빨리!”
잔뜩 흥분한 얼굴로 갈까마귀 부족의 전사가 나를 재촉했다.
내 뒤쪽은 더 가관이었다. 이미 내게 한 번씩 패배한 전사들이 앞다투어 순번을 기다리고 있었다.
나머지 세 명 또한 오늘 안에 온다고 했다. 그것들만 처리하고 나면.
곧장 차원을 이동한다.
차례를 기다리는 전사를 바라보며 그런 생각을 할 때였다.
-멈추시게.
머릿속에서, 목소리 하나가 울려 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