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5화 통합 (4)
노파 장로는 내가 허락하기만을 기다린 듯 행동을 시작했다. 이 부족, 저 부족에 사람을 보내며 사막의 대전사가 나타났다는 소문을 퍼트림과 동시에, 마을 내부로는 입단속을 시켰다.
감히 대전사를 건드리지 말라고.
그런데 장로가 내게 말했던 호언장담과 달리, 부족민들이 나를 바라보는 시선에는 여전히 날 서 있었다. 그게 당연한 것이긴 하다.
갑자기 나타난 동방인이 그들의 메시아라고 한다. 누가 그걸 믿고 따를까. 나 같아도 안 믿는다.
“진짜 대전사라고? 저 동방인이?”
“단체로 정신이 나간 거지. 웬 미친놈 하나에 온 부족이 속고 있는 거라고.”
“속으면 어떻고 아니면 어때. 지금 중요한 건 저딴 놈이 아니라, 제국이 우리를 짓밟으러 온다는 거야.”
장로가 바보라서 이 말도 안 되는 짓을 감행한 것이 아니다. 그만큼 그들의 부족이 지금 얼마나 위험에 처했는지를 말해 주는 것이기도 했다.
어쨌든 나도 적극적으로 퀘스트를 깨기로 한 마당이다. 그에 따른 행동을 취할 필요가 있었다.
쏟아지는 시선들을 스쳐 지나갔다. 내 발이 향하는 곳은 전사들의 연무장이라는 곳이었다. 부족 전체의 수준이 어떤지 확인하기 위해서 들른 곳이다.
땀을 뻘뻘 흘리고 있는 장정들과 여인들이 보였다.
사막의 부족들에게 전사라는 의미는 남녀를 가리지 않는다. 이 척박한 환경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모두가 주어진 과업을 완수해야 하는 것이다.
“하압!”
기합을 지르는 전사의 숫자가 총 500명이었다. 조만간 전쟁이 터질 거라는 소문 때문이다. 전사들의 얼굴이 하나하나마다 결의에 차 있었다.
걔 중 땀을 뚝뚝 흘리는 라반이 선두에 있었다.
내 앞에서야 떠듬거리는 모습을 보였다지만, 세쿤더스, 라반, 이셀라는 부족 내에서도 수위를 다투는 전사들이었다.
연무장 한편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훈련에 열중하던 사람들의 시선이 내게로 확 쏠렸다.
내 힘을 간접적으로나마 지켜본 이셀라와 그녀의 동료들은 눈에 띄게 내 눈치를 살피고 있었다.
특히나 라반은 힐끔힐끔 허리춤에 찬 내 검을 쳐다보는가 하면, 침을 꿀꺽 삼켰다.
라반이 이셀라와 대화를 나누더니 내 쪽으로 다가왔다.
“실례지만, 검을 다루십니까?”
고개를 끄덕이자, 라반이 한 번 더 용기를 냈다.
“한 수 부탁드립니다.”
“그러지.”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미 육체적인 훈련이 필요 없는 내가 구태여 연무장에 찾아온 이유이기도 했다.
적당히 힘을 보여주고, 가르침을 주는 것.
이들이 강해져야 내 할 일이 조금이라도 줄어든다. 어차피 이 세상을 떠나면 다시는 올 일도 없을 터. 알고 있는 것을 베푸는 것에 아낄 필요도 없었다.
특히나 라반은 ‘벽’을 마주한 상태였다.
자그마한 깨달음을 얻지 못해 앞으로 나가지 못하는 상태라는 것.
검을 가르치는 것은, 검을 다루는 것만큼이나 내가 자신 있는 분야였다.
“감사합니다.”
라반이 고개를 깊숙이 예를 표했다. 그러나 가르침을 구한 라반조차도 반신반의하는 중이었다.
바로 앞의 남자가 얼마나 강한 건지, 그저 호기심에 가르침을 신청한 것일 뿐이다.
그것은 다른 전사들도 마찬가지였다. 대체 저놈이 누구길래, 라반씩이나 되는 전사가 가르침을 청하는 걸까. 그것도 저렇게나 저자세로.
그런 말들이 구경꾼들 사이에 퍼졌다. 흥미로운 시선이 한가득 모인 가운데, 구경꾼들이 훈련을 멈추고 내 쪽으로 시선을 집중시켰다.
“어. 다 꺼지라고 할까요?”
고개를 저었다. 사막을 통일하는 과정에서 적지 않은 피가 쏟아질 터.
말했듯, 이것들이 조금이라도 강해져야 내가 할 일이 줄어든다.
“먼저 와라.”
“사양하지 않겠습니다.”
라반이 시미터를 들고 내게 달려왔다. 가르침을 주는 것뿐이다. 라반이나 나나 마나를 한 톨도 끌어올리지 않았다.
그럼에도 그의 시미터와 내 롱소드가 맞부딪쳤을 때, 묵직한 쇳소리가 연무장을 가득 채웠다.
쿠웅!
구경꾼들의 입에 감탄이 서렸다.
“호오!”
“대전사는 모르겠다만, 확실히 검은 꽤나 다룰 줄 아는군.”
그들 중에서도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라반과 동수를 이룬 것만으로 구경꾼들은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하지만 그건 뭘 모르는 것들의 이야기일 뿐이고.
검을 조금 더 아는 자들의 반응은 사뭇 달랐다. 이셀라, 이셀라와 다퉜던 야툼, 세쿤더스 등등의 얼굴에는 감탄 같은 감정이 없었다.
되려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이제 막 첫 수를 나눈 나와 라반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거울 같군.”
“라반의 자세와 완벽하게 대칭하고 있다.”
“언제 부족의 검술을 전수한 거지?”
“저게 며칠 전수했다고 나올 수 있는 동작으로 보여?”
야툼의 딱딱한 음성에 옆에 있던 이셀라가 반박했다.
“그래서 어떻게 된 일이냐. 저 자에게 부족의 비기를 가르쳐 줬다고?”
“정확히는 부족의 검술을 제 식대로 개량한 라반만의 검술이지.”
“그러니까 어떻게!”
이제껏 야툼의 말에 조목조목 반박하던 이셀라도 그때만큼은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그녀야말로 내게 묻고 싶을 터였다. 대체 언제 라반의 검술을 배우고 익혔냐고.
언제랄 것도 없다. 검신의 축복이 있는 한, 누가됐든 검 쥐는 법만 봐도 어떤 검술을 사용하는지 눈에 훤히 들어오기 마련이다.
라반의 입장에서는 마치 거울을 본 듯한 기분일 것이다.
“흡!”
이셀라와 야쿰의 반응이 저런데 하물며 라반은 오죽할까.
라반은 차마 입 밖으로 말만 못 했을 뿐이지 나를 요상한 눈빛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쿠웅!
두 번째로 검이 부딪치는 순간 라반의 눈이 또다시 커졌다. 아니, 방금 전보다 더 놀란 기색을 띠었다.
이번에는 거울처럼 똑같은 자세를 취한 것도 아닌데도 그랬다.
동작은 달랐지만 명맥은 같았다.
즉 라반이 넘지 못하고 있는 ‘벽’을 뛰어넘는 동작을 방금의 내가 보여준 것이다.
당연히 라반으로서는 입을 떡 벌리고 나를 쳐다볼 수밖에 없었다.
그는 지금이 대련 중이라는 것도 잊은 채, 흔들리는 눈빛으로 시미터를 내렸다.
그것도 잠시, 라반의 몸이 멋대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내렸던 시미터를 다시 올려 나와 검을 맞댄다. 그때마다 쿵, 쿵, 울려대는 검명이 라반의 손을 타고 찌르르 올라가고 있었다.
중력 마법을 조금 비틀어 사용한 결과였다.
“어, 어!”
당황하던 것도 잠시, 라반은 필사적으로 집중하기 위해 노력했다. 지금의 기회를 놓칠 수 없다는 듯 혼신의 힘을 다해서.
동작 하나가 이어질 때마다 라반을 가로막고 있던 벽에 조금씩 금이 갔다.
너무 많은 것을 알려줄 필요는 없다. 아예 정답을 알려줄 필요도 없다. 오히려 그게 라반에게 독이 된다.
자그마한 힌트 정도만 알려주면, 나머지는 라반이 알아서 할 몫이었다.
검을 쓰는 검사로서도, 라반이 가진 전사로서의 자존심까지 밟고 싶지는 않았다.
슬쩍 옆을 바라보자, 사람들이 점점 더 모이는 게 보였다. 처음에야 그럴듯한 검술이라며 고개를 끄덕이던 구경꾼들도 이내 침묵을 지키며 우리를 쳐다보고 있었다.
우리가, 정확히는 내가 어떻게 라반을 가르치고 있는지 모두 눈치챈 것이다.
급기야 그들은 부러움을 한가득 담으며 라반을 쳐다보기 시작했다.
구경꾼들의 뒤로는 노파 장로가 흐뭇한 얼굴로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쿵! 쿠웅!
검을 맞댈수록 라반의 표정이 달라졌다. 놀랐다가, 눈을 깜박거렸다가, 어느 순간엔 희열에 가득찬, 갖가지 표정을 지었다.
나 또한 아쉽기는 마찬가지였지만, 이후의 일은 라반의 몫이었다.
그것을 모르는 라반이 아닌지라, 라반이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이 은혜를 어찌 갚아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감격에 부르르 떠는 라반은, 내가 불지옥에 들어가라면 들어갈 것만 같은 얼굴이 됐다.
자고로 칼 쓰는 것들에게 의미 있는 가르침이란 목숨보다 소중한 법이라고 했다.
됐다, 라고 대답하려던 그때였다.
고개를 하늘로 올렸다. 아무것도 없는 창공이었지만 분명한 기운 하나가 느껴졌다.
아직은 점처럼 작디 작은 그것이지만.
알고 있다.
강한 것이 오고 있다.
지금!
희열에 가득 찬 라반의 몸을 저 멀리 날려 보냈다. 직후였다. 밤하늘의 유성처럼 그것이 땅으로 떨어졌다.
콰앙!
강한 바람이 뻗쳐 나왔다. 내 주위에 있던 모든 것들이 날아 다녔다. 직후에 내가 펼친 마나실드가 아니었다면 구경하던 전사들 중 태반이 조금 전의 충격을 견디지 못하고 죽었을 것이다.
돌풍과 함께 땅이 울렸다. 강한 지진을 맞은 듯 연무장이 쩌저적, 갈라졌다. 그 와중에도 내가 서 있는 자리는 그러한 참상과 동떨어져 있었다.
이윽고 뿌연 먼지구름이 완전히 가라앉은 후, 인영 하나가 보였다.
흑색 도복을 입고 창을 쥔 초로의 노인이었다. 노인의 얼굴을 보자마자 알 수 있었다. 노파가 말한 제국의 다섯 명 중 한 명이구나.
흑색 도복과 나는 뿌연 먼지구름이 가라앉고 나서도 한동안 서로를 마주 보고 서 있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주위에 파동을 퍼트렸다. 노인이 데려온 동료가 있다면, 퀘스트고 뭐고 자리를 피해야 하니까.
다행이었다.
노인은 혼자 온 것이 분명했다. 사방으로 뻗어 보낸 파동에 걸리는 것이 하나도 없었거니와, 노인이 눈빛으로 말하는 바도 같았다.
혼자 왔으니, 도망치지 마라.
돌풍이 끝난 시점에, 사막의 전사들이 저마다 무기를 꺼내 들었다. 나와 창을 쥔 노인을 번갈아가며 쳐다보면서.
“이셀라.”
조용히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웅성대는 무리 중 황급히 이셀라가 튀어나왔다.
“말씀하십시오.”
부쩍 나에게 존대하는 그녀에게 마을 끝부분을 턱짓했다.
“전투가 커질 것이다. 아무도 내 근처에 올 수 없게 해야 할 거다. 나를 도우려고도 하지 마라.”
“명심하겠습니다.”
“네가 할 일이 무엇이냐.”
“부족민들을 이끌고 마을 밖으로 나서는 것입니다.”
“움직여라.”
“예!”
그 대답을 끝으로 이셀라가 몸을 돌렸다. 그 순간 이셀라를 향해 날아가는 기운이 있었다.
노인이 날린 오러 블레이드였다.
어딜.
화르륵!
노인이 날린 오러블레이드보다 한층 두꺼운 오러가 내 롱소드에서 튀어 나갔다. 두 오러가 충돌함에 따라, 내 오러가 노인의 오러를 먹어 치웠다.
그것을 본 노인이 인상을 찌푸렸다. 애초부터 내 힘을 확인하고자 한 짓이었다. 거기에 내가 예상외의 실력을 보이자 당황한 것으로 보였다.
“어디에서 이런 놈이 숨어 있었을꼬.”
창을 쥔 노인이 터벅터벅, 내 앞으로 걸어 나왔다.
“너도 전사라면, 설마 도망치진 않겠지?”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서둘러 장비를 착용했다.
헬리오스의 심장, 아피야의 반지, 신성한 파괴자의 롱소드가 내 몸 위로 덧씌워졌다.
그때쯤엔 부족민들이 서둘러 마을 밖으로 빠져나가고 있었다. 조금전 오러와 오러의 충돌을 본 구경꾼들의 발놀림이 특히 다급했다.
이윽고 이셀라와 마을의 부족민 전부가 내 주위에서 사라진 것을 확인한 후.
놈을 보며 조용히 뇌까렸다.
“덤벼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