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4화 통합 (3)
“이셀라가 그러더군. 당신이 사막의 새로운 대전사라고.”
“그렇다는군.”
“이것 참 의외군. 전설상의 존재가 모래민족이 아닌 동방인이었다니. 어쨌든 만나 뵙게 되어 영광이오.”
명백히 비꼬는 투였다.
야툼이 내게 기운을 흘려보냈다. 내 수준이 어느 정도인지 가늠하기 위해서였을 테지만, 의미 없는 짓이었다.
겨우 녀석 따위가 내 레벨을 파악할 수 있을 리가 없다. 반대로, 나는 야툼이라 불린 사내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녀석의 레벨을 곧장 알아챌 수 있었다.
240레벨. 시미터를 손의 모양만 봐도 녀석이 다루는 검술이 어떤 것인지까지 파악됐다.
야툼의 레벨 자체보다, 이 세상의 평균 수준에 거듭 놀랐다. 대체 이곳은 어떤 곳이길래, A급 각성자들이 발에 차일 정도로 많은 거지?
내가 파악한 바에 따르면, 부족 하나당 각성자가 삼천 명쯤 된다.그런데 그중 50명 가까이가 A급 전사였다.
왜 이것이 중요하냐면, 50명의 A급 전사들이 한 마음 한뜻으로 내게 달려들 때를 상정해야 하기 때문이다.
아슬아슬하다. 돈을 걸라면 내 승리에 걸겠지만, 나 또한 적지 않은 상처를 입을 것이다.
분석을 마친 후 정면을 쳐다보자 야툼이 인상을 찌푸리고 있었다.
“가면도 못 써먹겠군. 이봐. 동방인. 정말로 네놈이 제국의 총독을 죽였나?”
“그만둬!”
언제 왔는지, 이셀라가 내 앞을 막아섰다.
“제정신이냐? 이놈이 여기 있는 이상 우리는 모두 죽는다. 당장 씹어 죽여도 모자랄 판에.”
“야툼. 이 이상 내 손님에게 무례를 범한다면 나도 가만있을 수 없다.”
“네 손님이 아니라 우리를 지옥으로 이끌고 갈 재앙이겠지. 저리 비켜. 한꺼번에 베어 버리기 전에.”
둘의 실랑이를 지켜보다가, 문득 시스템이 생각났다.
여기서 내가 뭘 어쩌라는 거지? 내가 할 일은 없는 건가?
그렇다면 굳이 내가 이곳에 있을 필요는 없다.
돌아가는 꼴을 보니, 제국이라 불린 곳에서 군사가 쏟아져 올 것 같다만, 거기까지 개입하기에는 내 상황도 녹록….
[퀘스트 발생 : 이셀라를 도와 사막 부족을 일통하십시오. 시스템의 계획 속에 있는 일입니다. 시스템이 당신을 도우려고 하는 이때, 시스템을 저버리지 마십시오.
보상 : 차원 이동문]
때마침 뜨는 퀘스트는 반가웠지만. 미션에 비해 보상이 짜다. 이셀라를 도와 사막부족을 통일하라고?
거기에 들어가는 시간과 노력을 생각하자면 굳이, 라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보상으로 내놓은 차원 이동문을 해석하자면 원래 세상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것이겠지만.
그 또한 어차피 때가 되면 자연스럽게 이뤄질 일이다. 그리고 내가 원래 세상으로 돌아가는 것은 나만큼이나 시스템이 절박할 것이고.
거절의 뜻을 밝히려던 그때였다.
바로 앞에 뜬 퀘스트의 글자가 서서히 바뀌었다.
[퀘스트 발생 : 이셀라를 도와 사막 부족을 일통하십시오. 시스템의 계획 속에 있는 일입니다. 시스템이 당신을 도우려고 하는 이때, 시스템을 저버리지 마십시오.
보상 : 차원이동문, 모든 능력치 +10]
제법 놀랐다. 원래 세상에서는 그렇게도 시스템을 협상 테이블에 앉히려 했는데. 그때마다 번번이 실패한 나였다. 그런데 이제는 시스템이 먼저 나서서 계약 조건을 변경시킨다.
시스템이 이 시스템에 얼마나 공을 들이는지 알 수 있는 부분이었다. 그리고 나는 그걸 이용할 수 있는 처지였고.
시스템이 날 도우려 하고 있다고?
웃기는 소리.
진정으로 날 돕고 싶다면 더 괜찮은 조건을 들고 와라.
어딜 레벨업 몇 번으로 퉁치려고.
슥슥.
글씨가 지워져 갔다.
이런 식으로 시스템이 나에게 매달린 적은 없었는데. 거칠게 지워지는 퀘스트 메시지 속에서, 시스템이 얼마나 약이 올라있는지를 알 수 있었다.
그런데 지금 시점에서 갑은 나였다. 사람만 없었다면 폭소를 터트렸을 것이다.
결국 시스템은 가진 것을 탈탈 털어놓았다.
완전히 바뀐 퀘스트 보상안은 미소를 짓기 충분했다.
[퀘스트 발생 : 이셀라를 도와 사막 부족을 일통하십시오. 시스템의 계획 속에 있는 일입니다. 시스템이 당신을 도우려고 하는 이때, 시스템을 저버리지 마십시오.
보상 : 차원이동문, 모든 능력치 +30, 아락투스의 창고로 가는 열쇠.]
대박.
***
두말할 것 없이 퀘스트를 수락했다.
이셀라를 도와 사막의 열 개 부족을 통합하라고?
분명히 많은 난관이 예상되지만, 공통의 적이 있는 한 그리 어려울 일도 아니었다.
정면을 바라봤다.
의외로 소란은 싱겁게 끝났다. 부족의 장로라는 노파가 찾아와 둘 사이를 뜯어말린 것이다.
“야툼! 이셀라! 둘 다 근신형에 처한다. 부족의 차기 지도자라는 것들이 하나 되지는 못할망정!”
장로의 호통에 야툼과 이셀라는 모두 고개를 푹 숙였다. 장로라는 노파의 권위가 얼마나 강한지를 알 수 있었다.
“썩 가지 않고 뭐하는 거냐!”
노파의 호통이 한 번 더 있은 후, 야툼은 나를 노려보다 질질 끌려 나갔고, 이셀라는 그런 야툼을 노려보면서 나갔다.
이윽고 내가 있는 숙소에는 장로와 나만 남았다.
낙타 부족의 족장과 비슷한 느낌의 여자였다. 자글자글한 주름으로 덮인 눈이 깊고 깨끗하다.
물리적인 힘과는 상관없이, 이런 사람은 상대하기가 껄끄러운 법이다.
“어마어마한 일을 저질렀더군.”
“…….”
“뭣 모르는 이셀라야 지금을 기회로 보고 있다지만. 당신 하나 때문에 우리는 멸족만 당하게 생겼소.”
“의도한 건 아닙니다.”
“그래서 문제지. 당신이야 책임질 게 없으니 말이오.”
“저를 어쩌실 생각이십니까?”
그렇게 되묻자, 오히려 노파가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우리가 어찌할 수 있었으면 당신은 이미 죽었겠지. 오히려 내가 묻고 싶은데. 우리를 어쩔 작정인가?”
노파의 깊은 눈동자가 내 몸을 샅샅이 뒤진다. 그녀의 눈이 닿는 곳마다 발가벗겨진 기분이 들었다.
어떤 스킬이나, 혹은 마법으로 내 수준을 측정하는 것이 아니다.
말로 형용할 수 없는 영역이었다. 굳이 따지자면 영혼의 깊이가 다르다고 해야겠지.
“글쎄요.”
“대전사치고는 책임감이 부족하군.”
“설마 그 말을 믿으시는 건 아니겠고.”
“믿든 안 믿든, 온 사막에 그런 말이 퍼지고 있지. 우리들의 새로운 지도자가 탄생했다고.”
“대전사가 그렇게 대단한 겁니까?”
“이셀라가 설명하지 않았나?”
“대충은 들었습니다.”
전설 속, 흩어진 사막 일족을 하나로 모아 세상을 정화시킨다는 대전사.
원래 세상으로 따지자면 메시아쯤 되는, 신화 속 존재였다.
“우리.”
“싫다고 하면 어쩔 겁니까?”
“어쩔 수 없지. 선택권은 자네에게 달려 있는 거니까.”
“강제로 시키고자 한다면 못할 것도 없겠죠.”
그 과정 속에서 이 부족의 태반이 죽고 말겠지만.
낙타 부족의 족장과 같게도. 이곳의 장로도 철저히 이성으로 벌어진 일을 접근했다.
나 하나 때문에 빚어진 일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거기에 대한 죗값을 묻지 않는다. 도리어 내게 저자세로 나선다.
“제국에 대항하려면 조금의 힘이라도 아껴야겠지. 말이 길어지고 있군.”
노파가 한 걸음 다가오며 말했다.
“이런 신경전은 그만두는 게 어떻나? 솔직하게 말하지. 우린 자네를 해할 수 없네. 그 반대야. 자네의 도움이 절실해. 그러니 원하는 것을 말해보게.”
“들어보고 판단해 보겠습니다. 정확히 이곳의 상황이 어떤지, 말씀해 보세요.”
노파의 얼굴에 한 줄기 희망이 떠올랐다.
혹여나 내가 말을 바꿀까 봐, 그녀의 입에서 쏟아지듯 말이 흘러나왔다.
노파의 말을 종합하자면 간단했다.
이 행성에서 가장 힘이 센 카다도스 제국이 이곳 쿰베이라칸 사막을 차지하려는 것.
그리고 그 이유는.
“마석?”
종종 이 세계를 모르는 듯 굴었어도, 노파는 인내심을 가지고 설명했다.
“본래 쿰베이라칸은 신들의 전쟁터였지. 봉인된 아락투스 군단장부터 신성한 용사들까지 그들이 남긴 힘이 사막 전체에 흩뿌려져 있단 말일세.”
“모래의 형태로 말입니까?”
노파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제국은 모래를 가공한 마석을 원하는 거고.”
“이곳의 전사들이 유독 강한 이유도 그 때문이군요.”
그제야 사막에 사는 몬스터들이 유독 강한 이유도, 그리고 이곳 전사들의 수준이 원래 세상의 평균을 훨씬 상회하는지도 알 수 있었다.
산소 농도가 공룡의 진화를 촉진시키듯 모래에 남겨진 강력한 마나가 몬스터든, 사람이든 생장시키는 것이었다.
퀘스트를 곱씹어보면서 노파에게 말했다.
어디에도 제국을 직접 무찌르거나, 제국의 황제라는 자를 죽이라는 말은 없다. 그저 사막 부족의 통일을 도우라는 말뿐이었다.
“사막 부족이 총 열 곳이라고요?”
“그렇지.”
“그중 제국의 손에 들어간 곳은 얼마나 됩니까?”
“다섯.”
“제국에 맞서려면 그들까지 설득해야겠군요. 도와 달라고.”
“이 사막에서 설득이란 서로의 힘을 겨루는 것이지.”
“부족끼리 싸운다는 말입니까?”
“이렇게 급한 상황에는 보통 각 마을의 최고전사끼리 맞붙어서 승자의 의견을 밀어붙이기도 하고.”
“제국에 넘어간 부족들이 과연 그 방식을 따를지 의문이 듭니다.”
“따를 것일세.”
“어찌 그리 확신하십니까?”
“그들이 바보라서 제국에 붙은 게 아니거든. 자네는 잘 모르겠지만, 총독은 제국 황제의 동생이야. 그놈을 죽였으니 제국이 우리를 어찌하겠나?”
“열 부족을 모두 쓸어 버리겠죠.”
“남 일 얘기하듯 이야기하지 말게.”
“남 일이긴 합니다.”
“그래서. 도와줄 건가?”
“생각 중입니다.”
“자네에게도 썩 나쁘지 않을걸세.”
“대전사인지 뭔지 말입니까?”
“그래.”
“다른 부족을 돌아다니며 싸워야겠군요.”
“대신 자네는 우리들의 선지자가 되겠지.”
노파는 자신이 말하고도 부끄러웠던지 헛기침을 했다.
어쨌든 배경은 모두 살펴봤으니, 개인적으로 궁금한 것을 물어봤다.
“제국에는 제 수준의 전사가 몇이나 됩니까?”
노파의 얼굴이 별안간 한풀 꺾였다. 내 질문이 내 의도와 달리, 거절의 뜻으로 전해진 듯했다.
“내가 사람 보는 눈이 없어서 원. 자네 수준이 어느 정도인지 말해 줘 보게.”
“장로님이 지금 생각하는 정도입니다.”
“그렇다면 다섯 정도 있겠군.”
“그 다섯 중 몇이나 저희를 방해할 것 같습니까?”
“셋 정도. 제국도 북부 전선 때문에 바쁠테니 말이야.”
“제 수준의 전사 셋이라면.”
열 부족이 모두 힘을 합치면 어찌어찌 막을 만하다.
“혹은 넷이거나.”
노파가 자신 없는 말투로 손가락 네 개를 펼쳤다. 내가 넷이라는 숫자를 들으면 무서워 도망치기라도 한다는 듯이.
“제 수준의 전사 넷이 이곳에 온다면.”
“순식간에 우리는 모두 죽고 말겠지.”
노파가 부쩍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며 내 눈치를 본다. 지금까지의 이야기를 들은 내가 그녀의 제안을 거절하리라는 판단이 섰나 보다.
“첫 번째 조건은.”
“으음?”
가라앉았던 노파의 목소리가 부쩍 높아졌다. 내 대답에서 희망을 엿본 듯했다.
“부족을 통합하는 과정에서, 이셀라가 그 중심에 있어야 합니다.”
어째서?
노파는 그런 질문을 하지 않았다. 내 의도를 파악하는 것은 그만두기로 한 모양이었다.
그것은 그만큼 지금 그들이 닥친 상황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했다. 당장 고양이 손이라도 빌리고 싶은 심정이겠지.
노파는 의도를 묻기보다는 실리를 택했다.
“두 번째는?”
“내가 관여하는 건 어디까지나 부족의 통일까지. 그 이후는 알아서 해야 할 겁니다.”
노파가 냉큼 고개를 끄덕였다.
“거기까지만 해도 그게 어디라고.”
“그런데 그 대전사라는 거. 제가 해도 되는 겁니까?”
보니까 굉장히 중요하고, 또 상징적인 자리 같은데.
“그럼. 당연히 되지. 뭐 별거라고.”
별거 같던데.
혹여나 내가 말을 바꿀까 봐, 한사코 별 것 아니라는 말을 남긴 그녀는 후다닥 자리를 피했다. 쉬라는 말과 함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