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3화 통합 (2)
“저희는 모르는 일입니다.”
“그런다고 넘어갈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냐만. 총독이 죽었다. 총독이!”
“족장님.”
“그런데 내 눈에는 네가 총독을 죽인 자를 지키는 것처럼 보이는구나.”
“저는 모르는 자입니다.”
“모른다? 그렇다면 그자를 우리에게 넘겨라.”
“저희가 넘기고 말 수 있는 자가 아닙니다. 족장님.”
“부탁이 아니라 명령이다.”
족장의 주름진 손이 파들파들 떨렸다. 그럼에도 이셀라는 단호했다.
“저자가 원한다면 이곳에 남을 것이고, 원하지 않는다면 이곳을 벗어날 것입니다.”
그녀는 내게 자신들의 목숨이 달렸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혹은 사막 부족 전체가.
어느 순간 이셀라, 라반, 세쿤더스가 내 옆을 호위하는 식으로 포지션을 변경했다. 나는 그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어떻게 할지를 고민했다.
이셀라가 나만 들을 수 있게끔 조용히 속삭였다.
“…어떻게 할지는 당신의 선택이겠지만, 바라건대 일이 커지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일은 이미 커진 것 같은데.”
“제가 기회로 만들 수 있어요. 허락만 하신다면.”
그녀가 사뭇 간절하게 말했다.
“총독이라는 자의 지위가 얼마나 높은 거지?”
“제국 내 서열 3위예요.”
“군대가 몰려오겠군.”
“예.”
“얼마나?”
“모르긴 몰라도 30만은 넘을테죠.”
지난밤, 이셀라의 이야기를 종합했을 때. 사막의 부족을 모조리 통합해봤자 그 숫자가 3만 명밖에 안 된다고 했다.
말 그대로 계란으로 바위를 치겠다는 뜻이다.
유독 사막의 전사라는 것들의 레벨이 높다한들, 30만이라는 숫자 앞에는 무력해지기 마련이다. 또한 이셀라의 말을 종합했을 때, 제국에 있는 고수들도 이들 못지않게 많다고 했다.
사막의 모든 부족이 제국의 군대에 짓밟히는 그림이 그려졌다. 그중 내가 서 있는 낙타 부족이 제 일 순위가 될 것이다.
족장이 부쩍 힘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제국이 바란건 평화였다.”
“평화가 아니라 복속이었죠.”
“대를 위한 소의 희생은 늘 동반되지.”
“자그마한 저항 한번 못 해 보고 무릎 꿇은 주제에 핑계는 거창하시군요.”
“이셀라. 자네가 지금 벌인 행동이 무슨 결과로 이어졌는지 아는가? 우리가 일궈 놓은 모든 것들이 한 줌 모래와 함께 사라질 것이다.”
족장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지난한 논쟁이야 지금 무슨 의미가 있겠나. 이미 일은 벌어졌는데.”
“그러니 힘을 합쳐야죠.”
“힘을 합쳐서 달라질 것이었으면 진작 그렇게 했겠지.”
“족장님께서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이미 일은 벌어졌다고요. 당장은 절망할 때가 아니라, 힘을 합쳐야 한다고요!”
“잘도 그딴 말을!”
족장의 옆에 서 있던 구릿빛 피부의 남자가 분노를 토해 냈다.
“당장 그놈을 쳐죽여도 모자랄 판에 뭐? 힘을 합쳐?”
“지금 당장 이 자를 죽인다 하더라도 저희에게 무슨 이득이 되죠? 그런다고 제국이 저희를 가만둘까요? 아니, 그전에 이 사람을 제압할 수는 있나요? 대전사의 시련을 통과한 사람을?”
“뭐?”
“뭐?”
“대전사?”
이셀라의 말 한마디가 이곳저곳에서 반응이 튀어나왔다.
“대전사?”
“저 남자가 사막의 시련을 통과했다고?”
“동방인이잖아.”
전사들이 웅성댔다.
“다들 진정해라! 저 미친 여자가 죽을 때가 되니 헛소리로 상황을 무마하려는 거니까!”
그 와중에도 이셀라는 지금의 상황을 설명하려고, 나만 들을 수 있도록 마법을 사용했다.
-저희 사막에만 내려오는 전설상의 인물이에요. 부족을 하나로 통합하는. 무례라고 생각지 말아 주세요. 마스터께서도 옛날에 당신을 두고…….
-알겠으니 이것부터 해결해 봐.
채채챙!
그들 각각의 시미터가 뽑혀 나왔다. 마찬가지로 내 옆에 있던 세쿤더스와 라반도 응축된 기운을 자신들의 시미터에 담았다.
일촉즉발의 상황이었다.
그것을 가만히 지켜보던 족장이 혀를 차며 손을 들었다.
“말했듯, 이미 벌어진 일. 조만간 너희 부족으로 사람을 보내겠다. 자네 말대로 힘을 합치든, 아니면 제국의 가랑이를 기든 결정해야겠지.”
족장은 한 번 더 나를 쳐다봤다가, 등을 돌렸다.
“모두 길을 비켜라.”
“그럴 수 없습니다. 이대로 돌려보내면 반드시 후환이 남을 것입니다.”
“멍청한 것들! 내가 오늘 너희 모두의 시체까지 봐야 겠느냐!”
족장의 노성에 지켜보고 있던 사람들이 모두 깜짝 놀랐다. 잇따르는 물음표들을 무시하고, 족장이 사라졌다. 싹 다 꺼지라는 말과 함께.
결국 우리는 아무런 방해도 없이 처음 왔던 입구를 통해 나갔다.
그제야 한숨을 토해 내는 일행이었다. 그러고도 나를 보는 눈빛은 변하지 않은 채였다.
믿기 힘든 불신과, 처음 봤을 때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경계심.
모두들, 그러니까 이셀라마저도 나를 바라보고만 있었다. 어찌해야 할지를 모르겠다는 얼굴로.
다른 건 관심 없다. 퀘스트만 보는 거다. 퀘스트만.
***
좌표상으로 이셀라가 왔던 마을을 특정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그녀가 따라왔던 대지의 기억을 읽어 내기만 하면 그뿐이니까. 약속된 시동어가 세상 밖으로 튀어나왔을 때였다.
모래가 간직하고 있는 기억들을 읽어나감에 따라, 이셀라 무리가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지 알 수 있었다.
“일단 길을 찾을게.”
라반이 분위기를 환기시키며 방향을 읽으려던 차였다. 하지만 그러던 것도 내 말 한마디에 무산됐다.
“잠시만.”
“예.”
두말할 것 없이 라반이 동작을 멈추고 나를 바라봤다. 이셀라와 세쿤더스 또한 나무토막처럼 뻣뻣하게 굳어서는 내가 하는 짓을 바라만 봤다.
안 그래도 써먹어 보고 싶은 게 있었다. 공간이동 마법의 최대 도약 거리는 150킬로미터. 50킬로미터 이내에 있는 그녀의 마을까지는 단 한 번의 도약으로 될 것이다.
마음먹은 즉시 손을 앞으로 내밀었다. 덜그럭거리는 고리의 마력이 그쪽으로 쏠렸다.
이윽고.
우웅!
어두운 기운이 검지를 중심으로 아지랑이가 피어올랐을 때. 위에서 아래로 손을 내리그었다. 물살이 갈라지듯 허공에 선이 그어졌다.
엿가락처럼 늘어진 그것이 어느 순간 투둑, 벌어졌다.
쩌저적-!
그어진 선은 천천히 벌려지다가, 어느 순간 확 찢어졌다. 공간의 뒤편으로 낙타 부족의 입구와 비슷한 흙벽이 보였다. 붉은 코끼리가 그려진 흙벽.
뒤를 돌아봤다. 이셀라를 포함한 녀석들의 얼굴이 하얗게 질려 있었다. 내가 만든 마법이지만, 내가 봐도 말도 안 되기는 한다. 공간을 찢어 도약한다니.
머릿속으로 완벽한 원리와 작동방식을 깨우쳤음에도 나조차 미심쩍었다. 혹시나 공간을 뚫고 들어갈 때 내 몸에 무슨 이상이 생기는 건 아닐까?
고개를 돌리니 떠듬떠듬 입술을 벌렸다 닫는 라반이 보였다. 사막의 길잡이 라반.
거기에 대고 말했다.
“먼저 들어가 봐.”
혹시 모르니까.
***
[퀘스트를 성공했습니다!]
[보상 : 모든 능력치가 +10만큼 상승합니다!]
겨우 집 좀 데려다줬다고 모든 능력치가 10포인트나 올랐다.
레벨업당 5포인트씩 준다는 걸 상기했을 때. 여덟 번의 레벨업을 한 것과 다르지 않았다.
시스템의 넉넉한 인심을 의심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대체 이번엔 또 어떻게 굴려대려고.
그러나 사람이란 무릇 그렇듯, 훗날의 고통보다는 당장의 과실이 맛있는 법이다.
어쩔 수 없이 새어 나오는 흐뭇한 미소와 함께 상태창을 열었다.
이름 : 이태진
레벨 : 252
스킬 : 오러 블레이드(S), 아드레날린 부스트(S), 신성한 파괴자의 검술(S), 일점폭발(S), 집중(S), 도약(S)
특성 : 검신의 축복(S), 무아지경(S), 인내하는 자(S), 전사(S). 만독불침(A)
체력 : 308
마력 : 280
근력 : 417
민첩 : 335
[레벨과 스탯의 괴리율이 지나칩니다.]
[자동 보정 : 레벨이 스탯에 맞춰집니다.]
[레벨 보정 : 252 → 268]
모든 스킬과 특성이 S급으로 자리 잡았고 레벨도 그에 맞춰 270에 가까웠다.
고통스러운 시간이었지만. 얻은 것이 더 컸다. 이세계의 나와 지금의 나는 아예 다른 등급의 각성자가 돼버렸으니까.
마치 처음 검신의 축복을 얻은 그때가 생각났다. 하루하루 상태창에 보이는 스탯의 숫자가 기하급수적으로 올라갔던 그때.
지금의 성장 속도가 그때와 흡사했다.
알 수 없는 자신감이 샘솟았다.
곧장 심상속으로 들어갔다. 다른 절차는 필요 없었다. 낙타 부족 안에서 기사들을 상대하며 확실히 느꼈다. 이제 A급들은 물론이고 어지간한 S급들도 내 상대가 되지 못함을.
곧장 성요한을 불러냈다.
사브르를 들고 나타난 성요한은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덤덤한 얼굴이었다.
그런데 왜일까. 간격이 부쩍 좁혀졌다고 생각하는 지금도 그를 마주보자마자 소름이 훅 끼쳤다.
“죽어라.”
심상 속 성요한이 검을 내질렀다. 시간을 쪼개고 쪼개고 쪼갠 찰나의 순간일 것이다.
성요한의 사브르가 직선으로 곧게 뻗어온다.
시간을 쪼개고 쪼개고 쪼갠 찰나의 순간, 저번에는 보지 못했던 무언가가 느껴졌다. 성요한의 손에서 번쩍거린 사브르가 아주 잠깐 그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혹시 모를 기대와 함께 심상 속 내가 검을 뻗었다. 조금이나마 느꼈으니, 조금이나마 막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와 함께.
그러나 여지없었다. 내가 방어하려는 모든 시도는 무위로 돌아갔다.
이번에도 아슬아슬하게, 그의 검이 내 정신을 쪼개버리기 전에 심상을 빠져나갔다.
휘청이는 몸을 가누었다. 조금만 더 몰입을 유지했다가는 큰일 날 뻔했다.
아주 자그마한 희망과 여전한 절망을 맛봤다.
자그마한 희망은 처음으로 사브르의 궤도를 확인한 것이고, 여전한 절망은 나는 아직도 성요한에게 한주먹거리도 안 되는 놈이라는 것이었다.
젠장할.
성요한의 상태창이 궁금해질 지경이다.
뒤로 몸을 누였다. 푹신한 바닥 위로 부드러운 카페트가 깔려 있는 곳이었다.
이셀라가 내게 마련해준 숙소는 그녀가 얼마나 내게 신경을 쓰고 있는지를 말해주고 있었다.
이곳에 온 지 며칠이 흐르는 동안, 누구도 내게 관심을 가지지 못하게 철저히 조치를 취하는 것도 그랬다.
그런데 그런 점들이 부족원들의 궁금증을 자아내고 있는 것이다.
아니, 이셀라는 지금 이 부분까지 의도했을 것이다. 낙타 부족에게 그러했듯, 나를 대전사인지 뭔지로 만들어 그들이 한 데 통합할 수 있는 근거로 만들어버린 것이다.
감각을 확장시키자 이셀라가 특정됐다. 그녀의 주위로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청력을 키웠다.
“천천히. 다시 말해봐. 뭐라고?”
“저 남자, 저 분, 아니. 하아. 미치겠네. 이걸 대체 어떻게 설명하라고!”
“길잡이라는 새끼가 보고 하나 똑바로 못하는 꼴이라니. 세쿤더스. 네가 말해봐.”
“…….”
“너까지 왜 이래? 정말 이럴 거야?”
“야쿰. 네가 듣고도 이걸 믿을 수 있을지 모르겠다.”
“대체 뭔데 그래? 오자마자 얼굴은 사색에, 웬 남자를 데려오지 않나, 그리고 제국이 우리를 공격하러 올 거라고? 내가 여기서 뭘 생각해야 하는거지? 이셀라.”
“애써 부정하지 마. 네가 들은 말들 모두 사실이니까.”
“사실이라면 더 큰 문제지. 대체 무슨 정신으로 저놈을 마을에 들인 거냐. 정말 총독이 저놈의 손에 죽었다면 그들이 가만있을 것 같아?”
“우리에겐 선택사항이 없어. 저자가 그러겠다고 하면, 그래야만 하는 거다.”
“이셀라!”
“야툼. 너와 내가 썩 좋은 사이는 아니다만. 내 충고를 무시하지 않는 게 좋을 거다.”
“내가 지금 꿈을 꾸고 있는 거지? 그런 거지?”
“빌어먹을. 나도 그랬으면 좋겠군. 그래도 다행인 점이 있어. 낙타 부족에서 아마 우리 쪽에 협력…….”
“그딴 개소리는 집어치워! 맙소사. 총독이 죽었다고? 그런데 저놈을 아직까지 살려두고 있어? 모두 잘 들어라. 저놈을 생포해라! 이셀라, 라반, 세쿤더스. 너희 셋은 이 일이 끝나는 대로…….”
거기까지 듣고 마력을 거둬들였다. 야툼이라 불린 사내와 그가 이끄는 무리의 기운이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이윽고 거칠게 문이 열렸다. 우르르 장정들이 쏟아져 들어왔다. 걔 중 가장 선두에 선 사내가 야툼이었다.
야툼이라 불린 사내는 대머리에, 2미터가 넘는 근육질이었다. 시미터를 꼬나 쥔 그가 내 앞에 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