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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터는 미래를 본다-131화 (131/170)

131화 적응 (3)

순간 눈을 의심했다. 퀘스트가 뜬 것 자체보다, 시스템이 여기까지 예상했다는 것이 놀라웠다.

대체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시스템의 그림 안에 속해 있는지 감을 잡을 수조차 없었다.

아주 대단하고 위대하신 시스템의 뜻을 생각하기보다는 바로 앞에 있는 과실을 따 먹기로 했다.

“내가 도와줄 수 있을 것 같은데.”

모두의 시선이 내게로 확 쏟아졌다. 그러다가 절망이 다시 찾아왔다. 더위에 찌든 놈의 헛소리로 치부하는 것이다.

“이봐 너. 이름이 뭐라고?”

사람은 환경에 지배받는 동물이다. 라반이 짜증 섞인 목소리로 나를 불렀다.

“이방인. 네가 나설 때가 아니다.”

세쿤더스도 마찬가지였다. 막막한 얼굴 사이로 짜증이 가득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공짜 포인트 40개에 눈이 돌아간 상태였다.

이것들의 길을 찾아주기만 하면 8번의 레벨업을 거저로 준다고? 거절하면 그게 미친놈이다.

사실, 이 쉬운 걸 왜 못하고 여기 나자빠져 있는지 이해할 수 없기도 했고.

라반이 한마디 더 하려던 그때였다. 이셀라가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한번. 한번 들어나 보자.”

“뭐?”

“사막에서 몇 날 며칠을 굴렀던 남자야. 한 번쯤 들어볼 가치는 있어.”

“이셀라. 우리에게 남은 기회가 몇 번 없다는 걸 알아둬. 한 번 길을 잘못 들면 영원히 사막을 배회할 수도 있다.”

“그래서 들어보자는 거다.”

“그랬다가 틀리기라도 하면?”

“라반. 이곳의 책임자가 누군지 잊었어?”

“길잡이로서 무리의 목숨을 챙기는 건 당연히 의무……!”

“서쪽 방향으로 10키로미터 앞.”

난잡한 대화가 뚝 끊어졌다. 내 한마디 때문이었다. 이대로라면 끝도 없이 대화가 이어질 것 같아서, 정답부터 먼저 말한 것이다.

“낙타인지 코끼리인지는 모르겠지만. 거기에 사람이 산다.”

믿든 말든 너희 자유지만.

***

이셀라의 용기, 혹은 만용은 박수받아 마땅했다. 웬 엉뚱한 놈의 헛소리만 믿고 10키로미터를 걸었으니까. 그것은 마지막 도박수이기도 했다.

라반이 내 옆으로 다가왔다.

“알고 있겠지만 이 사막 안에서 마력을 함부로 쓰는 것은 자살행위다.”

“몬스터가 나타나기 때문이지.”

“그래. 그래서 우리에게 몇 번 기회가 없다고 한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그 중 한 번의 기회를 네 말만 믿고 사용한 것이고.”

라반이 나를 뚫어져라 쳐다보며 말했다.

“솔직히 말하지. 네가 아무리 한때 대전사의 후보였다 하나. 나보다 사막의 길을 잘 알 거라 생각되지는 않는다. 더군다나 지금 상태라면 더더욱.”

“그래서?”

“네 말이 틀리다면 그만한 책임을 져야 할 거라는 말이다. 반대로 네 말이 맞다면 나도 그만한 대가를 내놓아야겠지.”

“그게 사막의 방식인가?”

“너에게 개인적인 감정은 없어. 진심으로. 네 말이 맞기를 빈다.”

피식 웃음이 나왔다. 라반의 악의 없는 말들이 나쁘게 다가오지 않았다. 무리의 길잡이로서 책임감을 느끼는 것뿐이다.

더군다나 녀석은 내 말이 틀렸다 하더라도 나를 어쩌지 않을 것이다. 진위를 가려내는 마법이 그렇게 말했다.

라반의 말은 거짓이라고. 단 하나, 내 말이 맞았을 때 그만한 대가를 내놓겠다는 말만 빼고서.

라반에게 정면을 턱짓하며 말했다.

“그렇게 심각하게 말할 것 없다. 대가는 음식으로 지불받았으니까.”

“뭐?”

“앞을 봐라.”

흙으로 쌓은 벽이 시야에 들어왔다. 거기에 낙타가 새겨져 있었다.

***

정말이었다. 이방인의 말이 진짜였다.

낙타 부족의 상징물이 눈앞에 있었다. 낮게 쌓인 벽이 보였다. 인기척도 그 안에 있었다.

그러나 발걸음을 뗄 수 없었다. 대신 모두의 눈이 이방인에게로 향했다.

한때 대전사의 후보였다던 이방인은, 여전히 무덤덤한 표정 그대로였다.

“어, 어떻게.”

라반이 일행을 대표해서 그렇게 말했다.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이게 뭐 별거냐는 듯 시선을 이리저리 돌리며 부족의 상징물을 쳐다볼 뿐이었다.

라반이 고개를 털었다.

“진심으로 사과한다.”

“받아주지.”

“아직까지 이름도 모르다니. 말도 안 되는 일이지. 이방인. 이름을 말해줘.”

“진.”

“진? 진. 진. 느낌이 좋군.”

그때쯤 이방인이 아무것도 허공에 손가락질을 하기 시작했다. 제 부족의 신성한 행위겠거니 싶었다.

아니, 그런 건 아무래도 좋았다. 당장 살 수 있는 길이 열렸다는 점이 중요했다.

라반이 들뜬 미소로 이방인의 이름을 불러댔다. 옆에 있던 세쿤더스도 마찬가지였다. 단 한 명, 이셀라만 침착함을 유지하려 애썼다.

“다들 긴장을 늦추지마. 지금부터 시작이니까.”

이셀라가 눈을 빛냈다.

어떻게 된 건지는 몰라도 기회를 얻었다. 사막에서 개죽음을 당하지 않은 것만 해도 절반의 성공이었다.

이렇게 된 이상 반드시 낙타 부족의 협력을 이끌어야 한다. 사막 민족을 통합의 길로 이끄는 첫 관문이 이곳이었다.

필요하다면 피를 볼 생각도 있었다. 최후의 발악이라 해도 좋았다.

제국에게 이 사막이 넘어가는 꼴을 볼 바에는, 목숨을 다해 싸우다 장렬히 전사하는 게 더 나을 테니까.

***

이셀라의 말이 맞았다. 낙타 부족은 우리를 환영하지 않았다. 환영은커녕, 마을로 들어선 직후부터 여기저기서 살벌한 기운이 쏟아졌다.

흙으로 지어진 집집마다 우리를 뚫어져라 노려보는 시선이 가득했다. 그나마 바로 공격하지 않은 게 다행일 정도라며, 라반이 안도의 한숨을 내쉴 정도였다.

“같은 일족이되, 긴 세월 싸워왔기 때문이야.”

라반의 설명이 이어졌다.

듣다 보니 마치 남과 북으로 갈라진 한반도와 비슷했다. 민족은 같되 떨어진 세월이 길어 정체성을 나누지 않는다는 것.

나를 제외한 일원들의 표정도 심각해지기는 마찬가지였다. 살아났다는 안도감도 잠시, 언제든 시미터를 뽑을 수 있게 검집에 얹은 손가락을 덜그럭거렸다.

“그래도 싸울 일은 없을 거다. 우리는 물론이고 이셀라도 부족의 핵심 전사거든. 우리를 건드리는 즉시 부족 간의 전쟁이 터질 텐데. 이것들도 그걸 바라는 건 아닐 테지.”

마을 어귀를 걷던 중, 늙은 남자와 무리가 우리 쪽으로 다가왔다.

“허어. 이셀라. 진짜 찾아올 줄이야.”

“부족장님을 뵙습니다.”

“자네가 어찌 여길. 이럴 게 아니지. 일단 안으로 들어가세.”

늙은 부족장은 적잖이 당황한 눈치였다.

“모두들 여기 있어.”

이셀라는 그렇게 부족장을 따라 사라졌다.

그렇게 길거리에 남겨진 우리들은 동물원 원숭이와 다름없는 꼴이었다. 여기저기 수군대는 소리가 한두 명이 아니었다.

그것들이 거슬리던 차에, 라반이 내게 다가왔다.

“진. 여기서부턴 입을 조심해야 할 거다.”

고개를 돌리자 라반이 걱정이 뚝뚝 묻어나오는 얼굴로 나를 보고 있었다. 라반 뿐만 아니다. 내가 아니었다면 사막에서 죽을 뻔한 이들이었다.

이들에게 나는 불쌍한 녀석에서, 신비한 능력을 가지고 있고, 지켜줘야 할 불쌍한 녀석으로 한 등급 상승해 있었다.

특히나 녀석들은 내 표정을 지적했다.

“네가 어떤 시련을 당했는지는 모르지만 여기서만큼은 얌전히 있어야 해. 정 안 되겠으면 그냥 내 뒤에 숨어. 너를 위해서 하는 말이야.”

“더 심각한 건 따로 있어.”

세쿤더스가 심각한 얼굴로 말했다.

“제국의 총독이 낙타 부족을 들렸다더군.”

“제국?”

그렇게 되묻자, 라반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 망할 쓰레기 새끼들.”

그때였다. 누군가 문을 걷어차고 나타났다.

“너희들. 총독께서 부르신다. 다 튀어나와.”

***

제국의 총독이라 불린 자는 날렵한 눈매를 가진 중년의 남자였다. 사막 부족의 여자 둘이 총독의 옆에서 부채질을 하고 있었다.

총독은 그들이 만든 그늘 아래에서 나른한 표정으로 우리를 살폈다.

녀석. 겉보기와 다르게 꽤나 강한 놈이다.

“고하라.”

총독의 말에, 옆에 서 있던 남자가 고개를 조아리며 말했다.

“붉은 코끼리 부족의 차기 부족장 후보에 오른 자입니다.”

“이름이 무엇이냐. 잠깐. 네가 직접 대답해 보거라.”

언제 잡혀 왔는지 모를 이셀라가 총독의 앞에 서 있었다.

“이셀라라고 하오.”

이셀라의 표정이 영 좋지 않았다. 돌아가는 꼴을 보니 언제 일이 터져도 이상할 것이 없어 보인다.

“이셀라. 대세는 이미 기울은 바,붉은 코끼리 부족도 답을 내놓아야 할 것이다. 우리에게 복종할 것인지, 아니면 죽을 것인지.”

“쉽지는 않을 거요.”

총독이 이셀라를 쳐다보다가 피식 웃었다.

“이쪽으로 데려오라.”

그 말만을 기다렸다는 듯 총독의 옆에 있던 기사들이 이셀라를 거칠게 끌고 왔다.

라반과 세쿤더스가 칼을 뽑으려 했지만 이셀라가 먼저 손을 저었다. 기다리라는 뜻이었다.

그때까지도 나는 뒤에서 가만히 서 있었다.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확인해 보게.

“황제를 보고 싶소.”

“이 요망한 것이 꿈이 크구나.”

“대화를……!”

짝!

이셀라의 고개가 돌아갔다.

“감히 네 입에 담을 분이 아니거늘. 지금 이 자리에서 너를 죽이지 않은 것에 감사히 여겨라.”

총독이 이셀라의 머리를 쥐어 잡았다.

“대화라 하였느냐? 열 개 부족 중 다섯 개가 우리 쪽으로 넘어왔다. 아니, 이제 여섯 개지. 안 그래도 뿔뿔이 흩어진 부족을 겨우 일개 부족 하나가 무슨 수로 우리에게 맞서겠느냐. 말해 보거라.”

“지금 당장 네놈 모가지 따는 것이 그렇게 어렵지는 않을 것 같은데.”

이셀라의 말에 총독이 피식 웃었다.

“한번 해 보거라.”

총독의 뒤에 도열한 기사 넷이 비릿하게 웃었다. 이셀라의 몸을 훑으면서였다.

가만히 보니, 총독도 이셀라를 죽일 마음은 없어 보였다. 지금은 그러니까, 조롱의 단계였다. 그녀의 자신감과 자존심을 꺾어가는 과정.

그러던 그때였다.

총독과 내 눈이 마주쳤다.

“너. 이리 와라.”

나른한 내 눈빛이 마음에 들지 않은 모양이었다.

혹은 이방인처럼 생긴 내 외모를 보고 흥미를 느낀 것일 수도 있고, 본보기로 나를 죽이려 하는 것일 수도 있었다.

뭐가 됐든 큰 흥미가 느껴지지는 않았다.

대체 시스템이 나를 왜 이곳까지 보낸 건지. 그게 궁금할 뿐이었다.

“다음 퀘스트가 있다면 보여라.”

그렇게 물어도 돌아오는 답이 없었다. 마음대로 해도 좋다는 뜻인가?

“너. 부르시잖아.”

“우리 말을 알아듣지 못 하는 거냐?”

기사 두 놈이 저벅저벅 걸어오려 하던 그때, 총독이 손짓하며 말했다.

“아니. 네놈 발로 직접 와라. 내가 그리로 가면 너는 죽는다.”

그렇게 말한 총독이 찰나간에 이셀라의 얼굴을 살폈다. 나의 죽음을 언급했을 때의 반응을 살피기 위해서였다.

이셀라의 얼굴을 본 총독이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총독이 서서히 내 쪽으로 다가왔다. 이셀라와 녀석의 부하들을 제외하면 모두가 재밌다는 듯 그 상황을 지켜보고만 있었다.

녀석이 내 멱살을 잡아올리려던 그 순간이었다.

총독의 손이 내 목에 닿았다.

원래는 죽일 생각이 없었다. 진심이었다. 이 상황을 최악으로 만들어서, 이셀라에게 해를 입히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망할 본능이 문제였다.

몇 년이나 사막을 뒹굴며 위기감이 느껴질라 하면 과하게 반응하는 이놈의 본능이.

총독의 목을 갈라버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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