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9화 적응 (1)
스릉!
구릿빛 장정 두 명이 내게 칼을 겨눴다. 동시에 내 몸에서도 파동이 퍼져나갔다. 이셀라를 포함한 놈들의 수준이 여실히 느껴진다.
레벨로 따지면 230, A급 후반대를 바라보는 녀석들이었다.
이 사막으로 넘어오기 전만 해도, 아니, 며칠 전만 해도 나는 목숨의 위협을 느꼈어야 했지만.
지금은 긴장은커녕 우습기만 했다.
각성자들을 괜히 구간별로 나눠놓은 게 아니다. 겨우 숫자 몇 개가 하늘과 땅만큼의 간극을 만들어 내는 법이다.
등급이 높아질수록 그런 경향이 짙어지는데, 하물며 A급과 S급의 차이라면.
다음 순간, 놈들의 눈빛을 읽었다. 만약 놈들이 내게 조금이라도 살기를 드러냈다면 이들의 목이 떨어져 나갔을 것이다.
그것은 내 의지이되 내 의지가 아니다. 이 사막에 있는 동안 칼날처럼 벼려진 감각 때문이었다.
그러니까 이것들의 목이 붙어있는 이유는 녀석들이 단순한 경계와 호기심만 드러내고 있어서였다.
이 죽음의 땅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저벅저벅 걸어오는 내게 무슨 사연이 있는 건지 궁금한 것이겠지.
그런데. 그럼에도. 단순한 경계일 뿐이었지만 어찌됐든 칼을 겨눴다. 그 행동 하나만으로 진작 놈들을 죽이고도 남았어야 했다. 이 사막에 적응해버린 나는 그런 놈이니까.
그런데 왜지? 왜 나는 지금 이것들을 살려두고 있는거지?
고민에 빠진 사이, 장정 중 한 녀석이 내게 말했다.
“조난된 건가? 머리색을 보아하니 사막 일족은 아닌 것 같고.”
“기운이 느껴지지 않는데? 어떻게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거냐.”
“잘 봐. 눈빛만큼은 살아있잖아. 무리를 잃고 사막을 헤매고 있는 게 분명해.”
“이봐. 네 무리는 다 죽은 건가?”
녀석들의 말을 무시하고 계속해서 상념 속으로 빠져들어 갔다.
단지 내게 위협이 되지 않기 때문일까?
그러던 문득 이셀라와 눈이 마주쳤다. 먼 과거처럼 느껴지는 기억 하나가 떠올랐다.
이셀라와 겨뤄본 기억이 있다.
한 합 차이로 내가 이겼던가?
그녀에게는 아쉬운 일이겠지만, 그런 아슬아슬한 승부는 두 번 다시 없을 것이다. 격차가 벌어져도 너무 벌어졌다.
어쨌든 이셀라는 이셀라대로 혼란스러운 모양이었다. 이셀라가 나를 애잔한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칼들 넣어. 아는 사람이다.”
말하는 투도 그랬다. 마치 몰락한 부자를 대하듯 동정이 섞여 있었다.
장정들이 입맛을 다시며 시미터를 허리춤으로 감췄다.
나 또한 그쯤에서 답을 얻었다. 내가 왜 이것들을 죽이지 않은 건지. 오랜만에 만난 인간이라서, 정확히는 대화가 통하는 상대라서였다.
몬스터의 울음소리가 아닌, 나와 같은 동족의 목소리가 그 자체로 위로가 됐기 때문이다. 그것이 설령 내게 칼을 겨눈 것들이라 해도.
고개를 털었다. 답을 얻은 이상 굳이 더 말을 섞을 필요가 없었다.
“먹을 것이 있다면 두고 가라.”
한 번 더 그들의 배낭을 턱짓하며 말했다. 그런데 그것이 장정들을 자극한 모양이었다.
“이셀라. 정말 아는 사람 맞아? 예의를 모르는 친구인 것 같은데.”
“이봐. 이 사막에서 몇 날 며칠 굴러서 예민해진 상태인 건 알겠어. 알겠는데. 그런 식으로 말했다가는 몬스터가 아니라 사람한테 먼저 죽을걸?”
“그만두라고!”
이셀라가 녀석들을 만류하며 나섰다. 이셀라의 다급해진 손길을 따라 장정 둘이 의아한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사이, 이셀라가 가방에서 육포와 빵을 꺼냈다.
마치 야생의 짐승에게 먹이를 주듯 그렇게 음식을 건네줬다.
말린 고기와 빵 냄새가 코를 찔렀다. 아까부터 심장이 뛰는 이유가 저것 때문이었다.
한입에 그것들을 씹어 삼켰다.
아!
입에서 녹았다는 표현이 맞았다. 독에 찌든 리저드나, 두더지 따위의 식감과는 차원이 달랐다
눈을 감고 지금의 느낌을 만끽했다. 충분히 그 감정을 반개했을 때. 녀석들이 나를 보며 낄낄거리고 있었다.
“몰골은 당장 누구 죽이게 생겨서는, 먹는 모습은 꽤 귀엽네. 오랫동안 굶주렸나 본데.”
“나쁜 녀석 같지도 않고.”
“그보다 이셀라. 이 녀석은 어떻게 아는 사이지?”
이셀라가 잠시 고민했다. 내게 허락을 구하는 듯한 눈빛이 느껴졌다.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와 같은 전사다. 아니, 전사였지.”
그 말에 장정 둘의 얼굴에 또다시 호기심이 피어올랐다.
“이 녀석이 전사라고?”
“그렇다기엔 느껴지는 기운이 한 톨도 없는데.”
이셀라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그를 존중해라. 4년 전 마스터께서 대전사의 자질을 타고났다고 했으니까.”
대전사라는 단어에 녀석들이 눈을 번쩍 떴다. 녀석들이 나와 이셀라를 번갈아 가며 쳐다봤다.
이셀라가 측은한 눈빛 그대로 말을 이었다.
“지금은 가진 힘을 다 잃은 모양이지만. 결국 대전사가 되지 못한 모양이야. 그렇지?”
“…….”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이 여자를 바라봤다. 먹을 것을 준 대가로 이 말도 안 되는 오해를 풀어줘야 하나?
하고 고민하는 사이 옆에 있던 장정들이 그녀의 말에 맞장구쳤다.
“아! 사막의 시련! 시련을 견디지 못한 거야. 마나홀의 마나가 모두 폭파된 거군.”
“눈빛을 봐. 안 봐도 뻔하지. 함께 시련을 시작한 동료들은 죽고 혼자 살아남은 거야. 우리가 발견하지 못했다면 이 친구도 얼마 안 가 똑같이 됐을 거고.”
제멋대로 추측을 시작한 녀석들이 이내 표정을 바꿨다. 건방지고 재밌는 놈에서, 가진 모든 것을 잃은 불쌍한 녀석으로.
걔 중 한 사내가 내 어깨에 손을 올렸다.
“힘을 모두 잃었다 해도 네가 전사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스스로 목숨을 끊을 생각이라면 그만둬.”
“당분간은 걱정하지 마라. 우리가 너를 지켜주겠다.”
이윽고 이셀라가 나를 턱짓하며 말했다.
“한때 대전사의 후보였던 사람으로서 네 감정을 충분히 이해한다. 우리를 따라와라. 다른 건 몰라도 목숨과 음식은 챙겨줄 테니까.”
마치 그러기를 바란다는 듯한 어투였다. 다시 한번 녀석들을 둘러봤다.
나쁜 것들은 아니다. 무슨 오해를 하는지는 관심 없지만, 나를 살리려 하는 마음이 느껴졌다.
순간 녀석들을 따라가고 싶은 충동이 들었다.
그래. 퀘스트를 완료한 이상 사람을 찾으러 갈 생각이기도 했고, 당장 원래 세상으로 돌아가는 방법도 모른다. 일단 이곳에 머물며 레벨업을 더 하는 게…….
아니. 솔직한 내 마음은 그런 게 아니다.
몇 마디 나누지도 않았는데 벌써 이것들이 사라질까, 또 혼자 남겨질까 두려움이 치솟아 오르려 한다.
그러한 감정을 인정하자,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그러지.”
***
뚜벅뚜벅. 발자국이 모래를 밟았다. 사막을 걷는 것은 전과 다를 것 없었다. 하지만 확실하게 달라진 게 있었다.
내 귀를 간질거리는 사람들의 말들.
목숨을 건졌으니 또 다른 기회가 있을 거라느니, 이 또한 지나갈 것이라느니, 녀석들은 나를 위로하기 위해 애를 썼다.
사실 대화의 내용이야 어떤 것이든 상관없었다. 그저 사람의 말을 듣는 것만으로 기분이 좋아지고 있었다.
그렇게 잠자코 그들의 조언을 듣다가, 조용히 한마디 했다.
“너희들은 지금 어디 가는 거지?”
“다른 마을.”
“다른 마을?”
“이 길로 열흘쯤 가다 보면 낙타 부족이 나오지. 거길 가고 있다.”
“왜?”
평소라면 궁금해하지 않았을 것들도 궁금하다.
“자세히는 알 필요 없어. 걱정하지 마. 최악의 상황이 닥쳐도 네게 피해 주는 일은 없을 거다.”
그렇게 일축한 사내 옆에, 다른 녀석이 고개를 갸웃하며 말했다.
“그것보다. 이상하단 말이야. 진작 몬스터가 나와야 하는데 왜 개미새끼 한 마리 안 보이지?”
“그러니까. 긴장한 게 무색할 지경이야.”
“경계 늦추지 마. 언제 어디서 튀어나올지 몰라.”
이상할 것 없다. 긴장할 것도 없다. 경계를 할 필요는 더더욱 없다.
지금 이 순간에도 나를 피해 뿔뿔이 흩어지는 몬스터 무리가 수백 마리다. 열흘이든 백일이든.
원한다면 몬스터를 만날 일은 영원히 없을 것이다.
밤이었다.
현재 나는 녀석들이 가져온 간이 천막 안에 누워 있다.
이셀라를 포함한 인간들과 대화한 이후로 더 간절해졌다. 원래 세상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방법이야 어차피 ‘그것’. 그러니까 시스템이 알고 있을 것이다.
늘 그랬듯 타이밍이 문제였다. 지금 당장 돌아가고 싶다 해도 그래서는 안 된다.
시간이 멈춘 저쪽 세상의 내 눈앞에는 성요한이 서 있을 테니까.
천외천.
비록 지금의 내가 S급이 됐다 하더라도 성요한과 비교할 수는 없다. 그는 S급 중에서도 하늘 위에 있는 존재다.
이곳에 오기 직전의 상황이 생생하게 기억났다.
지금 상태로 돌아가봤자 성요한에게 한 칼에 내 목이 날아가는 것은 변함없을 것이다.
시스템이 잠잠한 이유도 그 때문이겠지. 강해지라는 말이었다. 무려 성요한과 대적할 수 있을 만큼.
생각만으로도 아득했다.
일단은 퀘스트에서 받은 보상부터 확인해 보기로 했다.
아락투스의 마법 사전을 꺼냈다. 심장이 울리듯 책이 맥동을 시작했다.
그에 맞춰 내 심장이 박자를 맞춰갔다.
쿵. 쿵.
심장의 고리가 반응한다. 그렇게 사전의 첫 번째 장이 넘어갔다.
중력 마법을 배운 두 번째 장을 지나 세 번째 장으로.
장이 넘어가는 시간이 길게 느껴졌다. 공격 마법만 아니면 절반은 성공이다. 지금의 나는 검술만 따져도 S급이며, 중력 마법만 해도 쓰임새가 많다.
두 번째로는 회복 계열도 필요 없다. 박지현의 스킬을 뺏어 쓰면 그만이니까.
바라는 게 있다면.
공간 마법. 시공간을 다루는 기술이 필요하다.
그 순간 페이지가 넘어갔다.
아!
우연일까.
가장 위에 쓰인 글자가 뚜렷하게 눈에 박혔다.
[공간 마법의 기초.]
놀람도 잠시, 그 밑으로 쓰인 온갖 글자들이 빼곡하게 머릿속에 들어왔다. 오랜만에 느껴보는 기분이었다.
그에 따라 진동하듯 여섯 개의 고리가 움직였다. 정신을 집중했다. 압도적인 정보가 쏟아지는 기분이었다.
주체못할 환희가 내 영혼을 툭툭 건드려댔다. 눈을 떴을 때,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자연스럽게 알게 됐다.
그리고 공간 마법이라 이름 붙은 이 마법이 얼마나 무궁무진한 발전 가능성을 품었는지도.
흡족했다. 끝 모를 몬스터를 죽인 보람이 있었다. 그 억겁의 시간을 참아낸 결과로 충분했다.
당장 시험해보고 싶었다.
고리가 톱니바퀴처럼 움직인다. 일순, 잠든 마나가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마법 하나에 내 마력이 3분의 2나 빨아 먹혔다.
공간 마법이 얼마나 위대하고, 또 위험한지 알 수 있는 부분이었다.
마법의 결정이 손톱 끝에서 웅웅댔다. 본능이 이끄는 대로, 손톱을 위에서 아래로 그었다.
그 순간 파충류의 눈처럼 공간이 세로로 찢어졌다.
쩌저적!
갈라진 공간 너머 사막이 보였다. 마치 거울을 보듯 이쪽과 저쪽이 다를 것 없어 보인다.
하지만 엄연히 장소가 다른 곳이다. 이곳과는 무려 500키로미터가 떨어진 곳이었으니까.
또 다른 깨달음을 얻었다. 이곳은 태양계 너머의 행성이 아니다.
완전히 다른 차원의 세상이다.
이거라면.
원래 세상으로 돌아갈 수 있는 단서를 얻었다. 공간 마법의 극의를 깨닫는다면, 가능하지 않을까.
흐뭇한 마음으로 마법사전을 집어넣으려던 때였다. 바람 한 줄기가 마법사전을 건드리고 지나갔다.
세 번째 장에 멈춰있던 마법사전이 다음 장을 연 것도 그다음이었다.
네 번째 장, 다섯 번째 장. 그리고 여섯 번째 장까지.
내가 당황스러울 정도로.
마법사전이 끝도 없이 넘어가고 있었다.
아!
좋아할 때가 아니었다.
조만간, 정보가 물밀 듯이 밀려올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