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8화 건조 (2)
9. ???
[진행도 : 4323/10000]
완전히 마력을 회복했을 때. 심장의 고리가 여섯 개로 늘어났다.
몬스터를 잡을 때마다 차츰차츰 더해지던 마력이 결국 임계점을 뚫은 것이다.
이곳이 아락투스의 무덤이라서 그런 것이라 추측만 할 뿐이었다.
레벨은 여전히 249에서 멈춰 있었지만 성장했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래서 마법의 파괴력이 얼마나 늘어났는지 시험해 보기로 했다.
그때는 나를 둘러싼 고등급의 몬스터들이 순번을 정하듯 서로를 눈짓하고 있을 때였다.
직후, 걔 중 한 놈의 대가리가 푸확! 하고 터졌다.
먼 과거, 일 장로가 보여줬던 이능이 생각나는 장면이었다.
그다음은 일방적인 학살이었다.
나를 집어삼키는 샌드웜의 몸집이 세로로 쭉 찢어진다. 낙타 위에 올라타 시미터를 날리려던 고블린도 마찬가지였다.
몬스터들은 척력이 만들어낸 폭풍에 휘말려 허무하게 찢겨나갔다. 그나마 내게 상처를 입힐 수 있었던 놈들의 발악도 무위로 돌아갔다.
무감각하게 처참한 현장을 한번 쳐다본 뒤, 걸음을 옮겼다.
그래. 이거라면.
10. ???
[8000/10000]
빨라졌던 공략 속도가 다시 느려지고 있었다.
한 달 전, 보스몹을 대동하고 나타난 몬스터 천 마리를 남김없이 쓸어버린 시점 이후였다.
몬스터가 나를 피하기 시작했다.
마나 패턴을 바꿔가며, 사막 깊숙한 곳에 숨어가며, 저주 마법을 시도하며.
그것들이 갖은 꾀를 부리며 내 감각을 속이고 있었다.
뚜벅뚜벅. 끊임없이 베이스 캠프를 바꿔 가며 움직였다.
요즘 들어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내가 살았던 원래 세상의 일들은 사실 꿈이 아닐까?
사막의 내가 외로움에 미쳐서 만든 환상 같은 것이 아닐까. 하는.
콰득!
[8001/10000]
이 숫자가 모두 채워지면 알게 되겠지.
“임한나.”
긍정 대신, 뚜렷한 이름 하나를 되뇌었다.
11. ???
[진행도 : 8922/10000]
동이 트고 있었다.
숨을 들이켰다. 새벽녘의 차가운 공기가 폐부에 스민다.
오늘 하루도 생존하고자 꿈틀대는 것들이 온 사방에 가득하다. 그중 눈에 들어온 것은 녀석이었다.
원래 살던 세상으로 치면 C급에 해당되는 몬스터였다. 그러나 이곳에서는 생태계 피라미드의 가장 낮은 곳을 담당하는 녀석.
모래 두더지가 낑낑거리며 사구를 올라오고 있다.
모래 두더지의 그러한 노력과 별개로 녀석은 곧 죽을 운명이었다.
땅속에서 기어오르는 독사 한 마리가 녀석을 노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심장의 고리에서 마나가 빠져나갔다.
직후, 모래 두더지의 몸이 두둥실 떠올랐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발버둥치던 녀석이 안전하게 사구를 빠져나왔다.
잠시 고개를 두리번거리던 녀석이 후다닥 사라졌다.
시야를 돌렸다. 독사가 우뚝 몸을 멈춰 세우며 도망치는 녀석을 가만히 바라보고만 있었다. 독사의 당혹스러운 심정이 여기까지 전해졌다.
그러는 독사의 생명도 얼마 남지 않았는데 말이다.
독사를 구해 줄까?
그러면 그다음 녀석은? 그 녀석을 살려주면 그다음은?
태양이 반쯤 모습을 드러냈다.
문득, 몬스터와 내 처지가 다를 바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약한 몬스터는 강한 몬스터에게, 강한 몬스터는 더 강한 놈에게. 또 약한 몬스터가 무리를 지어 강한 놈들에게 대항하는 것까지.
이 모두가 장엄한 대자연의 순리였다.
물고 물리는 자연의 순환과정을 지켜보는 것은 그 자체로 깨달음이 되는 법이다.
자연스럽게 눈을 감았다.
폭탄이 터지듯 머릿속이 뜨거웠다. 고통과 희열의 어디쯤이었다.
굳이 뭔가를 하지 않았다.
자연스럽게 몸에 힘을 뺐다. 그것으로 충분하다.
머릿속이 번뜩였다.
화악!
몸이 부르르 떨렸다.
눈을 떴다. 반듯하게 자취를 드러낸 햇빛이 온 세상을 따뜻하게 비추고 있었다.
입을 열었다.
“상태창.”
좌측 상단, 250이라 적힌 숫자가 뚜렷하게 박혀 있었다.
***
머리가 선명해진다.
내가 왜 이곳에 있는지 분명해졌다. 원래 세상에서부터 지금까지.
조각난 기억들을 이어붙였다.
성요한부터 시작된 점이 8922마리의 몬스터를 잡은 것까지 이어졌다.
드디어.
S급에 올라섰다.
이날이 언젠가 오리라 생각은 했다. 그래서 그때가 되면 잔뜩 흥분해서 소리라도 지를 줄 알았는데. 막상 현실이 되자 정반대의 반응이 튀어나왔다.
무미건조하고, 당연히 그래야 한다는 마음뿐이었다. 비록 잃어버린 기억은 찾았으나 메마른 영혼은 여전했기 때문이다.
어쨌든 엄청난 경지에 올라선 것은 분명하다.
레벨로 표기했을 때는 단 한 개 밖에 차이 나지 않는데, 막상 끓어 넘치는 힘은 전과 비교할 수 없었다. 하고자 한다면 못할 것이 없었다.
250에 올라서면서 막혀있던 성장판도 뚫렸다.
이로써 또다시 기하급수적인 레벨업이 이어질 것이라 확신했다.
직전에 얻은 깨달음과 별개로.
나는 도를 닦는 승려가 아니다. 모래 두더지와, 독사와, 샌드웜과 내 처지가 다르지 않다. 오늘 하루를 생존하기 위해 발악할 뿐이다.
1178마리의 몬스터를 죽이는 것에 망설이지 않을 거라는 말이다.
쿠웅!
주먹에 힘을 담아 바닥을 내리쳤다. 지하 깊숙한 곳까지 오러가 닿는다.
끔찍한 비명 소리가 온 사막을 울렸다.
[진행률 : 10000/10000]
[레벨업!]
[잔여 스탯을 분배해 주십시오!]
[퀘스트를 완료했습니다!]
[보상 : 아락투스 마법사전의 세 번째 장.]
[보상을 확인하십시오.]
임한나가 보고 싶었다.
***
“크악!”
부족으로 실려 오는 부상자가 늘고 있었다. 더불어 하루가 다르게 전사들의 숫자가 줄고 있었다.
안으로는 부쩍 늘어버린 사막의 몬스터에, 밖으로는 제국의 최후통첩까지.
더군다나 규합되지 않고 뿔뿔이 흩어진 사막 민족들은 시간이 지날수록 갈등만 커지고 있었다.
총체적 난국이었다.
“모래 민족을 통합해야 해요.”
이셀라가 부족민들을 모아 놓고 외쳤다.
쿰베이라칸 곳곳에 흩어진 모래부족들을 통합한다면.
사막에 자리 잡은 열 개의 부족은 그 수만 해도 3만 명에 달하고, 하나하나가 전사와 마법사, 주술을 배웠다. 혹독한 사막에서 태어났기에 그랬다.
그 부족을 모두 합치면 제국도 함부로 이곳을 넘볼 수는 없을 것이다.
“모래 민족을 통합?”
“제정신이냐 이셀라?”
“제국에 몬스터만으로도 부족해서 갈등 거리 하나를 더 만들자니. 루께서 바라시지 않을 거다!”
대전사의 후보로 오른 이셀라다. 그만큼 부족 내에서 행사할 수 있는 영향력이 커졌지만. 그만큼 이셀라를 견제하는 반대세력도 늘었다.
“이셀라. 정신 차리고 상황을 직시해. 그딴 정신머리로 어떻게 대전사의 자질에 오른 거지?”
“다른 부족의 힘에 기댄다고? 사막의 전사는 그런 것에 기대지 않는다.”
“코앞에 제국의 졸개들이 있는데 도망치려고 하는 것 아닌가?”
멍청하고 무식한 야툼을 위시로 한 사막 전사들이 특히나 그랬다.
‘저것들이 부족을 망치고 있어.’
부족이 진정으로 통합되려면, 야툼부터 죽여야 한다. 그런 생각으로 심장의 고리를 돌리던 이셀라가 멈칫했다.
‘선인장 가시 하나도 고마운 판에.’
대전사의 후보에 같이 오른 야툼을 죽이는 것은 어불성설이었다. 단상에 오른 이셀라가 절규하듯 외쳤다.
“안 그러면 이대로 다 뒤지자고? 비겁한 새끼들. 한데 뭉쳐서 제국을 몰아내도 모자랄 판에. 남의 힘? 루께서 들으셨다간 경을 치겠군.”
그럼에도 전사들은 이셀라의 말을 귓등으로도 듣지 않았다. 무식한 사막 전사들은 올곧은 대신 생각이란 것을 모른다. 곧 다가올 죽음을 축복으로 여기는 것들까지 있었다.
‘이럴 때 마스터라도 계셨다면.’
자신에게 마법을 가르쳐 준 마스터는 왔을 때처럼 홀연히 종적을 감췄다. 언제나 그렇듯 마스터는 중간계의 평화를 위해 움직이고 계시겠지.
겨우 부족의 일 때문에 마스터를 찾는 것이야말로 그분의 존엄을 헤치는 일.
이셀라가 입술을 깨물며 짐을 챙겼다.
“아무도 가지 않는다면 나 혼자라도 가겠어.”
다행히도, 뜻이 맞는 부족의 전사 중 몇몇이 자신을 따라왔다.
그렇게 삼일 째가 되던 날.
“이상한데? 왜 몬스터가 한 마리도 안 보이지?”
“함정을 파고 있을지도. 혹은 나한테 겁먹었거나.”
“웃기는 소리 하지 마. 네가 무서워서 안 나올 거면 제국 놈들은 벌써 도망가고도 남았지.”
부하들의 의문은 이셀라에게도 미스테리였다.
이곳은 남부로 가는 첫 번째 고비였다.
죽음과 황혼의 오아시스. 1만이 넘는 몬스터 무리가 사는 모래무덤이었다.
지금까지는 마스터가 이곳을 지켜주셨기에 몬스터가 자신들을 해치지 않았지만, 이제는 다르다.
다른 부족에 가기 위해서는, 자신들도 목숨을 걸어야 하는 것이다.
‘뭐지?’
그런데 그 흔한 나락개미조차도 보이지 않았다. 보라색 독을 달고 다니며 생명의 진기를 빨아먹는 그것들.
지금은 무조건 등장해야만 하는 타이밍 아닌가?
오아시스 근처를 배회하며 몬스터를 잡아먹는 리저드 무리들이라도 말이다.
이셀라는 눈을 감고 집중했다. 정말 함정을 파 놓은 건가 싶어서.
사막의 일부로서 받은 특권이 있다. 마나를 퍼트려 사막에 있는 몬스터 숫자를 알아보는 것.
헌데 착각이 아니었다. 이 근방에는 몬스터의 씨가 마른 듯 단 한 마리도 보이지 않는 것이다.
“다들 조심해. 혹시 모른다.”
보이지 않는 공포가 더 무서운 법이다. 추적마법에 걸리지 않는 몬스터가 수상했다. 언제 모래 밑에서 몬스터가 튀어나올지 몰랐다.
전사들은 침묵을 유지한 채 시미터를 들고, 천천히 오아시스로 나아갔다.
“저게 뭐야, 사람이야?”
그때 오아시스를 발견한 전사가 옆을 가리켰다. 야자나무 그늘 아래서 휴식을 취하고 있는 인형 하나.
겨우 사람 하나라지만 이곳에서 휴식을 취하는 것 자체가 결코 평범하지 않다는 뜻.
기척을 숨기고 천천히 다가갔다. 지척에 다다른 이셀라와 전사 둘은 잠든 그의 목에 칼을 겨누었다.
“일어나. 이름과 출신을 밝혀라.”
아까까지 장난스러운 말투를 유지하던 전사, 라반이 놈을 툭툭 건드렸다.
‘뭐지? 왜 낯이 익은 거지?’
이셀라는 이게 꿈인가 싶었다. 남자의 얼굴을 안다.
몇 해 전, 마스터께서 대전사의 자질을 지닌 자라고 말했던 자, 자신에게 수치를 줬던 전사였다.
“당신이 여기 왜 있어?”
상황도 당시와 같았다. 주황빛 황혼은 모래를 비추고 있고, 남자는 지친 듯 쓰러져 있다.
문득, 잠에서 깬 남자가 일어나 자신을 바라봤다. 그때와 다른 점이 있다면, 남자에게서 긴장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허둥지둥대며, 발악하며, 겹겹이 중첩된 독기를 달고 다니던 그때와는 달라도 너무 달랐다.
시미터 두 자루가 제 목을 겨누고 있는데도 남자는 안중에도 없다는 듯 몸을 일으켰다.
그러고는 천천히 자신 쪽으로 다가왔다.
“아는 놈이야? 말해, 이셀라!”
“놈! 멈춰라! 움직이면 베겠다!”
부하들의 물음에도 이셀라는 대답할 수 없었다. 이셀라가 이렇게까지 당황한 것은 참으로 오랜만이었다.
건조한 그의 입술이 이윽고 열렸다.
“먹을 것이 있다면 두고 가라. 몬스터 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