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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터는 미래를 본다-127화 (127/170)

127화 건조 (1)

“살려줘? 그렇게 보여?”

일 장로의 얼굴에 귀찮고, 짜증 난다는 기색만 한가득 써 있었다. 애물단지 보듯 나를 쳐다 본다. 게 다였다. 일 장로가 넓은 사막을 둘러봤다.

“조금 뒤로 미뤄준 거지. 고향에 데려다준 대가로.”

“여기가 네 고향이라고?”

일 장로가 대답 없이 몸을 돌렸다. 처음부터 나 따위는 안중에도 없는 투였다.

일 장로의 시선이 허공을 맴돌았다. 곧, 그녀의 초점이 한곳에 맺혔다.

“이제 허락해 주십시오.”

일 장로의 목소리가 사뭇 간절했다.

“시스템과 대화하고 있군. 그놈이 또 뭐라고 말한 거냐.”

예상했듯 그녀는 내 말을 귓등으로도 듣지 않았다.

지금만큼은 그게 다행이라고 여겨졌다. 팔 하나가 날아간 탓 때문인지, 일 장로의 상태가 굉장히 예민해 보였으니까.

뚫어져라 일 장로를 쳐다봤기에 알 수 있었다. 찰나 간에 그녀가 작은 한숨을 쉬었다.

안도하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다음 순간 일 장로와 눈이 마주쳤다.

저번과 똑같았다. 내가 인지할 수 없는 속도였다.

옅은 풀꽃 향기와 함께 그녀가 사라져 버렸다. 붉은 모래가 내 몸을 스쳐 지나간다.

적막이 흘렀다. 주위를 둘러봤다. 끝도 없이 이어진 모래와 두 개의 달만 나를 비추고 있었다.

그렇게 이 붉은 사막에, 또다시 나 혼자 남겨졌다.

***

상황을 정리해봤다.

잠시만. 그런데 어디서부터 퍼즐을 끼워 맞춰야 하지?

뒤죽박죽 엉켜 있는 상황을 풀어보려 해봤자 머리만 더 꼬였다.

아예 처음으로 되돌아갔다.

A급 던전에서 나타난 성요한의 제자를 해치운 것부터.

다음은?

최태성의 만류를 무릅쓰고 백인호를 죽였다.

그 직후 갑자기 성요한이 나타났다. 그렇게 휩쓸리듯 이 세상으로 도망쳤다. 죽어가는 나를 일 장로가 다시 한번 살렸고.

돌아가는 상황에 억지 몇 개만 더하면, 일 장로는 이 세상을 이미 알고 있는 모양새였지.

웃음이 나왔다.

나열한 모든 상황이 삼일 안에 벌어진 것 때문에.

정신없이 돌아가는 고래 싸움에, 등이 터지는 새우가 된 기분이었다.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얻어터지는 것밖에 없는 새우.

자책을 하는 것이 아니라, 사실이 그랬다.

다만 유일하게 다행인 점이 하나 있었다.

이 세상에 오기 전 마지막으로 떴던 메시지. 원래 세상의 시간이 멈추게 됐다.

나는 그것이 시스템의 배려처럼 느껴졌다. 이 세상에서 강해진 뒤, 다시 돌아가라는 ‘시스템’의 배려.

눈앞의 메시지를 바라봤다.

[도전 : 아락투스의 시험.

임무 : 사막에 등장하는 B급 이상 몬스터 1만 마리를 무찔러라!

조건 : 사막의 시련은 온전히 스스로 감당해야 하는 법. 임무가 진행되는 동안, 어떠한 도움도 받아서는 안 됩니다!

보상 : 아락투스 마법사전의 세 번째 장.]

심플한 메시지와 그렇지 않은 내용이었다.

예상은 했지만 어처구니가 없었다. S급을 목전에 둔 지금도 장담할 수 없는 난이도였다.

B급 이상 몬스터 1만 마리. 하루에 백 마리씩 잡아도 100일은 걸린다. 변수를 더하면 얼마나 길어질지 모르고.

조건 몇 개를 추가해서 파동을 퍼트려 봤다.

확인 결과, 이 근처에 있는 B급 이상의 몬스터는 삼백쯤 된다. 잡몹까지 합친다면 천마리쯤 되고.

머릿속으로 상황을 그렸다.

하나가 달려들면 자석에 이끌리듯 반응하는 몬스터인지라, 전투가 시작되면 근방의 모든 놈들을 상대한다는 각오로 임해야 한다.

그럼에도 어쩔 수 없이 도주를 선택해야 할 테고.

파동 끄트머리, 전방으로부터 삼십 키로미터 너머에 오아시스 하나가 잡혔다.

내가 처음 이 세상에 떨어졌을 때 나를 살렸던 그곳. 그곳을 베이스 캠프로 삼았다.

호흡을 가다듬었다.

몸 상태는 이미 최상이다. 지금 당장 전투에 돌입해도 될 정도로.

남은 건 마음의 문제뿐이다. 깨끗하게 비웠다고 생각했지만 드문드문 올라오는 잡념이 나를 괴롭히고 있었다.

남겨두고 온 많은 일들, 돌아가면 해치워야 할 일들 같은 것.

더군다나 황량한 사막은 그 감정을 키우기 더할 나위 없었다.

고개를 털면서 기합을 내질렀다.

아카데미에서 배웠던 교훈을 떠올렸다.

극한의 상황에서 나 자신을 잃지 않는 법. 긍정적인 마인드를 되새겼다.

“설마 뒤지기야 하겠어.”

숨을 가볍게 내쉰 후, 발을 크게 들어 올렸다가 바닥으로 찍었다.

콰직!

손가락 한 뼘 크기의 벌레가 터지면서 진액을 사방으로 뿌렸다. 이래 봬도 B급 독충 중 한 마리다.

[진행도 : 1/10000]

거대한 그릇에 모래 한 알을 넣은 기분이다. 9999개의 모래알만 더 넣으면 된다.

시작이 좋다.

우웅-!

마나를 끌어 올렸다.

놈들의 반응이 느껴진다. 싱싱한 먹잇감을 발견한 듯 꿈틀거리며 내 쪽으로 다가오는 놈들이었다.

지능이 높은 것들이었다. 무리 지어 사방으로 살금살금 기어오고 있었다.

더군다나 시각으로는 파악할 수 없게끔 모래 안에서 움직이는 것들이 대다수였다.

기감이 극도로 발달한 게 아니라면 등급 여하에 관계없이 반드시 죽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콰앙!

땅이 솟구쳤다.

-쿼어어어!

거대한 지네 세 마리가 삼면으로 튀어올랐다. 동시에 독충들이 바닥에서 올라왔다.

우수수 떨어지며 시야를 가리는 모래더미는 방해물이 되지 못한다. 힘껏 박차 올랐다.

“와라!”

***

1. 7일째.

전투 직후 지친 몸을 오아시스 옆에 누였다. 독운이 스물스물 주위를 뒤덮고 있었지만 그런 것을 생각할 때가 아니었다.

[진행도 : 1000/10000]

진행도만 보면 차곡차곡 퀘스트를 진행 중인 것처럼 보인다.

실상은 전혀 달랐다. 벌써부터 한계에 다다랐다.

단전이 텅텅 비었다. 내게는 마나를 모을 시간도 없었다.

언제 어디서 몬스터가 튀어나올지 모르기 때문에.

문제가 많았다.

지난 삼 일 동안 먹은 것이라고는 물뿐이었다. 하지만 수면에 비하면야 먹는 것 따위는 중요한 게 아니다.

쪽잠이라도 좋으니 눈을 감고 싶었다. 긴장으로 꽉 조인 몸을 잠시나마 풀어헤치고 싶었다.

그런 면에서, 쉐도우 나이트를 상대한 것과 비슷한 점이 많았다.

가장 비슷한 점이라면, 조금이라도 눈을 감을라치면 사건이 발생하는 것.

콰득!

본능적으로 고개를 틀었다.

아슬아슬하게 목을 비껴간 송곳니가 어깨를 쥐어뜯는다. 맹독을 머금은 독사였다.

[감당할 수 없는 독기에 노출됩니다!]

[초당 체력이 0.3%씩 고갈합니다.]

[헬리오스의 심장이 맹독을 방어합니다!]

[독기 저항력이 상승합니다!]

어떻게 할지 고민됐다. 이깟 잡몹을 죽이는 것은 별일 아니다.

그 이후가 문제지.

피냄새를 맡은 주위의 몬스터들이 우후죽순 튀어나올 것이다.

한 200마리쯤.

당장 놈들을 다 죽일 수 있느냐도 문제가 아니다. 진짜 문제는 오아시스가 더럽혀지는 것이다.

빌어먹을 일이었다. 겨우 독사 한 마리 죽이는 것에 이렇게 많은 고민이 뒤따른다.

그런데 고민할 시간마저 길게 주어지지 않았다.

독사의 대가리에 달려 있는 더듬이가 꿈틀거렸다.

지금까지 알아낸바, 동료들을 모으는 놈들만의 방식이었다.

서둘러 기다란 놈의 몸체를 찢어 없앴다.

그러나.

쿠구구궁!

여지없이 놈들이 찾아온다.

[아드레날린 부스트를 시전합니다!]

2. 그렇게 보름째.

[진행도 : 1200/10000]

타는 갈증이 느껴졌다.

베이스 캠프를 새로 찾아야 한다는 생각에 끊임없이 걸음을 옮겼다.

3. 한 달째.

[진행도 : 1700/10000]

새로운 오아시스를 발견했다.

그러나 내게 주어진 시련은 그것 말고도 쌓여 있었다. 회복 마법으로 텅텅 비어버린 심장의 고리도, 단전도 찢어질 것 같았다.

독성 때문에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몸이 언뜻 보기에도 심각해 보인다.

선택해야 한다. 이대로 죽을 것인지, 위험을 무릅쓰고 마나를 다시 채울 것인지.

행동은 빨랐다.

시스템이 날 지켜보고 있다면, 어떻게든 살려내겠지. 긍정. 긍정이 중요하다.

반드시 살아남을 것이다.

4. 90일이 흘렀다.

[진행도 : 1999/10000]

이곳에 사는 몬스터를 모두 먹어봤다. 실수로 샌드웜의 독주머니를 씹어 삼킨 게 죽음의 고비였다.

수많은 시도 끝에 그나마 먹을 만한 것은 리저드라는 것을 깨달았다.

긍정.

5. 200일째.

[진행도 : 2200/10000]

애초에 계획했던 100일은 고사하고 그 두 배가 되는 시간 동안 절반도 채우지 못했다.

A급 몬스터가 점점 많아지는 기분이 든다.

현재 레벨은 249. S급 헌터까지 단 1레벨을 남겨둔 상황이었다.

그러나 경험치는 전혀 오르지 않고 있었다.

멈춰버린 경험치바는 0에서 제자리걸음만 반복하고 있는 중이었다.

어째서지?

레벨업을 해도 진작 했어야 하는 거 아닌가?

6. 300일.

[진행도 : 2710/10000]

붉은 사막에 어둠이 찾아왔다. 막 전투를 끝낸 지금이 가장 힘들다. 언제 다른 몬스터가 등장할지 몰라 긴장을 유지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할 일을 안 할 수도 없는 노릇.

몸을 가누기도 힘들었지만 지금 허기진 배를 채우지 않으면 내일은 더 힘들어진다.

우득우득.

리저드의 내장을 제거하고, 꼬챙이에 끼운 후, 불을 피웠다.

치이익.

놈의 피부에서 뚝뚝 떨어지는 진액이 자주색 연기가 되어 하늘 위로 번졌다.

기체 상태라 해도 B급 헌터 이하는 근처도 다가가서는 안 된다. 연기를 들이마시는 것만으로 치명적인 중독에 이를 정도로 독한 것이니까. 적당히 익힌 리저드 고기를 씹어 삼켰다.

[극독물에 자주 노출됩니다.]

[단기간에 많은 독극물을 버텨냈습니다. 특성을 획득합니다!]

[특성획득 : 만독불침(A)!]

[만독불침(A) : 독성에 대한 내성이 극도로 높아집니다.]

“긍…….”

물기 없이 마른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마지막으로 말해 본 게 언제였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정.”

꾸역꾸역 끝맺은 단어의 뒷맛이 씁쓸했다.

긍정은 니미.

어쩌면 지금까지 살아 있는 것도 기적이 아닐까.

7. ???

[진행도 : 4322/10000]

300일이 지나고서는 시간을 세지 않았다. 날짜를 세는 것이 의미 없다고 판단했다.

언제부터인가, 목적성을 잊은 행위만 반복됐다.

몬스터가 나타나면 죽이고, 진행도를 확인하고, 또다시 죽이고, 휴식을 취한다.

내가 이 짓을 왜 하고 있었더라.

기억이 드문드문 없어지기 시작했다. 문득 정신을 차리면 주위에 몬스터 시체가 널브러져 있는, 그런 식이었다.

그날도 멍하게 몬스터를 찾아 배회하고 있던 때였다.

북소리가 들렸다. 아니, 그렇게 느껴지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건 앞으로 등장할 몬스터의 마나 파장이었다. 모래를 가르고 나타난 놈은 개 대가리를 달고 있는 인간형 몬스터였다.

몬스터 도감에서도 본 적 없던 놈이었다. 굳이 따지자면 이집트 신화 속 아누비스와 비슷하게 생긴 것.

헌데 겨우 개 대가리를 달고 있는 놈의 몸 안에서 느껴지는 파동의 양이 살벌하다.

따끔따끔할 정도로.

그것만으로도 파동의 깊이를 유추할 수 있었다.

A급 말엽의 수준. 능히 보스몹 중에서도 최강이라 불려야 할 놈이었다.

“덤벼.”

짐짓 여유로운 척 해 봤자 앞으로 일어날 전투가 얼마나 살벌할지는, 부들부들 떨리는 손가락이 증명하고 있었다.

놈이 지팡이를 휘둘렀다. 동시에 놈의 심장에 모여있는 고리가 요동쳤다. 무려 일곱 개의 고리를 가지고 있는 놈이었다.

젠장할.

내 몸이 어떤 힘의 작용에 의해, 놈에게로 끌려가고 있었다. 중력 마법이었다. 우리의 전투는 그렇게 개 대가리의 선공으로 시작됐다.

끌려가고 있는 와중에 장기 내부에서 느껴지는 압력 또한 마찬가지로 막대했다.

내게 당한 것들의 심정이 이랬던가? 도저히 벗어날 수 없을 것만 같은 기분.

이 와중에 놈이 날린 불덩어리까지 쏟아지고 있는 판국이니, 망설일 것 없었다. 전력을 쏟아부었다!

8. ???

[진행도 : 4323/10000]

단 한 끗 차이로 놈을 이겼다. 몸 상태가 심상치 않았다.

이번에도 내 목숨을 천운에 맡길 수밖에 없었다.

회복 마법을 쓸 수 있을 만큼 마력을 회복할 때까지. 그 누구도 나를 건드려서는 안 된다.

그 조건이 얼마나 말이 안 되는지를 알면서도, 나는 죽지 않을 것이다. 그런 확신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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