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6화 급전개 (4)
백인호의 붉게 충혈된 두 눈에서 알 수 있었다. 놈이 각성제를 썼다. 놈의 눈이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나를 죽이면 너도 죽는다!’
거기에는 그런 확신이 담겨 있었다. 어느 정도 놈의 말이 사실이기도 했다.
이대로 공격을 계속 진행하면. 반드시 백인호의 목을 벨 수 있다. 하지만 백인호의 주먹도 내 배를 강타할 것이다. 놈에게도 그 정도 깜냥은 있으니까.
백인호의 주먹 한 방에 내가 죽게 될 확률을 계산해봤다.
내가 놈의 방어막을 뚫어냈듯 놈의 주먹도 헬리오스의 심장을 뚫어낼 수 있다.
그렇게 되면 내 장기가 뒤틀리고 곤죽이 되겠지.
그런데 백인호의 거래에 응하는 것은 그것대로 곤란했다. 내가 놈을 죽일 수 있는 건 단 한 번의 기회, 지금뿐이다. 다음은 없다.
달려오고 있는 손영혁과 협회가 백인호를 철통방어할 것이다.
다른 날을 계획하는 것도 물거품이 될 것이다.
가장 개 같은 건, 백인호도 이걸 알고 있다는 것이다.
‘넌 나를 죽이지 못해!’
놈의 두 눈이 그런 확신을 담고 있었다.
결정했다.
리스크를 감수할만하다는 판단이 섰다.
롱소드를 멈추지 않고 뻗었다.
죽는 건 너 혼자다!
백인호를 지키고 있던 세 번째 방어막이 날아갔다. 그때부터는 백인호의 근육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롱소드를 꽉 조이는 근섬유 한올 한올이 그대로 느껴졌다. 그것이 내게는 어떠한 발악으로 느껴졌다.
네 겹, 다섯 겹. 끝내 마지막 방어막이 갈려 나간 순간이었다.
때마침 집중력이 다 떨어졌다.
불가항력이었다. 잔뜩 조였던 긴장이 확 풀렸다. 지금부터는 검을 멈추려 해도 멈출 수 없다.
그렇게 정지된 영상이 재생되듯, 세상이 빠르게 움직이며 온갖 소음이 터져 나왔다.
그중 가장 큰 음성은 역시 백인호의 것이었다.
“끝내 같이 죽자는……!”
백인호의 말이 채 끝내기도 전에 내 검이 놈의 목을 갈랐다. 놈의 얼굴이 허망한 표정을 담고 위에서 아래로 떨어졌다.
때마침 백인호의 주먹이 내 복부에 충돌하고,
화악!
동시에 회복 마법이 내 몸을 둘러 감싼다.
곧장 내부를 관조했다. 조금이라도 지체했었다면 큰일이었겠지만. 약간의 출혈을 제외하면 내 장기는 무사했다. 두말할 것 없이 깔끔한 내 승리였다.
와장창 깨지는 유리 소리가 연이어졌다. 백인호의 목이 바닥에 구르기 시작할 때.
풀쩍하고 주위로 아홉 명이 착지했다. 각각 서로를 대치하면서.
“해치웠나?”
음지 삼인방 중 한 명이 그런 식으로 말했다. 조영은이 재수 없는 소리 하지 말라며 눈짓했다.
하지만 이미 일어난 일을 그깟 부정 타는 소리가 막을 수는 없는 것이다.
백인호는 확실히 죽었다. 경험치가 올랐다는 메시지가 그 전리품이었다.
“죽이기 직전 각성제 비슷한 걸 느꼈다. 채취해.”
“옛!”
눈치 빠른 탱커가 얼른 바닥에 흐르는 피를 손수건에 묻혔다.
정면을 바라봤다. 손영혁의 표정이 영 좋지 않았다.
“이태진.”
손영혁이 할 말 많은 눈빛으로 나를 응시한다. 제 형 쪽으로는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있었다.
손영혁의 입이 열리기 전에 내가 먼저 말했다.
“나가서 만납시다.”
그 말만 던지고 바깥으로 몸을 던지려 할 때였다.
“어딜!”
손영혁이 내 몸을 가로막으려 했다. 이 상황까지도 사전에 약속된바, 화이가 나섰다.
“동생아. 형을 봤으면 인사해야지.”
화이가 손영혁의 손을 낚아챘다. 그 순간 몇 번이나 주먹이 오고 갔다.
어쩔 수 없이 뒤로 물린 손영혁의 눈길에 살의가 깃들었다.
또한, 화이의 얼굴에서도 전에 보지 못한 표정이 돋아났다.
“이태진. 일이 커지는 게 싫으면 기다려라.”
“기다리지 마. 지금부터는 가족사가 될 것 같으니까. 혹시 구경할 사람?”
화이가 나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머지는 알아서 하라고 하고. 목적을 이뤘으니 여기 있을 필요는 없었다.
.곧장 할 일이 있었다. 여기서 빠져나가는 순간 아락투스의 시험을 치르러 갈 계획이었다.
그렇게 다시금 창밖으로 몸을 던지려 할 때.
머릿속이 번쩍거렸다.
미래?
아니다. 그런 종류가 아니라. 검신의 축복이 경고를 보내오고 있었다.
피부가 따끔거렸다. 주위를 살펴봤지만 특정할만한 스킬은 따로 없었다.
그러나 검신의 축복이 이 정도로 신호를 보내는 데는 이유가 있을 것이다. 풀었던 긴장을 다시 채우려고 한순간.
내 앞에 있던 공간이 일렁거렸다. 마치 검으로 종이를 베는 듯했다.
그렇게 공간이 세로로 찢어지기 시작했다.
칠흑 같은 어둠이 찢어진 공간 뒤로 가득했다. 그게 불길했다. 뭔지는 몰라도 좋지 않은 것은 분명했다.
암흑 공간 안으로 오러 블레이드를 날렸다.
있는 힘껏, 전력을 담아서!
하지만 무의미한 시도였다.
끝 모를 어둠이 순식간에 오러를 먹어치웠다.
때마침 그 뒤로 걸어 나오는 인영이 보였다. 검신의 축복이 요동친다. 빨리 몸을 피하라는 신호를 몇 번이고 보내고 또 보냈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저벅저벅 이쪽으로 다가오는 인영을 봐버렸다.
헛숨을 삼켰다.
깔끔하게 넘긴 머리에, 손에는 사브르를 든 남자.
성요한.
입으로 말하려 했지만 그럴 수 없었다. 성요한을 보자마자 몸이 굳어 버렸으니까.
어느새 성요한이 공간을 완전히 뚫고 나오고 찢어졌던 공간이 스르륵, 봉합됐다.
성요한의 무정한 눈빛이 나를 가리킨다.
그 순간만큼은 아무도 입을 열지 못했다. 방금까지 치고박고 싸우던 화이와 손영혁마저도 굳은 채 그 장면을 바라만 보고 있었다.
독사 앞의 개구리 꼴이었다.
이윽고. 나를 한참 동안 쳐다보던 성요한의 입술이 열렸다.
“죽어라.”
마치 명령 같았다.
차마 반응하지 못할 속도로 날아온 어떤 기운이 내 심장을 꿰뚫는다.
아니, 꿰뚫으려 했다.
눈을 한번 깜박인 순간.
내 앞에 가녀린 등이 보였다. 흑발을 길게 늘어뜨린 여인의 등이었다.
“일 장로.”
성요한이 무신경한 목소리로 그렇게 말했다. 반면에 여인, 그러니까 일 장로의 목소리는 다급하기 그지없었다.
“어서 방법을 생각해!”
방법?
“여기서 벗어날 방법 말이다. 빨리!”
일 장로가 으스스한 말투로 그렇게 말했다. 일 장로가 지금처럼 다급하게 말했던 적이 있었던가?
반면, 성요한은 여전히 무덤덤한 얼굴 그대로였다. 성요한이 손을 저었다.
콰드드득!
미처 파악할 수 없는 찰나의 순간, 일 장로의 팔이 뜯겨 나갔다. 기류에 휘말린 일 장로가 저 멀리 날아갔다.
성요한이 내 앞으로 천천히 다가왔다.
더 이상 나를 지켜주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지척까지 다가온 성요한이 손을 휘둘렀다.
심장이 따끔거렸다. 눈동자만 살짝 내렸다. 어느새 사브르가 내 심장에 박혀 있었다.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아슬아슬했다. 너무 늦지 않기를 바랐다.
그때는 일 장로가 말한 방법이란 것이 완성된 순간이었다.
[새로운 마법을 배우기 위해서는 합당한 시험을 거쳐야 합니다. 그러시겠습니까?]
아락투스의 마법사전 다음 장이 펼쳐졌다.
화악!
찰나 간에 내 몸이 공간 속으로 잡아먹혔다.
마지막 순간에 보인 것들이 번진 피 사이로 슬그머니 보였다.
서서히 커지는 성요한의 눈, 회색빛으로 멈춘 세상, 그리고 다급하게 내 어깨를 붙잡은.
일 장로!
[불안전한 차원이동이 감지됐습니다. 시간의 흐름이 정지합니다.]
***
비몽사몽한 가운데 눈을 떴다. 사막. 붉은 모래가 가득한 곳이었다. 이곳을 안다.
원래 살던 세상과는 전혀 다른 곳. 이셀라가 살고 있는 태양계 너머의 행성이었다.
마지막 힘을 쥐어짜 내 도망쳐 온 곳이다. 살 수 있다는 확신보다는, 본능에 의한 행동이었다.
그 대가가 분명해 보였다.
몸을 가눌 수 없었다. 아니, 의식이 있는 것만으로 기적이었다. 성요한의 사브르에 심장이 찔린 즉시 심장이 터졌다.
그것에 휘말린 다른 장기들도 마찬가지다. 소용돌이치듯 곤죽이 된 상태였다.
회복 마법?
그딴 것으로 살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박지현이 아니라, 어떤 S급 힐러가 와도 나는 죽는다.
그때였다. 귓전으로 일 장로의 감격스러운 음성이 터졌다.
“드디어!”
삐걱대는 고개를 돌렸다. 감기는 눈으로 일 장로가 담겼다.
그녀는 눈물을 주르륵 흘리고 있었다. 아마 내 상태가 정상이었다면, 저 모습을 보고 같이 눈물을 흘려줬을지도 모르겠다.
누누이 말하지만 일 장로의 외모는 감히 아름답다는 표현으로는 부족한 것이어서, 어쩔 수 없는 것이었다.
허나 생각을 이어나가기에는 정신은 혼미해지고, 눈이 감겨 왔다.
과거의 기억을 돌이켜 보면 이곳은 몬스터들이 던전 바깥에 서식하는 곳이었다. 아마 조만간 사막 곳곳에 고등급 독을 내뿜는 그것들이 나를 죽이러 올 것이다.
“너는. 이대로 두면 죽겠지.”
감격에 사무친 일 장로가, 문득 얼굴을 일그러트리며 나를 내려다봤다. 그때 나는 억지로라도 졸린 눈을 뜨려 애쓰고 있었고.
“이걸 어떻게 해야 할까.”
좋았던 기분이 나 때문에 망가졌다는 듯, 음성에 실린 짜증이 명백했다.
입을 열 수 있다면 그렇게 했을 것이다.
나를 살려라, 원하는 게 무엇이든 주겠다. 그토록 바라던 교주 자리든, 아니면 어떤 것이든.
허나 점점 감겨오는 눈꺼풀은 세상 그 어떤 것보다 무거운 것이었다. 벌어지지 않는 입술도 그러했고.
“죽는 거야? 진짜 죽는 거야?”
콕콕.
그녀가 집게손가락으로 내 얼굴을 찌른다. 은근한 기대를 담고서.
“……일. 장.”
입을 연 것만으로 기적이라고 부를 수 있겠지만.
기적은 그것으로 끝이었다.
티비 전원을 끄듯, 어떠한 생각도 이어지지 않았다.
그러던 문득 다시금 티비 전원이 켜지는 순간이 있었다.
몸이 부유하는 기분이 들었다.
이게 죽는다는 건가?
생각보다 몸이 편하다. 오히려 개운한 기분이 들기도 하고. 아드레날린 부스트가 남긴 정신적 데미지도 없다.
그래도 천국에 왔구나, 하는 생각과 함께 눈을 떴을 때.
두 개의 달이 보였다. 그리고 지천에 깔린 붉은 모래가 바람에 휘날리고 있다.
바뀐 것이라고는 무대가 밤으로 바뀐 것뿐이다.
“…….”
숨을 들이켜고 내쉬어 봤다. 호흡이 편하다. 일부러 몸에 통증을 유발해봤다. 정상적인 반응이 이어졌다.
“죽은 건 아닌데.”
안력을 집중시켰다. 사방 수십 키로미터가 한눈에 들어왔다.
끝없이 이어진 붉은 모래와 달, 그리고 저 멀리서 달빛을 받으며 저벅저벅, 천천히 걷는 일 장로까지도.
그때.
-쿠뤄러러!
지축을 흔드는 괴성이 터졌다. 일 장로의 바로 옆에서. 두꺼운 사구를 뚫고 올라온 샌디타이드가 아가리를 쩍 벌렸다.
던전에서 보던 것들과는 비교할 수 없는 크기였다. 족히 30미터는 넘는 지네의 몸체에서 강한 파동이 느껴졌다.
A급 던전에서도 보스몹으로 취급될 놈이다.
그런데 일 장로는 그 가운데서도 홀로 여유로워 보였다. 팔 하나가 사라진 그녀는 처음부터 걸음을 멈춘 적이 없었다.
쯧, 한번 혀를 차는 것을 끝이었다.
거대한 모래 지네의 대가리가 터졌다.
후두둑-
떨어지는 놈의 보랏빛 혈액이 비처럼 쏟아졌다.
한 방울마다 지독한 독기를 담고 있는 것이다. 곧장 오러를 몸에 휘감으며 다시 정면을 바라봤다.
일 장로가 자줏빛 폭우를 맞으며 이쪽으로 걸어왔다.
“일어났으면 뭐해? 안 움직이고.”
천천히 다가온 일 장로에게 어떤 말도 할 수 없었다. 왠지 모르게 얼굴에 피로가 짙어 보였다. 샌디타이드를 처리한 것 때문이 아니었다.
그래. 그것은.
“날 살려 줬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