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5화 급전개 (3)
숨이 턱 막혔다.
네로드 하나로도 그런데 레인 우버 여섯?
혹시 몰라 되물어봤지만 돌아오는 답이 같았다.
하나 상대하기에도 벅찰 놈들이 떼거지로 내 쪽으로 몰려오고 있단다.
“어때. 이제 음지쪽 정보력을 믿어주는 건가? 기다려 봐. 다음 것도 있어.”
신난 표정의 화이가 다음 녹음기를 꺼냈다. 이번에도 잡음이 뒤엉킨, 낮은 품질의 녹음기였지만 의미를 알아듣는 것에는 무리가 없었다.
-마음이 바뀌었다. 영혁의 레벨도 날이 갈수록 높…….
“손정연?”
“내 조부를 그렇게 부르는 사람은 또 처음 보네. 어쨌든 계속 들어 봐.”
-최선은 족쇄를 채우는 것이겠지만 그게 힘들다면 죽여야지. ……성도 마찬가지. ……달 안에 마무……!
거기까지가 끝이었다. 녹음기를 집어넣은 화이가 문득 정색했다.
“레인 우버가 아니더라도 너는 한 달 안에 죽을 거야.”
화이가 확신하며 말을 이었다.
“지금 영감이 통화 중인 사람. 인도에 사는 S급 주술사 중 한 놈이거든. 듣기로는 네로드만큼 최면술을 잘 쓴다지.”
“그러면 족쇄라는 말이.”
“세뇌술의 한 종류겠지.”
“왜 하필 한 달이지?”
“그놈이 다음 달쯤에 한국으로 넘어오거든. 네로드가 일을 서두르는 이유가 이것 때문이야. 공들인 보물을 뺏기기 싫다는 거지. 어라. 안 놀라네?”
“네 말이 틀렸으니까.”
다른 건 몰라도. 내가 죽는 날짜는 한 번도 바뀐 적이 없었다. 죽더라도 나는 240일이 지난 후, 성요한에게 죽는다.
다른 미래는 몰라도 그것 하나만큼은 바뀐 적이 없으니까.
그래도 복잡한 심경은 어쩔 수 없는 것이었다. 일거리 하나를 치우려 왔는데 두 개를 떠맡은 기분이다.
화이가 손가락을 튕겼다.
“어떡할래? 백인호. 죽여?”
“죽여야 할 이유가 더 늘었지.”
지금 내 적은 총 네 명.
성요한, 레인 우버, 손정연, 백인호.
더 나가자면 하오란까지 있지만 당장은 논외로 쳤다.
척 봐도 숨이 막힐 라인업이다. 말로 합의를 볼 수 없다는 점 때문에라도 그랬다. 놈들처럼 강자들의 사고방식이란 그런 것이다.
내 것으로 만들거나, 죽이거나.
“이 정도면 네가 말한 조건 두 가지는 만족한 것 같은데.”
“필요한 돈은?”
“우리 사이에 돈은 무슨.”
역시. 지금껏 질질 끌었던 이유는 돈 때문이 아니었다.
그보다 더한 것을 요구하기 위해서였다.
“원하는 게 뭐지?”
“크게 어려울 건 없고. 이번 작전에 나도 끼워 줬으면 좋겠는데. 백인호 죽이는 거.”
“뭐? 속셈이 뭐냐.”
“나도 볼 일이 있거든.”
“그 볼일이 뭔지 말해.”
녀석이 피식 웃었다.
“나머지 멤버가 곧 올 거야. 그때 들려 줄게. 이런. 벌써 왔네.”
때마침 문이 열렸다. 익숙한 얼굴들이 보였다. 조영은을 포함한 음지 3인방.
내 얼굴이 찌푸려졌다.
“암살 경험이 있는 A급 헌터 넷이라고 했다.”
“어머. 이 팀장님. 저 이래 봬도 사람 죽여 본 적 많아요.”
조영은은 그게 자랑이라도 되는 것처럼 위풍당당한 얼굴로 내게 걸어왔다.
“뭘 말하고 싶은 건지 알겠어요. 저번 던전부터 백인호까지. 저희들이 아무것도 한 게 없다는 거죠? 그러고 돈만 받아 처먹었다는 거잖아요. 그런데 저희도 억울하거든요.”
“억울?”
“음지 세계라는 게 안 그렇게 보여도 신뢰가 생명이거든요. 일성에서 저희 신뢰가 날아갔는데 제 기분이 어떻겠어요? 그러지 말고 만회할 기회 주세요.”
돈귀신이 붙은 조영은이 내 옆으로 바짝 붙어왔다.
“대신 대가는 확실하게. 일이 일인만큼 A급 던전에서 이야기한 것에서 따블로. 어때요?”
“암살이 또 우리 전문이라. 허허.”
“믿고 맡겨 보시죠.”
음지 3인방이 저마다 한마디씩 했다. 특히 나머지 두 명의 매우 어색한 연기톤이 인상적이었다.
그러며 조영은에게 눈짓한다. 잘했냐는 듯. 조영은이 팔꿈치로 나머지 두 명의 복부를 찌르면서 말했다.
“아. 얘들은 밥만 줘도 만족하는 애들이라. 돈은 저한테 주면 됩니다 고객님!”
잠시 고민했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음지 3인방의 움직임 정도라면 쓸 만하다는 판단을 내렸다.
또한 지불할 수 있는 게 돈이라면 나로서도 편하고.
“고객님이 생각하시는 마감기한이 언제인가요?”
“최대한 빨리. 오늘 밤이면 좋겠는데.”
그러자 화이가 곤란한 얼굴로 말했다.
“그러면 암살이 아니야. 기습이지.”
“무슨 뜻이지?”
“백인호도 알고 있을 거라는 뜻. 우리가 죽이러 갈 거라는 걸.”
그럴듯했다.
내가 화이를 찾아왔듯, 백인호도 그만한 정보통이 있을 수 있으니까. 아니, 반드시 있을 것이다.
“지금쯤 협회 쪽에서 백인호를 사방팔방으로 보호하고 있을 거야.”
“그걸 몰래 뚫을 방법은?”
화이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없어. 협회에서 나온 A급 헌터 네 명을 속이고, 백인호의 자택 안으로 들어가는 것부터 난관이야. 그런데 자택 안에 들어가도 문제지. 백인호의 기감을 속이는 건 불가능에 가까워.”
“협회에서 나온 A급 네 명.”
“응?”
“그게 네 목적이군.”
멍하니 나를 바라보던 화이가 목을 드러내며 웃어 젖혔다.
“맞아. 손영혁이 백인호를 지키고 있다.”
화이가 웃었다.
“어쨌든 작전은 정공법…….”
“아니.”
이번엔 내가 고개를 저었다.
“기척을 숨기는 건 걱정하지 마라.”
확신한다. S급 중에서도 나만큼 마나 컨트롤을 잘하는 헌터는 몇 없다고.
절정에 다른 감각 앞에서 기척을 숨기는 것쯤은 일도 아니었다.
화이를 비롯한 음지 3인방이 의문을 띄며 나를 바라봤다.
백문이 불여일견.
쏴아악!
화이와 음지 3인방이 눈에 띄게 당황했다. 방금까지 바로 앞에 있던 녀석이 자취를 감췄으니 그럴 만했다.
다만, 나는 처음부터 그 자리에 있었다. 쉐도우 나이트를 상대하며 느꼈던 깨달음의 일부였다.
“자, 장난치지 말고 나와.”
“여기 안에는 있는 거죠?”
묶어 뒀던 기감을 확 풀었다. 어둠 속에 잠겨 있던 내 몸이 그제야 드러났다.
“어. 이렇게 되면 믿을 수밖에 없겠는데.”
화이와 음지 세 명이 서로를 바라보다가, 떨떠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
한남동의 으리으리한 주택가에 도착했다. 멀리 불 꺼진 백인호의 집이 보였다.
-백인호가 돌아오는 시각은 21시 정각. 그 안에 기척을 숨겨야 해. 가능하겠어?
가능하다는 말만 남기고 휴대폰을 쓰레기통에 버렸다. 장비를 착용하고, 스킬을 점검했다.
그 직후.
후웅!
내 몸이 어둠 속에 동화됐다. 그 후부터는 일사천리였다. 백인호의 자택 천장에 달라붙은 나는 조용히 숨을 가다듬으며 기다렸다.
작전은 그런 식으로 진행될 것이다.
한순간 내가 마나를 끌어올리면, 바깥에서 대기 중인 음지 것들이 튀어나온다.
그때 쯤 이 근방에 숨어있을 협회 것들도 마찬가지로 뛰쳐나오겠지만.
그때는 이미 백인호의 목이 날아가 있을 것이다.
그래. 그럴 것이다.
몇 번이나 머릿속으로 시뮬레이션을 돌리고 있을 때였다.
아까부터 시작된 잡념을 떨치기 힘들었다. 성요한부터 시작된 것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네로드까지 도착했다.
그 와중에 백인호를 죽이는 것이 맞는가, 하는 쓸데없는 생각마저 끼어들었다.
백인호를 죽였을 때 내가 감당해야 할 온갖 리스크들, 일이 잘 풀리지 않았을 때 일성에 끼칠 일들 같은 것.
고개를 털었다.
다시 한번 가슴속에 확신을 품었다. 그렇게 숨을 가다듬고 있을 때였다.
쿵, 하는 소리가 들리며 자택의 문이 열렸다. 백인호가 어둠 속을 천천히 걸어오고 있었다.
눈을 감았다. 백인호의 목소리가 또렷하게 들렸다.
“블랙마켓에서 구입한 휴대폰이다. S급 보안 마법이 겹겹이 둘러싸였어. 그러니까 당장 말해. 나한테 무슨 일이 생긴다고?”
휴대폰 너머 웅얼거리는 목소리가 들렸다.
원한다면 상대방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지만. 그 순간 내 모습이 드러날 것인지라, 일단 조용히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미끼? 또 그 헛소리. 저번에도 말했지만 이태진은 내 손을 떠났다. 죽이든 살리든 네 마음대로 하라고.”
백인호가 피식 웃었다.
“내 뒤를 밟아? 그러라고 해. 나까지 도달하기 전에 협회 것들한테 죽을……. 뭐? ……그게 무슨.”
백인호의 말이 뚝하고 끊겼다.
혹시 나를 발견했나? 아니, 그건 아니지만.
불안한 예감이 들었다. 그 순간 백인호의 몸 위로 붉은 아지랑이가 백인호의 피어올랐다.
집기가 깨지고 벽이 무너지는 소리가 들렸다.
일이 틀어졌다. 어디선가 정보가 샌 것이다. 이대로라면 나를 발견하는 것도 시간문제.
지체할 필요가 없었다. 붉은 아지랑이 쪽으로 몸을 던졌다. 동시에 세상 모든 것이 느려졌다.
인식의 속도가 지나치게 빨라서 생기는 괴리율이었다.
[아드레날린 부스트를 시전합니다!]
[오러 블레이드를 시전합니다!]
[일점 폭발을 시전합니다!]
감춰줬던 감각을 풀어 젖히며 주요 스킬을 모조리 시전했다.
내 몸에서 빛이 뿜어져 나왔다. 아직 마나에 불과한 그것이 스킬로 변하는 전조현상이었다.
빠르게 좌우를 주변을 살폈다.
역시 예상했듯, 서서히 양쪽 창문이 깨지고 있었다.
옆에는 복면을 쓴 네 명이, 반대쪽에서는 손영혁을 포함한 다섯 명이 이쪽으로 몸을 던지고 있었다.
빠르게 계산을 마쳤다.
이 중, 내가 검을 내지르는 속도가 가장 빠르다!
다시금 정면을 바라봤다. 서서히 백인호와 가까워지고 있었다. 느려진 시간 속에서도 백인호의 눈동자만큼은 여느 때만큼 빠르게 굴러가고 있었다.
그러던 때, 뒤룩뒤룩 굴러가는 백인호의 눈깔이 정확히 내 정면에서 멈췄다.
동시에 백인호의 등 뒤에서 빛이 뿜어져 나온다.
허나 늦었다.
저 빛이 스킬로 변하는 속도보다, 내가 놈의 몸을 가르는 게 더 빠를 것이다.
놈과의 거리가 약 1미터쯤 남았을 즈음. 검을 쥔 오른손을 옆으로 휘둘렀다.
느려진 시간 속에서 검을 휘두르는 건 꿈속에서 허우적대는 것과 비슷한 느낌이다.
천근처럼 무거운 공기의 마찰을 이겨냈다.
여느 때보다 날카로운 칼날이 백인호의 목으로 향한다!
그런데.
백인호의 입꼬리가 천천히 올라가고 있었다.
웃어?
나야말로 웃음이 나온다. 놈의 저 웃음은 가짜다. 나를 잠시라도 당혹시키려는 같잖은 수작!
그렇게 내 롱소드가 놈의 목 지척에 다가갔다. 그때도 놈은 웃음을 거둬들이지 않았다.
백인호의 목에 검을 갖다 대자마자 느껴지는 게 있었다. 놈에게 걸려있는 온갖 보호 계열 스킬이 걸려 있었다.
물리는 물론이고 마법과 저주 계통까지 보호해 주는 스킬의 한 종류였다.
그러나 이것마저도 작전을 시작하기 전부터 계산된 바였다.
으드득!
거침없이 방어막을 뚫고 나갔다.
그렇게 리저드의 외껍질을 연상케 하는 놈의 첫 번째 방어막은 순식간에 파괴됐다.
곧장 두 번째 방어막이 느껴진다. 첫 번째보다 족히 두 배는 더 단단한 그것마저도 두부처럼 갈려 나갔다.
놈의 표정이 일순간 일그러졌다. 백인호가 다음 수를 생각해 낸다.
느려진 시간 속, 백인호의 주먹이 내 복부를 향해 날아오고 있었다. 내가 예상했던 놈의 스펙보다 더 강하고 빠르다.
어떻게?
내가 모르는 놈의 숨겨진 능력이 있었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