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4화 급전개 (2)
마치 RPG 게임이 연상됐다. ‘퀘스트’라는 이름부터, 임무와 보상, 그리고 기한까지 적혀 있는 게 꼭 그랬다.
가만 생각해 보면 각성자라는 것 자체가 그렇다.
상태창과 스킬, 특성까지.
이것 또한 시스템의 의도일까 싶었지만. 지금은 그런 것을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가만히 나를 바라보고 있는 일 장로에게 말했다.
“물어볼 게 있다. 성요한은 시스템과 무슨 관계지?”
그렇게 물어봐도 일 장로는 미동 없이 가만히 나를 쳐다보기만 했다.
“그런다고 네 주인의 뜻이 변하지는 않아. 넌 나를 죽일 수 없다.”
도발에 가까운 말을 해봐도 일 장로의 표정에는 변함이 없었다.
활화산 같은 분노는 사라진 지 오래였다. 차가운 눈빛이 나를 응시하고 있다.
오히려 그게 더 불안했다.
분명 일 장로가 나를 죽이지 못한다는 확신이 있었음에도 목이 꺾이는 환상이 보였다.
그렇게 만약의 상황을 대비하고 있을 때였다. 일 장로가 넌지시 말했다.
“그분께서는 네가 나를 고향으로 돌려보내 준다는구나.”
“고향?”
“믿어야지. 믿어야지. 그것만 믿어야지. 전지하신 그분께서 약속한 것이니. 믿어야지.”
일 장로가 주문처럼 같은 말을 중얼거렸다. 또 다른 단서임이 분명할 그 말을 되물으려고 했다.
때마침 홀연한 바람 한 줄기와 풀잎 향기가 내 옆을 스쳐 지나갔다.
그것이 끝이었다. 다시 고개를 돌렸을 때 일 장로는 어느새 사라져 있었다.
***
하루가 더 지났다.
[퀘스트!
등급 : SS
목표 : 공동의 적, 검신 성요한이 당신의 존재를 인지했습니다. 당신과 당신의 동료 모두를 해칠 그를 처단하고 시스템의 안정을 도우십시오!
보상 : ???
남은 시간 : 229일]
퀘스트의 시간은 착실하게 줄어들고 있었다. 머리를 굴리고 굴려도 추측할 수 있는 건 하나밖에 없었다.
성요한과 시스템의 사이가 썩 좋지 않다는 것.
그리고 그 고래 싸움에 나라는 새우의 등이 터지게 생긴 것.
변하는 것도 없었다. 목표가 조금 더 명확해졌을 뿐이다. 저 날짜가 도달하기 전에 성요한을 죽여야 한다.
그리고 그 방법은.
최태성과 손정연, 혹은 일 장로에게 힘을 빌리는 것을 생각했다가, 고개를 저었다. 그것은 최후의 수단이다.
다시 한번 시스템과 협상해 보는 것은?
그것도 기각시켰다. 대답을 들려줄 것이었다면 이미 미래가 보였을 것이다.
그래서 지금 할 수 있는 것만 나열해 봤다.
그렇게 나온 것이 총 세 가지였다.
1. A급 던전을 다시 공략하는 것.
2. 마법 사전이 내리는 퀘스트를 진행하는 것.
3. 백인호를 죽이는 것.
1번은 가장 무난한 방법이지만 남은 시간을 고려했을 때 가장 위험한 방법이기도 하다.
제일 끌리는 것은 역시 두 번째였다. 마법적인 역량을 향상시키는 것.
검술의 성장이 슬슬 더뎌지고 있다. 다른 쪽으로 확장을 시도할 필요가 있었다.
만지작거리던 아락투스의 마법사전을 덮고 일어섰다.
그전에.
일단 백인호부터.
***
일성은 온통 백인호에 대한 이야기로 정신없이 가득 차 있었다.
당자 B-1팀장 자리를 어떻게 할 것이냐가 화두였다.
위기는 기회라고. 정철규를 비롯한 고위급 헌터들이 열기를 띠고 있었다.
이걸 좋아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모르겠지만.
덕분에 내가 A급 던전을 공략하지 못한 일은 뉴스거리도 되지 않았다. 나오는 말이라고 해 봤자.
“이태진도 실패하긴 하는구나. 기사만 보자면 S급 던전도 공략할 것 같았는데.”
“이걸 실패라고 하긴 그렇지.”
“음. 하긴, 멤버 구성도 세 명뿐이었지? 임한나. 박지현.”
“그리고 음지에서 올라온 세 마리. 합이나 맞춰 봤겠어? 살아 돌아온 것만 해도 성공이지.”
김이 빠질 대로 빠진 탄산 같은, 미적지근한 반응뿐이었다.
엘리베이터에 올라타 일성의 가장 꼭대기 층을 눌렀다.
“어. 이태진 팀장님? 무슨 일이세요?”
“회장님 계십니까?”
정작 비서의 대답도 듣지 않고서 대표실의 문을 노크했다.
“이태진입니다.”
“…들어와.”
문을 열고 들어갔다. 언제나 그랬듯 최태성이 여유롭게 앉아 있었다. 최태성이 앉으라는 듯 눈짓하며 말했다.
“표정이 안 좋네. A급 던전이 그 정도였나?”
“죄송합니다. 실패했습니다.”
“실패가 아니라 포기지.”
눈썹이 꿈틀거렸다. 그건 또 어떻게 알고.
“지현이가 말해 줬어.”
“박지현 씨가요?”
이 여자는 대체 줄을 몇 개나 댄 거야.
“음. 나도 삼중 스파이일 줄은 몰랐거든.”
“저를 감시하라 시키셨군요.”
“방해는 안 됐을 것 같은데.”
머릿속이 빠르게 돌아갔다.
다른 건 필요 없고. 혹시 박지현이 성요한의 제자에 대해서도 말했나?
최태성이 재밌다는 듯 나를 바라봤다.
“그런 눈빛은 처음 보는데. 도전적이야. 하고 싶은 말 있으면 말해봐.”
“혹시 어디까지 알고 계십니까?”
“백 팀장이 자네를 죽이려 한 것. 그리고 자네가 회사에 오자마자 S급 헌터 중에서도 검사들에 대한 데이터를 가져간 것.”
“백인호가 저를 죽이려 했다는 증거는 아직 없습니다.”
“이 팀장이 백 팀장 편을 들어줄 줄은 몰랐는데. 어쨌거나 그건 사실이야. 내가 따로 확인해 봤거든.”
결국 박지현의 말이 사실이었구나.
손가락으로 의자 손잡이를 두드리던 최태성이 말을 이었다.
“나도 묻고 싶은 게 있는데.”
“예.”
“갑자기 S급 헌터들 자료가 왜 필요했는지.”
이것에 대해 설명하려면 던전에서 만난 성요한의 제자에 대해서부터 말해야 하지만.
거짓말하는 것쯤은 이미 도가 텄다.
“저보다 강한 근거리 딜러들이 어떤 스킬을 가지고 있는지 궁금했습니다. 배울 게 있나 살펴봤습니다.”
“그러니까 왜 하필 지금?”
“당장 강해져야 할 이유가 생겨서요.”
최태성의 반응을 살펴보며 말했다.
“죽여야 할 사람이 있어서요.”
최태성의 표정은 여전히 여유로웠다. 한 치의 빈틈도 찾을 수 없었다.
“그 사람이 혹시 백 팀장?”
“예.”
최태성이 턱을 문질렀다. 문득, 나를 빤히 쳐다보는 시선이 칼처럼 날카로워졌다.
“그건 안돼.”
뭐?
“안 된다고요?”
최태성이 단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숨이 턱 막히는 기분이었다.
이제껏 내가 한 행동 중에 최태성이 허락하지 않은 적이 있었나?
있긴 있었지.
화신과의 BTO 때. 그런데 그때도 이런 느낌은 아니었다. 어르고 타이르던 당시와는 분위기가 180도 달랐다.
“협회와의 문제 때문이라면 저 혼자 처리할 수 있습…….”
“겨우 협회가 뭐라고. 그리고 꼭 자네가 나서지 않아도 협회와는……. 음. 어쨌든 이번 일은 없던 걸로 하지.”
“협회 때문이 아니라면 대체 왜.”
“자네도 죽을 테니까.”
“저를 믿지 못하시는군요. 제가 백인호보다 약해 보입니까?”
“아니. 자네가 더 강하지. 그리고 믿고 말고의 문제가 아니야.”
최태성이 고개를 내 쪽으로 가까이 숙였다.
“이 팀장. 이번만큼은 내 말을 들어야 할 거야.”
“이해할 수 없습니다.”
“이해 안 해도 괜찮아. 지금은.”
“백인호가 이대로 저를 가만히 두겠습니까?”
“그거라면 걱정 안 해도 돼.”
너무 단호해서 끼어들 여지조차 보이지 않았다. 입술을 달싹이다가, 결정을 내리고 말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나도 양보할 수 없는 문제라서.
“여쭤볼 게 있습니다.”
“말해 봐.”
“백인호와 레인 우버가 어떤 관계입니까?”
“자네가 보고서에서 봤던 그대로.”
“한패라는 말씀이시군요.”
“찬규가 그렇게 가버린 건 안타까운 일이지.”
“……그래서 드리는 말씀입니다. 끝끝내 제가 일을 저질러야겠다면요?”
최태성이 가만히 나를 바라봤다. 그러던 순간. 최태성의 미간이 잔뜩 구겨졌다.
“하지 마.”
그렇게 대화가 끝났다. 최태성이 축객령을 내렸다.
***
오랜만에 찾는 뒷골목이었다.
을씨년스러운 기운이 풍기는 곳이었다. 여기저기 널브러진 약쟁이들을 바라보다가, 익숙한 술집 안으로 들어갔다.
당장 내게 달려들 취객을 예상한 것과 달리, 익숙한 얼굴이 바텐더 놀이를 하고 있었다.
“언제 오나 목이 빠지는 줄 알았어.”
잔을 닦던 화이가 웃는 낯으로 나를 반겼다. 볼 때마다 적응되지 않는다. 이 낭창한 녀석이 손영혁의 형이라는 것이.
“내가 올 줄 알고 있었다고?”
“우리 쪽 정보력도 보통은 아니지. 앉아.”
“그러면 내가 무슨 말을 할 줄도 알겠고.”
“백인호?”
고개를 끄덕였다.
“흐음. 여기까지 찾아온 걸 보면 보통 요구는 아니겠고. 말해봐. 양지에서 할 수 없는 것들이 여기선 일상이거든.”
“암살.”
화이가 휘파람을 불었다.
“한때 동료 아니었던가? 양지도 음지만큼 살벌한 동네구만.”
“할 수 있나?”
“조건만 맞으면 못할 게 뭐가 있겠어. 이게 우리들 일인데.”
“말해 봐.”
“성격도 급하셔라. 그나저나 일성에서는 모르는 일이야? 다른 사람은 몰라도 최태성은 알고 있을 텐데.”
그럴 가능성이 높다. 최대한 몰래 움직인다고 했으나 최태성의 눈을 속이기란 불가능할 것이다.
지금은 당장 최태성이 난입하지 않은 것만으로 충분했다.
“백인호가 협회로 들어간 건 알고 있지? 일이 커질 수도 있어. 예를 들어 일성 대 협회의 한바탕 뜨거운 전쟁 같은 거.”
“그래서 여기 찾아 왔잖아.”
“일성과는 관계없는 일로 만들겠다? 이런. 나를 높게 쳐주는 건 고맙지만 요구조건이 너무 까다로워. A급 레인저를 어떻게 흔적 없이 죽일 수 있겠어?”
“그 반대다. 흔적이 남아야 한다. 백인호가 레인 우버와 한 패였던 것도, 놈이 날 죽이려 했던 것도.”
“응? 아! 그 말이었군.”
화이가 낄낄거리며 웃었다.
반드시라 해도 좋다. 백인호가 죽는다면 내가 유력한 용의자가 될 것이다.
때문에 이번 사건은 어느 쪽으로든 완벽해야 한다.
한 치의 실수도 없이 백인호를 죽이는 것은 물론이고, 여론을 내 편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뜻이다.
-알고 보니 백인호가 나쁜놈이었네. 이태진이 죽일 만했음.
이런 느낌이 들게. 화이를 턱짓하며 말했다.
“요구조건은 세 가지다. 백인호가 레인 우버와 손을 잡았다는 증거 확보, 백인호가 나를 죽이려 한 정황 확보, 그리고 암살 경험이 있는 A급 헌터 넷.”
“하나같이 어렵군. 미리 말해두는데 나는 램프요정이 아니라고.”
“불가능하면 지금 말해. 다른 곳도 있으니까.”
유리잔을 닦던 화이가 잔을 내려놨다. 녀석이 흐느적거리는 걸음으로 내 쪽으로 다가왔다.
“물론 조건만 맞다면 가능한 것들이지. 그전에. 혹시 암살해 본 경험은?”
“뭐든 처음은 있지.”
“이러면 가격이 더 높아질 수밖에 없는데.”
“뜸 들이지 말고 말해. 돈은 원하는 대로 줄 테니까.”
백인호급의 괴물을 사냥한다는데 흥정이 뭐에 필요할까. 내 전재산을 달라고 한들 거절하지 않을 것이다.
“그전에. 앞서 말했던 두 가지를 먼저 구해 올 경우에. 네가 자랑하는 블랙 마켓의 정보력 말이다.”
“그게 내 전문이야.”
기다렸다는 듯 화이가 품속에서 녹음기를 꺼내. 빨간색 버튼을 눌렀다.
치지직거리는 잡음이 가득한 가운데, 백인호의 목소리가 흐릿하게 들렸다.
-……래. 일성……. 눈치를 챘다. 이태진? ……차피 알아서 죽을……. 신경…….
점차 커지던 잡음이 결국 소리를 완전히 집어삼키면서 녹음이 끝났다. 화이를 바라보며 턱짓했다.
“상대방은 누구지?”
“널 노리는 것 중 하나. 네로드라고 하면 알아들으려나?”
“뭐?”
“아직 모르는구나. 네로드가 너를 원해. 살아있는 상태로 최면을 걸 생각인가 봐. 그게 놈의 주특기거든. 내가 알기로는, 레인 우버 여섯 명이 지금 모두 한국에 들어와 있어. 너 하나 잡으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