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헌터는 미래를 본다-123화 (123/170)

123화 급전개 (1)

여섯 번째 usb의 주인공은 율리안 펜슬러였다.

독일의 검독수리라 불리는 그는 2미터가 넘는 덩치와 함께 그처럼 거대한 대검을 붕붕 휘두르는 사내였다.

가진 스킬 또한 지금껏 봤던 검사 중 가장 파괴적이었다. 당연히 내가 상대했던 일본도의 놈과는 전혀 다른 철학을 지녔다.

그래서 곧장 다음으로 넘어가려 했는데.

눈이 떨어지질 않았다. 이런 깨달음은 오랜만인데.

신선한 충격이 머리를 강타했다. 검신의 축복이 꾸물거렸다. 이 기회를 놓칠 수 없었다. 나는 몇 번이나 영상을 분석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흡족한 눈으로 다음 영상을 틀었다.

조만간. 그러니까 단 한 발자국 앞에 S급이 있음을 확신했다.

조그마한 깨달음도 깨달음이라는 걸까. 지루함의 연속이었다.

일곱 번째를 넘기고, 여덟 번째 영상을 끄기까지도 채 1분이 걸리지 않았다.

무려 S급 헌터들의 검술인데도 그랬다. 헌터로서의 경력과 가진 스탯만 따져보면 나와는 비교할 수 없는 괴물들이었지만.

그뿐이다.

레벨만 갖춰지면 가볍게 그들을 뛰어넘을 자신이 있었다.

그러던 문득 불안함이 찾아온 건 열두 번째였다. 열여섯 명 중 단 네 명만 남았다는 불안함도 있었지만.

차라리 마지막에 남은 저것만 아니기를 바라고 또 바랐다.

열네 번째가 지났다.

이번에도 아니었다. 율리안 펜슬러 다음으로 괜찮은 스킬을 보유하고 있었지만 그뿐이다. 일본도의 남자와 비교하기에는 격의 차이가 났다.

열다섯 번째를 열었다. 미국의 다니엘 샤피로.

영상을 틀자마자 껐다. 한숨이 나왔다. 마지막 하나에 적힌 이름이 눈에 들어왔다.

-한국, 성요한.

20년 전부터 세계 각성자 랭킹 중 1위를 놓친 적이 없는 남자의 이름이었다.

나와 같은 검신의 축복이라는 특성을 가지고 있는, 그야말로 검신의 이름이 가장 어울리는 남자.

두근대는 가슴을 억누르며 usb를 열었다. 치직대며 노이즈 가득한 영상 하나가 보인다.

픽셀로 구겨진 영상을 보정에 보정을 거친 것으로 보인다. 그것도 굉장히 먼 거리에서 찍은 것이었다.

중심을 잃은 카메라가 몇 번이나 흔들리다가, 인물 하나를 포커스했다. 사브르를 들고 있는 남자였다. 그가 성요한이다. 불안한 마음이 가중됐다.

흔들리는 화면 속 성요한이 게이트 밖으로 삐져나온 몬스터 하나와 싸우고 있었다.

입으로는 뭔가를 중얼거리면서.

콰드득!

성요한의 손이 그 순간 움직였다. 배속을 몇 배나 줄인 것일 테지만 그래도 빨랐다. 그저 손이 한번 기우뚱하는 것처럼만 보였다.

그러나 내게는 그것으로 충분했다. 검신의 축복이 번쩍거렸다.

내 입에서 탄식이 흘러나왔다.

빌어먹을.

“김주현 씨. 성요한에 대한 자료라면 뭐든 좋습니다. 다 가져오세요.”

***

낫 놓고 기역자도 모른다고.

왜 이제껏 성요한에 대한 의심은 추호만큼도 하지 않았는지 모르겠다. 당장 내 별명 중 하나가 제2의 성요한인데.

그러나 이것들은 모두 결과론적인 생각일 뿐이다.

내가 일본도를 든 남자와 싸우지 않았다면, 애초에 성립되지 않는 문제였다.

널브러진 자료들을 주섬주섬 정리하던 중 내가 요청한 마지막 자료가 도착했다.

봉투를 뜯고 첫 번째 서류부터 살폈다.

이름 : 성요한.

이력서와 비슷한 양식이었다. 증명사진 속, 그의 얼굴이 돋보였다. 겉보기로는 40대처럼 보이는 남성이다. 훤칠한 외모와 날렵한 눈빛 외에는 이렇다 할 특징이 없었다.

심장이 쿵쾅댔다. 못 볼 것을 본 듯 질끈 눈을 감았다가 다시 떴다.

사진 속 성요한은 가지런히 정돈된 머리를 뒤로 넘겼으며 손에는 얇은 사브르를 들고 있었다.

밑으로 눈을 내렸다. 곧장 허탈한 실소가 흘러나왔다.

추정 레벨 : 290+α

다른 것들은 눈에 보이지도 않았다. 오로지 290이라는 숫자만 들어와 움직일 생각이 없었다.

그 압도적인 숫자 앞에 가장 먼저 떠오른 생각은 이것이었다.

290레벨의 각성자 성요한이 마음먹으면 일성의 전부를 죽일 수 있는가.

“가능하다.”

성요한이 마음먹고자 하면 못할 리가 없었다.

오히려 단칼에 모두의 심장에 칼을 쑤셔박을 수 있을 것이다.

힘이 풀린 다리를 부여잡았다.

집무실 벽에 걸린 시계가 눈에 들어왔다.

멈추지 않고 달려가는 시간이 야속했다. 지금도 남은 시간은 줄어들고 있다.

문득.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럴 때 찾을 수 있는 건 역시 ‘놈’뿐이겠지.

“무시무시한 검신께서 나를 죽이려고 하는 이유 말이야. 당신이랑 연관 있는 것 같은데. 아니야?”

시스템에게 그렇게 물어봤지만 돌아오는 답이 없다. 여러 가지 가정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그중 가장 그럴듯한 가정은 역시.

“성요한과 너는 무슨 관계지? 성요한도 너의 꼭두각시였나? 성요한에게 미래를 보여준 적이 있나?”

연이어 말했다.

“내가 죽인 놈이 성요한의 제자라면, 너는 내게 경고해 줬어야 했다.”

시스템의 조각을 매만졌다.

늘 그랬듯 시스템은 일부러 성요한의 제자와 나를 만나게 했을 것이다.

결코 우연이 아닐 것이다.

다 이것 때문에.

이번에도 나는 시스템에게 철저히 이용당한 것뿐이다.

“시스템의 조각을 성요한한에게 갖다 바치면 어떻게 되지? 그리고 말하는 거야. 시스템에게 이용당하고 있다고. 살려달라고. 그러면 성요한은 어떤 반응을 보일까.”

기세를 몰아붙였다.

“너도 반쪽짜리 꼭두각시는 싫잖아. 그러면 내게 신뢰를 보이란 말이다. 이유도 모른 채 끌려다니는 건 더 이상 사양이니까.”

머리를 정리시켰다.

“우선 하오란. 놈에게 미래를 보여 주는 것을 멈춰라. 하오란뿐만이 아니야. 여기저기 깔아둔 보험이 있다면 지금 당장 멈춰라.”

“네놈이 뭐라고.”

번뜩이는 순간 검을 잡았다. 곧장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흑발을 길게 늘어뜨린 여자가 보였다. 보는 것만으로도 심장이 멎을 것 같은, 이 세상에 존재할 수 없는 미모의 여인.

일 장로가 나를 보고 있었다.

“일 장로.”

말은 침착하게 했지만 당황을 금치 못했다.

어떻게 일성의 모든 보안 마법을 뚫고 여기까지 찾아올 수 있었지?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강렬한 열망이었다. 나를 보는 일 장로의 눈빛이 뜨거웠다.

저렇게 아름다운 여자가 저런 눈빛으로 쳐다보는 것은, 그 자체로 현혹마법이라고 할 만했다. 마음을 단단히 먹었다.

일 장로가 말했다.

“내놔.”.

다짜고짜 말했음에도 나는 그녀가 말하는 것이 뭔지 알 수 있었다.

시스템의 조각(1).

“네 주인더러 직접 내 앞에 나타나라고 해라.”

“내 인내심을 시험하지 않는 게 좋겠구나. 다시 말해주마. 이리 내.놔.”

일 장로가 부들부들 떨며 기다랗고 하얀 손을 내밀었다.

그사이에 그녀와 내 간극을 체크했다. 허나 무의미한 일이었다.

S급임이 분명한 일 장로다. S급 중에서도 최상위의 영역에 들어섰을 것이다.

파장을 퍼트려도 그녀의 힘을 전혀 읽을 수 없다는 게 그 증거였다.

내가 상대할 수 없다.

성요한의 제자와는 경우가 다르다. 횟수의 문제가 아니라는 뜻이었다. 천 번, 만 번의 시간을 되돌려도 일 장로를 이길 수 없는 게 당장의 현실이었다.

“이게 뭔지 말해.”

품속에서 시스템의 조각(1)을 꺼내며 말했다.

두 가지 뜻을 담아서였다.

첫째로는 순수하게 무엇인지가 궁금했고, 둘째로는 일 장로의 반응을 보기 위함이었다.

그런데 예상했던 대로였다. 일 장로가 미간을 찌푸릴지언정 내게 달려들지 않는다.

“네가 알 필요 없는 것.”

활화산 같은 분노를 실은 말이 튀어나왔다.

대체 이 보석이 뭐길래, 내가 이걸 획득한 건 또 어떻게 알고. 같은 질문이 머릿속을 멤돌았지만 그전에 확실하게 짚고 넘어갈 게 있었다.

“당장 가져가면 될 것이지 왜 굳이 나한테 달라고 하는 거지?”

“뭐?”

“이상하잖아. 힘으로 뺏으려면 충분히 가져갈 수도 있을 텐데.”

조각을 툭툭 건드리며 말했다.

“혹시 내 허락이 없으면 가져가지 못하는 거냐? 그렇군. 네 주인이 그 짓을 허락하지 않았어.”

내 말에 일 장로가 피식 웃었다. 꿈틀대던 그녀의 손이 쏜살처럼 움직였다.

정신을 차렸을 땐 일 장로가 내 목을 움켜쥐고 있었다.

“귀여운 것. 허락?”

꽈악!

손에 쥐어지는 힘이 점점 커졌다. 감히 내가 대항할 수 없는 거대한 힘이었다.

허나 그럴수록 확신이 더해졌다. 컥컥대는 숨을 삼키며 말했다.

“이러고도 나를 죽이지 못하지. 위대하신 시타둠께서 내 죽음을 허락하지 않았거든.”

“어디 계속 조롱해 보거라.”

“나를 죽이고 가져가든가. 네가 그토록 섬기는 시타둠께서도 그걸 원할지는 모르……겠군.”

어느 순간 목에 가해지는 압박이 확 가셨다. 붉게 충혈된 눈이 거울 속에 비쳤다. 그 와중에도 일 장로는 무정한 눈길로 나를 쳐다만 봤다.

“괴롭히고자 하면 얼마든지 그럴 수도 있지. 네놈이 사랑하는 인간들이 어찌 될지 보고 싶으면 계속 지껄여 봐라.”

피식 웃음이 나왔다.

“그거야말로 시스템이 원치 않는 일이지. 지금도 내 동료의 목숨을 빌미로 나와 거래하고 있는 판이거든.”

그녀의 호흡이 순간 틀어졌다.

“나야말로 더 이상 되묻는 일은 없을 거다. 일 장로. 시스템의 조각이 무엇인지 말해.”

한참 동안 나를 노려보던 일 장로가 조용히 숨을 내쉬었다. 그로부터 한참이 흐른 뒤였다. 그녀가 한 음절 한 음절 끊어 말했다.

“위대하신 그분이 성전 중 잃어버린 힘.”

“성전?”

“그래. 성전. 이전에 치렀고, 또다시 치를 전쟁. 네놈 따위가 알 리가 없지.”

일 장로는 과거를 회상하듯 아까보다도 좋지 않은 표정이 됐다.

성전. 잃어버린 힘.

정확한 의미는 모른다. 허나 이것이 시스템에게 얼마나 중요한 아이템인지를 알 수 있었다.

“두 번째. 내가 죽인 놈의 스승이 성요한이 맞나?”

“그건 네놈이 알아서 생각해야 할 문제지.”

“맞다는 소리군.”

“귀여운 것아. 대답을 다 들었으면 내게 줘야지.”

“잠깐. 아직 물어볼 게 남았…….”

별안간 말을 끊고 일 장로를 쳐다봤을 때였다. 그녀는 나를 보고 있지 않았다.

일 장로의 표정 변화가 다채로웠다. 허공을 쳐다보던 일 장로의 얼굴이 황홀경에 물들더니, 곧 인상을 찌푸렸다. 또 울 것 같은 얼굴로 나를 보기까지. 찰나의 순간이었다.

“그. 조각에. 마나를. 불어넣어라.”

일 장로는 음절 음절마다 힘겨운 표정으로 말했다. 거기에 대고 마지막으로 도발해 보기로 했다.

“위대하신 시타둠께서 날 선택했나 보군.”

일 장로의 눈썹이 꿈틀거렸지만 끝내 그녀의 입술이 열리는 일은 없었다.

결국 확인하는 수밖에 없는 건가.

푸른색 보석에 마나를 불어넣었다. 옅은 바람이 우리를 스쳐 지나간 동시에. 시스템의 조각이 빛을 뿜어냈다.

[퀘스트 발생!

등급 : SS

목표 : 공동의 적, 검신 성요한이 당신의 존재를 인지했습니다. 당신과 당신의 동료 모두를 해칠 그를 처단하고 시스템의 안정을 도우십시오!

보상 : ???

남은 시간 : 230일]

정신없이 뜨는 시스템 메시지는 혼란만 가중시켰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