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2화 검신의 흔적 (9)
심상 속에서.
놈이 했던 말을 상기했다. 특히나 놈이 ‘스승’이라고 불렀던 그 부분.
‘스승님의 젊은 시절을 본 기분이군. 좋은 싸움이었다. 그러니 죽어라.’
그 부분에서 확신했다. 놈의 스승이라는 자를 찾아야 한다고.
놈의 스승이 그자다. 일성을 시산혈해로 만들 그놈!
반드시 찾아서 제거해야 할 것이다.
문득 정신을 차렸을 때는 긴 시간이 흘렀다고 생각됐다. 내 팔은 축 늘어져 있었고, 눈빛은 허공을 맴돌고 있었다.
고개를 돌려 옆을 바라봤다. 여전히 참혹한 현장에서, 모두들 나만 바라보고 있었다.
어떠한 대화도 오가지 않은 채였다. 상황을 판단하기에는 뜬금없이 벌어진 일이었다.
나조차 왜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 모르는 판에 저들은 어련할까.
팀원들의 얼떨떨한 심경이 눈에 박혔다. 그러던 문득 박지현과 눈이 마주쳤다. 묻고 싶은 게 많았던지 그녀의 입술이 열리려 하고 있었다. 그보다 먼저 내가 말했다.
“아무 일도 없었던 겁니다.”
나도 깜짝 놀랄 만큼 살벌한 목소리가 울대에서 튀어나왔다.
***
하루가 더 지났다. 그 사이 팀원들은 쥐 죽은 듯 내 눈치만 살펴보고 있었다. 그 정도로 분위기가 날 선 상태였다.
허나 그것도 잠시, 넘어야 할 산이 아직 남아 있었다.
“좋아요.”
박지현이 못마땅한 얼굴로 말했다.
“어제는 아무 일도 없었던 걸로 치고. 오늘은 어떻게 할 건데요? 백인호가 바깥에서 당신만 죽이려고 벼르고 있을 텐데.”
그녀의 말이 맞다.
죽은 놈의 스승을 찾기 위해서라도 일단 여기서 살아나가야 한다.
“하나씩 받으세요.”
각자에게 탈출석 하나씩을 손에 쥐여줬다.
흐릿한 과거 속에서는 몇 번이나 탈출을 시도했지만, 번번이 막혔었다.
허나 이번에는 다를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놈이 죽으며 깨진 마력 파장 하나가 뚜렷했기 때문이다.
“어제 말했던 그대로입니다. 탈출석을 쓰자마자 북쪽으로 돌파할 겁니다. 목표는 일성 본사. 그 사이 누가 낙오하더라도 뒤돌아보지 마십시오.”
마지막으로 죽은 놈의 치아, 머리카락, 가진 아이템을 모두 회수했다.
나를 향해 부릅뜨고 있는 놈의 시체를 한번 바라본 뒤.
또 한 번의 전투를 준비했다.
[탈출을 시도합니다.]
[탈출에 성공합니다.]
화악!
눈 한번 깜박이자 모든 장면이 뒤바꼈다. 숨 막히도록 조용한 도심 속이었다.
도시가 조용한 이유는 A급 던전 때문이었다.
오히려 잘됐다. 인명 피해 없이 일을 마무리 지을 수 있으니 말이다.
명동이라 적힌 지하철 간판을 보자마자였다. 약속한 대로, 그림자 다섯 개가 비산하며 북쪽으로 몸을 날렸다.
모두가 출발한 것을 본 뒤였다. 지면을 박찬 그대로 하늘 위로 몸을 띄웠다.
쿠웅!
후끈한 열기와 함께 빌딩 위로 착지했다. 다음 동작이 부드럽게 이어진다. 날렵한 닌자처럼 빌딩과 빌딩을 넘어 다니며, 파동을 퍼트렸다.
백인호, 혹은 놈들이 나를 공격하기 전에, 내가 먼저 놈들을 찾아 낸다!
“…….”
그렇게 마음먹은 것도 잠시뿐이었다. 내 얼굴이 와락 일그러졌다.
파장에 걸리는 게 없었다. 백인호를 특정할만한 것은 물론이거니와 이 근방에는 각성자조차 없었다.
원래 암살의 기본이 생기를 지우고 마나를 숨기는 것이라지만,
나를 속일 정도로 준비를 철저하게 해왔다고?
기감 하나는 S급에 뒤지지 않을 나다. 믿을 수가 없었다.
한 번 더 파동을 퍼트렸다. 더 깊고, 진하게.
허나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간간이 걸리는 민간인들을 제외하고는 어디에도 각성자는 없었다.
이렇게 되면 경우의 수는 두 가지.
첫째로는 백인호가 나를 속일 정도로 기감을 완벽히 지우고 암살을 노리고 있는 것.
이 경우는 최악이다.
일성 본사가 있는 종로까지는 앞으로 2분을 더 달려야 한다.
겨우 2분이 아니다. 무려 2분이다. 언제 어디에서 어떤 방식으로 공격해올지 모르는 상황에서의 2분이라는 말이다.
백인호의 수준을 나와 동수, 혹은 반수 아래로 쳤을 때.
나는 반드시 필패한다.
두 번째 경우의 수는.
쯧.
잔뜩 긴장하고 있는 몸에서 일부러 힘을 뺐다. 이렇게 된 거 리스크를 감수하기로 했다.
언제든 스킬을 날릴 수 있게 준비했던 것도 꺼트렸다.
선공을 허락해서라도 백인호의 위치를 파악하기 위함이었다.
내가 백인호라면 반드시 이 지금을 노릴 것이다. 암습을 계획했다면 지금만큼 완벽한 타이밍이 없다.
그렇게 눈까지 감고 몸을 가만히 두었다.
째깍째깍.
그런데. 이번에도 내 주위로 다가오는 인기척이라고는 임한나 외에는 없었다.
눈을 떴다. 내 옆에 착지한 임한나가 고개를 저었다.
“없어. 골목 구석까지 뒤지고 왔는데 이 근방에는 아예 각성자는……. 그런 눈으로 보지 마. 내 한 몸 피할 능력도 없을까.”
임한나가 말했다.
“아무래도 둘 중 하나인 것 같아. 백인호가 눈치까고 튀었거나, 박지현이 우릴 속였든가.”
임한나의 눈이 가늘어졌다.
나도 마찬가지였다. 점점 두 번째 가능성으로 추가 기울어진다.
다시금 발을 굴렸다. 점처럼 작았던 박지현이 순식간에 크기를 키웠다.
그녀는 지금 음지 3인방과 함께 숨을 헐떡대며 일성 본사를 향해 전력질주하고 있었다.
거기에 대고 말했다.
“멈춰.”
미리 각인시켜 뒀었다. 내 말이 떨어지면 죽는 시늉이라도 해야 할 것이라고.
방금까지 혼신의 힘을 다해 달리던 박지현과 음지 셋이 뚝하고 걸음을 멈춘 것은 그 이유 때문이었다.
음지 3인방과 박지현이 눈 한가득 의문을 띄면서 호흡을 가다듬고 있었다. 헐떡이는 숨이 잦아들 때까지 기다린 후에 말했다.
“우리를 속였습니까?”
“…뭐라고요?”
“우리를 속였냐고 물었습니다.”
“알아듣게 말을 해요. 그보다 갑자기 멈춰 세운 이유는 뭔데요? 딱 공격받기 좋은 위치인 것 같구만.”
한 번 떠봤는데 전혀 동요하지 않는다. 눈빛을 보아하니 언제 공격이 날아올까 경계심만 잔뜩 올라와 있다.
맥박도 일정하고.
“백인호는 여기 없습니다.”
“뭐요?”
“에라이. 괜히 고생했네.”
“난 뭘 잘못 먹었나 봐. 위가 너무 당겨.”
안도의 한숨을 쉬거나 툴툴대는 음지 3인방과 달리 박지현은 당혹스러워 보였다.
“그, 그럴 리가. 그럴 리가 없어요. 잘 찾아본 거 맞아요?”
“암습을 한다면 필연적으로 남을 수밖에 없는 흔적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여긴 없더군요.”
애초부터 백인호는 이곳에 오지 않았다는 게 맞다.
혼란스러워하는 박지현을 턱짓하며 말했다.
“우리를 속였습니까? 지금이라도 솔직하게 말하는 게 좋을 겁니다.”
“내가 뭣하러 그딴 거짓말을 해요? 지금 제일 당황스러운 사람이 누군데.”
“이태진의 실패를 위해서.”
“뭐?”
“이태진이 던전에서 도망쳤다고 하면 백인호가 좋아하긴 할 것 같군요.”
“헛소리하지 마요!”
“헛소리로 들립니까?”
마나를 끌어올리면서. 박지현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지금의 나는 내가 느끼기에도 예민해질 대로 예민해진 상태였다.
“제대로 대답하는 게 좋을 겁니다. 마지막 기회라는 걸 명심하고.”
박지현의 동공이 흔들거렸다. 그녀의 눈동자 위로 비친 내 모습이 살벌했다.
“제가 박쥐짓한 건 맞는데요. 죽기 전에 그런 헛소리 지껄일 정도로 미친년도 아니라서. 왜, 고문이라 하면 속이 풀리겠어요?”
박지현의 말대로. 당장 박지현을 힘으로 찍어누르지 않는 이유가 그것 때문이었다. 죽기 전에 하는 말치고는 너무.
휴대폰을 꺼내 김주현에게 전화 걸었다.
“백인호 팀장. 지금 어디 있는지 알아보는 데 얼마나 걸립니까?”
수화기 너머 엉뚱한 대답이 튀어나왔다.
“협회로 이적했다고?”
***
“어? 이태진 팀장님?”
“뭐야. 공략 간 거 아니었어?”
“그러니까. 왜 저 사람이 여길.”
우수수 튀어나오는 관심과 말들을 지나치고 팀장실에 들어갔다. 김주현의 말대로 쌓여있는 서류가 많았다.
죄다 별 세 개짜리 특급기밀문서. 그중 가장 위에 있는 것부터 살펴봤다. 오늘로부터 나흘 전의 보고서였다.
-백인호 전 B팀 팀장. 금일 협회로 이적. 이유 파악 중.
두 번째와 세 번째 서류를 빠르게 훑었다.
-이전까지 사내 행사 꾸준히 참석한바, 갑작스러운 결정으로 파악 중.
-이틀 전 협회장과의 대담 이후로 마음을 돌린 것으로 파악.
-김석환 외 3인. 협회 내부 잠입 성공. 기밀문서 획득 완료.
-백인호 전 B팀 팀장, 레인 우버의 리더 네로드와 유착 정황 드러남.
그것으로 보고서는 끝이었다.
생각보다 충격은 없었다. 심증으로는 계속 확신했던 것이어서였다.
그제야 박지현의 말이 아귀가 맞아떨어진다는 생각만 들었다.
백인호로서도 협회와 일성. 두 곳에서 감시당하는 와중에 나를 도모할 수는 없었겠지.
어쨌든 중요한 것은 변하지 않았다. 최찬규가 죽은 이후 백인호와 나는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넜고, 둘 중 하나는 반드시 죽어야 한다는 것.
그 시기가 조금 빨라진 것일 뿐이다. 조영은에게 받은 번호가 있었다. 뒷골목 음지 세계의 대장, 화이의 연락처였다. 거기에 문자 하나를 남겨뒀다.
그 후 김주현을 불렀다. 머릿속을 괴롭히는 가장 큰 과제를 해결하려고.
“S급 이상, 검을 다루는 각성자들의 정보가 필요합니다. 반드시 영상자료여야만 하고요. 다른 업무는 모두 제쳐두고 최우선으로 알아보세요. 최우선입니다.”
“예.”
내가 알기로 전세계의 S급 헌터는 총 서른 명이다. 서른 명 중 검을 쓰는 자를 추리자면 대략 열 여섯 명. 그들의 전투 영상까지 찾으려면.
작게 잡아도 보름은 걸릴 일이다. 그동안 할 일이 많았다.
레벨업 포인트를 찍고, 화이를 만나 백인호를 어떻게 처리할지 계획을…….
똑똑.
노크 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갸웃하며 들어오라고 했을 때. 김주현이 우쭐된 표정으로 서 있었다. 손에는 서류봉투가 가득하다.
“요청하신 자료 찾아 왔습니다.”
***
별 세 개짜리 기밀보다도 더 깊숙한 비밀 자료였다. 노란색 봉투에는 가져온 김주현조차 함부로 열 수 없게끔 강력한 마법 처리가 돼 있었다.
슬쩍 김주현을 쳐다본 것만으로 충분했다. 고개를 꾸벅 숙인 김주현이 종종걸음으로 사무실을 빠져나갔다.
후웅! 투두둑!
흩어지는 마나를 무시하고 봉투를 열었다. 서류마다 usb가 하나씩 있었다. usb마다 국적과 이름이 적혀 있었는데, 하나같이 세계에서 이름을 날리는 S급 헌터들이었다.
또한 복잡한 마력파장의 흔적이 usb마다 얽히고설켜 있다. 그것이 내 손에 닿는 즉시 파훼됐다. 내가 한 짓이 아니라, 사용자를 인식하는 알람 마법까지 걸려 있는 것이다.
어쨌든. 여기에 일성 비밀요원들이 목숨 걸고 가져온 자료가 있다.
무려 S급 헌터들의 전투 장면이. 본래 목적과 별개로 심장이 두근댔다.
더 망설일 것 없다.
일본, 키미키치 토요우라 적힌 usb부터 컴퓨터에 연결했다.
짧은 영상 하나가 튀어나왔다. 그녀의 제자가 찍어둔 것으로 파악되는 자료였다.
40대의 여자가 검도복을 입고 있다. 손에 들린 것이 눈에 띄었다.
일본도.
눈썹을 꿈틀거리며 재생을 눌렀다.
후웅!
벚꽃처럼 이지러지는 그녀의 검술은 웅혼한 기운이 느껴졌지만.
곧바로 껐다.
그녀는 범인이 아니다. 스킬의 급으로 따져도 내가 만든 ‘신성한 파괴자’보다 한참 떨어진다.
허나 실망하지 않았다. 아직 자료는 열다섯 개나 남아 있으니까.
진실에 다가가는 기분으로, 옆에 있는 usb를 컴퓨터에 꽂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