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1화 검신의 흔적 (8)
중력 마법을 완전히 배제한 후, 온전히 회복 마법을 때려 박았다. 치명상과 회복, 두 가지를 반복시켰다. 그럼에도 여지없이 놈의 우상단에서 오는 검격을 막을 수 없었다.
“그러니 죽어라.”
팟!
방법을 바꿨다. 회복 대신 공격에 치중하기로. 우상단에서 오는 놈의 검을 중력 마법으로 상쇄시켰다. 놈의 검이 저 멀리 날아가기도 잠시, 놈의 주먹이 내 심장을 타격했다.
“…그러니 죽어라.”
팟!
놈의 13가지 쾌검술을 완벽하게 파악했다. 아니, 파악했다고 생각했다. 내 착각이었다.
“어떻게 내 검술을 그리 꿰고 있는 거지? 그 빛나는 재능이 아깝다. 정말 아까워….”
팟!
시도가 이어질수록 과거의 잔상이 겹쳐 보였다. 놈의 일그러진 얼굴이 당혹감으로 변해 갔다. 그러나 그뿐이다. 나는 여지없이 죽는다.
“스승님의 젊은 시절을 본 기분이군. 좋은 싸움이었다. 그러니 죽어라.”
팟!
“적이지만 감탄이 나오는군. 그 천부적인 감각은 대체…! 하지만 시스템의 종은 우리의 기치 아래 있을 수 없다. 그러니 죽어라!”
팟!
***
부들부들 떨리는 몸을 주체할 수 없었다.
이로서 몇 번째지?
백 번?
흥분을 가라앉혀야 했지만 뜻대로 되질 않았다.
우웨엑!
구토를 내뱉으며 일어났다. 펄떡거리며 살아 숨 쉬는 심장과 별개로 정신적인 데미지가 쌓이고 있었다.
점차 전투 양상이 달라지고 있는건 사실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무력감이 느껴졌다. 이대로 가면 천 번을 죽든, 만 번을 죽든 똑같다. 놈에게 다가갈 수 있을지언정, 결과가 달라지지는 않는다는 말이다.
“왜지?”
왜 내가 놈을 이기지 못하는거지? 아니, 왜 이기지 못한다고 확신하는 거지?
이제껏 베어 넘긴 적들 가운데 나보다 레벨이 높았던 놈들은 발에 차일 정도로 많았다.
그런 상황에서도 포기한 적이 없었다. 그리고 포기하고 싶지도 않았고.
그런데 왜 지금은 안된다는 생각이 드는 걸까.
내가 놓친 것을 찾아야 한다.
놈의 검술을 다시 복기했다. 거기에 답이 있다는 확신이 들었다.
‘그것’이 내가 승리하는 미래를 보여주지 않는 이유가 분명히 있을 것이라는 확신.
짧은 시간, 무아지경으로 의식이 넘어갔다.
의식 속에서 놈의 근육 하나하나를 그려냈다. 부드럽게 움직이는 놈의 검 끝이 낯설지 않았다.
쾌검을 기반으로 한 변화무쌍한 검술. 내가 가지고 있는 검술과 미묘한 동질감마저 드는 그것.
동시에 잡힐 듯 말 듯한 뭔가가 있었다. 단순히 레벨 차이로만 설명되지 않던 놈과 나의 움직임이 조금씩. 아주 조금씩 보였다.
감각을 더 확장 시켰다.
천천히. 더 천천히. 놈의 근섬유 한 올 한 올을 선명히 느꼈다. 놈이 어떨 때 어떤 동작을 사용하는지, 그것을 느껴야 한다.
한참을 그렇게 놈의 근육과 검을 휘두르는 동작을 관찰하던 때였다. 불현듯 뭔가가 뇌리를 강타했다.
[레벨과 스탯의 괴리율이 지나칩니다.]
[자동 보정 : 레벨이 스탯에 맞춰집니다.]
뭐?
순식간에 상념에서 빠져나왔다.
얼른 상태창부터 열었다.
210이라 적혀있어야 할 레벨칸이 달라졌다. 240으로. 그렇다고 스탯이 올라갔냐 하면 그것은 아니었다. 스킬의 숙련도도 마찬가지였고.
고양감에 물들기도 잠시, 몸에 힘이 빠졌다.
레벨이 높아졌으면 좋지 않냐고?
천만에.
미간이 찌푸려졌다.
레벨과 스탯간의 괴리율은 지금껏 내 성장동력이었다. 높은 스탯과 그것을 따라가지 못하는 레벨.
그것이 빠른 레벨업을 부추겼는데, 지금에 와서 스탯과 레벨이 동일하게 맞춰졌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가 뭘까.
이제 남들과 성장속도가 같다는 뜻일까?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주먹을 쥐자마자 알았다. 어쩐지 몸의 세밀한 근육 조정이 쉬워진 느낌이다. 아니, 원래부터 이랬어야 할 것이 드디어 맞춰졌다고 해야 할까.
이제껏 레벨은 레벨 자체만으로는 의미 없는, 그저 스탯이 몇인지를 나타내는 지표에 불과하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레벨은 레벨 자체로 의미 있었다. 정확히는 4대 능력치를 올바르게 작동시키는 윤활유 같은 것.
혹시나 싶어 심장의 고리를 돌려봤다. 마법이라고 다르지 않았다. 기름칠 된 베어링처럼, 고리가 맹렬하게 돌아갔다.
“패널티가 아니었구나.”
오히려 기뻐해야 할 일이었지. 아마 성장속도 또한 그대로일 것이다. 달라진 것은 내가 스탯을 온전히 사용할 줄 알게 된 것. 하나뿐.
짜릿한 감정이 발끝에서 올라왔다. 이제야 ‘그것’, 그러니까 시스템의 의도를 알 수 있었다.
구태여 내가 승리하는 미래를 곧장 보여주는 대신, 시간을 되돌린다는 착각을 주는 이유를.
지금이 순간. 그 어느때보다 검신의 축복이 숙련도를 높이고 있었다. 단순히 내가 이기는 그림을 봤더라면, 얻을 수 없었을 숙련도를.
그렇다면 지금은 꿈 속인가, 아니면 현실인가. 이제 곧 알 수 있을 것이다.
콰앙!
놈이 등장했다. 여전히 무시무시한 기세를 품으면서.
그 즉시 깨달았다. 앞으로도 나는 기백번 더 죽을 것이다. 레벨 열 개 차이는 한번의 깨달음으로 좁힐 수 있는게 아니니까.
그러나 전과 달랐다.
시간만 주어지면, 놈은 내게 죽는다.
***
조금씩이지만 놈과의 전투에서 내가 우위를 가져가고 있다. 특히나 직전의 상황에서는 내가 처음으로 놈에게 치명상을 입힌 때이기도 했다.
놈의 믿을 수 없는 얼굴을 보고 통쾌함을 느낀 것도 잠시, 곧바로 새로운 스킬이 날아왔다. 반달 모양으로 날아온 오러 블레이드가 음지 3인방을 지나쳐 내 목을 날린 것이다.
이로써 검신의 축복이 확보한 놈의 패턴이 180가지. 확신한다. 더 이상은 없다.
이번이 마지막이다. 웃으며 죽었다.
“딱 세 배. 추가 보수비용으로 세 배만 더 받을게요.”
앞에 앉은 조영은이 기세등등한 목소리로 말했다. 옆을 돌아보니 음지 3인방이 농담따먹기를 하며 히히덕거리고 있었고, 박지현과 임한나는 뚱한 표정으로 서로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건 힘들겠는데요.”
“이 팀장님. 생각 잘 하세요. 밖에 나가면 백인호밖에 없겠어요?”
“저 혼자만 죽을 것 같지는 않은데.”
“상부상조하자는 거죠. 일이 누구 때문에 일어났는데? 이런 식으로 나오면 곤란하죠.”
“상부상조 좋죠. 그러면 이렇게 하시죠. 제가 조영은씨 목숨을 살려드릴 테니, 조영은씨도 저를 도와주는 걸로.”
“뭐라고요? 그게 무슨….”
냅다 조영은의 몸을 음지 3인방 쪽으로 던졌다. 앞으로 일어날 일에 나머지 팀원들은 방해만 된다. 설령 같은 A급들이라 해도 말이다.
쾅!
천장이 무너지며 놈이 나타난다.
“이태…!”
놈의 말을 무시하고 검을 뻗었다. 바람이 귓가를 스쳤다.
이번 패턴은 좌측에서 우상단으로 찌르는 패턴이었다. 무수히 겪어봤던 패턴 중 하나였다.
가볍게 그것을 피하고 놈의 품 안으로 파고들었다. 놈은 방심하지 않았다.
간파당한 것을 확인한 즉시 마기를 끌어올렸다. 놈으로서는 천장이 뒤집어진 기분일 것이다.
그러나 그조차 잠시일 뿐이다. 놈이 순식간에 내 마법을 파훼했다. 경악스러운 놈의 얼굴이 가까워졌다.
놈의 어깨가 움찔거렸다. 이것도 겪어봤다. 다음 순간 놈의 손바닥이 명치를 파고들었다.
헬리오스의 심장이 한 번, 응축된 마나가 한번, 아락투스의 중력마법이 한번, 세 겹의 방어막이 심장을 지켰다.
놈이 당했다는 얼굴로 나를 바라봤다. 그사이 회수하려는 놈의 손목을 낚아챘다. 그대로 분질렀다.
콰득!
셀 수 없이 많은 시도 중 이때와 비슷한 적이 있었다. 조급한 마음에 놈에게 잠시나마 보인 틈에 내가 죽었었고.
그때를 반면교사 삼아 놈의 단전이 자리 잡은 곳에 주먹을 뻗었다.
“커헉!”
놈이 등을 굽히며 피를 뿜어냈다. 직전의 시간대에서는 여기서 죽었다.
빌어 처먹을 놈.
발을 굴러 공중으로 도약했다. 직전까지 내가 서 있던 자리에 반달 모양의 오러가 공간을 가로지르며 스쳤다. 음지 3인방은 내 마법에 의해 벽까지 몸을 물러난 형태였다.
공중에 떠오른 몸이 천천히 놈에게로 쏟아졌다.
놈의 두 눈이 믿을 수 없다는 듯 부릅떠졌다. 악을 지르며 ‘안돼!’ 하는 입모양도 슬로 모션처럼 느렸다.
“이쯤 하면 좀 죽어라.”
전력을 실은 주먹이 놈의 면상에 부딪친 순간, 퍽! 하는 소리와 함께 놈의 몸이 허물어졌다.
[경험치를 획득했습니다 : 1790exp!]
[레벨업!]
[레벨업!]
[레벨업!]
[아이템을 획득했습니다 : 시스템의 조각(1)]
***
주변은 완전히 난장판이 됐다. 던전이라고 부를 수도 없게 됐다
형체를 알아볼 수 없게 된 파충류의 시체가 곤죽이 돼 바닥에 뿌려져 있고 넓은 개미굴의 바닥은 쩍쩍 갈라져 강도 높은 지진이 덮친 것만 같다.
도무지 실감 나지 않는다. 정말로 내가 놈을 죽였다고? 이 괴물 같은 놈을?
혹시 지금도 꿈을 꾸고 있는 건 아닐까. 눈을 한번 깜박이고 나면, 다시 조영은이 세 배니 어쩌니 하는 과거로 날아가지 않을까.
혹은, 두 눈 부릅뜨고 죽은 놈이 당장이라도 일어나 ‘스승님의 젊은 시절’, ‘그러니 죽어라.’ 같은 대사를 외치는 건 아닐까.
때문에 얼마간 석상마냥 굳은채로 놈을 쳐다볼 수밖에 없었다. 현실감각이 돌아올 때까지.
하지만 안심해도 좋았다. 명백한 증거가 앞에 있다. 지금도 들어오고 있는 막대한 양의 경험치.
아직도 죽죽 들어오고 있는 경험치의 쓰나미가 어마어마했다.
S급에 근접한 놈의 수준을 감안 해도 헤일과 같은 경험치의 양은 시스템의 넉넉한 인심이라 생각해도 좋았다.
백 번 넘게 목이 잘리는 끔찍한 경험을 했지만. 지금 당장은 정신적인 후유증보다 고양감이 앞섰다.
아니, 앞서야 했다.
그래. 분명히 그런데.
왜 찜찜한 기분이 드는 거지?
뭔가를 빠트린 기분이다. 다시 한번 놈의 검술을 상기해 봤다. 이제는 눈을 감고도 놈의 패턴을 따라 할 수 있을 정도로 외웠다.
그래서 확신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런 미친.”
일성에서 벌어질 참사. 그리고 놈의 검술. 흥분을 가라앉히고 나서야 그 둘의 공통점이 보였다.
내게 죽은 이놈이 미래의 범인이라는 뜻이 아니다.
하지만 같은 검술이다. 분명하다. 빠른 쾌검을 기반으로 한 깔끔한 수법. 검신의 축복은 거짓말을 하지 않으니까.
찜찜한 기분이 나를 덮쳤다. 어떻게 해서든 놈을 살렸어야 했는데.
놈이 누군지, 왜 나를 공격했는지. 일성과 어떤 관계가 있는지.
고문을 해서라도 이유를 알아냈어야 했는데.
그러기에는 상황이 급박했다. 이번의 기회를 놓칠 수 없었다. 놈을 죽인 건 우연의 우연의 우연이 겹친 결과였다. 다시 과거로 돌아간다 해도 놈을 죽이기까지는 무한에 가까운 시도가 필요할 것이다.
굳이 단서를 찾고자 한다면 이것이다. 밝게 빛나고 있는 푸른색 보석.
시스템의 조각(1).
놈이 했던 말과 가지고 있는 아이템으로 미루어 보아 시스템과 깊은 관련이 있는 게 아닐까? 그것도 엄청 안 좋은 쪽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