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0화 검신의 흔적 (7)
모든 것이 제자리로 돌아왔다. 날아갔던 왼팔은 얌전히 붙어 있었고, 찔렸던 심장은 세차게 피를 순환시키고 있다.
“딱 세 배. 추가 보수비용으로 세 배만 더 받을게요.”
눈앞의 조영은이 먹잇감을 포착한 미소로 말했다. 털썩하고 주저앉았다. 조영은이 당황하며 두 배를 외쳤지만 그런 것에 신경 쓸 때가 아니었다.
내가 방금 겪은 것은.
전에 한번 경험해 본 적 있다. 아카데미 총장 민수정을 구해주면서.
시간을 거슬러 온 것이 아니다. 이제야 느낄 수 있었다. 시점으로는 지금부터, 미래를 본 것이다. 내가 죽는 미래를. 단지 내 의지로 내 몸을 움직일 수 있다는 착각이 들었을 뿐이다.
어쨌든 중요한 것은 ‘그것’이 나에게 다시금 기회를 준 것이다.
약 1분 후, 정체 모를 놈이 들이닥쳐 우리 모두를 죽인다. 거기에 대비해야 한다.
먼저 상태창을 열었다.
이름 : 이태진
레벨 : 210
스킬 : 오러 블레이드(S), 아드레날린 부스트(A), 신성한 파괴자의 검술(A), 일점폭발(A), 집중(A), 도약(A)
특성 : 검신의 축복(S), 무아지경(A), 인내하는 자(A), 전사(A)
체력 : 275
마력 : 245
근력 : 380
민첩 : 300
언제나 그랬듯 눈앞의 레벨은 무시했다. 스탯만 따지면 내 실제 레벨은 240. 놈과의 격차는 레벨 아홉 개.
내 예상대로 놈이 S급에 도달한 게 아니라면, 레벨 아홉 개 정도는 어찌어찌 비벼 볼 만했었다. 내게는 검신의 축복과, 마법이 있으니까.
그런데 이 찜찜한 기분은 왜일까.
“왜 그래?”
임한나가 내 표정을 보고 고개를 갸웃했다. 그러나 거기에 답해 줄 정신마저 없었다.
바둑기사가 패배한 대국을 복기하듯, 방금의 대결을 되새겨 봤다. 검신의 축복이 건네 오는 데이터의 양이 방대했다.
내가 흘려 넘어 갔던 순간순간까지도 검신의 축복은 간직하고 있었다. 그래서 나온 결론이었다.
실로 믿기 힘들었지만, 레벨뿐만 아니라 검술재능으로만 따져도 나보다 놈이 더 뛰어나다. S급의 검신의 축복을 들고 있는 나보다도.
어떻게?
그런데 그것만으로도 내가 패배한 이유를 전부 설명할 수는 없었다.
찜찜함으로 몸을 씻어내면 이런 기분일 것 같았다.
째깍.
답을 찾지 못했는데 1분이 모두 지나갔다.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다. 벌떡 일어난 뒤 외쳤다.
“전투 준비해. 당장!”
얼굴에 물음표를 띄우면서도, 파티원들은 내 말에 충실했다. 두말하지 않고 장비를 착용하며 내가 바라보는 쪽으로 경계태세를 취했다.
다음 순간, 파동의 끝에 걸린 놈이 순식간에 이곳까지 도달했다.
쾅!
위에서 쏟아져 내려온 놈이 갸웃거렸다. 우리가 대비하고 있을 줄은 몰랐던지, 놈의 입가가 호선을 그렸다.
“제법인……!”
“쏴!”
내 말에 임한나가 팽팽하게 당겨진 활시위를 놓았다.
그와 동시에 응축된 발바닥의 힘으로 지면을 박찼다. 내 몸이 지나가는 곳곳마다 공기가 굉음을 터트렸다.
오러를 머금은 화살의 속도보다도 내가 더 빨랐다. 그만큼 전력을 다했다. 느껴지는 힘은 이전의 시간대보다도 폭발적이었다.
허나 그것뿐, 곧장 자세를 잡는 놈의 반사신경은 경이적이었다.
선공은 이번에도 나다. 정확히는, 놈이 공격을 허용해 준 것으로 봐야 했다.
여유를 부리는 것이 아니라 내 검술이 어떤 식으로 구성됐는지를 궁금해하는 듯했다. 선수를 내주고도 이길 자신이 있다는 뜻이기도 했고.
박지현의 버프가 내게 완성된 순간, 놈의 상완골을 향해 검을 뻗었다. 검신의 축복이 정확히 가리키는 지점이었다.
콰앙!
놈이 흠칫하며 재빨리 검을 들어 막았지만, 중심을 잃은 게 눈에 훤했다. 놈이 눈으로 어떻게? 따위의 말을 지껄였다.
하지만 그조차도 이길 수 있다는 여유에 기반된 것.
아까 봤던 장면과 비슷한 장면이 또다시 연출됐다.
폭풍이 우리 주위로 형성됐다. 쩌적 거리며 바닥이 갈라지고 소용돌이 속으로 던전의 모든 것들이 휘말렸다.
기류에 휘말린 파티원들이 균형을 잃었다. 애초부터 우리 둘의 싸움에 나머지가 끼어들 여지는 없었던 것이다.
때마침 머릿속에서 띠링, 하는 느낌표가 떠올랐다.
검신의 축복이 놈의 검술을 완벽히 파훼하는 데 성공했다. 승리를 확신했다. 꿈틀거리는 놈의 미간을 향해 검을 내질렀다,
그때.
“어?”
검신의 축복이 해석한 궤도와 전혀 다른 방향으로 놈의 칼이 움직였다.
이럴 수는 없는 법인데?
이제껏 겪어봤던 검신의 축복이란 그 어떤 프로그램보다 완벽한 것이어서, 그것을 뛰어넘는 검의 변화가 있을 줄은 상상조차 못 해 봤다.
“쾌검은 다양한 변화를 추구한다. 그래도 진짜 놀랐어. 어떻게 내 검술을 파악한 거지? 무슨 수를 쓴 거냐.”
놈이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었지만, 나야말로 묻고 싶었다.
어떻게 검신의 축복을 뛰어 넘은 거냐!
당황스러운 내 심정이 검에 그대로 묻어나왔다. 놈이 중심을 잃은 지금 몰아붙여야 하건만, 원래의 궤도와 전혀 다른 검격이 쥐새끼들의 던전 한구석에 부딪혔다.
그조차도 첫 일격이 일으킨 소용돌이 속으로 종적을 감췄지만, 흔들리는 내 동공에 비할 수는 없었다.
드드득!
한순간에 폭풍은 사라지고, 놈은 중심을 단단히 고정시켰다.
“말해봐. 어떻게 내 검술을 알고 있었지?”
놈의 말을 무시하고 다시금 공격을 이어나가려 했다. 그런데 이미 기세는 놈에게로 넘어간 후였다.
놈이 검을 휘두를 때마다 검신의 축복이 오류를 냈다.
왼쪽을 예상하면 오른쪽, 위를 예상하면 아래에서 검이 떨어졌다. 검신의 축복이 예상했던 궤도와 정반대, 혹은 예상치 못했던 곳으로만 찔러 들어오고 있었다.
놈의 검술은 이전의 장면에서 겪었던 것과는 전혀 다른, 완전히 새로운 것이라 봐도 됐다. 쾌속을 추구한다는 것 말고는 공통점이 하나도 없었으니까.
예컨대 과거가 된 미래에서, 놈은 횡격으로 들어가는 내 공격을 왼팔로 쳐낸 후 빈틈을 노려 내 어깨를 잘랐다.
이번에는 달랐다. 발을 굴러 내 앞으로 치달은 놈의 검이 허벅지를 찌른다. 내 비루한 저항은 놈의 발구름 한 번으로 허무하게 사라져버렸다.
콰득!
예상했다 한들, 직접 겪는 고통이란 언제나 내 상상 이상이다.
특히나 놈의 손속이 이번에는 더 거칠었다. 검을 쥔 손을 포함한 오른쪽 상체가 완전히 뜯겼다.
“크악!”
비명을 참지 못했다. 그러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본능적으로 동공이 아래로 내려갔다.
사자에 물어뜯긴 것마냥 흉곽이 너덜너덜해진 모습은 쇼크사를 불러도 이상할 것이 없었다.
임한나가 놈에게 뛰쳐 가는 것은, 이전과 마찬가지로 속박에 막혔다.
악을 지르는 입은 봉인됐고 몸은 공중으로 떠올라 무력해졌다. 그것은 나머지 팀원들 또한 마찬가지여서, 결국은 선언할 수밖에 없었다.
완패였다.
때마침 검신의 축복이 보내오는 데이터가 그것을 확정지었다.
놈의 칼끝에 심장이 도륙나고, 내 상반신이 완전히 뜯겨나갈 것이다.
헌데 나보다도 와락 일그러진 놈의 표정은, 어째서인지 당혹스러워 보였다.
“죽어라.”
가타부타 말도 없었다. 놈의 선고가 떨어진 즉시 내 목이 뎅강 날아갔다.
팟!
“딱 세 배. 추가 보수비용으로 세 배만 더 받을게요.”
상체가 갈려 나간 고통이 생생한 가운데 조영은의 얼굴이 보였다.
젠장할.
또 돌아왔다. 아니, 돌아온 게 아니라 본 것이지. 내가 또 죽은 미래를.
그것이 다시 한번 기회를 줬다. 동시에 무력감이 들었다. 이런 식으로는.
“왜 그래?”
전과 똑같이 임한나가 내 얼굴을 보고 턱짓했지만 설명해줄 방도도 없었다.
근본적인 질문이 떠올랐다. 지금 벌어진 일은 대체 무슨 상황이지?
백인호와 관련이 없다는 것은 알겠다. 놈이 했던 말을 떠올렸다.
-그러니 죽어라. 우리의 기치 아래 시스템의 종은 용납할 수 없다.
시스템의 종?
마음속으로만 가지고 있던 의문에 확신이 생기는 시점이었다.
‘그것’. 그것이 시스템이라는 확신이. 시타둠과 관련 있는 놈, 혹은 ‘그것’을.
혹시 대화가 가능하지 않을까?
놈의 오해를 바로잡는다면….
콰앙!
문이 박살 나자마자 놈이 들어왔다. 조영은을 뒤로 던진 후 말했다.
“너는 누구지?”
남자가 대답 없이 던전을 둘러본다. 그러던 놈이 나를 발견하고 눈에 이채를 띠었다.
“이태진.”
“잠시만. 나는 시스템의 종이 아니다.”
천천히 손을 들어 올리며 싸울 의사가 없음을 표했다. 남자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오히려 그 반대라고 할 수 있지. 이름이 뭐지? 아무래도 대화가 필요할 것 같은데.”
그렇게 말하며 천천히 놈에게 다가간 그때였다. 머릿속에서 경고음이 요란하게 울렸다.
재빨리 뒤로 몸을 물렸다. 방금까지 서 있던 공간이 뒤흔들렸다.
고개를 위로 들었다. 남자의 얼굴이 눈앞에 있었다. 두 눈 가득 살기가 흉흉하다.
아래에서 위로 검날을 쓸어올렸다. 검신의 축복이, 놈의 패턴을 모두 분석했다. 추출되는 이미지상으로는 내 승리가 점쳐졌다.
허나 알고 있다. 놈의 쾌검이 주는 변화의 가짓수는 검신의 축복의 계산보다도 위에 있다.
즉슨, 이번에도 이렇게.
“쾌검은 다양한 변화를 추구한다. 그래도 진짜 놀랐어. 어떻게 내 검술을 파악한 거지? 무슨 수를 쓴 거냐.”
놈이 표정을 구겼다.
놈은 검신의 축복 같은 S급의 특성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그게 아니고서야 내가 이렇게까지나 무력하게 질 수는 없는 법이다.
“씨발.”
버벅거리는 검신의 축복이 조금 더 빨리 반응했다는 점이 희소식이었지만.
서걱!
결과는 똑같았다.
팟!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모두 탈출석 쓰세요!”
세 배니 어쩌니 하던 조영은이 나를 미친놈처럼 바라봤다. 한숨을 쉬며 다시금 협상해오려는 조영은을 향해 던전 탈출석 세 개를 던져줬다.
“이태진 씨. 밖으로 나가면 백인호가…!”
“죽기 싫으면 당장!”
마지막으로 임한나에게 전달해 준 뒤 탈출석에 마나를 불어넣었을 때였다.
[탈출을 시도합니다.]
[알 수 없는 누군가의 가호를 받는 던전입니다.]
[탈출할 수 없습니다.]
뭐?
눈살을 찌푸렸을 때.
쾅!
일본도를 든 40대의 남자가 어김없이 등장했다.
서걱!
팟!
***
아락투스의 영역과 같다. 누군가의 인위적인 작용에 의해 탈출석은 그 의미를 상실했다.
즉슨 이 공간을 벗어나는 방법은 없다.
방법은 오로지 하나뿐이다. 일본도를 든 남자를 죽이는 것.
그런데 어떻게?
“딱 세 배. 추가 보수비용으로 세 배만…!”
“시스템! 내가 승리할 수 있는 미래를 보여 줘라!”
눈앞의 조영은이 나를 미친놈처럼 바라봤다. 하지만 거기에 신경 쓸 만큼 겨를도 없었다.
“이딴 장난질을 하는 이유가 뭐지?”
지금 내가 의식하고 있는 이 공간이 미래인지, 현실인지도 구분할 수 없었다. 분명 내 의지대로 몸이 움직이지만, 죽고 나면 또다시 과거가 될 가능성이 농후했다.
대체 왜 시스템이 이딴 짓을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놈의 검술을 파훼할 수 있는 단 하나의 길을 보여주면 그만인 것을!
그러나 시스템은 잠잠했다. 시스템의 뜻이 확고했다.
-남자를 죽여라. 기회는 무한히 줄 테니.
콰앙!
직후 놈이 위층을 부수고 나타났다. 놈이 고개를 갸웃거린다. 저 개 같은 면상에 주먹을 꽂고 싶었다.
검이 아니라 맨몸이라면 어떨까?
다섯 개의 고리를 전력으로 분출했다. 놈의 일본도와 신성한 파괴자의 롱소드가 저 멀리 날아갔다.
“같잖은 수작을.”
놈은 맨몸 박투에서도 상당한 자신감을 드러냈다.
쿠웅!
육안으로 확인할 순 없었지만 놈의 손바닥이 순식간에 내 명치를 치고 돌아갔을 것이다. 귓속에 이명이 퍼졌다.
호흡기를 뗀 중환자가 된 기분이었다. 곧이어 사형선고가 들렸다.
“우리의 기치 아래 시스템의 종은 용납할 수 없다.”
그다음 상황은 이제 지긋지긋했다.
“그러니 죽어라.”
이제는 알고 있다. 지금 상황 또한 미래일 뿐이다.
그러니까 지금의 죽음도 진짜 죽음이……!
서걱!
팟!