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9화 검신의 흔적 (6)
“어떻게 한 거죠?”
그녀가 침착한 목소리로 물었다.
“이 정도 회복 스킬이 가능하다고요? 그걸 이제껏 숨겼어요? 아니 그보다. 전사 계열 아니었어요? 멀티 클래스?”
온갖 물음표가 날아왔다. 몬스터 보듯 나를 보는 시선과 함께.
“몸은 어떻습니까?”
“어떠냐고요? 완벽해요! 전투 한 번은 더 치러도 될 만큼! 이제 대답해 봐요. 방금 그 스킬. 완전 내 거랑 판박이었잖아요. 어떻게 된 거예요?!”
“그 수준은 아직 멀었는데.”
“그걸 말이라고 해요? 대체 기준점이 어디인거야? 지금도 B급 힐러 정도는 찜 쪄 먹을 거라고!”
박지현이 흥분한 목소리로 내 팔을 붙잡았다. 자신이 살아난 것보다, 전사 계열의 내가 어떻게 이런 이적을 부릴 수 있는지가 더 궁금한 모양이었다.
“살아난 게 기쁘지는 않습니까?”
“그쪽이 치료 마법을 쓸 줄 아는 게 더 놀라워요!”
“정신은 차린 것 같으니 하던 얘기나 계속해 보시죠.”
“하던 얘기?”
박지현이 인상을 찌푸렸다. 그러던 문득 그녀의 눈동자가 요동쳤다.
“무슨 말? 내가 뭐라고 했더라?”
“던전 바깥에서 백인호 어쩌고 하던 거.”
“백인호? 백인호 팀장님? 갑자기 그 사람이 왜요?”
깜빡하면 나도 속을 뻔했다. 얼마나 당당한지 눈빛 하나 안 바뀌길래.
“백인호가 저를 죽이려고 한다고요? 그 정보는 어떻게 알게 된 겁니까?”
“…….”
그러고 보니, 오늘따라 유난스럽게 깽판을 치던 박지현이 떠올랐다. 원래도 성격이 고약했지만, 이번엔 특히 지랄맞았었지.
“뻥이었어요. 장난 좀 쳐본 거 가지고 왜 이래요?”
“임한나.”
“준비됐어.”
임한나가 활을 꺼냈다. 임한나를 힐끗 본 박지현이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저한테 이러는 거. 후회 안 할 자신 있어요?”
“후회하더라도 찜찜한 건 못 견뎌서. 다시 말해 보세요. 그 정보는 어떻게 알게 된 겁니까?”
“우연히 들었어요! 백인호가 이번 던전 공략이 끝나면 죽인다고 한 거. 됐어요?”
“우연히 살인 계획을 들었다고요?”
“네. 우연히 들었어요.”
이번에도 눈 하나 깜박하지 않는다. 각성자가 아니었다면 연기자로 대성했을 만큼의 연기력이다.
“왜 저한테 바로 말하지 않았습니까?”
“왜 바로 말해야 하는데요?”
“박지현 씨가 백인호와 공조하고 있다 생각되니까.”
“무슨! 억측도 지나치네요. 고래 싸움에 새우 등 터지기 싫어서였어요! 그리고. 제가 몇 번이나 말했잖아요! 이 망할 공략 하지 말자고. 그런데 니가 내 말 안 들었잖아!”
“그런 정보를 들었으면 저도 마음을 바꿔먹었을 겁니다.”
“그리고 난 백인호에게 죽었겠지.”
“그래서 물어본 겁니다. 지금이라도 찜찜한 거 없이 확실하게 하자고. 그 정보는 어떻게 알게 된 겁니까?”
박지현이 벌떡 일어났다.
“이봐요! 지금 취조하는 거예요? 당신 금붕어 대가리야? 내가 그쪽 목숨 구해준 거 잊었어?”
“그래서 제압하지 않고 있는 겁니다. 목숨 구해 준 건 저도 마찬가지고.”
슬쩍 옆을 보니 음지 3인방이 재밌는 구경거리 보듯 이 광경을 쳐다보고 있었다. 반대편의 임한나는 시위를 당기고 있었다. 신호만 내리면 언제든 쏠 수 있게끔.
임한나에게 손짓한 후 말했다.
“마지막으로 묻겠습니다. 그 정보. 어떻게 알게 됐습니까?”
***
“아이템을 받기로 했다고?”
임한나가 뜨악한 얼굴로 물었다. 박지현은 얼굴을 붉힌 채 고개를 수그렸다.
“이렇게 될 줄 몰랐어.”
“대체 무슨 아이템을 받기로 했길래.”
“A급 중에서도 최상위.”
누군가 휘파람을 불었다. 조영은이 그럴만하다며 고개를 끄덕거리고 있었다.
반면 내 얼굴은 사정없이 구겨지고 있었고.
엇나갔던 퍼즐이 이제야 맞춰지는 기분이었다.
왜 박지현이 팀장 자리를 포기했는지부터, 그렇게까지 나를 도와줬던 이유까지. 어처구니가 없을 지경이었다.
대체 이 여자가 몇 명의 등골을 빼먹은 거지?
최태성에게도 팀장 자리를 양보하면서 받은 아이템이 있다고 들었으니까.
“일성 핵심간부 세 명한테 삥 뜯었다는 거네. 대단한데.”
조영은이 순수한 감탄사를 내뱉었다. 심지어 나도 거기에 동조할 뻔했다.
“…그쪽한테 받은 아이템은 다시 돌려주려고 했어요.”
박지현의 말을 무시하고 생각에 빠졌다.
알만한 정보는 다 알아냈고.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하지?
박지현의 말대로라면 탈출석을 쓴 즉시 나는 백인호에게 공격당할 것이다. 그리고 백인호가 혼자 왔을 리도 만무하고.
그렇다고 던전을 공략하는 것도 어불성설이다. 음지 3인방을 먼저 내보내서 지원을 부르는 건?
그것도 안 된다. 아니, 그것이야말로 화를 자초하는 일이다. 나간다면 우리 모두 동시에 나가야 한다.
시선을 왼쪽 상단으로 돌렸다.
아드레날린 부스트의 재사용 대기시간 앞으로 하루. 하루가 지나면 여기서 나간다. 그게 최선이다.
***
정확히 24시간이 지났을 때였다.
“이태진 팀장님. 잠시 이야기 좀 하시죠.”
음지 3인방 중 조영은이 눈치를 살피며 말했다.
“말씀하세요.”
“아무래도 계약에 비해 일이 너무 커진 것 같은데요.”
“그게 무슨 말입니까?”
“그렇잖아요. 미궁형 던전도 모자라서, 리저드가 튀어나올 줄은 몰랐어요.”
“몰랐어도 계약은 계약입니다.”
“문제는 그뿐만 아니죠. 여기서 당장 나간다고 해도, 그쪽 회사 백인호 팀장이라는 인간이 떡하니 버티고 있다면서요. 우리 죽이려고 벼르고 있다면서요.”
“우리가 아니라 저 혼자입니다.”
“백인호가 잘도 남은 인간들을 그냥 보내주겠네요.”
“원하는 걸 말해 보세요.”
조영은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딱 세 배. 추가 보수비용으로 세 배만 더 받을게요.”
“지금 계약 조건만 해도 두당 14억입니다. A급 헌터 용병이 한 번 던전 돌 때 7억쯤 받는 걸로 아는데.”
“저희는 스페셜하잖아요. 이번 전투에서 저희들이 잡은 몬스터 숫자가 제법 될텐데?”
“52마리 중 30마리를 저 혼자 해치웠습니다.”
“상황이 스페셜하다는 뜻이었어요. 어머. 저 공주님 말이 맞나보네. 왜 이렇게 쪼잔하게 굴어요? 이래서 앞으로 큰일 하겠어요?”
“계약을 체결해도 문제입니다. 일성에서 제가 호구 맞은 걸 두고 볼 리 없습니다.”
“그러면 이 팀장님이 잘 말해야 하겠군요. 저희 음지 것들이 엄청난 도움이 되었다고.”
슬그머니 뒤쪽을 바라봤다. 음지 형제가 죽은 리저드 시체 사이에서 농담 따먹기를 하며 낄낄거리고 있었다. 꼴을 보니 아무 생각도 없어 보인다..
“쟤들은 때되면 밥만 주면 그만인 애들이라. 돈은 저한테 입금해 주시면 됩니다.”
어쨌든 지금 당장 갑은 음지 3인방이 맞았다.
“두 배.”
“감사합니다. 고객님!”
조영은이 승리자의 미소를 짓고 돌아갔다. 정작 미소를 지어야 할 것은 나인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사실, 돈이라면 달라는 대로 줘야 하는 게 내 처지였다.
만약 이것들이 나를 도와주지 않는다고 해버렸으면, 상황이 심각하게 돌아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예컨대 내가 먼저 죽인다고 협박할 수밖에 없는 상황.
어쨌든 상황이 최악으로 치닫지는 않았다.
바깥에 얼마나 많은 헌터들이 숨어 있을지 모른다, 반드시 음지 3인방의 도움이 필요한 시점이다.
생각을 정리한 후 자리에서 일어났다.
“모두 일어나세…!”
말을 끝맺으려던 순간이었다. 좋지 않은 예감이 들었다. 본능적으로 몸을 뒤로 물렸다. 생각을 하고 자시고 할 것도 없었다. 몸이 먼저 움직였으니까.
콰직!
던전에 들어온 이후부터 늘 예민하게 작동시키고 있는 레이더였다.그럼에도 알아차리지 못한 기척이었다.
그렇게, 인영 하나가 내 앞에 서 있었다. 일본도를 어깨에 걸친 40대의 남성.
생전 처음 보는 놈이었다.
“어?”
그 순간 덜컹거리는 소음과 함께 조영은의 목이 떨어져 나갔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이런 개새끼가!”
멈추라고 말할 틈도 없었다. 음지 2인방이 일본도에게 몸을 날렸다. 다음 순간, 음지 2인방의 심장에 칼이 박혔다.
“커럭!”
2인방의 생명 반응이 꺼졌다. 즉사였다.
다른 쪽은?
시선을 돌리자 눈치 빠른 임한나와 박지현은 진즉 전투태세에 돌입해 있었다.
다시 정면으로 고개를 돌렸을 때, 뜬금없이 나타난 남자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
“흠. 듣던 것보다는 조금 실망인데. 이태진.”
싸늘한 목소리가 울렸다. 강한 바람이 귓가를 스쳐 지나간 직후였다. 놈의 여유로운 얼굴이 눈앞에 보였다.
[아드레날린 부스트를 시전합니다.
잔여 시간 : 5:00]
[오러 블레이드를 시전합니다.]
몸부터 날렸다. 아니, 날렸다고 생각한 순간 내 몸이 어딘가로 날아갔다.
“이 새낀 또 뭔데!”
박지현의 말을 한 귀로 흘리고 구석에 처박힌 몸을 일으켰다. 다시금 놈에게 몸을 던졌다.
콰과광!
혼신을 담은 일격이었다. 위에서는 한껏 뭉쳐놓은 중력 덩어리를 던졌고 정면에서는 공간을 구부리는 오러가 놈을 향해 쏟아졌다.
공격을 받는 당사자가 나라고 해도 죽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 만큼, 모든 것을 쥐어짜 낸 공격이었다.
뭐가 뭔지는 모르겠지만.
죽어!
놈의 검이 빛처럼 움직였다. 놈의 일본도와 내 롱소드가 공중에서 맞부딪쳤다.
쿠우웅!
잠시간, 놈과 내 주위에 진공이 형성됐다. 그다음엔, 휘몰아치는 폭풍이 놈과 나를 중심으로 생성됐다.
시야에 가려 보이지 않았지만, 순간이나마 놈의 눈썹이 꿈틀거리는 게 포착됐다.
“제법이야.”
풍압 너머로 남자의 목소리가 울렸다. 남자의 말과 달리, 남자의 일본도가 사정없이 흔들거리고 있었다.
놈으로서도 전력을 다하고 있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내 공격이 부족한 것도 사실이었다. 머릿속에서 울리는 경고음이 상당했다. 허나 늘 이런 난관을 헤쳐온 나다. 요란한 경고음을 끄고 한 발 더 내디뎠다.
콰아아앙!
사방 수백 미터에 지진이 일어났다.
쩌적거리는 바닥이 언제 무너질지 몰랐다. 다행인 점이라면 남자의 능력치가 예상 범주 내에 있었다.
나와 동급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S급도 아니다.
레벨로 따지자면 249. S급 바로 밑에 위치한 녀석이었다.
화악!
남자의 일본도가 내가 일으킨 폭풍과 정반대로 움직였다. 손짓 한 번에 기류가 잠잠해졌다.
허무한 감정을 숨기고 번쩍이는 검로를 따라 움직였다.
섬광이 터졌다. 어떻게 놈의 공격을 막은 건지 이해할 수 없었다. 감각으로도 쫓을 수 없는 속도였다. 검신의 축복이 내 몸에 덧씌워져 나를 대신해 싸우고 있었다.
무의식의 영역이었다.
벌새의 날개짓 마냥 순식간에 우리의 검이 여러 번 교차했다. 혹시 내가 승리하는 게 아닐까, 하는 착각이 들 무렵이었다.
허나 남자가 “쯧.” 하고 혀를 찬 순간. 일말의 희망이 사라졌다. 일본도가 번쩍거렸다.
그에 따른 대비를 하려 했을 때였다. 놈의 속도가 한참 더 빠른 게 문제였지.
스윽!
왼팔 어깻죽지에서 피분수가 뿜어졌다. 즉시 지혈된 것은 내가 한 게 아니었다.
폭풍에 가려 볼 수 없었지만, 박지현이 회복 스킬을 사용한 것일 터다.
그런데 다음 공격은 어떡하지?
“이태진. 너는 여기서 죽는다. 너무 걱정하지 마라. 나머지 두 녀석들은 목격자로 살아 남을 테니.”
남자는 망설임이 없었다. 지금껏 지나왔던 여느 세력처럼 나를 회유하지도, 혹은 시간을 끌지도 않았다. 무정한 얼굴 그대로 일본도를 내 왼쪽 가슴을 찔렀다가 뺐다.
“그러니 죽어라. 우리의 기치 아래 시스템의 종은 용납할 수 없다.”
“거르륵.”
박지현을 부르려했던 내 입에서는 그저 힘없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문득 시야가 흐릿해졌다.
찰나간이었다. 어떤 스킬을 쓴 건지 임한나와 박지현이 당혹스러운 얼굴로 굳어 있었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동료들의 생사를 확인하는 것뿐이었다.
젠장할.
움직여라. 움직여라!
하고 몸에 명령어를 주입해도, 무릎 꿇은 내 몸은 잠시나마 꿈틀할 뿐, 어떤 유의미한 반항도 불가능했다.
“그 빛나는 재능이 아깝다. 정말 아까워. 그래도 어쩌겠어. 스승님의 젊은 시절을 본 기분으로 만족해야지. 즐거웠다. 이태진.”
휙하고 뒤돌아선 남자가 감정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자. 이제 죽어라.”
남자의 무정한 얼굴을 끝으로. 내 머리가 뎅겅 잘려 나갔다.
…팟!