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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터는 미래를 본다-118화 (118/170)

118화 검신의 흔적 (5)

성체 리저드 수십 마리가 이병환을 쓰러트리고 그 위에 올라탔다. 쇳덩이가 우지끈 구겨지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조영은이 외쳤다.

“이병환! 괜찮아?”

“어! 근데 좀 힘들어!”

“나올 수 있겠어?”

“그건 좀 힘들겠는데!”

조영은이 우리 쪽을 돌아봤다. 정확히는 박지현을 쳐다보며 말했다.

“힘들다는데요?”

박지현이 고개를 저었다.

“거리가 너무 멀어요. 몬스터 속에 파묻혀 있어서 특정하기도 어렵고.”

“하려면 할 수 있지 않습니까.”

내 말에 박지현이 코웃음 쳤다.

“그러면 마나를 더 써야 하는데. 그쪽이 다친 거면 모를까. 그렇게는 못 해요.”

“왜 못해요?”

“A급 던전은 언제 어디서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니까.”

조영은이 다급하게 외쳤다.

“그러면 쟤는! 쟨 어떡해요!”

“올라오라고 해. 여기까지 올라오기만 하면 도와줄 테니까.”

차가우리만치 냉정한 판단이었다.

퍼버벅!

어둠 속 리저드들이 이병환을 공격하는 속도가 점점 더 빨라졌다. 이병환이 탱커가 아니었다면, 진작 죽었을 만한 상처가 여기저기 벌어지고 있었다.

임한나와 조영은을 바라보며 말했다.

“화살이나 마법을 쏘는 건?”

그러나 돌아오는 대답은 예상했다시피, 절망적이었다.

“공간이 너무 협소해. 시야 확보도 어렵고. 어그로가 내 쪽으로 튀는 건 둘째고. 팀킬이 날 수도 있어.”

역시 방법은 하나뿐이었다. 내가 들어가는 것.

“제가 저 자리에 있었으면 어떻게 했을 겁니까?”

팔짱을 끼고 있는 박지현에게 말했다.

“그쪽은 일성이니까.”

마나 소모를 더 하더라도 도와줬을 것이라는 의미였다.

“저 이러다 죽겠는데요!”

이병환이 느긋하게 외쳤다.

음지 특유의 여유로운 목소리였지만, 생각보다 상황이 긴박했다.

저대로 두다가는 백 퍼센트 확률로 죽는다.

때마침 꾸역꾸역 계단을 올라오려는 이병환의 다리가 미끄러졌다. 지옥의 아귀처럼, 리저드들이 그의 몸에 달라붙어 떨어질 생각을 안 했다.

“사, 살려……!”

순간, 조영은과 눈이 마주쳤다. 흔들리는 눈동자가 절박해 보인다.

박지현을 돌아보며 말했다.

“…제가 밑으로 내려가면요? 도와줄 겁니까?”

“꿈 깨요. 그딴 협박질에 누가 넘어간다고.”

박지현이 코웃음 쳤다.

“그쪽이 이번 공략의 최우선 보호 대상인 건 맞는데. 그건 공략을 계속했을 때 이야기고. 한번 내려가 봐요. 난 탈출석 쓰고 나갈 테니까.”

“그럼 저대로 죽게 놔둬? 구해줘! 제발! 부탁이야!”

조영은이 빌다시피 박지현에게 매달렸다. 박지현의 표정은 차가우리만큼 냉정했다.

“그러게 가지 말았어야지. 내가 몇 번이나 말했잖아.”

“미안해! 미안하다고! 그러니까 이번 한 번만 살려줘!”

“야.”

엉겨 붙는 조영은을 떨쳐내며, 박지현이 낮게 말했다.

“던전에서 두 번이 어딨어. 여기가 학예회인 줄 아나. 안 그러면 네가 내려가 보든가. 그건 안 말릴 테니까.”

“잠깐만요.”

분위기가 더 달아오르기 전에. 내가 만류하고 나섰다.

좋은 생각이 떠올라서였다.

“탈출석을 쓴다고요?”

“못할 것 같아요? 미친 짓도 정도가 있어야지. 저 좁은 곳에서 어떻게 싸우려고? 잘 해 봐요. 어디. 내가 이렇게 될 줄 알았지.”

그 말만 남기고 박지현이 등을 돌렸다.

거기에 대고 빠르게 말했다.

“그게 아니라. 그쪽 탈출석. 저한테 있는 것 같아서.”

뒤돌아가던 박지현이 우뚝 멈췄다. 삐그덕거리는 박지현의 몸이 내 쪽을 향해 돌아섰다. 표정이 살벌했다.

“내놔.”

“다시 물어봅시다. 제가 계단 밑으로 내려가면 어떻게 할 겁니까? 진짜 저는 구해주는 거예요?”

“이런 미친 새…!”

뒷말은 듣지 않았다. 좁은 통로로 내 몸을 밀어 던졌다.

그나마 호롱불이 있던 바깥과는 달리, 암흑천지의 계단이 나를 반겼다.

그때였다.

파충류 한 마리가 내 쪽으로 쏟아졌다.

세로로 쭉 찢어진 놈의 눈빛에 탐욕이 일던 것도 잠시, 리저드가 당황을 금치 못했다.

‘어떻게?’ 따위의 의사를 전달하는 듯했다.

문답 무용.

다음 순간, 구붓하게 휘어진 오러 블레이드가 놈의 몸을 갈랐다. 걸리는 것 하나 없이, 놈은 내게 쏟아진 그대로 양단됐다.

그와 함께 놈의 몸 안에 있던 자주빛 액체가 내게 쏟아졌다.

헬리오스의 심장을 장착하고 있음에도 어깨가 화끈거리는 정도였다.

뒤에서 쿵쿵대는 심장 소리 네 개가 들렸다.

찰나간에, 다시 한번 정신을 집중해 봤다. 착각이 아니었다. 팀 전원이 나를 뒤따라 계단으로 들어온 것이다.

특히나, 바로 뒤에 있는 심장 소리는.

“박지현?”

“왜!”

“위에서 도우라니까!”

“그럴 수가 있어야지! 탈출석 내놔!”

서걱!

리저드 한 마리를 더 베고 나아갔다. 지금 뒤를 돌아봐서는 안 된다. 그 순간 몬스터들이 나를 향해 덮쳐올 것이다.

어쨌든 상황은 벌어졌고, 지금은 팽팽하게 당겨진 긴장감을 믿는 수밖에 없었다.

좌수로 든 검을 벽면에 찔렀다.

[일점폭발을 시전합니다!]

쾅!

터지는 소음이 벽 안쪽까지 퍼졌다.

끼에엑!

소름 끼치는 괴성도 함께였다. 어마어마한 경험치 덩어리를 만끽할 틈도 없었다. 바닥에서 올라오는 지네를 발로 밟아 터트린 후, 오른쪽으로 오러블레이드를 쏘았다.

쿠구구궁!

세 마리가 한 번에 즉사했다. 그러고도 이병환에게 다가가기까지는 열다섯 마리가 남았다.

“이병환! 살아있어? 대답해봐!”

“죽기 직전이야! 살려줘!”

불쑥 가까워진 곳에서 이병환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의 말은 거짓이 아니었다. 가래 끓는 목소리로 미루어보아, 정말로 상태가 위험해 보였다.

그런데 불현듯 좋지 않은 생각이 떠올랐다.

내가 몬스터라면 지금 이 상황에서 어떻게 할까. 정면을 바라봤다,

리저드 열다섯 마리. 세로로 길게 찢어진 놈들의 노란 눈깔 서른 개가 일시에 나를 보고 있었다.

빌어먹을 확신이 들었다.

“모두 잘 들어요! 아마 조만간 벽이 무너질 겁니다!”

꿀꺽, 꿀꺽.

침 삼키는 소리가 연이어졌다. 천장부터 와르르 쏟아지는 벽에 깔리는 상상을 한 모양이었다. 정확히는 벽과 함께 쏟아질 몬스터와 뒤엉키는 상상을 한 모양이겠지.

때마침 좁은 통로의 천장이 흔들거렸다.

“제가 신호를 주면 뛰세요! 우리는 지하 1층에서 싸울 겁니다.”

“거기에 몬스터가 있으면 어떡하죠!”

몬스터 밭에 깔려 있는 이병환이 그 와중에 소리쳤다.

“싸워야죠!”

“그렇군요!”

이병환의 낭창한 대답을 시작으로 조영은, 근거리 딜러 김대연이 대답했다. 그런 다음 박지현에게 물었다.

“그렇게 할까요?”

“닥쳐!”

이쪽 허락도 구했고. 다리에 마나를 잔뜩 실은 후였다.

“뛰어!”

쿠웅!

바닥을 걷어찼다. 그와 동시에 벽면에서 진동이 울렸다. 아래, 위, 옆 할 것 없이 온갖 곳에서!

[아드레날린 부스트를 시전합니다!]

아드레날린 부스트와 함께 시간이 느려졌다. 또한 내 몸이 균형을 잃고 계단 아래로 쏠렸다.

꾸역꾸역 네 번째 계단을 밟았을 때 성체 리저드 열 마리가 내게 쏟아졌고, 다섯 번째 계단을 밟았을 때는 천장이 와르르 무너지고 있었다.

중력 마법을 쓸 새도 없이 내 몸이 앞으로 밀려났다. 기겁하며 뒤돌았을 때는, 무너지고 있던 계단이 완전히 땅 밑으로 꺼져 있었다.

지하 1층.

다음 개미굴로 넘어온 순간이었다. 재빨리 팀원들의 상태부터 확인했다.

임한나, 박지현, 그리고 음지 3인방까지. 다행이었다. 계단 밑에 깔린 사람은 없었다. 찰나간에 살펴본 이병환의 상태도 나쁘지 않았다.

지금도 나를 죽일 듯이 노려보는 박지현이 치료한 덕분이었다. 팀원들의 상태가 확인됐으니 몬스터를 파악할 차례였다. 파동을 넓게 퍼트렸다.

빌어먹을.

무너졌던 계단 잔재 속, 벌떡 하고 몬스터들이 몸을 일으켰다. 뒤쪽은 더 가관이었다. 이게 웬 떡이냐는 듯 몬스터들이 우리를 쳐다보고 있었다.

“쌍두 도마뱀 열하나, 성체 리저드 열, 샌드 웜 아홉, 이블아이 리저드 다섯 마리.”

임한나가 절망 섞인 목소리로 보고했다. 머리 둘 달린 것들, 혹은 눈깔이 하나인 것들은 서열상 성체 리저드 보다도 윗급을 차지한다.

A급다웠다. 저것들이 뿜어내는 독액의 파동만 느껴봐도 살 떨릴 정도다. 팀원들의 표정도 마찬가지다.

“씨발. 두 번째 방부터 무슨!”

“일단 살아남는 것에 집중합시다.”

그렇게 외친 후였다.

“와라!”

머리 두 개 달린 도마뱀이 나를 물어뜯으려 다가왔다. 느려진 시간 속에서도 빠르다고 느낄 정도로 굉장한 속도였다.

허나 그것이 위협이 된다는 말은 아니었다. 애초에 모든 힘을 드러내기로 한 마당이다. 아마 이 전투가 끝나고 며칠 동안 드러눕는 대가를 치를 것이다.

그 대신 얻은 힘이었다. 검신의 축복이 쌍두 도마뱀의 공격 방향을 정확히 예측했다.

콰직!

[경험치를 획득했습니다! : 790exp!]

다음, 그다음, 그다음.

베고 베도 끝없이 몬스터 떼가 나를 뒤덮었다. 일부러다. 모든 몬스터의 어그로를 내가 감당해야 한다. 그만큼의 상처도 마찬가지고.

그렇지 않아도 내려다본 손이 떨리고 있었다. 손바닥부터 시작해 어깨까지. 기포가 툭툭 터지고 있었다. 조금 전에 스친 독액 때문이었다. 겨우 스친 것만으로 이렇게 된 것이다.

허나 그것도 잠시뿐, 옆에 있던 박지현의 손에서 빛이 뿜어져 나왔다. 부글부글 끓기 시작하던 기포가 그 순간 잠잠해졌다.

감탄할 새도 없었다.

지체하지 않고 몬스터 쪽으로 날아갔다. 쏟아지는 리저드들이 끝도 없이 이어졌다.

진영이 무너진 건 오래였다. 그 와중에도 박지현의 시선에는 오로지 나밖에 없었다. 임한나가 걱정됐지만 그런 걱정조차 사치였다.

베고 베고 또 벴다. 더 이상 지쳐 팔 한번 움직일 수조차 없을 만큼 벤 후였다.

아드레날린 부스트가 종료를 알렸고, 남아 있는 것들이 없었다. 헉헉거리는 숨소리 가운데 리저드 수십 마리가 바닥에 널려 있었다.

머리가 어지럽고, 여기저기 벌어진 상처가 한둘이 아니었다. 거기마다 독기운이 퍼져 피부 겉표면이 부글부글 끓고 있는 것은 두말할 것도 없었다.

그러나 이 정도면. 이 정도 상처로 직전의 전투를 끝냈다면 오히려 믿지도 않는 신께 감사라도 해야 할 판이다.

임한나와 눈이 마주쳤다. 자주빛 피칠갑을 한 그녀가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임한나의 상태도 나와 별반 다르지 않다. 치료를 받아야 하고, 휴식을 취해야 한다.

그러나 죽을 정도는 아니었다. 조영은, 이병환, 김대연도 마찬가지다.

단 한 사람만 빼고.

박지현이 던전 구석에 쓰러져 있었다. 부들부들 떨면서. 가까이 다가가니 상태가 더 심각했다.

보기 흉하게 일그러진 그녀의 얼굴이나, 부풀어 오를 대로 오른 몸은 사람의 형상으로 보기도 힘들었다. 지금 당장 치료받지 않으면, 그녀는 무조건 죽는다.

탈출석을 쓰고, 포션을 찾는다면 그때는 늦는다.

“치료 마법은.”

나지막하게 내가 물었다. 그녀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 대기 시간이라는 뜻이었다.

다른 말로는, 그녀는 자신의 목숨을 도외시하면서까지 내게 치료 마법을 몰아줬다. 이유가 무엇이든 나는 큰 은혜를 입었다.

그때 그녀의 입이 천천히 열렸다.

“…렇게 죽을 줄 알았으면 그냥….”

가래 끓는 소리가 박지현의 목소리를 잠재웠다. 그러나 박지현은 포기하지 않고 내게 손짓했다.

“잘…… 들어. 바깥……에서 당신…… 죽이…….”

그녀가 참지 못하고 죽은 피를 토했다.

안된다. 안돼.

몇 번이나 제발을 외치며 심장의 고리를 돌리고 돌렸다. 전투에서 쓰고 남은 마력을 마지막 한 톨까지 끌어모았다.

고리 다섯 개가 삐거덕거리면서 아우성쳤지만 개의치 않았다. 심장이 쥐어짜지는 기분이 들었지만 그것도 개의치 않았다.

지금 중요한 것은 나를 위해 목숨을 내던진 박지현을 살리는 것 하나. 그것뿐이었다.

마침내 마법을 시전할 수 있을 만큼 마력을 모은 때였다. 박지현이 마지막 숨을 헐떡이고 있었다.

그리고 내 손에서 박지현을 향해, 마법 결정을 토해냈다.

화악!

“……백인호가 바깥에서 기다리고 있으니까. 조심하라고요. 벌써 지금쯤이면 던전 바깥에서 대기하고 있겠네. 내가 죽으면서까지 이딴 말이나 하고 있어야…… 어?”

박지현이 말을 멈췄다. 그녀가 숨을 들이킨다. 걸리는 것 하나 없이 호흡하는 게 그리도 이상한 것인지, 박지현이 벌떡 일어났다.

제 몸 구석구석을 살핀 박지현이 나를 쳐다봤다.

“이게 무슨.”

나머지 파티원들도 마찬가지였다. 이해할 수 없는 복잡한 눈빛으로, 그들이 나와 박지현을 번갈아 가며 쳐다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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