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7화 검신의 흔적 (4)
쏴악!
공간의 압력이 우리를 뱉어냈다.
컴컴한 어둠 속, 벽면에 붙은 붉은색 호롱불만 을씨년스럽게 우리를 반겼다. 조영은의 이맛살이 팍 구겨졌다.
“까다롭게 됐네.”
“그러니까. 미궁형이야.”
던전 중 가장 까다로운 유형이 걸렸다. 미궁형. 아래로 내려갈수록 끊임없이 갈라지는 길을 찾는 것은 물론이고 음흉한 것들이 파놓은 함정을 피하는 것도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다른 말로는, 헌터들이 가장 기피하는 던전이기도 했다.
침묵이 흐르는 가운데 임한나가 붉은 호롱불을 가리키며 말했다.
“몬스터는 리저드야.”
끙끙 앓는 소리가 튀어나왔다. 그럴만하다. 미궁형에 리저드라니. 안 좋은 것들은 모두 겹쳤다.
가위바위보를 통해 던전을 고른 것이 생각났다. 분명 내가 1등이었는데, 왜 이렇게 된 거지.
“운수도 더럽게 없지. 꼭 골라도 이런 걸 골랐어요?”
박지현이 나를 위아래로 훑어보며 말했다.
“지금이라도 그만두는 게 어때요? 겨우 다섯 명으로 이 개미굴을 공략하자고요? 자신 있어요?”
“자신 있습니다.”
“고집부리지 말죠? 그쪽 생각해줘서 하는 말인데.”
웃음이 터질 뻔했다. 천하의 박지현이 날 생각해 준다?
지나가던 개도 안 믿을 소리를.
“나갈 거면 지금이라도 나가도 좋습니다. 탈출석 드릴까요?”
“누가 달래요! 내가 여기 팀장이야!”
그러더니 저 혼자 땅바닥을 쿡쿡 밟으며 앞으로 나아갔다.
“뭐해! 안 따라오고!”
음지 3인방과 임한나가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나를 돌아봤다. 어떡하냐는 듯이.
“따라오라네요.”
어쨌든 팀장은 팀장이다. 어깨를 으쓱이고 박지현의 뒤를 따라갔다.
우리는 아주 천천히 나아갔다. 첫 번째 굴을 뒤적거리면서. 다행히 몬스터가 숨어있는 흔적은 어디에도 없었다.
몬스터가 없다면 통로를 찾아야 한다. 이곳은 위로 올라가는 탑도 아니고, 일자로 쭉 뻗은 통로형 던전도 아니니까.
끝없이 이어진 개미굴처럼 내려가는 길만 있을 뿐이다. 즉, 어딘가 계단이 있을 것이다.
한참 동안 임한나가 눈을 감고 집중한 후였다. 임한나가 저벅저벅 걸어간 곳에 계단이 숨어 있었다.
“통로는 여기뿐이에요.”
한 명씩, 그것도 몸을 비집고 들어가야만 내려갈 수 있는 좁은 계단이었다. 박지현이 계단을 뚫어져라 쳐다보며 말했다.
“딱 봐도 몬스터 우글거릴 것처럼 생겼는데. 맞아?”
“서른 마리쯤. 그 이상일 수도 있고.”
임한나의 말이 맞다. 늘어진 계단 곳곳에 몬스터들이 숨어 있었다. 어떤 놈은 천장에, 어떤 놈은 바닥에, 그리고 양옆에도 한가득.
우리가 이곳을 지나가기만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느껴지는 기운도 하나하나가 B급 몬스터와는 궤를 달리했다. 환골탈태를 거친 나조차도 몸이 저릿저릿할 정도의 파동이 느껴졌다.
박지현이 눈살을 찌푸렸다. 그러더니 나를 돌아봤다.
“어떻게 할 거예요?”
“저한테 묻는 겁니까?”
“그럼 누구한테 묻겠어요?”
“지금은 박지현 씨가 팀장이잖아요.”
박지현의 눈이 커졌다. 생각도 못 했다는 듯이. 헛숨을 들이켜면서.
“…팀장으로서 의견 물어본 거였어요.”
한결 부드러워진 목소리로 박지현이 턱짓했다.
“이제 말해 봐요. 어떻게 하는 게 좋겠어요?”
한번 상상해봤다. 이 좁은 통로를 한 명씩 지나가는 모습을. 그러면서 전투가 벌어지는 우리가 그려졌다.
곧바로 고개를 저었다. 누군가는 반드시 죽는다.
그리고 그 반드시에는, 레인저와 원거리 딜러, 힐러일 가능성이 아주 높고.
“제가 팀장이라면 여길 지나가지는 않겠죠.”
한순간 박지현의 얼굴이 밝아졌다.
“통로가 너무 좁습니다. 우리 여섯 명은 좁은 곳에서 싸울 만큼 합을 맞춰본 적도 없고요. 이 상태로 계단을 내려가는 건 자살하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그렇죠? 역시 지금이라도 탈출….”
“대신 놈들을 위로 끌어올릴 겁니다. 사람이라는 미끼를 주면서 한 마리씩 말입니다. 아무리 A급이라 해도 몬스터는 몬스터. 놈들이 미끼를 물지 않을 리가 없습니다.”
밝아졌던 박지현의 얼굴이 다시 일그러졌다. 표정 변화가 다채로운 여자였다.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해요? 어디에, 어떤 몬스터가, 얼마나 숨어 있는지 어떻게 알고 유인해요?”
어두컴컴한 계단을 가리키면서, 박지현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혹시라도 잘못 건드렸다가 떼거리로 튀어나오면, 그땐 어떡하게요? 겨우 여기 있는 여섯 명으로 감당이 될 것 같아요? 리저드 서른 마리를?”
“떼거리로 튀어나오지 않게 하면 되겠죠.”
“방법이 있다는 것처럼 구네요.”
“방법이 있으니까요.”
박지현이 피식 웃었다.
“뭔데요?”
“박지현 씨가 말했잖아요. 어디에, 어떤 몬스터가, 얼마나 숨어있는지 어떻게 아냐고. 그걸 알고 있습니다.”
환골탈태까지 거친 감각이다. 몬스터의 수준이 아무리 높다 한들, 내 기감을 속일 수는 없었다.
이번에는 박지현뿐 아니라, 음지 3인방의 얼굴도 괴상하게 구겨졌다. 음지 3인방이 의심의 눈초리로 나를 바라봤다.
“…이태진 팀장님. 아니, 부팀장님. 아니. 이태진 씨. 진짜예요? 어디에 몇 마리 숨어있는지가 보인다고요?”
“일성에서 쫓겨나기 전에 들은 적 있어. B급 던전에서 이태진 씨 활약한 거. 그때도 던전 구석구석 몬스터 숨어있는 거 이태진 씨가 다 찾았다면서요? 그게 진짜였구나.”
“잠시만. 그게 A급 던전에서도 적용된다고?”
“그때도 A급 같은 B급이었다잖아.”
“뭐가 됐든 우리는 이미 돈 받았어. 돈 받은 만큼은 믿어야지.”
조영은의 말을 마지막으로 들은 후였다. 고개를 돌려 박지현을 바라봤다. 여전히 반신반의하는 표정이었다.
“정확한 위치와 개체 숫자까지 보인다고요? 그걸 믿으라고?”
“믿고 말고는 박지현 ‘팀장님’ 자유죠. 저는 알려주는 것뿐이고.”
“…좋아요. 진짜라고 치고. 몬스터를 유인한다고요? 미끼는 누가 할건데요?”
“그건 제가 가겠습니다.”
음지 3인방 중 탱커를 맡고 있는 이병환이 손을 들었다. 해맑은 얼굴이었다.
“어그로 끄는 데는 일가견이 있는지라. 위치만 알려 주십시오. 천천히 한 발자국씩 걸어가 보겠습니다.”
이건 좀 감동인데.
음지 것들이라고 무시한 마음이 없지 않아 있었다. 그런데 막상 보니 웬만한 양지 헌터들보다 깡이 세다. 이 사람들. 돈 준 만큼은 일처리가 확실했다.
감동과는 별개로 고개를 저었다. 이들에게 동료애를 느껴서가 아니라, 공략을 위해서 벌써부터 파티원들의 힘을 뺄 수 없기 때문이었다.
“아뇨. 미끼는 제가 합니다.”
“어. 그러면 몬스터 어그로는….”
그 순간 금빛 헬리오스의 심장이 던전을 환하게 비췄다.
“문제없겠군요. 알겠습니다.”
싱겁게 웃으며 물러난 이병환을 두고 박지현에게 턱짓했다.
“허락하는 겁니까?”
“아뇨.”
옆에서 탄식이 터져 나왔다. 나머지 네 명이 그쯤 하지, 하는 의미로 박지현을 쳐다봤다. 그래도 박지현은 조금의 동요도 하지 않은 채 나를 쳐다봤다.
이쯤 되니 나도 한계였다.
박지현의 면상을 향해 탈출석을 던져버리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치아가 우수수 떨어진 박지현을 보고 싶었다.
가까스로 충동을 이겨냈을 때였다.
“작전은 그럴듯해요.”
“그러면 뭐가 문제입니까?”
“미끼를 왜 그쪽이 해요? 그쪽이 계단 안으로 들어가면 우리는 누가 지키냐고. 혹시라도 몬스터가 잘못 튀어서 여기까지 어떡하냐고요.”
음지 3인방 중 탱커 이병환과 근거리 딜러 김대연을 턱짓했다.
“일성에 있는 A급 헌터 못지않습니다.”
“저딴 것들을 내가 어떻게 믿고. 이봐요.”
“이병환입니다.”
“이름은 됐고. 들어가요. 안으로.”
뭐라 말할 틈도 없이, 박지현이 내게 쏘아붙였다.
“주제 파악이 안 돼요? 이 되먹지 않은 파티에서 그쪽이 얼마나 큰 역할을 맡고 있는지 몰라요?”
“주제 파악?”
“다른 놈들은 죽거나 말거나 어떻게든 공략을 이어나갈 수 있어요. 그런데 그쪽은 달라요. 그쪽이 죽는 순간 우리도 전멸이라고요.”
욕을 먹는 건지, 아니면 칭찬을 듣는 건지 헷갈린다. 모두 꿀 먹은 벙어리가 돼서 박지현을 쳐다봤다.
“다들 잘 들어요. 미리 말해 두는데, 내 치료 스킬은 이태진 이 사람한테 집중될 거예요. 그러니까 알아서 몸 사려요. 죽기 싫으면.”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모두 조용히 박지현의 말을 듣기만 했다. 심지어 박지현을 한심하게 쳐다보던 임한나조차 눈만 껌벅거리고 있었다. 구구절절 옳은 말이어서 그랬다.
“혹시라도 이상한 상황이 벌어지면 이태진 당신은 내 옆에 꼭 붙어있고.”
“알겠습니다.”
“이유도 안 물어봐요?”
“팀장의 말은 절대적이잖습니까.”
기분 좀 풀리라고 말했는데 생각보다 효과가 더 좋았다. 박지현이 만족스럽다는 듯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으니까.
“뭐해요? 안 들어가고.”
“아, 예. 들어가겠습니다.”
머리를 긁적이던 이병환이 방패를 들었다. 그가 첫 번째 계단을 밟기 직전, 내가 말했다.
“첫 번째 계단 오른쪽 허리 부근. D급 고블린 한 마리 죽일 수 있는 정도로 건드리세요.”
“예? 아. 예.”
이병환이 긴가민가하면서 주먹을 쥐며 벽을 건드렸다.
쿵.
딱 내가 말한 만큼의 힘이 아래로 내려가는 계단으로 퍼졌다.
직후였다. 이병환의 눈이 큼지막해진 순간, 벽을 뚫고 튀어나온 게 있었다. 족히 3미터는 될법한 성체 리저드였다.
“케륵!”
놈이 이병환을 물어뜯기 직전, 내 롱소드에서 튀어나온 오러 블레이드가 리저드를 갈랐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남은 것은 반으로 쪼개진 리저드와, 놈의 시체에서 튀어나온 자주빛 액체뿐이었다.
모두의 시선이 훽하고 돌아갔다. 내 쪽으로. 상황이 상황인지라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이제 어떡하죠?”
“두 번째 계단부터는 벽을 치는 즉시 이곳으로 올라오세요. 저는 안으로 못 들어가니까.”
“예. 그렇게 하겠습니다.”
이병환이 얼떨떨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지시는 계속됐다.
“두 번째 계단 왼쪽 벽, D급 오크 한 마리를 죽일 수 있는 정도로.”
툭.
이병환은 주먹을 건드린 즉시 후다닥 위로 올라왔다.
아슬아슬하게 이병환을 놓친 리저드 두 마리와 내 눈이 마주쳤다.
서걱! 퍼벅!
한 놈은 내 칼에, 나머지 한 놈은 임한나의 화살이 박혔다. 아무리 A급이라 한들 겨우 첫 번째 방이다. 몬스터는 손 쓸 새도 없이 죽었다.
연이어 계속 말했다.
“두 번째 계단 오른쪽 벽, 힘은 똑같습니다.”
서걱! 서걱! 퍼벅!
세 번째, 네 번째, 다섯 번째 계단을 지날 때까지도 이병환은 지시한 주문을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수행해냈다. 그러면서도 긴장한 기색이 안 보였다. 이거. 볼수록 음지 3인방이 마음에 든다.
“지겨워 죽겠네.”
“두 칸 남았습니다.”
몬스터로 치자면 스무 마리가 남은 상태였고.
“여섯 번째 계단 천장. C급 리저드 한 마리 죽일 정도로.”
이번에도 잘하겠지.
의심 없이 이병환을 바라봤을 때였다.
쿠웅!
들려서는 안 될 효과음이 계단으로 울려 퍼졌다.
“어라?”
이병환이 멋쩍게 웃으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런 미친 새끼!
C급이 아니라 B급 리저드를 일격에 처 죽일 만한 파동이었다.
“어서 나와!”
다급히 외쳤을 때였다.
“저 어떡…!”
콰과광!
이병환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사건이 벌어졌다.
좌, 우, 위, 아래.
벽 안에서 잠자고 있던 몬스터들이 번쩍이며 일어났다. 순식간이었다. 이병환의 몸이 파충류 속으로 파묻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