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6화 검신의 흔적 (3)
요즘 따라 비싼 곳에 자주 오는 기분이다. 노는 물이 달라진 만큼 익숙해져야 한다지만 어울리지 않는 옷을 입은 기분은 여전하다.
괜히 텁텁한 기분에 넥타이를 손보는 사이 손영혁이 젓가락질을 멈췄다.
“뜻은 잘 전했던 것 같은데.”
“예. 잘 받았습니다.”
“그런데 왜 다시 그놈들을 영입했지?”
“일성이 아니라, 제 개인적인 용병으로 고용한 겁니다. 그 두 개는 엄연히 다르죠.”
손영혁의 뚫어질 듯한 시선이 느껴졌다.
“말장난하자는 건가? 아니면 협회가 만만해 보여서?”
“둘 다 아닙니다.”
“뭔가 착각하는가 본데, 몇 번 같이 일해 봤다고 해서 널…….”
“봐달라는 말도 아니고요.”
젓가락을 탁 내려놓는다. 찌푸린 눈썹만큼 불쾌한 감정이 여실하게 느껴졌다.
“다시 말하지만 어디까지 개인적으로 고용한 용병들일 뿐입니다. 확실하게 해 둘까요? 협회가 일성을 공격해도 그 사람들이 끼어들지는 않을 겁니다. 반대도 마찬가지고요.”
찌푸린 눈썹이 위로 올라갔다. 곧 곰곰이 뭔가를 생각하는 듯했다. 침잠된 손영혁의 눈빛에 다시 생기가 돌았을 때, 그가 뭔가를 깨달은 모양이었다.
“일성을 나갈 생각이군.”
손영혁의 눈에 욕심이 스쳐 지나갔다.
“언제?”
“글쎄요. 한 250일 뒤?”
목이 바짝 탄다는 듯 손영혁이 벌컥벌컥 물을 들이켰다.
“또 누가 알지?”
“아무도 모르죠. 아직은.”
“협회로 들어올 생각은?”
“없습니다.”
활활 타오르던 눈빛이 그 순간 식었다. 하지만 잔불은 꺼지지 않았나 보다. 손영혁이 냉수를 한 번 더 들이키고 말했다.
“들어와야 할 거다. 아니면 쓸려갈 테니까.”
“쓸려간다고요? 그게 무슨 뜻입니까?”
안 그래도 좀 자세히 듣고 싶은 주제였다. 요즘 협회에서 하는 짓들이 평범해 보이지는 않아서.
행보를 보나, 협회장이 했던 말을 돌이켜보나 나라를 전복시켜도 이상하지 않았다.
한참을 꾸물대던 손영혁이 말했다.
“음지 것들은 알아서 잘 관리해라. 이번 한 번은 넘어가 줄 테니.”
손영혁이 일어났다. 문을 열고 나가는 그가 슬쩍 뒤돌아봤다.
“아무래도 다음에는 적으로 만나겠군. 느낌이 그래.”
***
한석훈이 검을 빙빙 돌리면서 자세를 잡았다. 한껏 여유로운 표정이었다.
묵직한 기세와 파동이 여실히 느껴졌다. 단순히 강하고 약한 문제가 아니라, 오로지 산전수전 다 겪은 베테랑 헌터만 낼 수 있는 분위기였다.
연무장을 중심으로 반 바퀴쯤 돌았을 때였다. 동시에 멈춰선 우리 중 먼저 입을 연 건 한석훈이었다.
“이것 봐라. 이제 쫄지도 않네?”
“그렇게 보입니까?”
“팔 하나 없다고 무시하는 거지?”
“많이는 아니고 조금요.”
“개구리 새끼가 올챙이적 생각도 못 하고. 버릇 한번 고쳐줄 때 되긴 했지.”
“팀장님도 혓바닥이 길어졌습니다.”
“건방진 새끼.”
“뭐해요? 안 오고.”
말을 끝내자마자였다. 전투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격돌하며 시작됐다.
콰앙!
쭉 뻗어 나온 푸른색 오러 블레이드 두 개가 맞부딪쳤다. 과연 예상했듯, 강력한 압박이 내 눈알을 터트릴 듯 짓눌러왔다.
A급이 아니었다면, A급 중에서도 한석훈만큼의 수준이 아니었다면 그 순간 목이 꺾였을 만큼의 힘이었다.
시간이 느리게 흘러갔다. 방금까지 천지를 진동할 듯 울려대던 소음이 사라졌다. 대신 웅웅거리는 공기의 진동만 고막을 타고 흘러 들어온다.
한석훈이 씨익 웃고 있었다.
휘청거리는 몸을 부여잡은 후, 내 차례가 다가왔다. 한석훈의 발이 바닥을 짚기 직전이었다.
고리 다섯 개가 돌아가며 중력 마법을 시전했다. 삐끗거리는 한석훈의 발이 보였고, 그 순간 전력을 다해 칼을 내리쳤다.
한석훈의 머리 위로!
화아악!
승부를 결정지을 한 수라고 생각했던 것도 잠시였다. 검을 거둬들일 수밖에 없었다. 발을 더듬은 한석훈이 그 자세 그대로 내 목을 노리고 들어왔기 때문이었다.
하!
예전, 한석훈에게 배운 그대로 마나를 다시 뱃속으로 집어넣은 후, 내가 먼저 물러났다.
시간이 다시 빨라졌다.
우우웅!
연무장이 아우성쳤다. 발밑을 보니 운석이 떨어진 듯 거대한 구덩이가 생겨났다.
검을 다시 잡고 자세를 잡았다. 그러고 보니 이 모든 것이 한 호흡 만에 일어난 일이었다.
검면에 비친 내 얼굴이 웃고 있었다. 앞을 보자 한석훈도 마찬가지였다.
“이제 몸이 좀 풀리는 것 같기도 하고.”
“허세는.”
아드레날린 부스트를 시전했다.
돌연, 넘쳐나는 힘을 바탕으로 뛰어갔다. 토끼눈으로 나를 바라보는 한석훈의 얼굴이 커졌다.
승리를 확신하며 밀어붙였다.
그런데 젠장할. 한쪽 팔밖에 안 남은 양반이 뭐가 이렇게 강한지, 밀어내려 해도 꿈쩍하지 않았다.
누가 보면 생사를 건 혈투라 생각할 정도로, 우리의 손속에는 자비가 없었다. 그러면서도 정작 피 한 방울 튀지 않았다.
내가 생각해도 희한한 일이었다.
마지막 한 방울까지 마나를 쭉 짜낸 후였다. 한석훈의 목 바로 한치에서 멈춘 칼을 거뒀다.
턱밑까지 차오른 숨을 내뱉으며 털썩 주저앉았다. 한석훈은 아예 대자로 엎어져 거친 숨을 내몰았다.
“드디어 한 방 먹었군.”
“드디어 한 방 먹였네요.”
가슴 속에서 벅차오르는 무언가가 느껴졌다. 언젠가 도달하리라 생각했던 목표를 실제로 마주하니, 쿵쾅대는 심장이 멈출 생각을 하지 않는다.
혹시라도 한석훈이 마음 상할까 걱정했던 것도 잠시였다. 어느 때보다 개운해 보이는 한석훈이 금이 쩍쩍 간 연무장의 천장을 보며 말했다.
“이 정도면 제 몫은 하겠네.”
***
보급부터 사람까지 철두철미하게 준비했다. 느낌이 좋았다. 이번 던전은 꼭 성공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말을 듣기 전까지는.
“가기 싫어요.”
박지현이 금발을 찰랑거리며 말했다. 잘못 들었나 싶어 다시 물어봤는데 돌아오는 답이 똑같았다.
“왜요?”
“가기 싫어졌으니까요.”
“그러니까 왜 가기 싫어졌는데요?”
“그걸 제가 왜 말해야 하는데요?”
“던전 진입하기 직전에 이러는 법이 어딨습니까?”
“전 원래 이래요.”
황당한 눈길이 쏟아졌다. 특히 조영은을 포함한 음지 삼인방은 헛웃음을 지으며 박지현을 쳐다봤다. 재밌는 구경거리를 쳐다보는 눈길이었다.
속에서 끓어오르는 한숨을 꾹 참고. 웃으며 말했다.
“그러지 말고 말해 봐요. 조건 붙일 게 생겼습니까?”
“조건? 무슨 조건이요?”
“원하는 게 있을 거 아닙니까. 돈이라든지, 아이템이라든지.”
“제가 그렇게 물욕에 미친년으로 보여요?”
이번엔 내가 다른 사람들과 같은 눈빛으로 박지현을 쳐다봤다. 황당하다.
그럼 아니라고?
내가 박지현 때문에 아이템 창고에서 몰래 빼낸 아이템이 몇 갠데.
박지현이 내 눈을 피하며 말했다.
“…미친년은 맞는데. 이번엔 그런 이유 때문 아니거든요?”
“그러면 뭐 때문입니까?”
“그건.”
박지현이 할 말을 찾아 입술을 더듬거렸다.
“그건.”
그건?
“그걸 제가 왜 말해야 하는데요!”
귀청 떨어지는 줄 알았네. 방귀 뀐 놈이 성질낸다고. 분한 듯 씩씩거리기까지 한다. 나를 보는 표정에 억울함까지 배여 있는 것 같다.
진짜 억울한 사람이 누군데.
표정을 바꾼 박지현이 싱긋 웃으며 말했다.
“어쨌든 난 못가니까 그렇게 알아요.”
그러고는 막 생각났다는 듯 손가락을 튕겼다.
“아 참. 이 팀에 힐러 나 하나지? 이거 어쩌죠? 던전에는 못 들어가겠는데.”
참다못한 한숨이 내 입에서 새어 나왔다. 그럴수록 박지현의 입꼬리가 점점 말려 올라갔다.
“그럼 오늘은 이만 해산…!”
“아뇨. 박지현 씨가 정 못 가면 할 수 없죠. 빼고 가야죠.”
일성 최고 힐러를 데려갈 수 없다는 건 아쉽지만 때를 놓칠 수도 없다. 겨우 구성원 하나 때문에 공략을 포기한다는 꼬리표가 붙느니, 실패하더라도 진입하는 게 모양새가 더 좋다.
회복 마법이라는 믿는 구석도 있고.
“…빼고 간다고?”
방금 전만 해도 귀까지 올라간 박지현의 입꼬리가 파르르 떨렸다.
“다시 말해 봐요. 날 빼고 A급 던전을 가겠다고요? 제정신이에요?”
이번엔 또 왜 이래? 대체 무슨 장단에 맞춰줘야 할지 몰라 박지현을 응시했더니 억울함이 뚝뚝 묻어 나오는 목소리로 말했다.
“이봐요. A급 던전 한 번도 안 들어간 거 티 내는 거예요? 상황파악이 안 돼?”
“박지현 씨.”
“고등급 던전에서 힐러가 얼마나 중요한데! 이것 봐. 이렇게 아무것도 모르니까 내가 안 간다고 하는 거지. 다른 사람들도 안 간다고 할걸요?”
기세등등한 말과 달리 사람들의 표정은 생각보다 평이했다. 혹시 몰라 물어봤다.
“다른 분들은 괜찮습니까?”
내 물음에 임한나는 오히려 좋다는 듯 고개를 끄덕거렸고 조영은을 포함한 음지 3인방은.
“우리야 뭐 돈만 맞으면 지옥에도 들어가니까.”
“까짓거 해 봅시다. 재밌겠네.”
“굴다리 밑에서는 힐러 없이도 많이 들어가 봤어요. 목숨 아까웠으면 음지까지 안 굴러왔지.”
어찌 되든 상관없다는 듯 심드렁한 얼굴이었다. 무식한 음지인들이 든든해지긴 또 처음이다.
박지현을 바라봤다. 홍당무처럼 붉어진 얼굴에 씩씩거리는 입술, 억울함이 가득한 눈빛이다.
대체 아까부터 뭐가 억울한 걸까.
“언니. 그쯤 하지? 보기 안 좋은데. 보니까 가기 싫은 것도 아닌 것 같은데.”
“누가 네 언니야? 더러운 음지것들 끼워주는 것만 해도 감사할 것이지.”
“어머. 말 예쁘게 하는 거 봐.”
가만있던 조영영이 손바닥에 침을 뱉었다. 그러더니 박지현의 팔뚝에 슥슥 문질렀다.
“이러면 언니도 더러운 거 맞지?”
“이게 보자 보자 하니까!”
“한 대 쳐봐. 내 성질 얼마나 더러운지 보여주려니까. 밑바닥에서 구른 짬은 내가 너보다 위일걸?”
점입가경이었다. 씩씩거리는 박지현이 주먹을 부들부들 떨었다.
옆에 있는 임한나는 은근히 조영은 옆에 붙어서는 뭔가를 속닥거리고 있었다. 마치 조언이라도 건네주듯이.
상황이 더 심각해지기 전에 내가 나서려던 때였다. 박지현이 돌연 웃었다. 불안하게.
“좋아요. 갈게요. A급 던전.”
“뭐요?”
“간다고요. 대신 조건이 있어요.”
내가 뭐라 말하기도 전에 박지현이 말을 쏟아냈다.
“내가 팀장 할래요.”
“팀장을 하겠다고요?”
“이번 한 번만. 그 정도 자격은 충분할 것 같은데? 그쪽이랑. 거기 옆에 있는 활쟁이. A급 던전 들어가 봤어?”
“…….”
“…….”
그럴 줄 알았다며 고개를 젓던 박지현이 이번엔 3인방을 쳐다봤다.
“그리고 음지 패밀리도 제대로 된 공략 한 번 못 해봤을 거고.”
“…….”
“…….”
“…….”
우리 모두 꿀 먹은 벙어리가 됐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모르긴 몰라도 여기 있는 사람들 다 합친 것보다 박지현이 A급 던전을 많이 들어가 봤을 테니까.
“합당한 이유 같은데요? 왜요! 이것도 못 해 주겠어요!”
버럭 성질까지 내니 할 말이 더 없다. 이쯤 되니 안 간다고 할 만하다는 생각까지 들 지경이다.
슬쩍 임한나를 쳐다보자 분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얘도 딱히 답은 없구나.
나야 경험치만 얻으면 되고, 딱히 반박할 명분도 없었다.
팀장 자리 한번 건네주는 걸로 박지현을 데려간다면 나쁘지 않은 거래였다.
“좋습니다. 그렇게 하시죠. 대신 안 되겠다 싶으면 다시 가져올 겁니다. 팀장 자리.”
“…퍽이나. 확실히 해요. 팀장의 말은 뭐라고요?”
“절대적이다.”
“…내 말에 꼭 따라야 할 거예요. 죽고 싶지 않으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