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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터는 미래를 본다-115화 (115/170)

115화 검신의 흔적 (2)

“회장님 들어오십니다. 모두 자리에서 일어나 주십시오.”

서른 명의 일성 간부가 우르르 기립했다. 회의실 문이 열리고 최태성이 들어온다.

언제나처럼 뜻 모를 표정은 그대로였다. 또 언제나처럼 힘의 깊이를 측정할 수 없었고.

“자네가 그 친구군.”

성큼성큼 내 쪽으로 다가온 최태성이 김태평에게 악수를 건넸다. 김태평이 감격스러운 얼굴로 허리를 굽혔다.

“여기까지 오느라 고생했어. 앞으로도 잘 부탁하네.”

최태성이 김태평의 어깨를 두드리며 축하해 준다. 여기저기서 박수갈채가 쏟아져 나왔다.

나도 박수를 치고는 있는데. 조금 의아했다.

내가 S급 특성을 얻었을 때와 비교하자면 너무 건조한 반응이라서. 심지어 지금도 최태성의 눈은 김태평보다 나에게 더 쏠려 있었다.

“전부 반대하는 거 자네가 데려왔다고?”

“예?”

“이 친구 말이야.”

“아. 네.”

최태성이 김태평에게 시선을 떼고, 나를 뚫어져라 쳐다봤다. 건조한 눈빛은 어디 가고 생기가 가득하다.

“솔직히 나도 이번엔 반신반의했거든. 사람 보는 눈도 뛰어날 줄은 몰랐어.”

“…감사합니다.”

“내가 더 고맙지.”

찜찜한 마음을 숨기고 손을 맞잡았다. 아까보다 더 큰 박수가 튀어나왔다.

잠시간 박수소리를 듣던 최태성이 흡족한 미소를 지으며 자리에 앉았다.

“저 친구 계약 이야기는 추후에 따로 하기로 하고. 제일 중요한 안건이 뭐지?”

“A급 던전 관련 협의입니다.”

“천인우 팀이랑 계약한.”

“예. 천인우 팀장이 나가면서 공략 일정에 차질이 생겼습니다.”

“나머지 팀원들은?”

“어제 저희 쪽에서 계약해지 통보했습니다.”

“음. 어쩔 수 없었지?”

“예. 여론이 좋지 않습니다. 천인우 형제와 한 팀이었다는 이유로요. 더군다나 그 친구들. 출신이 출신인지라.”

정철규의 말에 김석환이 고개를 갸웃했다.

“겨우 그것 때문에 A급 헌터 넷을 버리기엔 아까운데.”

“아무래도 협회가 뒤에 있는 것 같습니다”.

“뭐? 왜?”

거기에는 한석훈이 대답했다.

“걔들 넷 데려가면 일성도 탈탈 털어 버린다잖아. 미친 새끼들.”

“안 그래도 협회 쪽에서도 영입 제안을 했더라고요. 걔들 출신 때문에 관리 차원이라는 명분도 충분하고.”

팔짱을 낀 최태성이 심각한 얼굴이 됐다.

“협회 소속 A급이 몇 명이지?”

“총 서른 명입니다.”

“이번에 나간 네 명이 협회로 가면.”

“서른네 명.”

“걔들. 일 년 전엔 A급 몇 명 데리고 있었어?”

“일곱이요.”

정철규의 대답에 모두 침음을 삼켰다. 헛숨을 삼키는 사람들도 있었다.

티 내지는 않았지만 나도 정신이 번쩍 드는 기분이었다.

A급 헌터 서른네 명?

국내 최고라는 일성도 겨우 A급 헌터 열 명 남짓을 데리고 있다.

여유롭게 앉아 있던 플래시가 분위기를 털어 내고자 웃으며 말했다.

“원래도 이게 맞긴 하잖아요. 협회는 모든 기업을 다 관리해야 하니까.”

“서른이다. 서른. 관리 명목으로 보기에도 지나치게 많아.”

“어디서 그렇게 긁어모은 거야?”

“외국인들까지 영입 중이라잖아.”

“그나마 협회 견제하던 민정락 의원도 얼마 전에 정계에서 은퇴했고.”

“강제로 은퇴 당한 거지. 손녀가 민수정이지? 아카데미 총장.”

“예. 민수정 그 기지배. 협회까지 찾아가서 길길이 날뛰었다나 봐요.”

장내에 웃음이 번졌지만. 분위기를 전환하기는 어려웠다.

A급 헌터 서른이라는 중압감은 그 정도였다.

“회장님. 손정연 그 늙은 여우가 아무래도….”

김석환이 말하다 말고 최태성에게 눈짓했다. 아무리 간부 회의라 한들, 말해 줄 수 없는 정보라는 뜻이었다.

“아쉽지만 어쩌겠어. 이번엔 명분이 저쪽에 있는데. 김태평 저 친구 하나 살린 걸로 만족해야지.”

최태성의 말에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이기도 했다. A급 헌터 넷보다는 장차 S급 헌터가 될 유망주 한 명이 더 귀하니까.

“계약해 놓은 A급 던전은 어떡할까요?”

“몇 곳이나 계약했지?”

“총 다섯 곳입니다.”

“다섯 군데나?”

이번에는 한석훈이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예. 아무래도 고레벨 던전이 기승이기도 하고 고등급 던전 위주로 공략해 달라는 협회 권고 사항이 있다 보니.”

한석훈이 곤란한 얼굴로 머리를 긁적였다.

“방법은 있어?”

김석환이 손들었다.

“두 곳은 제가 커버칠 수 있습니다. 국내 복귀하는 애들도 몇 있으니까. 걔들 데리고 가면 돼요.”

“나도 끼워줘.”

“…형도요?”

“뭘 그렇게 놀라? 난 가면 안 되냐?”

“아, 아뇨. 나머지 두 곳이 문제네요. 백 팀장은 스케줄 어때.”

가만히 회의를 지켜보던 백인호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저도 한 곳 맡을게요. 그럼 이제 한 곳이 남는데….”

백인호가 슬그머니 나를 쳐다본다.

“이 팀장은 어때?”

왜 갑자기 입을 여나 했더니.

어쩐지 잠잠하다 했다. 한동안 내가 벌인 일들을 멀뚱히 지켜보기만 해서, 그게 더 불안했었다.

차라리 이렇게 대놓고 견제해 주는 게 나로서도 마음이 편했다. 표정 하나 안 바꾸고 대답했다.

“제가요?”

“왜, 자신 없어? 아, A급 던전은 한 번도 안 가 봤다고 했나.”

기분이 묘했다. 예전엔 나를 의도적으로 무시하던 양반이 대놓고 견제하지 않고는 못 견딜 만큼, 내가 성장했구나 싶어서.

“회장님. 그러면 나머지 한 곳도 제가 맡을….”

“자신 없다고는 안 했는데요. 제가 가도 되냐는 뜻이었지.”

“뭐?”

“괜히 백 팀장님 일거리 제가 가로채는 느낌이라서요. 선뜻 저한테 기회 주실 줄 몰랐는데, 감사합니다.”

혹시라도 말을 바꿀까 얼른 일어나서 고개를 숙였다. 그러면서 슬쩍 옆을 돌아봤다.

김석환과 한석훈은 차마 말리지는 못하겠던지 대신 머리만 쥐어뜯고 있었고, 최태성은 의중을 알 수 없는 표정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다른 간부들의 얼굴도 눈에 들어왔다. 워낙 벌인 일이 많아서 그런지, 이 미친놈이 또 어떤 일을 벌일까, 궁금해하고 있었다.

백인호가 숨을 고르며 할 말을 찾았다.

“A급 들어갈 만한 팀원은 있고?”

“이제 구해 봐야죠.”

죽 쒀서 개 줄까 걱정하던 백인호의 입에서 바람 빠진 소리가 흘러나왔다.

“멤버도 안 구해 놓고 나한테 일 달라고 한 거였어?”

“시간만 주시면 문제없이 구할 수 있습니다.”

“A급 던전이 뉘 집 개 이름도 아니고. 누구랑 갈 건데? 설마 박지현, 임한나랑 가겠다고?”

원래는 세 명으로 도전해 볼 생각이었다. 박지현에게 그 말을 듣기 전까지는.

‘그게 전력이에요? 진짜 놀랍네요. 그런 힘을 숨기고 있을 줄이야.’

‘이 정도면 괜찮겠습니까? A급 던전에서요.’

‘뭐야. 진짜 세 명이서 공략할 생각이었어요?’

‘……’

‘…솔직히 대단하긴 해요. 일성 내에서도 회장님 아니면 적수가 없을 정도로.’

‘불가능하다는 거군요.’

‘장담컨대 삼 일 안에 탈출석을 쓸 거예요. 제 말을 허투루 듣지 마세요.’

생각을 마친 후 백인호를 보며 말했다.

“설마요. 팀원은 제가 알아서 구해 오겠습니다.”

“그 말. 책임질 수 있겠어?”

“네. 다시 한번 기회 주셔서 감사합니다. 백인호 팀장님.”

한 번 더 고개를 꾸벅 숙인 뒤 최태성을 바라봤다. 최태성이 기다렸다는 듯 씨익 웃는다.

“구색만 갖춰와 봐. 이때까지 한 일도 있는데. 믿고 맡겨 줘야지.”

***

“선배님들. 오셨습니까?”

“선배는 무슨.”

한때 천인우의 팀이었던 A급 헌터 네 명이 프라이빗룸 안으로 들어왔다. 하나같이 불편한 얼굴이었다.

그렇겠지. 한때 팀장이었던 사람을 날린 것도 모자라 예정에 없던 계약 해지까지 당했으니까.

나를 보는 시선들이 곱지 않았다.

“꼭 할 말이 있다고 해서 왔는데. 그게 뭔데요?”

“바쁘신 분들이니 긴말 하지 않겠습니다. 혹시 저랑 A급 던전 공략할 마음 없습니까?”

“…뭐요?”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해요?”

“우리가 어떻게 쫓겨났는지 몰라서 그런 거예요?”

한마디씩 던지는 말에 가시가 돋아 있었다. 상황이 더 나빠지기 전에, 빠르게 말을 덧붙였다.

“만만하지 않아서 부탁드리는 겁니다. 계약 엎어진 데는 제 책임도 있으니까요. 제가 책임지고….”

“다시 일성으로 들어오라고?”

천인우 팀에서 힐러를 맡고 있는 최장엽이 눈살을 찌푸렸다.

“이태진 씨. 우리 방금 협회랑 만나고 오는 길이에요.”

“협회로 가시게요?”

“그렇다면요?”

“그러면 어쩔 수 없죠.”

“…….”

굳이 간다는 사람을 말릴 정도로 급하지는 않다. 기싸움에서 져 줄 정도로 만만해 보이고 싶지도 않고. 황당함으로 일그러진 최장엽을 두고 고개를 돌렸다.

“다른 분들 생각도 그렇습니까?”

침묵이 맴돌았다. 나머지 세 명이 눈짓으로 대화를 주고받는 사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선배님들. 음식은 계산했으니 편히 드시고….”

“지금 이건 무슨 쇼예요?”

여자 원거리 딜러 조영은이 나를 째려보며 말했다.

“한번 들어나 보고 싶네. 얼마나 쓸만한 조건 가져오나.”

“협회와 계약한 거 아니었습니까?”

“만나고 오는 길이었다고요. 계약이 아니라.”

조영은이 한 호흡을 쉬며 이어 말했다.

“블랙 마켓에서 일하다 온 거 모르는 것도 아니면서. 빼지 말고 그냥 시원하게 말해요. 안 그래도 화이가 당신이랑 만나 보라고 했으니까.”

화이.

음지 것들의 수장의 이름이 튀어나왔다.

“조건이 뭔데요? 일성 다시 들어가기는 힘든 거 다 알고 왔어요.”

최장엽을 제외한 세 명이 고개를 끄덕였다. 배신감에 젖은 얼굴로 최장엽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 참. 이딴 식으로 배신을 때려? 하여튼 음지 새끼들이랑은 어울리는 게 아니었는데. 너희들끼리 잘 해 봐라.”

최장엽이 뒤도 돌아보지 않고 문을 박차고 나갔다. 그때까지 조영은을 포함한 세 명은 내게 시선을 두고 있었다.

잠시간 정적이 흐른 후, 자리에 앉은 내가 술을 한잔 씩 돌렸다.

“그럼 편하게 말씀드리겠습니다.”

목구멍으로 넘어간 술만큼 대화가 풀려 갔다. 원래부터 이럴 것이라 예상한 만큼 분위기는 더할 나위 없이 좋았다. 각자가 예상한 조건들이 부드럽게 오갔고, 끝날 때쯤엔 계약서에 세 개의 도장이 찍혀 있었다.

***

조용한 바, 바텐더를 흘끗 쳐다본 백인호가 카운터 구석진 자리에 앉았다. 옆에 앉은 여자가 흘끔 그를 쳐다봤다.

“계획대로 잘 안 되나 봐요.”

“누구 덕분에.”

“어머. 그게 왜 제 잘못이에요? 시키는 대로 했는데.”

박지현이 위스키를 홀짝이며 말했다.

“같이 던전 들어가라고 한 적은 없는데.”

“옆에서 열심히 도와주라면서요?”

“그렇다고 그놈한테 힘을 실어줘?”

“왜 이래요? 이태진 팀장 만들라고 한 건 팀장님이면서.”

박지현이 머리를 털었다. 허리까지 오는 금발을 찰랑거렸다.

“솔직히 말해 봐요. 백 팀장님 정말 레인우버랑 관련 없어요?”

“너까지 내 속 긁으려고 작정했냐?”

“맞나 보네. 저야 조건만 맞으면 레인 우버든 블랙 마켓이든 상관없지만요. 그래서, 오늘은 무슨 일 때문에 불렀는데요?”

“이태진 소식은 들었지?”

“A급 던전 들어간다는 거요? 팀장님이 도와줬다면서요? 전 잘못 들은 줄 알았잖아요.”

“조건 붙인 건 못 들었어? A급 팀원들로만 구해 오라는 거.”

박지현이 얄궂게 웃었다.

“진짜 구해 오면 어떡하게요? 이번에도 한 방 먹는 건가?”

“너 같으면 이태진이 팀장인 A급 던전을 갈 것 같냐?”

“그래도. 만약이란 게 있잖아요.”

“만약은 없어.”

백인호가 씨익 웃으면서 말했다.

“그래도 A급 던전에는 어떻게든 보낼 거야. 멤버야 어떻게든 내 팀원들 붙여 주면 되고.”

“왜요?”

“거기서 놈을 죽일 거거든.”

방금까지 머리를 매만지던 박지현의 손길이 뚝 멈췄다.

“…농담이죠?”

“넌 이게 농담으로 들려?”

“갑자기 왜 생각이 바뀌었는데요? 원래대로라면….”

“그 빌어먹을 원래 계획은 실패했다고 몇 번이나 말했을 텐데.”

후드 속 붉은 안광이 박지현을 매섭게 노려봤다.

“그러니까 너도 그쯤하고. 내 옆에 붙어.”

“글쎄요.”

“글쎄요? 갑자기 뭐가 글쎄요야?”

“수지타산이 안 맞는 것 같아서요. 팀장님이랑 이태진.”

“뭐?”

“둘이 싸우는 상상을 해 봤거든요.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이태진이 이길 것 같단 말이지. 아니에요?”

백인호가 박지현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의중을 읽는 백인호의 눈길이 사나웠다.

“야. 박지현. 너 설마. 이상한 마음 품은 건 아니지?”

“이상한 마음?”

“왜. 갑자기 이태진이 남자로 보여?”

“푸핫!”

박지현이 들이켜던 술을 뿜었다. 그러더니 배를 잡고 웃어댔다. 눈물까지 찔끔 흘리면서.

백인호의 표정은 처음과 똑같았다. 의미심장한 눈이 박지현을 쏘아봤다.

“박지현. 미션 내려줬더니 사랑질이나 하는 건 상관 안 해. 그래도 할 건 해야지. 왜, 못 죽이겠어?”

“대체 아까부터 뭔 소리를 하는 거예요? 제가 이태진을 왜 죽여요?”

“그러면 다시는 헌터질 못 하게 만들어 놔. 팔을 자르든, 다리를 자르든.”

백인호가 이어서 말했다.

“아니면 이태진한테 네 정체를 까발려 줄까? 회장님, 나, 이태진까지. 삼중으로 돈 받아 처먹고 있다는 거. 그놈이 알면 무슨 반응을 보일지 나도 궁금한데.”

살기가 넘실거리는 눈빛으로 박지현을 쳐다봤을 때였다. 박지현의 휴대폰이 울렸다.

휴대폰을 꺼낸 박지현의 눈이 커졌다. 피식 웃으며, 박지현이 문자를 가리켰다.

“일단 첫 번째 계획은 실패한 것 같은데요. 이태진. 팀원 구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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