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3화 러브 앤 썬더 (6)
결전의 당일이었다. 결전이라고 말하기는 좀 민망하기는 한데. 어쨌든 중요한 날인 것은 분명했다. 여기서 어떻게 되느냐에 따라 미래가 확 바뀔 테니까.
묵묵히 차창 밖을 쳐다보는 김태평에게 말했다.
“긴장돼요?”
“아뇨. 괜찮습니다.”
빈말이 아니라 진짜 괜찮아 보인다. 승부는 어떻게 되든 괜찮다는, 그런 초연함마저 보였다.
그런데 그런 초연함이야말로 자신감의 방증이란 것을, 김태평은 아직 깨닫지 못했을 것이다.
“방송국에서도 촬영 올 거예요. 생중계로 방영될 거고.”
“이 팀장님이 밀어붙였다고 들었습니다.”
“누가 그래요?”
“사람들이 지나가면서요.”
“그리고요?”
“네?”
“그 외에는 별다른 말 안 했어요?”
“…이 팀장님 망신 안 당하게. 알아서 처신 잘하라고…….”
쯧. 이 사람들이 진짜.
일을 벌인 건 나인데, 정작 눈칫밥을 먹는 건 김태평이었다.
일성 헌터들에게 나는 소중한 자식이고, 김태평은 하나뿐인 아들을 홀린 불여시였다. 눈엣가시 같은 김태평만 없으면 이 사단이 안 났을 거라는 게, 하나같은 의견이었다.
내 말이라면 껌벅 죽는 홍주연도 이번만큼은 결사 반대를 했을 정도니 다른 사람들은 안 봐도 뻔하다.
“이번에 증명하면 되겠네요. 불여시가 아니라 구미호를 데려왔다고.”
***
널찍한 좌석에 사람들이 하나둘씩 채워졌다. 일성의 D급부터 A급 헌터들이 저마다 팔짱을 끼며 대련장을 쳐다봤다. 하나같이 똥씹은 얼굴들이었다.
C-1팀장이 분주하게 움직이는 방송국 직원들을 쳐다보며 말했다.
“저건 또 뭐야? 카메라?”
“생중계로 진행한대요.”
“뭐? 온 동네 망신시킬 일 있냐?”
“이태진 팀장님이 밀어붙였대요. 무조건 생중계로 해야 딴소리 못 한다고.”
1팀장이 머리를 잡았다. 옆에 앉은 2팀장이 아연실색한 얼굴로 말했다.
“대체 무슨 바람이 들었길래 일을 이 지경으로 만들어? 이 팀장 진짜 미친 거야?”
“혹시라도 천인우 쪽이 이겨 봐. 이태진 무릎 꿇는 걸 우리가 봐야 해?”
“형. 이거 지금이라도 말려야 하는 거 아니에요?”
1팀장과 2팀장이 동시에 고개를 돌렸다. 3팀장은 이미 체념한 얼굴로 팔짱을 끼고 있었다.
“말리긴 뭘 말려. 이태진 그놈 성격 몰라? 괜히 밉보이기 싫으면 가만있어. 이태진도 이 기회에 배우는 게 있겠지.”
“혹시라도 김태평이 이길 가능성은….”
“없지. 때려죽여도 없지.”
“그렇죠. E급이 C급을 어떻게 이겨.”
“혹시 모르죠. 그새 S급 특성이라도 떴으면 가능성이 있긴 하니까.”
“…….”
“…….”
“말이 그렇다고요. 젠장할. 이태진 살릴 방법이나 모색하죠. 진짜 무릎 꿇릴 수는 없잖아요. 어, 시작한다.”
두 사람이 무대 위로 올라가고 있었다. 여유 가득한 천현우와 웃음기 한 점 없는 김태평의 얼굴이 카메라 앵글이 잡아챘다.
장내에 거대한 침묵이 맴돌았다. 굴러온 돌인 천현우를 보는 시선이야 당연히 곱지 않았지만, 문제는 김태평에게도 비슷한 눈빛이 쏟아지고 있었다.
팔은 안으로 굽는다고. 응원이야 하겠지만 큰 기대는 안 한다는 얼굴들이었다.
그마저도 이태진을 등에 업은 게 아니었다면 쌍욕이 날아왔을 분위기였고.
그러한 시선을 즐기듯 천천히 사람들을 둘러보던 천현우가 턱짓했다.
“인연이 참 질겨.”
천현우가 피식 웃었다.
“오늘은 내가 악역이었지? 기분이 어때? 좋아?”
“…….”
“가끔 원숭이가 자기가 사람인 줄 알고 착각한다는데. 야. 옆에서 헛바람 넣어주니까 진짜 니가 뭐라도 된 것 같고 그래? 아니면 긴장돼서 말도 안 나와?”
“긴장은 네가 한 것 같은데.”
“뭐?”
“심장 박동이 불규칙적이야. 안쓰러울 정도로.”
“…뭐?”
“아카데미에서는 어떻게 숨겼는지 모르겠다. 네 그 지독하고 더러운 열등감.”
“…….”
“지긋지긋한 악연은 오늘로 끝내자. 그러자.”
눈썹을 꿈틀거린 천현우가 뭐라 말하려던 때였다. 대결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음이 울렸다. 직후, 천현우가 고개를 갸웃했다.
‘왜 무기가 없지?’
김태평이 평소 다루던 검이 보이지 않았다.
“병신. 검도 놓고 왔…어?”
방금까지 앞에 있던 김태평의 몸이 그 순간 사라졌다. 본능적으로 위험을 감지한 천현우가 고개를 돌렸을 때.
‘손바닥?’
미처 반응하지도 못할 만큼 빠른 속도였다. 거대한 손바닥이 자신의 얼굴을 덮쳐왔다. 재빨리 검을 꺼내는 데는 성공했지만,
콰지지직!
부지불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샛노란 기운이 시야 전부를 잡아먹은 것까지만 생각났다.
그 이후로는 하늘과 땅이 수없이 위치를 바꿔댔다. 전신이 부르르 떨렸다.
정신이 혼미했다. 일어나야 한다는 강박만 남아 있었다. 그런데 몸이 덜컹거렸다. 몇 번을 일어났다가 다리에 힘이 풀렸다를 반복했다.
희미한 시야로 김태평이 보였다. 지루하기 짝이 없는 얼굴이었다. 저 면상에 검을 꽂아 줘야 하는데. 그래야 하는데.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한 번 더 사라진 김태평이 번쩍거리며 나타났다. 손에는 자신의 머리카락을 잔뜩 부여잡고 있었다.
“생각이 바뀌었어. 딱 나만큼만 너도 고생해라.”
쾅!
그게 끝이었다.
***
모두의 시선이 전류에 감전돼 게거품을 물고 있는 천현우와, 무릎 꿇고 숨을 헐떡이는 김태평에게 집중됐다.
천인우가 황망한 얼굴로 동생을 바라봤다.
“어, 어떻게.”
그런 반응이 여기저기서 튀어나왔다. 대결을 지켜본 다른 헌터들도 마찬가지였다. 박수를 칠 타이밍이건만 멍하니 대련장 위를 쳐다보기만 했다.
“이게. 지금, 이게 뭐야?”
“어. 이긴 것 같은데? 김태평이?”
“뭐?”
함성 대신 얼떨떨한 질문이 여기저기서 튀어나왔다. 서둘러 대련장을 빠져나가는 직원들도 카메라에 잡혔다.
나는 천천히 천인우 쪽으로 다가갔다. 혹시 모를 사고를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서였다.
“내기는 내가 이긴 것 같은데.”
천인우가 황망한 얼굴로 나를 올려다봤다.
“일성에서 나가.”
굳이 뒷말을 붙이지 않아도 됐다. 나와 김태평을 번갈아가며 쳐다보던 천인우가 멍하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던 문득, 천인우가 번쩍 고개를 들었다.
“힐러! 힐러 어딨어!”
천인우가 허둥지둥대며 장내를 돌아다녔다. 어서 빨리 동생을 치료하지 않으면 어떻게 될지를 깨달은 모양이었다.
“힐러! 최장엽! 어서 치료해! 치료하라고!”
분위기가 영 이상했다. 정확히는 대결이 끝난 시점부터였다. 갈팡질팡하던 천인우의 팀원들이 나를 쳐다봤다.
고개를 끄덕여줬더니 그제야 결심이 선 얼굴이 된다. 결국 대표로 나선 팀원 중 한 명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천현우 씨. 저희는 일성에 남기로 했어요.”
“…뭐?”
“당신 지금 뉴스에 떴다고. 조만간 협회에서도 찾아올 거고. 괜히 엮이기 싫으니까, 여기까지만 합시다.”
“그게 무슨 미친…!”
“혹시라도 허튼짓했단 봐요. 저희도 가만 안 있으니까.”
“우리까지 피해 주지 말고, 여기서 깔끔하게 정리합시다. 천인우 씨.”
네 명의 A급 헌터들이 천인우를 둘러쌌다. 그사이 황급히 휴대폰을 연 천인우가 허망한 얼굴로 고개를 떨궜다.
***
천인우는 각종 탈세 행위를, 천현우는 던전에서 자행했던 각종 행위들을. 예쁘게 정리해서 각종 언론사에 뿌렸다.
여론에 동정이 묻으면 힘이 실리기 마련이다. 김태평이 지나온 기나긴 고행의 세월이 세상에 알려졌다.
곧장 협회에서 수사를 나섰다. 그 결과로 천인우는 헌터 면허가 박탈됐으며, 천현우는. 그럴 것도 없었다.
김태평과의 대결에서 사지가 병신이 됐으니까. 놈에게는 삶을 지속하는 것이야말로 고통의 연속일 것이다.
모처럼 가벼운 마음이었다. 그렇게 B급 던전 몇 개를 돌았다. 우리에게, 그리고 내게 B급 던전은 어느새 가벼운 마음으로 공략할 수 있는 곳이 됐다.
그렇다고 저번처럼 나 혼자 무식하게 돌격하는 일은 없었다. 그때처럼 묵힌 스트레스를 푸는 상황이 아니라, A급 던전 공략을 위해 합을 맞춰야 하니까.
“이제 호흡은 어느 정도 맞춘 것 같은데.”
“어느 정도? 이봐요. 이 정도 합 맞추려면 원래 5년은 필요해요.”
“다 박지현 씨 덕분이죠.”
“아니까 다행이네.”
“A급에서도 잘 부탁드립니다.”
결국 박지현이 찌뿌둥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 정도면. A급 갈 수 있겠네. 단, 사람이 더 필요해요.”
“세 명은 불가능합니까?”
박지현이 표정을 굳혔다.
“그쪽이랑 저 싸가지 없는 레인저 실력에 놀라긴 했는데. A급은 차원이 달라요. 최소 네 명은 더 필요해요.”
“그 정도라고?”
임한나가 눈살을 찌푸렸다.
“흥. 장담하는데, 우리 셋이 겁도 없이 들어갔다가는 삼일 안에 탈출석 쓰고 나와야 할걸요? A급이면 탈출석이 막혀있을지도 모르고.”
박지현이 저런 얼굴이 된 건 처음 본다. 잔뜩 굳은 채, 몇 번이고 경고를 하는 것도 처음 본다. 그래서 그녀의 말을 무시할 수 없었다.
“김주현 씨. A급 헌터 용병 모집 글 올려 주세요.”
“알겠습니다.”
용병을 모집하는 한편, 훈련을 멈추지 않았다. 검술이야 차곡차곡 잘 성장하고 있다지만. 문제는 마법이었다.
회복과 중력 마법 모두 성장이 가로막혔다. 노력의 문제가 아니었다. 방법이 한 가지밖에 없었다. 아락투스 마법사전의 다음 장을 여는 것.
[조건 : 아락투스의 예비된 시험이 존재합니다. 공간의 이동이 예정되어 있습니다. 이동하시겠습니까?]
이건 A급, 더 나아가 S급 던전을 공략해도 해결할 수 없는 문제다. 또다시 이세계에 떨어질 것인지에 대한 고민과 함께 퇴근했을 무렵. 짧은 단발머리가 보였다.
“임한나? 거기서 뭐해.”
“너 기다리고 있었어.”
어쩐지 평소와는 다른 느낌이 들었다. 원래도 시니컬한 녀석이긴 했는데. 오늘은 그게 좀 더 극대화돼서 우울해 보이기까지 한다. 왜인지 모르겠는데. 심장이 덜컹거렸다.
“왜? 무슨 할 말 있어?”
“A급 던전은 언제 진입할 거야?”
“글쎄. 한 일주일쯤 뒤? 그것 때문에 온 거야?”
일부러 과장된 제스처를 취하며 어깨를 들썩였다.
“설마 아직도 박지현이 꺼려지는 건 아니겠지? 혹시라도 그런 거면 부담가지지 말고 말….”
“그런 건 아니야!”
분위기를 풀어보려 했는데 역효과가 났다. 임한나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런 게 아니라. 갑자기 궁금해져서. 왜 네가 그렇게까지 성장에 목매는지.”
그야. 얼굴을 찌푸렸다. 젠장할. 비밀로 간직하고 있던 일기장의 겉표지를 들킨 것 같다.
평소 같았으면 눈 하나 깜박이지 않고 거짓말로 둘러댔을 텐데. 도무지 입이 떨어지지 않는다. 임한나에게 거짓말을 하라고?
그건. 싫은데.
“네가 아카데미 때부터 그랬다는 건 알아. 그래서 지켜봐 왔던 거고.”
지켜봐?
되묻기도 전에 시선을 회피한 임한나가 말을 이어갔다.
“그래도. 일성에 입사한 뒤부터 유독. 좀 달라진 것 같아서. 저번에도 물어봤지만. 확실하게 듣고 싶어. 이유를 알아야 나도 마음의 준비를 할 수 있으니까.”
뒤로 갈수록 임한나의 목소리가 한없이 작아졌다. 한 번 더. 심장이 철렁거렸다.
왜지?
미래를 본 것도 아닌데 왜 안 좋은 예감이 드는 거지?
임한나와 함께한 게 햇수로 5년쯤 됐으니까, 이제 표정만 봐도 녀석이 어떤 생각을 하는지 느낌이 온다.
그리고 지금 느껴지는 이건. 상당히 불안하다. 머릿속의 다른 생각들이 모두 날아갈 만큼 말이다.
임한나가 숙인 고개를 들었다. 석양에 물든 눈동자의 물기가 첨벙거린다.
“사실.”
공중에서 똑같은 단어가 부딪쳤다. 임한나와 내 눈이 마주 커졌다. 입을 오물거리던 임한나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러더니 고개를 저었다. 그다음 떨어질 말이 어떤 것인지는 알고 있다. 결국 이렇게 흐지부지 넘어가겠지.
문득 이 모든 상황이 짜증 났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임한나에게는 이러면 안 되는 거 아닌가?
꼭 그게 아니더라도. 젠장할. 세 번째다. 심장이 출렁거렸다. 이제는 한계였다.
“들려줄 게 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