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2화 러브 앤 썬더 (5)
“예?”
“그쪽이 천인우 씨냐고요.”
천인우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여 버렸다. 이태진의 날 선 질문이 계속해서 날아왔다.
“내가 방금 이상한 말을 들은 것 같아서. 내 안목이 썩어서 그쪽 자존심을 건드렸다고 하던데. 맞아요?”
뭐라 대답할 틈도 없었다. 이태진이 칼로 베듯 자신을 쏘아봤다.
“그것 때문에 계약도 엎어지게 생겼다고.”
그때까지도 이태진은 덤덤한 얼굴 그대로였다.
“나가는 거야 자유긴 한데. 내 안목이 이상하다는 건 도저히 참을 수 없어서. 내 앞에서 다시 말해 봐요. 정말 그렇게 생각해요?”
잠시간 눈을 껌벅거리던 천인우가, 허탈한 웃음을 터트렸다.
“그렇게 안 봤는데. 이태진 씨. 원래 이런 식으로 일해요? 작은 말 하나 크게 부풀려서 논지 흐트리는 거? 이게 일성 방식입니까?”
“없는 말은 아니라는 거네요.”
“이봐요. 이태진 씨!”
천인우가 입술을 깨물었다. 처음 생각해 놨던 말이 튀어나오긴 했는데, 상황이 판이하게 달라졌다.
이건, 아무리 봐도 자신이 말리는 그림이었다.
슬쩍 주위를 둘러보자 갖가지 표정들이 천인우를 향해 쏟아지고 있었다. 기대, 실망, 찜찜함, 그리고 어딘가 통쾌해 보이는 인사팀장까지.
여기서 얕보이면 끝난다는 경고음이 쉼 없이 그의 머릿속에서 울려댔다.
천인우가 목소리를 가다듬고 말했다.
“역으로 묻고 싶은데. 그쪽이야말로 그 덜떨어진 놈이랑 제 동생이 동급으로 보여요?”
“아니.”
“그것 봐요. 그런데 뭐가….”
“김태평이 더 낫죠. 다시 봐도 천현우 씨는. 좀 애매한 느낌이고.”
이태진이 천현우를 쳐다보며 고개를 젓는다. 처음으로 장내의 모두가 같은 얼굴로 이태진을 바라봤다. 심지어 인사팀장마저도 황당함을 숨기지 못했다.
“저, 이 팀장님.”
이상한 낌새를 느낀 인사팀장이 이태진을 말리려고 일어났을 때는, 기회를 포착한 천인우가 먼저 앞을 가로막고 있었다.
“정말 그렇게 생각해요?”
천인우가 묘한 표정으로 물었다.
“정말 김태평인지 뭔지가 천현우보다 낫다고 생각하냐고요. 잘 생각하고 말해요. 이태진 씨. 다큐 때문에 그런 컨셉 잡는 거라면….”
“그렇게 못 믿겠으면 확인시켜 줄 수도 있고요.”
“확인?”
이태진이 씨익 웃으며 말했다.
“각성자답게 대결로 증명하자고요. 김태평이 나은지, 그쪽 동생이 나은지.”
“…진심이에요?”
인사팀장이 아연실색하며 일어섰다.
“이 팀장님. 이번 일은 제가 마무리하고 가겠습니다. 천인우 씨. 방금 말은 못들은 걸로…….”
“이미 들은 걸 어떻게 못 들은 걸로 해요? 계약서라도 다시 작성하면 또 모르겠지만.”
“네. 그렇게 하시죠. 원하시는 조건이 무엇이든 맞춰 드리겠습니다.”
천인우와 팀원들의 얼굴에 화색이 돋았다. 이게 웬 떡이냐는 표정으로 이태진을 쳐다보며 키득거렸다.
패색이 짙은 인사팀장을 보며 천인우가 입을 열려던 때였다.
“인사팀장님. 그럴 필요 없어요. 말한 건 책임져야죠. 깔끔하게.”
“사과하시려고요? 그럼 무릎이라도 꿇어야겠는….”
“아뇨. 아까 하던 이야기 계속하자고요. 대결 일정은 언제가 좋을까요? 이렇게 된 거 일 좀 키워 보죠. 일성 방식대로.”
그 말을 하는 이태진의 표정은, 기다리던 사냥감이 마침내 덫에 걸렸을 때 나오는. 그런 웃음이었다.
***
“소문 들으셨어요? 그 미친놈이 또 일 하나 터트린 거.”
한석훈이 킬킬거리며 최태성을 바라봤다. 안절부절못하며 서성이던 김석환이 소리를 질렀다.
“형은 이게 웃겨요?”
“그럼 안 웃기냐? 이번엔 또 어떤 미친 짓을 할지 벌써부터 기대되는데.”
“그럼 그걸 믿는다는 거예요? 그 김태평인지 뭔지 하는 놈이 천현우를 이긴다는 걸? 천현우가 C급 최고 기대주인 건 알고 계시죠?”
“못 이길 건 뭔데.”
김석환이 말이 안 통한다는 눈빛으로 한석훈을 쳐다본 뒤, 고개를 돌렸다.
“회장님. 아무래도 이 팀장이 제대로 휘말린 것 같습니다. 지금이라도 말려야 합니다.”
“말리다니.”
“그놈이 팀장된 지도 얼마 안 됐고, 여기저기서 띄워주니까 진짜 미래라도 보는 것처럼 굴잖아요. 지금 그놈. 자기 자신한테 취한 거예요.”
하지만 최태성은 그 얘기에도 뜻 모를 미소를 지었다.
“하고 싶다는데. 하게 해 줘야지.”
“그러다 고꾸라지면요.”
“죽지만 않으면 돼.”
“걸린 게 크지 않습니까. 아닌 말로 김태평만 걸고넘어졌으면 모르겠는데.”
“천현우랑 이태진이 내기한 거.”
바로 그거라는 듯 김석환이 손가락을 튕겼다.
“진 쪽이 소원 들어준다잖아요. 조건도 없이 뭐든지요. 그 미친놈이 벌써 공증까지 했다는데.”
최태성이 대표실 입구를 바라보며 말했다.
“정 아닌 것 같다 싶으면 내가 나서면 되고.”
그 담담한 말에 한석훈과 김석환이 동시에 서로를 쳐다봤다.
“그쪽 형제 쥐고 흔들 약점 몇 개는 있으니까.”
그런 술수쯤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한 투였다. 회장실에 어색한 침묵이 감돌 때였다.
타이밍 좋게 이태진이 등장했다. 노크 두어 번과 함께 나타난 이태진의 얼굴은 평소와 같았다.
“넌 이 상황에서 긴장도 안 되냐?”
한석훈마저도 이태진의 모습에 혀를 내둘렀다.
“자신감이 넘치는 거야, 아니면 분위기에 취한 거야? 방법은 있는 거냐?”
“그러다 잘못되면 어쩌려고. 보니까 작은 내기도 아니던데.”
“무릎이라도 꿇게 되면. 꿇을 거야?”
한석훈과 김석환이 쉴새 없이 이태진을 몰아붙였다. 그래도 이태진은 차분해 보이기만 했다.
“설마요. 이때까지 공들여 쌓은 이미지 다 무너질 텐데.”
이태진이 어깨를 으쓱였다.
“천현우 쪽 뒤져 봤더니 좀 구리더라고요. 특히 김태평한테 한 짓들 보면. 쥐고 흔들만한 약점 몇 개는 가지고 있어요.”
한석훈과 김석환이 소름 끼친다는 얼굴로 이태진을 바라봤다.
왜 그러냐며 물어봐도 마찬가지였다. 대답 없이 닭살 돋은 팔만 매만졌다.
오로지 최태성만이 처음과 같이. 송곳처럼 이태진을 뚫어지게 쳐다봤다.
***
“이게 정말 너라고?”
김태평은 어머니의 이런 표정을 오랜만에 봤다. 늘 병실에 누워 죽네 사네 하는 모습만 10년 넘게 봐 왔었다.
휘둥그레 눈을 치켜뜬 얼굴의 어머니는 낯설기 그지없었다.
“그렇다니까요.”
멋쩍은 듯 뒤통수를 긁었더니 어머니가 리모컨을 빼앗았다.
위이잉!
비디오가 되돌아갔다. 마지막 장면에서 10분여를 남겨둔 시점으로. 김태평의 불안한 눈빛과 이태진 팀장의 자신만만한 얼굴이 화면에 잡혔다.
“얘는. 얼굴에 왜 이리 근심이 가득해? 방송은 자신감이 반이야. 너희 팀장님 봐라. 뺀들뺀들 말 잘하잖아.”
어머니가 볼멘 목소리로 질책했어도 그게 어떤 의미인지 알고 있다. 아픈 와중에도 늘 자식 걱정만 하던 분이 아니던가.
“그러게. 좀 더 자신감 있게 할 걸 그랬나 봐요.”
그렇게 말하는 것으로 충분했다. 하지만 속내는 달랐다. 김태평은 불안하기 그지없었다. 증명하지 못하는 자신이 버려질까 불안했다.
그러면서도 어머니의 병원비를 대납한 이태진은, 평생의 은인으로 생각됐다.
‘평생 갚아도 못 갚을 은혜라는 게 문제지.’
그런 걱정이 무색하게도.
“김태평 씨. 저랑 어디 좀 가시죠.”
웃는 낯의 이태진이 병실 뒤에서 자신을 부르고 있었다.
***
헉헉거리는 숨소리가 그의 훈련이 얼마나 고된지를 알리고 있었다. 축 처진 김태평의 등에서는 우악스러운 다짐이 느껴진다.
나에게 잘 보여야겠다는, 굳은 결의 같은 게.
“쉬면서 하시라니까.”
“어디 그럴 수 있나요. 팀장님이 기회 주신 것만 해도 감사한데.”
말은 팀장님인데, 주인님이라고 바꿔 불러도 손색없을 것 같다.
그렇게 적당히 안부를 묻다가, 본론을 꺼냈다.
“내, 내기요?”
“네. 천현우랑 사이 안 좋은 것도 알고 있고요. 김태평 씨가 싫으면 지금이라도 물릴 수 있으니까 부담 갖지는 마시고요.”
김태평의 얼굴이 사색이 됐다. 그런데 그것도 잠시뿐이었다.
“저야 쪽팔리고 말지만 팀장님께서….”
“저도 뭐. 괜찮습니다. 이길 자신도 있고요.”
정 안되면 천현우 쪽을 완전히 매장시키는 방법도 있으니까.
당장은 그런 것보다는.
“김태평 씨. 혹시 죽을 뻔한 적은 없어요?”
“죽을 뻔한 적이라면….”
“던전에서라든가, 사람한테라든가.”
“그런 거라면 많죠.”
뭐 별거냐는 투로 김태평이 고개를 끄덕였다.
“일성 오기 전에는 돈 때문에 상위 던전 짐꾼으로 참여했던 적이 많았거든요. 두 달 전인가. C급 던전에서 몬스터 어그로가 잘못 끌려서 죽을 뻔했고, 그전에는 D급 던전에서도 보스몹한테 잘못 걸리는 바람에….”
누르면 튀어나오는 자판기처럼 건조한 목소리로 사건 사고를 나열해 나갔다. 내가 들어봐도 하나같이 위험한 순간들이었다.
“그런데 그건 갑자기 왜….”
“찾아보고 있거든요. 김태평 씨가 어쩌다 그렇게 됐는지.”
왜 악당이 된 건지는 알 것 같으니까. 이제 어떻게 강해졌는지를 알아볼 차례다.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습니다.”
“혹시 2차 각성이라고 들어 봤어요?”
“들어 봤습니다. 한때 관심 있게 찾아봤거든요. 제가 살길은 그것밖에 없을 것 같아서. 지금 생각하면 참 한심했….”
“저는 김태평 씨가 2차 각성자라고 생각하거든요.”
“예?”
2차 각성이니, 재각성이니 하는 명칭이 붙는 사람들이 있다. 뱃속에서 헌터가 되는, 선천 각성자들만큼이나 희귀한 능력자들 말이다.
내 예상대로라면. 김태평은 어떤 영약이나, 스킬북을 얻어서 강해지는 게 아니다. 내가 봤던 미래를 몇 번이나 분석해서 얻은 결론은.
김태평은 죽음을 넘는 위기와 함께 재각성한다. 결정적인 증거도 있다. 미래에서의 나는 겨우 D급에 불과한 김태평을 죽이려다 실패했다.
재각성은, 그런 말도 안 되는 모순을 풀어낼 수 있는 유일한 답이었다.
김태평이 입을 벙긋거렸다. 할 말이 많은 얼굴이었다. 그렇겠지. 내가 모르는 그의 노력들이 하루 이틀일까.
“그래도 이번엔 다를 겁니다.”
아마도.
***
훈련 방식을 뜯어고쳤다. 적당히 같은 건 더 이상 없다. 미래에서 힌트를 얻은 만큼, 그를 빈사 상태로 만들어 볼 계획이었다.
그냥 하는 말이 아니라, 당장 조치를 취하지 않으면 죽는 상태로.
김태평에게 내 계획을 그대로 말했다.
“상관없습니다. 저는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거든요. 팀장님.”
그 마음 부디 끝까지 갔으면 좋겠다. 김태평의 말이 이어지려던 그때. 다리를 박차고 뛰쳐나갔다. 그의 명치에 툭하고, 손바닥을 갖다 댔다.
쿠웅!
힘을 조절한다고 했는데도 김태평의 몸이 풍압과 함께 뒤로 나가떨어졌다.
벽에 부딪혀 나온 김태평이 꺽꺽대며 숨을 몰아쉰다. 잠시나마 심정지를 경험한 그는 지금의 이 시간이 영겁처럼 느껴질 것이다.
역시나. 천천히 걸어오는 나를 김태평이 죽음의 사신 보듯 쳐다봤다. 차마 이 정도일 줄은 몰랐겠지.
그래도 이미 시작한 마당이다. 여기서 끝내 봤자 죽도 밥도 안 된다.
가까이 다가갈수록 쇳소리를 내는 김태평의 호흡이 느려졌다. 둥둥 울리는 심장도 마찬가지였다. 즉, 이대로 두면 그는 죽을 것이다.
혹시나 싶어서 잠깐 내버려 뒀다. 많이는 아니고. 한 10초 정도. 아무리 죽을 고비를 넘겨왔던 김태평이라 해도, 심정지는 처음이니까. 혹시 이게 힌트가 되지는 않을까 싶었는데.
“애매한데.”
화악!
손에서 뻗어 나온 허연 빛이 김태평의 몸을 감쌌다. 절반의 마기를 쓴 대가로 멈춰 있던 김태평의 심장이 다시 작동했다.
“커헉!”
김태평이 악몽에서 깨어난 얼굴로 한참 동안 숨을 몰아쉬었다. 그동안 난 연구 결과를 지켜보는 교수처럼 메마른 감상으로 생각을 이어갔다.
“죽음에서 느껴지는 공포가 2차 각성의 재료는 맞는 것 같은데. 뭐가 하나 빠진 것 같단 말이지.”
김태평이 심정지된 순간 느껴졌던 작은 기운 하나가 있었다. 너무 찰나 간에 사라져서 내 착각인가 싶을 만큼 작은 기운.
“다시 공략해 보면 알겠지.”
물론 김태평은 거절할 것이다. 숨을 몰아쉬며, 눈빛은 절박해져서 나를 바라보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사람의 의지란 무릇, 이토록 의미 없는 것이다. 방금까지 각오됐다는 말이 무색하게도, 김태평이 뒷걸음질 치고 있었으니까.
그런데 그건 김태평의 생각이고. 나도 나름 절박하거든.
콰앙!
또다시 김태평의 몸이 저 멀리 날아갔다.
“한 열 번쯤 해 보면 답이 나올 것 같기도 하고.”
***
열다섯 번. 김태평은 열다섯 번의 죽음을 경험하고 살아 돌아왔다.
어느 순간부터 김태평은 살려달라고도, 그만하겠다고도 말하지 않았다. 그저 이 지옥 같은 순간을 끝내주기만을 기다리는 얼굴로 날 바라봤을 뿐이지.
그럼에도 나는 비정하게 그를 죽이고 또 죽였다. 정답이 거기 있었기 때문이다. 헉헉대는 김태평에게도 말해줬다.
“조건이 까다롭긴 하네요. 진짜 죽이려는 각오가 있어야 하니까.”
정말로 죽이고자 하는 살의. 김태평이 그것을 느꼈을 때 비로소 재각성이 시작된다.
“미쳤어요? 진짜 사람 죽이려고 작정한 거냐고요!”
박지현이 나를 돌아보며 사이코패스보듯 쳐다봤다. 다급하게 김태평을 살리려 분주하게 스킬을 쏟아내면서.
“이제 한계예요. 힐링이 만능도 아니고, 이제 한 번만 더 심정지 일어나면 저도 장담 못 해요.”
“한 번이면 될 겁니다.”
쇳소리를 토해내는 김태평에게 다가갔다. 자동반사처럼 김태평이 꾸물댔다.
쿠궁!
무정한 눈길로 그의 명치에 권격을 먹였을 때였다.
번쩍!
내 손이 그의 명치에 닿는 순간.
마침내 기다리던 반응이 찾아왔다. 샛노란 기운이 그를 중심으로 환하게 번졌다.
빠지직!
치료도 필요 없었다. 벌떡 일어난 김태평이 얼떨떨한 눈빛으로 나를 쳐다봤다.
“티, 팀장님.”
김태평의 몸에서 푸르고 노란 기운이 튀어나왔다. 스스로도 주체 못 하는 기운들이 이리저리 부딪치는데, 그걸 보는 기분이 묘했다.
해냈다는 안도감과, 결국 해 버렸다는 찜찜함이 동시에 찾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