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0화 러브 앤 썬더 (3)
던전에 입장할 때의 기묘한 감각. 쏟아지는 압력의 느낌이 묘했다. 전에는 느끼지 못했던 감각을 이제야 찾은 느낌이었다.
이거 꼭. 이셀라가 있는 붉은 사막으로 이동했을 때 같은데.
“전방에 다섯.”
생각에 빠져들려던 틈도 없이 곧장 튀어나온 몬스터가 보였다. 임한나의 말대로 오크였다. 다만 숨어있는 놈들이 더 있었다.
“그리고 그 뒤로 무쉬 열 마리.”
쥐새끼들이 기척을 숨긴 채 기다리고 있었다.
“내 불찰이야.”
임한나가 그렇게 말했지만 나는 물론이고 박지현도 그녀를 나무라지 않았다.
이 경우엔, 쥐새끼들이 작정하고 오크들 사이에 기척을 숨겼다고 보는 게 맞았다.
“작전은 뭐예요?”
심드렁하게 묻는 박지현의 말에 고개를 저었다.
“겨우 B급 던전에서 작전은 무슨.”
“뭐요?”
말 그대로였다. 겨우 첫 번째 방에서는, 그것도 이런 허접한 놈들 따위에게 작전은 사치였다.
일시에 장비를 착용하면서 앞으로 달려나갔다.
콰앙!
이 기분. 오랜만이다. 시끄럽고 피곤한 정치싸움 같은 것은 저 멀리 날려두고, 온전히 전투에만 집중할 수 있는 후련한 기분.
다가오는 오크의 눈동자에 비친 내 웃는 얼굴이 그것을 말해주고 있었다.
놈들의 능력치는 이미 파악해뒀다. 이것들 중 나를 막을 수 있는 것은 한 놈도 없었다.
그 생각과 동시에 검을 휘둘렀다.
서걱!
단말마도 지르지 못한 오크가 양단됐다. 칼끝의 감각이 나도 놀랄 만큼 서늘했다. 오러를 쓰지 않았음에도 이런 감각을 느낄 수 있는 이유는.
내 본연의 능력치 때문만이 아니라 신성한 파괴자의 검이 나날이 성장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나는 경험치를, 내 검은 놈들의 피를 먹고 자란다.
흐뭇하기도 잠시, 반대편에 서 있던 오크가 도끼를 만지작대며 다가왔다.
“네가 다음이냐?”
놈이 반응도 없이 도끼를 내려찍었다. 날보다 앞선 풍압이 시원하게 느껴졌다.
적당한 긴장감이 나를 옥죄는 이 기분이 좋았다. 왜 한석훈과 임한나가 던전 공략을 말리지 않았는지 이제야 알 것 같았다.
그 이후부터는 일방적인 사냥이었다. 검이 가는 곳마다 몬스터들이 쓰러졌다.
팔 한번 움직일 때마다 놈들의 목이 우수수 떨어졌다. 그렇게 첫 번째 방을 클리어하는 데까지는, 채 30초도 걸리지 않았다.
얼떨떨한 표정의 임한나와 박지현에게 집중하라고 말하려던 때였다. 그보다 먼저 박지현의 볼멘소리가 튀어나왔다.
“그렇게 초반부터 힘 빼면 어떡해요? 던전 처음와요? 힘 조절 못 하면 나중에 지쳐서 공략 더 못해요. 이것도 몰라요?”
“전력이요?”
“지금 나 보라고 이렇게 무리하는 거잖아요. 웃겨 정말.”
“무리한 적 없습니다.”
딱 잘라 말했더니 그녀가 어련하겠냐는 얼굴로 나를 돌아봤다.
“그쪽 싸우는 거 나도 본 적 있는데 뭘.”
“할 말 끝났으면 다음으로 넘어가죠.”
박지현이 뒤이어 짜증을 쏟아냈지만, 깔끔하게 무시하고 앞장섰다.
좋을 대로 생각하라지. 지금은 넘치는 이 힘을 온전히 내 것으로 만드는 게 더 중요했다. 있는 힘을 다해 다음 방으로 가는 나무문을 박살냈다.
콰광!
선빵이 곧 승리다. 라는 한석훈의 지론은 대부분 옳았다. 문을 박살내자마자 검 끝으로 오러 블레이드를 쏘아 날렸다.
콰과과과!
푸른색 오러가 부메랑처럼 휘며 놈들을 스쳐 지나갔다. 그것으로 끝이었다. 내 얼굴 한번 보지 못한 오크와 무쉬 서른 마리가 일시에 두 동강 나며 쓰러졌다.
“두 번째 방 클리어.”
“뭐, 뭐 이런 미친…!”
박지현이 말을 하다말고 나를 손가락질했다. 그런데 아직도 나는 만족하지 못한 상태였다.
“도망쳤어.”
임한나도 나와 같은 입장이었다.
“흔적이 남아있어. 오른쪽 문. 더 깊은 곳에서 우리를 맞이할 생각인 것 같은데.”
전형적인 무쉬들의 수법이었다. 다만 놈들이 B급이라면 이야기가 달라지지만. 모든 것들이 상관없다고 여겨지는 지금이다.
“계획을 수정한다. 열흘이면 충분하겠어.”
보름으로 잡아뒀던 공략 일정을 줄였다. 그래도 되겠다는 확신이 들었다. 그 정도로 주체못할 힘이 내 몸 내부에서 꾸물대고 있었다.
“열흘?”
그쯤에서 슬쩍 박지현을 쳐다봤다. 혹시나 반대한다면 탈출석을 던져 줄 요량이었다. 내 수준을 정확히 알게 된 지금, 그녀는 경험치를 좀먹는 수준에 불과했다.
“뭐 이런 공략이 다 있어! 당신 진짜 레벨이 몇인데?”
“190?”
얼굴을 와락 일그러트리는 박지현을 무시하고 다음 방으로 향하는 나무문을 부쉈다.
“끼긱!”
곧장 당황한 쥐새끼들의 표정이 보였다. 놈이 나를 노려보기도 잠시, 불덩이가 날아와 헬리오스의 심장에 꽂혔다.
화르륵!
재가 되어 날아가는 불덩이를 보며 쥐새끼가 슬금슬금 나와 거리를 벌린다.
콰직!
그대로 달려가 놈을 밟아 터트렸다. 그러면서 일부러 틈을 내보였다. 몬스터들이 다가와 주길 바라면서.
허나 내 예상이 빗나갔다. 대뜸 처들어온 우리 때문일까. 아니면 순식간에 동료를 터트려 죽인 탓일까.
바짝 얼어붙은 놈들이 우리를 바라보기만 했다. 높은 지능 탓이었다. 우리와의 전투를 그려봤을 것이고, 분명히 자신들 대부분이 죽는다는 것도 알고 있을 것이다.
“쯧.”
차라리 D급 오크가 더 용맹해 보일 정도다.
우물쭈물거리는 무쉬 중 한 녀석을 특정했다. 로브를 뒤집어쓰며 시뻘건 눈깔만을 드러낸 채 찍찍거리고 있는 놈이었다.
쥐새끼의 입장에서는 내가 사라졌다가 나타난 것, 그리고 목이 따끔한 느낌이 다였을 것이다.
[경험치를 획득했습니다 : 341exp!]
무르디 무른 쥐새끼의 목은 그렇게 잘려나갔다. 갈 길이 멀었다. 곧장 다음 스텝을 밟았다.
서걱! 서걱! 서걱!
검이 가는 곳마다 연약한 쥐새끼의 몸뚱이가 덧없이 잘려나갔다. 세 놈을 희생한 대가로 단 한 번, 놈들이 공격할 찬스가 있었지만.
[저주…!]
[완전히 저항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아무런 영향도 끼치지 못하고 사그라들었을 뿐이었다.
드르르륵!
스무 마리의 쥐새끼들이 칼질 한 번에 목이 나가떨어졌다. 그걸로 끝. 보따리째 쏟아져 들어오는 경험치는 훌륭하기 그지없었다.
“잠시만!”
곧장 다음으로 향하려던 차. 박지현이 서둘러 내 앞을 막아섰다.
“대체 그건 뭐예요.”
“뭐가요?”
“뭐가요가 아니라. 그 이상한 전투방식.”
잠시간의 휴식이 끝난 후 다음 방으로 진입 전이었다. 박지현이 얼굴을 일그러트리며 삿대질을 해댔다.
“그 말투. 그 행동거지. 꼭…. 꼭.”
말까지 더듬으며 몸을 부르르 떤다. 마치 끔찍한 과거를 회상하듯 시선은 허공에 두면서.
“한석훈 그 아저씨 같잖아!”
“예?”
절로 표정이 구겨졌다.
뜬금없이 한석훈이라니. 굉장히 불쾌하다. 생각만 해도 소름이 돋는다.
“다짜고짜 문 여는 것 하며, 상의도 없이 무리로 달려드는 것 하며. 그 되먹지도 않은 전략 때문에 고생한 거 생각하면…!”
박지현이 미친 거 아니냐며, 대체 그 밑에서 뭘 배웠냐며 따져 물었다. 나는 어이가 없어서 어깨를 으쓱했고.
조금 공격적이었다는 건 인정한다. 하지만 그건 분풀이를 할 곳이 필요해서일 뿐이었지, 다른 이유가 있던게 아니었다.
한석훈?
뭔 소리야. 그래도 내가 그 사람보다는 양반이지.
쾅!
다음 방문을 발로 열며 외쳤다.
“한꺼번에 덤벼.”
***
박지현이 썩은 얼굴로 임한나와 나를 쳐다봤다.
“내 평생 이렇게 무식한 공략은 처음이라. 뭐라 말도 안 나오네.”
박지현이 맑은 하늘을 보며 헛웃음을 지었다. 열흘을 예상했던 공략 일정이 닷새로, 닷새에서 또 사흘로 줄어들었다.
우리는 그만큼 거침없었다. 직전의 보스전마저도 아드레날린 부스트를 꺼낼 필요도 없이 싱겁게 끝나버렸다.
나도 어이없을 지경인데, 비각성자들은 오죽할까. 맑은 공기가 폐부에 들어찰 때쯤이었다.
보초를 서고 있던 협회 직원이 아연실색한 표정으로 우리를 쳐다봤다. 금붕어처럼 뻐끔뻐끔 할 말을 못 찾는 그에게 고개를 숙이며 현장을 빠져나왔다.
회사로 복귀하는 길, 박지현이 불만 가득한 얼굴로 말했다.
“이럴 거면 난 왜 불렀어요? 기죽이려고? 이런 짓 안 해도 충분히….”
“아뇨. 큰 도움 됐습니다. 진심으로요.”
“하!”
마냥 빈말이 아니었다. 박지현에 대한 이미지가 시시각각 변하고 있었다. 나쁘지 않은 쪽이었다.
팀워크만 해도 그렇다. 박지현이 내 오더를 따라줄지에 대한 걱정이 무색하게도.
던전에서의 위계를 누구보다 인지하고 있다는 듯 그녀는 한 번 내려진 명령에 대해서는 철저하게 지켜나갔다. 의외로 말이다.
능력면에서는 말해봤자 입이 아플 지경이고.
특히 보스전에서 박지현은 왜 자신이 일성의 공주인지를 증명했다.
적재적소의 스킬 분배, 마나 관리, 생존능력. 거기다 버프스킬까지. 파견이 아니라 아예 내 밑으로 들어왔으면 좋을 정도였다.
나쁘지 않았다. 이 정도라면 바로 A급에 뛰어들어도 괜찮다는 판단이 생겼다.
박지현의 동의만 구하면….
“그래서. 다음 공략은 또 언젠데요?”
박지현이 못마땅하다는 얼굴로, 그렇게 말했다.
***
네댓 명의 일성 직원이 자판기 앞에 모였다. 차례대로 커피를 배급받은 직원들이 커피를 마시다, 마침 생각난 듯 직원 한 명이 말했다.
“요즘 그 말 들었어요? 이태진 팀장님. 던전 도는 거.”
“아. 그거 유명하지.”
“반응 좋던데요. 규제 풀린 마당에 앞장서서 고등급 던전 공략한다고. 그것도 겨우 세 명이서.”
옆에 있던 직원이 눈을 빛내며 낭창하게 말했다.
“그나저나 진짜 세 명이서 가는 거예요? B급 던전을요?”
“그러라고 규제 푼 거 아니에요? 다른 팀들 보니까 세 명씩 짝지어서 던전 공략하고 있던데.”
신입으로 보이는 직원이 선배에게 묻자, 곧장 면박이 날아왔다.
“그거야 C급 이하 던전이고. B급부터는 다른 얘기지. 어떤 미친놈이 겨우 셋이서 B급 던전을 들어가.”
“공략도 한 삼 일 만에 했다며? 난 처음 들었을 때 뭔 헛소리를 하나 했다니까.”
직원들이 혀를 내둘렀다.
“백인호 팀장님은 요새 잠잠하죠?”
“그렇지.”
가장 고참 직원이 목을 긋는 시늉을 했다.
“팔다리 다 잘려서 요새 조용하잖아. 그것도 까마득한 후배한테.”
“그 후배가 보통 놈이어야지.”
“이태진은 이제 해외에서도 반응 오던데. BTO 영상 역주행하는 거 봤어?”
“레인 우버 때려잡고 중남미에서도 러브콜 왔다잖아. 여기도 좀 맡아줄 수 없냐고. 백인호 팀장님 이제 어떡하냐?”
“이대로 은퇴하는 거 아니야?”
“B-1팀 애들한테 물어봐도 별다른 소식이 없던데. 폐관 들어갔다는 말밖에.”
떨떠름한 표정과 함께 복도에 설치된 티비를 쳐다봤다. 화면 속에는 한창 이태진 다큐의 마지막이 방영 중이었다.
[마지막으로. 최근 이태진의 행보는 조금 특이합니다. 새로운 특성을 얻은 것도, S급 스킬을 얻은 것도 아닙니다. 그저 사람 한 명을 뽑은 것뿐이죠.]
PD의 심각한 얼굴이 줌업됐다.
[김태평. E급 헌터인데도, 요즘 모르는 사람이 없다죠? 일성에 들어가려는 날고기는 각성자들은 많습니다. 그런데 그 많은 엘리트를 제치고 이태진은 김태평 씨를 밑으로 불렀는데요.]
의미심장한 피디의 표정이 점점 줌아웃 됐다.
[이건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요. 10년째 허덕이는 E급 헌터에게서 이태진은 과연 무엇을 본 걸까요?
만약 이번에도 뭔가. 우리가 모르는 사건이 터진다면. 그때는 의심을 확신으로 바꿔도 되지 않을까요? 이태진 팀장이. 미래를 볼 줄 안다고요.]
그것으로 다큐는 끝났다. 하지만 직원들은 미동도 없이 꺼진 화면만 쳐다봤다. 그것도 잠시, 참다못한 신입사원이 입을 열었다.
“어때요? 김태평. 진짜 뭐 있어 보여요?”
거기에 대해서는, 누구도 답할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