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9화 러브 앤 썬더 (2)
다음날이었다. 쭈뼛쭈뼛 내 개인 연무실로 들어오는 김태평의 얼굴은 여전히 낯설었다.
미래의 모습과 전혀 다른, 어리숙한 남자 한 명이 뒤통수를 긁고 있었다.
“검 쓰시죠?”
“예. 팀장님.”
김태평이 고개를 꾸벅 숙이며 목검을 받았다. 거기에 꼬박꼬박 팀장님 소리를 붙이는데, 티는 안 냈지만 영 어색했다.
언제 죽일지 모를 양반한테 이런 대우를 받고 있자니 내 마지막 양심이 너무 걸려서. 무뚝뚝한 표정을 유지한 채로 턱짓했다.
“스킬 중에 휘발성, 그러니까 단기간에 폭발적인 힘을 낼 만한 건 없던데. 주력 스킬이 어떤 겁니까?”
“그게…. 없습니다. 박스를 까도 스킬보다는 특성 위주로 뜨는 바람에.”
멋쩍은 듯 김태평이 머리를 긁적였다.
없다라.
뭐, 괜찮겠지. 누구 가르치는 건 자신 있다. 검신의 축복 덕분에, 성장 잠재력은 물론이고 상대의 약점까지 속속들이 보이니까.
팀장이 되기 전에는 일성 내에서도 유명했다. 무기를 가리지 않고 포인트만 콕 집어 보완점을 알려준다고 해서 족집게 이 선생님이라고 불리기도 했었다.
“한번 봅시다.”
“…예?”
말이 끝남과 동시에 김태평에게 검을 내질렀다. 백문이 불여일견이라고, 가타부타 떠드는 것보다 검 한번 부딪쳐 보는 게 훨씬 이해하기 쉽다.
“흡!”
김태평이 배에 힘을 주고 똑같이 검을 뻗었다. 기본은 돼 있는데. 뭐지? 이 애매한 움직임은.
퍼억!
김태평의 옆구리에 목검이 적중했다.
“크흡!”
저 멀리 날아가는 순간까지도 눈을 감지 않은 것은 칭찬할 만한데.
고개를 갸웃했다.
뭐지?
지금 나는 속도도, 힘도 김태평과 동일한 수준으로 낮춘 상태였다.
그런데도 이렇게 힘없이 나가 떨어진다는 것은, 그가 기본적인 센스도 없다는 말이었다.
옆구리를 부여잡은 채로 김태평이 일어섰다. 부들부들 떨면서도 눈빛 하나는 살아 있었다. 이 기회를 놓칠 수 없다는 독기가 얼굴에 가득하다.
“주, 준비됐습니다. 팀장님.”
어지간히 재능 없지 않은 이상 저 정도 독기를 가진 사람이 실패하기도 힘든데.
왜지?
왜 불안한 거지?
***
“커헉!”
“오늘은 여기까지 하시죠.”
혀를 차고 김태평을 일으켜 세웠다. 중간중간 포션으로 회복시켰어도 정신적인 데미지가 남아있는 터라 김태평은 요동치는 몸을 주체하지 못했다.
“더, 더 할 수 있습….”
“아뇨. 여기까지면 여기까지인 겁니다. 휴식도 훈련인 거 아시죠?”
“아! 예!”
김태평은 마치 내 말이라면 지옥불에라도 떨어질 듯 굴었다. 똥을 보고 황금이라고 해도 믿을 것 같은, 저 신뢰의 눈빛은 시타둠 교도들한테서나 보던 건데.
지끈거리는 머리를 문지르면서 김태평에게 이만 퇴근하라고 했다. 빙그레 웃어주면서.
“저, 팀장님. 역시 제가 별로인….”
“좋은데요?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잠재성이 보입니다.”
하루 종일 두들겨 맞던 김태평은 그제야 안심한 얼굴이 됐다. 수고했다는 말과 함께 친절히 문까지 열어주고 나서. 김태평의 기감이 완전히 없어질 때까지 기다렸다가.
털썩 주저앉았다.
“이거 뭐지? 뭐가 어떻게 된 거지?”
확실히 알았다. 내게 가르치는 재주는 있다. 적당히 뒷짐만 지고 제자만 받아도 어디 가서 떵떵거릴 정도로. 헌데 그것도 한계가 있기는 하더라.
나비를 드래곤으로 만드는 건 가능하다. 그런데 무기물을 유기물로 만드는 건. 내가 시스템도 아니고 그런 게 가능할 리가.
이런 말 하기 뭣하지만, 김태평의 재능은 쓰레기에 가까웠다.
이런 김태평이 반년 안에 나와 동등한 강자가 된다는 것은, 떠올릴 수 있는 최대한의 기연을 생각해 봐도 이해할 수 없었다.
검신의 축복 같은 사기적인 특성을 몇 겹으로 걸치지 않는 이상….
“설마.”
미래가 바뀌었나?
나도 모르는 나비효과로 인해서, 김태평이 그저 그런 헌터로 전락하고 만 건가?
정말 그런 것이라면, 김태평에게는 미안하지만 돈이라도 왕창 쥐여준 다음….
그런데 찜찜한 기분이 영 가시질 않았다. 잠잠한 ‘그것’ 때문에 더 그랬다. 뭔가 내가 모르는 것이 더 있을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
여느 때처럼 내 옆에 달라붙어 잡일을 도맡던 임한나의 표정이 오늘따라 심각했다. 그녀의 시선을 따라 티비 화면 속을 쳐다봤다.
-물 반 던전 반이라는 말이 유행 중인데요. 그만큼 급증하는 던전과 게이트가 사회적 문제로 거론되고 있습니다. 과학적인 이론은 차치하고요, 이에 대해서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요? 장 박사님.
-상황이 안 좋아요. 헌터 회사들이야 때아닌 호황에 비명 지르고 있다지만, 우리 같은 일반 시민들은 불안해서 밖으로도 못 나가요. 심각합니다.
-그래서 협회에서 규제까지 풀지 않았습니까? 6인이었던 공략인원을 3인으로 줄이고, 심지어 헌터 면허가 박탈된 사람들에게도 다시 기회를 주고 있습니다. 이래도 부족하다는 말씀인가요?
-근본적인 해결책이 안 되니까 문제죠. 쯧.
-자세히 좀 말씀해주시죠.
-부익부 빈익빈 아시죠? 딱 그거예요. 앵커님 말씀대로 인원이며 던전 횟수며. 협회에서 좋은 마음으로 규제 싹 다 풀어주니까 어떻게 됐습니까? 상위권 각성자들이 A, B급 던전 공략합니까? 옳다구나 하고 C급 던전 하루에 스무 번 돌고 말지.
“저 장 박사라는 인간. 협회 쪽이지?”
“응.”
임한나가 혀를 차는 사이, 화면 속 장 박사가 침을 튀기며 열변을 토했다.
-아닌 말로, 200레벨짜리 각성자 한 명이 C급 던전 공략하는 데 얼마나 걸릴 것 같아요? 30분? 목숨 걸고 B급 던전 공략할 바에 편하게 돈 벌겠다는 건데. 그러면 고등급 던전은 어떡합니까? 그대로 둬요?
-고등급 던전을 공략하지 않는 고레벨 헌터들을 지적하셨는데요. 던전을 공략하지 않고 놔두면 어떤 문제가 발생할까요. 장 박사님.
-다들 평화 속에 살아서 잊으셨나 본데. 일정 시간 던전을 그대로 놔두면요. 그게 게이트가 됩니다. 던전 밖으로 몬스터들이 튀어나온다고요. 잘나신 고레벨 헌터들이야 알아서 살아남는다지만 저처럼 힘없는 시민이나, 저레벨 각성자들은 어떡합니까? 그냥 손가락만 쪽쪽 빨고 있다 죽을까요?
-그래서 협회에서 다시 규제안을 발표한 것으로 아는데요. 고레벨 헌터들의 저등급 던전 횟수 제한을요.
-그걸로도 부족해요.
-그러니까 장 박사님 말씀은 더 강력한 규제가 필요하다는 말씀이신가요?
-바로 그겁니다. 당장 고레벨 각성자들부터 한데 묶어서 관리해야 합니다. 헌법에도 적혀 있잖아요. 각성자들은 국가 위기 상황이 되면 헌터 협회에 강제로 귀속된다고. 지금이 딱 그 상황입니다. 솔직하게는요, 각성자들 몸에 칩이라도 심어서….
그쯤에서 티비를 껐다. 저 말도 안 되는 망상을 계속 듣고 있다 보면 나도 모르게 욕지기가 튀어나올 것 같아서.
대신 임한나에게 본론을 꺼냈다.
“던전에 들어갈 생각이다.”
“응.”
“B급으로. 인원은 최소로 둘 생각이야.”
“응. 세 명이라는 말이지?”
“…뭐 할 말 없어?”
“응? 무슨 할 말?”
임한나가 전에 없이 밝아진 얼굴로 활짝 미소지었다. 거기에 따라 찰랑거리는 단발이 화사하게 빛…, 이게 아니라.
“반대할 줄 알았는데.”
“응? 내가 왜?”
“왜라니.”
그때 이후, 아니지. 피하지 말자.
그러니까 최찬규의 죽음 이후 온종일 내 옆에 붙어서 매니저를 자청하던 임한나였다. 심지어는 빨래며 청소까지 하려 해서 식겁했었다.
그랬던 임한나가 던전에 들어간다는 걸 쌍수 들고 환영한다고?
“그래서 나머지 인원은 누구로 생각했어? 아무래도 힐러가 좋을 것 같은데.”
동감이다. 아직 내 힐링 스킬은 고등급 던전에서 먹힐 만큼 효율이 좋지 않다.
“박지현.”
A급 최고 힐러 정도라면. 세 명이라도 던전을 공략할 수 있지 않을까.
내 예상과 달리 활짝 웃고 있던 임한나의 얼굴이 구겨졌다.
“…그 사람은 못 미덥지 않아? 도와주는 건 고맙긴 한데 뭐랄까 찜찜하다고 해야 하나, 여자의 감이라 해야 하나.”
“그러면 다른 힐러로 구할게.”
순순히 알겠다고 대답했다. 임한나는 우리 팀의 부팀장이다. 더군다나 뭐가 찜찜한 건지 충분히 이해 간다.
최태성과의 거래라든가, B팀장 자리를 순순히 양보했다든가, 아니면 악명 높은 그녀의 소문 때문일지도 모르지.
“김아랑 선배도 괜찮고. 어쨌든 힐러는 있어야 하니까.”
“너랑 스캔들 난 그 사람?”
“그건 스토리 만들기 좋아하는 기자들이 낸 더러운 헛소리고.”
임한나가 차라리 박지현이 나을 거라며, 박지현을 설득해 보라고 세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
“던전이요?”
어떻게 설득해야 할지 고민하던 차에 박지현을 만났다. 고고한 공주님답게 자존심이 무척 세다고 들었다. 좋게 말해서 자존심이 센 거지, 성격이 굉장히 더럽다고.
“마침 몸이 근질근질하긴 했는데. 등급은요?”
“B등급이요.”
박지현이 시시하다는 얼굴로 코웃음을 쳤다.
“난 또 뭐라고. 몸풀기 정도면 뭐. 알겠어요. 도와줄게요. 멤버는 몇 명이에요? 설마 그 소꿉놀이 하는 애들까지 다 껴서 가자고?”
“소꿉놀이?”
“김세린, 이지은 걔들요.”
“B급 던전이 애들 장난도 아니고. 가는 건 우리만요.”
“우리?”
“네. 우리.”
원하던 대답이 아니었는지, 박지현의 얼굴이 괴이하게 바뀌었다.
“우리 누구. 설마 우리 둘이서요?”
“설마요. 셋이서 갑니다.”
“셋은 또 뭐야. 지금 나랑 농담하는 거예요? 내가 만만해 보이나?”
만만하기는. 하루걸러 하루마다 박지현의 악명 자자한 말들을 듣고 있었다.
고집불통에, 리더의 말을 무시하는 일도 다반사에다, 공략할 던전이 제 마음에 안 든다 싶으면 아예 나오지도 않는다고 한다.
그런 사람을 두고 농담할 만큼 내가 넉살 좋지는 않다.
“저도 그런 농담 싫어합니다.”
“농담이 아닌데 B급 던전을 겨우 셋이서 간다는 말이 나와요?”
“네.”
기가 차다는 얼굴로 나를 노려보던 박지현이 혀를 차며 물었다.
“셋이서 가면 김석환 팀장님이라도 오는 건가 봐요?”
“아쉽게도 아닙니다. 박지현 씨, 나, 임한나. 이렇게 셋이요. 구성은 딱 맞습니다.”
말 바꾸기 전에, 빨리 덧붙였다.
“설마 했던 말 무르는 건 아니죠?”
다음날이었다.
“무슨 던전 공략을 번갯불에 콩 볶듯이 진행해요?”
박지현이 볼멘소리로 혀를 찼다. 그러면서도 주섬주섬 던전에 들어갈 짐을 준비하는 모습이 능숙했다.
차량이 통제된 충무로역으로 걸어가면서 박지현이 은근한 얼굴로 물어 왔다.
“명색이 팀장이라면서 A급 던전 가본 적이 없어요?”
“네. 그렇게 됐습니다.”
“에이. 재미없어라. B급 들어간 게 언젠지도 기억 안 나네.”
“언제는 세 명이서 간다고 무섭다고 하지 않았어요?”
“무섭긴. 그냥 어처구니가 없어서 그랬지.”
박지현이 코웃음을 치며 고개를 저었다.
“그래도 A급 간다고는 말 못 하겠나 봐요.”
“갈 거예요. A급도.”
“뭐, 뭐요?”
못 들었나 싶어 한 번 더 말해줬다.
“갈 거라고요. 솔직히 말하자면, 당장 들어가고 싶은데 지금 우리 합이 어느 정도인지 몰라서 한번 테스트해 보는 겁니다.”
“테스트를 B급 던전으로 해요?”
박지현이 어처구니없다는 듯 물었다.
“그리고, 누가 같이 들어가 준대요? 오늘이 마지막이에요. 부탁 들어주는 거.”
“네. 그러세요.”
딱히 미련 없었다. 아이템을 쥐여줘서라도 용병을 구하려면 구할 수 있으니까.
박지현의 어이없다는 표정과 함께 던전 입구에 도착했다. 언제나 사람 많고 시끌벅적한 거리가 싸늘하게 식어 있었다.
그 많던 사람 대신, 이곳저곳에 쳐진 바리케이드며 노란색 접근금지선, 그리고 경비를 서고 있는 협회 직원이 보였다.
“아. 오셨네.”
우리를 발견한 협회 쪽 헌터가 반색을 띠었다. 줄곧 험상궂게 사람이 오나 안 오나를 살피던 그들이 한시름 놨다는 표정을 지었다.
보랏빛 게이트를 턱짓하며 말했다.
“던전은 어때요?”
“발견된 지 얼마 안 됐기도 하고, 마력 파장도 안정적입니다. 빨리 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한숨을 내쉬던 협회직원이 혀를 차며 말했다.
“요즘엔 워낙 헌터님들 바쁘잖아요. 특히 이런 고등급 던전은 다들 피하는 분위기고.”
협회 쪽 인사가 씁쓸하게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바로 입장하십니까?”
“잠시만요.”
하고 임한나를 바라봤다. 그때쯤 임한나는 이미 제 머리 위에 푸른색 눈을 띄워놓고 던전 내부를 살피는 중이었다.
“오크 던전이야. 함정은 따로 없고, 루트도 단순해.”
임한나가 표정을 일그러트리며 말했다.
“보스몹을 읽을 순 없지만 피할 정도는 아닌 것 같아.”
“뭐? 그렇게까지 보인다고?”
옆에 있던 박지현이 되물었다. 어느새 우쭐한 임한나가 코웃음을 쳤다.
“뭐 별거라고.”
“아. 별거 아니지. 그냥 네가 한 게 놀라워서. 친구 덕에 부팀장 맡은 줄 알았는데. 꼭 그건 아니구나?”
“그냥 친구가 아니라 아카데미 동기.”
“어머. 얘 말하는 거 보게? 넌 선배도 없니?”
“선배는 무슨. 급으로 따지면 내가 더 높지. 부팀장인데. 나한테 존댓말 할래?”
그러면서 임한나가 힐끔 나를 돌아봤다. 기선제압에 승리한 고양이가 떠올랐다가 머릿속에서 날려 보냈다.
“들어갑시다.”
둘의 신경전을 쳐다보며, 오늘 잘 풀리려나 걱정하다가, 쓸데없는 걱정임을 깨달았다.
지금 내 수준과, 방금 임한나가 보여준 능력에, A팀에서도 구를 대로 구른 박지현까지 있으면.
오크 던전 정도는 가뿐하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