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헌터는 미래를 본다-106화 (106/170)

106화 연극이 끝나고 난 뒤 (2)

298일. 내게 남은 시간이다. 무슨 말이냐 하면, 남은 시간이 지나면 일성에 어느 미친놈이 찾아올 것이다. 그런 다음 가슴에 칼 한방씩 먹여주고, 나까지 슥삭.

아니다. 어쩌면 시간이 더 줄어들 수도 있다. 그리고 이건 내 생각인데, 높은 확률로 시간이 더 줄어들 것이다. 그것도 내가 강해질 때마다 점점.

당장의 성장보다 입지를 먼저 다진 이유였다.

어쨌든.

언제까지 슬픔에 젖어있을 수만은 없었다. 많은 사람들의 목숨이 내게 달렸다는 사명감뿐만 아니라, 당장 내 목이 달아나게 생겼기 때문이다.

억지로 일을 만들었다. 각종 행사에 나가 사람들과 교류를 쌓고 인맥을 넓히는 과정을 밟았다. 말하자면 사교계에 발을 들인 것이다.

검을 휘두르는 날보다 정장을 입는 날이 많아졌다. 땀에 젖어 푹 익은 얼굴보다, 맨들맨들한 화장에 웃는 낯으로 사람들을 대할 때가 더 많았다.

실시간으로 내 유명세가 높아지는 기분 또한 썩 나쁘지 않았다. 겨우 떠오르는 신예 취급하던, 혹은 애송이로 알던 시절과는 진즉에 벗어났다. 명실상부 나는 한국의 주요 헌터가 됐다.

아카데미 시절, 그토록 혐오하던 일들을 내 손으로 하고 있다니. 자조 섞인 미소 뒤로 슬픔은 넣어뒀다.

내가 강해질수록 모두가 살 수 있다. 그게 직접적인 무력이든 권력이든 말이다.

그러는 한편, 일성 내부에서 해결할 일도 남아있었다.

“어…. 오빠 괜찮아요?”

“왜?”

“아, 아녜요. 그냥 괜찮나 해서. 괜찮은가보다. 헤헤.”

자연스럽게 밝은 분위기를 만들었다. 팀장으로서 추한 꼴을 보이는 건 나도 사양이었다. 효과가 있었다.

이전처럼 김세린이 툭툭 장난을 걸었다. 옆에서는 박하영이 맞장구를 치고, 이지은과 전용철이 고개를 끄덕였다.

내 연기는 완벽했다. 두 사람한테만 빼고.

“더 쉬어 인마. 센 척하지 말고.”

“너 지금 제정신 아닌 거 알지?”

한석훈과 임한나가 걱정이 뚝뚝 묻어 나오는 눈길로 나를 쳐다봤다. 내가 안 쉬면 강제로라도 묶어둘 기세였다.

그런데 앞서 말했듯, 더 이상 애송이 시절의 이태진은 없다. 지금에 이르러서는 설령 최태성이라 해도 내 행동을 강제할 수는 없었다.

쉬어야 한다고? 살인마가 우리 모두를 죽이러 오고 있는 마당에 무슨.

언젠가 그런 생각을 한 적 있다. 어차피 죽을 거 편하게 생각하자고, 깊게 생각해봤자 답이 안 나온다고. 아마 민수정 아카데미 총장을 경호했던 때인 것 같은데.

그때의 나를 보면 한 대 때리고 싶다. 강박이라 해도 좋다. 더 이상 동료를 잃는 일은 일어나서는 안 될 것이다.

***

최태성의 방에 가기 전이었다. 엘리베이터 앞에서 애타는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이 팀장님!”

“자, 잠깐만요! 이태진 팀장님!”

“1분이면 됩니다!”

내가 달아날까 봐 먼저 앞부터 막아서는 그들이었다. 기자인가 싶어 얼굴들을 확인하는데 아니었다. C팀의 팀장들이었다. 차례대로 C-1, 2, 3팀장들.

언제부터 뛰어왔는지 각성자씩이나 되는 양반들이 한참이나 숨을 헐떡였다. 그러면서도 1분, 대화, 부탁. 단편적인 단어를 말하며 내 시선을 끌었다.

겨우 숨을 돌린 팀장 중 한 명이 내 손을 붙잡으면서였다.

“팀장님. 우리 세린이 좀 한 번만 더 부탁드릴 수 없을까요?”

우리 세린이?

눈썹을 까딱거리려는 찰나, 옆에 팀장이 선수치며 말했다.

“이 팀장님. 저는 지은이랑 하영이요. 딱 한 번만 부탁드립니다. 사람이 없어서 그래요!”

옆의 3팀장은 더 가관이다.

“이 팀장님. 제가 하라는 거 다 할게요. 저는 뭐 이놈들처럼 누구 빌려달라 말 안 합니다. 그냥 B-2팀 팀원이면 누구라도 좋으니까 꼭 좀 부탁드립니다. 우리 팀에 지금 사람이 없어서 그래요. 네?”

각 팀장들이 내게 매달려왔다. 가랑이를 기라면 길 기세였다.

뭔 말인가 했더니.

한창 조사단장으로 있을 무렵, 김세린을 포함한 팀원들이 성장할 시간이 없었다. 물론 훈련이야 열과 성을 다해 봐주지만, 직접적으로 레벨을 올리기 위해선 결국 몬스터를 잡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때가 기억난다. 바로 앞의 세 남자가 시큰둥한 얼굴로, 내가 조사단장이 아니었다면 거절했을 것 같은 느낌으로.

억지로 내 팀원들을 끼워줬었지. 그것도 내가 아이템 하나씩 쥐여주기까지 하면서.

‘얘들 실력이야 저희도 다 알고. 이 팀장님 얼굴 보고 끼워주는 거지만 그렇다고 특별대우는 못 해 드립니다.’

덕분에 애들도 눈칫밥 좀 먹었을 테고.

그런데 평가가 달라진 건 딱 한 번. 던전을 갔다 오고 나서부터였다.

틈나는 대로 애들을 직접 가르쳐 줬다. 심지어 골머리를 앓던 이지은까지 박지현이라는 A급 힐러가 코칭해 줬으니. C급 던전에서 두각을 나타내지 않았을 리가 없었다.

평가 보고서가 내 밑으로 들어왔을 때 흐뭇한 미소를 지었었다.

모든 성과들이 A 이상이었다.

덕분에 이 꼴이 난 것이다. 한 번 고기맛을 본 놈이 고기를 못 끊듯이, 적재적소마다 활약을 해주는 B-2팀을 맛본 팀장들이다. 팀장들은 지금 각성제에 중독된 헌터들처럼 중독 증세를 보이고 있었다.

“이지은, 박하영은 내가 가져갈 테니까 그런 줄 알아.”

“너 혼자 둘 다 가져간다고? 정신 나갔냐? 찬규형 그렇게 되고 팀장 자리 꿰차니까 이게 위아래도 없이 뭐하는 짓이야?”

“다들 닥쳐. 우리 팀이 제일 시급하니까. 용철이 형, 이지은, 박하영, 김세린까지 내가 다 데려가야 해.”

“뭐요? 형. 정신 나갔어요?”

떡 줄 놈은 생각도 안 하는데 자기들끼리 북치고 장구치고 난리가 났다.

한참을 그 꼴을 쳐다보고 있자, 문득 팀장들의 얼굴이 천천히 내 쪽으로 향했다.

“걔네들. 혹시 B급 던전으로 들어가는 겁니까?”

팀장 한 명이 조마조마한 얼굴로 내게 물어봤다.

“글쎄요. 아직 정해진 건 없어서.”

꿀꺽.

침 넘어가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린다. 그사이 나는 턱을 짚으며 뭔가를 고민하는 척 표정을 바꿨다.

“애들도 C급 던전을 마음에 들어 하고…. 저희가 경험치 몰아 줄 수 있는 부분은 확실하게 밀어주고 있거든요.”

“애들이 그래요? C급 가고 싶다고? 나한테 하는 말이랑은 좀 다르네요.”

“네?”

팀장들의 얼굴이 사색으로 바뀌었다. 눈동자가 굴러갔다. 얼굴에 빤히 그런 말들이 적혀 있었다.

‘내가 뭐 실수했나?’

‘더 잘해줬어야 했는데.’

‘이 팀장 팀원들 없으면 안 되는데!’

“이 팀장님. 제 면 한 번만 봐주시죠.”

팀장 중 한 명이 애원하듯 매달렸다.

“생각 좀 해볼게요. 지금은 조건이 조금 시원찮은 것 같아서.”

***

“요새 얼굴 보기가 힘들어.”

최태성이 잔잔한 웃음과 함께 차를 건넸다.

“나보다 바쁜 것 같고. 어때. 일은 할 만해?”

“예. 신경 써주셔서 감사합니다.”

내 말에 어째선지 최태성이 피식 웃었다.

“이런 걸 보면 순수했던 자네가 조금 그리워지는데.”

차를 한 모금 들이킨 최태성이 넌지시 물었다.

“일은 다 정리한 건가?”

“예. 조사단장은 내려놨고, 팀원들 관련해서도….”

“아니. 그런 거 말고. 마음의 준비.”

“예?”

“설마 이번에도 혼자 던전에 들어갈 생각은 아니겠지? 막아주는 것도 한계가 있어서. 더군다나 자네 수준에 맞는 던전을 구하는 건 더더욱 힘들고.”

뭐?

“오대산 말이야. 지금 생각해보니 BTO 전에도 혼자 던전에 들어간 것 같기도 하고. 아닌가?”

칼에 찔린 듯 가슴이 뜨끔했다. 지금 내가 무슨 이야기를 듣고 있는거지?

“나만 아는 일이야. 손정연 그 여우도 모르는 일.”

언제나처럼, 최태성이 잔잔한 미소를 지으며 나를 쳐다봤다.

나는 그러질 못했다. 표정 관리고 뭐고, 거울이 있다면 한번 내 얼굴을 보고 싶다. 얼마나 당황으로 일그러져 있을지.

“그런데 이제 그럴 필요도 없겠어. 혼자는 무리겠지만 셋 정도는 괜찮을 것 같은데.”

뒤이어 말하는 소리를 알아듣지 못했다. 재밌다는 얼굴이 된 최태성이 벽에 걸린 티비를 켰다. 곧장 뉴스 하단에 적힌 자막부터 눈에 들어왔다.

[협회 긴급발표. 던전 최소 인원 : 6인에서 3인으로 축소.]

이건 또 무슨.

-…아무래도 최근 들어 급증하는 던전과 게이트의 출몰빈도 때문인 것으로 확인되고 있습니다만, 일각에서는 갑작스러운 규제 완화로 인해 던전 내부에서 발생하는 사건 사고가 더 급증할 것이라는 우려가 일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협회가 이런 결정을 내린 이유가 있다고요.

-말씀대로 정말 갑작스러운 발표입니다. 하지만 그만큼….

꿀꺽 침을 삼켰다. 속으로는, 세 명이서 들어가는 던전을 상상해봤다. A급이 아니더라도, B급만 돼도 셋으로 공략이 가능한가?

나와 임한나, 그리고 다른 한 명을 붙인다면.

꼭 불가능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런데 그것보다 마음에 걸리는 게 있었다.

“알고 계셨습니까?”

“무엇을. 오대산? 아니면 던전 공략 인원 완화?”

“둘 다요.”

맹랑한 아이를 본다는 듯 최태성이 흘긋 눈웃음을 지었다.

“알고 있었지. 그래도 오해는 하지 말았으면 좋겠는데. 사람을 뒤에 붙인 건 아니니까.”

그러고는 힐끔 창밖의 한강 둔치를 쳐다본다. 더는 말해줄 수 없다는 무언의 뜻이었다.

이 남자의 속내는 정말 뭘까. 정말 ‘그것’의 인격체를 마주하면 이런 기분일까 싶다.

속을 알 수 없는 표정으로 나를 도와주는데, 분명 꿍꿍이가 있는 것 같은데.

내미는 손이 워낙 달콤해야지.

“앞으로도 이렇게만 해. 자네한테 들이는 지원은 아끼지 않을 테니까.”

***

싱숭생숭한 기분이었다. 잘 해결되긴 했는데. 찝찝한 기분을 넘길 수가 없었다.

언제부터 내 뒤가 밟힌 건지 도통 감이 안 잡혔다. 최태성이 나에 대해 어디까지 알고 있는 건지 감이 잡히질 않았다.

설마 전주 던전에 들어간 것도 알고 있나?

“이번엔 또 뭐 때문에 그렇게 심각해?”

삼겹살을 굽던 한석훈이 언짢은 얼굴로 내게 고기를 건져줬다.

“소 먹으러 가자니까요. 내가 사준대도.”

“난 소고기 느끼하더라.”

킬킬대던 한석훈이 문득 씁쓸한 얼굴로 말했다.

“그래서. 던전 들어간다고?”

올 것이 왔구나, 하는 마음이 들었다. 요 며칠 나를 심신미약 환자로 보는 한석훈인지라, 또 나를 말리면 뭐라 둘러대야 하나 고민이 많았다.

“근데 그걸 나한테 왜 말해? 똥 굵은 니가 알아서 할 것이지.”

“뭐가 굵다고요?”

“마음 정리도 다 한 것 같고. 네가 똥인지 된장인지 구분 못 할 짬도 아니고. 뭔 사연이 있겠지.”

한석훈이 못 미덥다는 눈길로 내 쪽으로 고기를 밀어 넣었다. 그럴수록 내 그릇 쪽에 쌓이는 고기가 수북이 늘어났다.

“미리 말해 두는데. 내가 죽을 땐 그렇게 찔찔 짜지 마라. 그 꼴 보면 너무 웃길 것 같거든.”

이 양반은 위로를 해도 참 거지같이 하는 재주가 있다. 그런 마음을 담아 쏘아보자 멋쩍은 듯 한석훈이 대화 주제를 돌렸다.

“크흠. 오늘이었나? 다큐인지 뭔지 방영하는 날. 여기저기서 네 사인 받아달….”

“팀장님은 성장 안 합니까?”

한석훈에게 옛날부터 궁금한 걸 물어봤다. 그가 제대로 된 상위 던전을 공략하는 걸 한 번도 본 적이 없어서.

멀뚱멀뚱.

날 쳐다보던 한석훈이 피식 웃었다.

“나한테는 그럴 자격이 없거든.”

굉장히 사연 있어 보이는 얼굴인데, 뭐라 물을 수 없었다. 슬픔은 각자의 몫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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