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4화 레인 우버 (4)
우드득.
척추를 곧게 정렬시켰을 때 아랫배가 따끔한 통증은, 단전이 확장되면서 일어나는 작은 성장통일 뿐이었다.
그보다는 충만한 만족감이 몸을 가득 채웠다. 확장된 단전을 가득 채운 마나가 온몸으로 뻗어 나가면서, 주체할 수 없는 힘이 끓어 넘쳤다.
-어떻게?
당혹으로 일그러진 얼굴로 놈이 그렇게 물었지만 무시했다. 그보다는 상태창이 먼저였다.
[이름 : 이태진
레벨 : 184
스킬 : 오러 블레이드(S), 아드레날린 부스트(A), 신성한 파괴자의 검술(A), 일점폭발(A), 집중(A), 도약(A)
특성 : 검신의 축복(S), 무아지경(A), 인내하는 자(A), 전사(A)
체력 : 245
마력 : 223
근력 : 345
민첩 : 270]
하!
B급에 머물던 스킬과 특성들이 모조리 A급 이상이 됐다. 특히나 오러 블레이드가 S급이 된 것이 눈에 띄었다
그런데 적을 앞에 두고 표정 관리를 하지 못한 진짜 이유는 따로 있었다. 근력을 포함한 스탯.
믿을 수 없게도 모든 스탯이 20씩 늘어났다. 내가 겪은 고통의 보상으로 충분하고도 넘쳤다. 이제 보니 환골탈태라는 거창한 이름이 붙을만했다.
늘 그랬지만. 지금부터는 이름 밑에 적힌 184레벨이란 숫자는 잊어도 좋았다.
단순 수치로만 따져도 220레벨이고, S급과 A급으로 점철된 스킬, 특성을 합친다면.
바로 앞에 적을 두고도 여유를 부려도 되겠다는 본능적인 판단은, 이래서였다.
이제라면 정말 김석환, 한석훈, 그리고 백인호 정도의 강자에게도 도전해 볼 만하지 않을까?
쿠웅!
묵직한 기운이 단전 바깥으로 빠져나왔다. 이전까지와 비교할 수 없는 빠르고 강한 속도였다.
직접적인 공격을 한 것이 아니다. 겨우 파동을 퍼트린 것뿐이다. 그런데도 놈은 그저 뻗어 나온 기파에 움찔거리며 뒤로 주춤댔다.
-무슨 짓을 벌인 거지? 이런 능력은 데이터에 없었는데.
더불어 이 칠흑 같은 공간도 더 이상 아무런 제약을 주지 못했다. 시각도, 청각도, 쓸 수 있는 모든 감각이 제자리로 돌아왔다. 심지어 한층 성장한 상태로.
파지직!
또한 마침내 기다렸던 검신의 축복이 반응하기 시작했다. 머릿속에서 스파크가 튀었다.
놈의 이마, 인중, 명치를 타고 오는 급소를 어떻게 공격해야 빠르게 죽일 수 있을지, 혹은 고통스럽게 만들지. 수많은 선택지가 생겨났다.
이제야 파악되는 쉐도우 나이트의 레벨은 그래봤자 210에 불과했다.
고레벨로 갈수록 레벨 하나의 가치가 남다른 법. 놈이 특이 각성자임을 감안한다 해도, 환골탈태를 거친 지금은 날 이길 가능성이 티끌만큼도 없어졌다.
그런데 왜일까. 쉐도우 나이트도 그 사실을 모르는 바가 아닐 텐데도. 놈은 어째선지 태연해 보였다.
당황으로 물든 시선도 다시 원래대로 돌아와 있었다. 놈은 마치 관찰자가 된 듯 흥미로운 눈빛으로 나를 쳐다봤다.
-뭐. 아무래도 상관없어. 더 먹음직스러워졌으니까.
그때 놈이 씨익 웃었다. 동시에 나도 움직였다.
옆으로 선을 그리듯 검을 그었을 때도 놈은 반응하지 못했다. 전과 다른 감각이 신성한 파괴자의 롱소드를 통해 여실히 전해졌다.
물컹한 느낌이 아니라, 확실히 놈의 근육과 뼈가 걸렸다. 그 말인즉, 내 공격이 확실히 먹혔다는 증거였다.
드르르륵-
일자로 쭉 그은 검을 따라 잔상이 그려졌다. 내가 생각해도 초인의 경지라 생각되는 속도였지만, 그럼에도 고개가 갸웃거려졌다.
과연 착각이 아니었다. 놈이 죽지 않았다. 이래서였다. 놈이 도망치지 않았던 이유 말이다.
어찌 된 능력을 가진 건지, 놈의 재생 속도가 내 검이 지나가는 것보다 빨랐다.
징그럽게 돋아나는 검은색 액체가 놈의 목을 따라 돋아났다.
-크르륵. 속도는 제법!
그 말을 무시하고 한 번 더 검을 휘둘렀다. 이번에는 눈을 노리고서. 역수로 잡은 검을 내리꽂았다.
콰직!
-커륵!
놈의 신형이 무너졌다. 표정을 보아하니 고통은 확실히 느끼고 있는 게 확실했다.
내 검이 놈의 뒤통수를 관통하며 반대편으로 튀어나왔다.
그러고도 모자라 관통된 검에 오러 블레이드까지 쏟아붓고 나자.
우우우웅!
-크르르륵!
확실히 놈이 고통스러워했다. 그런데. 그런데 뭔가 부족하다. 결정적인 한 방이 모자랐다.
푸른빛 선명한 오러가 놈의 머리를 사정없이 찢어 놓았지만 놈을 죽이기에는 부족했다.
어처구니없었다. 검이 관통된 상태 그대로 놈의 뇌가 점점 복구되고 있었다.
징그러울 정도의 회복력이었다. 이놈의 몸을 해부해서 능력을 확인해 보고 싶을 정도였다.
그렇게 눈썹을 꿈틀거린 것도 잠시, 코웃음을 쳤다. 어차피 끝의 끝까지 가면 내가 승리할 것이다.
검신의 축복은 거짓을 말하지 않는다. 놈의 능력이 낱낱이 해부된 이상 더 두려울 것도 없었다.
두피까지 단단히 아문 놈의 머리에서 다시 한번 검을 거칠게 뽑아 냈다.
“열 번, 백 번도 버텨 봐라.”
검을 타고 떨어지는 검은색 점액질을 털어낸 후, 다시 한번 롱소드를 뻗었다. 회복력이 아무리 좋다 한들 언제까지 지속될 리 없다.
그런 게 가능하면 놈이 레인우버의 끝자리에 있을 리가 만무하다.
과연 순간에 쉐도우 나이트가 흠칫 몸을 떨어댔다.
-자, 잠시만!
콰직! 퍽! 드르륵!
오른손으로 검을, 왼손으로는 주먹을 말아쥐어 사정없이 놈을 공격했다.
쿵! 쿵! 쿵!
좌측 어깨, 명치, 우측 어깨로 이어지는 삼연격이 터졌을 때, 비로소 놈이 비명을 질렀다.
-그, 그만!
놈의 말을 무시하고 한 번 더 검을 내질렀다. 그렇게 싹둑하고 놈의 머리가 잘려나가기를 예상했지만. 놈도 놈 나름대로의 무기가 있었다.
순간적으로 놈의 몸이 사라졌다. 처음 겪는 스킬이었기에, 검신의 축복도 반응하지 못할 만큼 찰나간이었다.
빠르게 고개를 아래로 내렸다. 거기에 놈이 있었다. 땅속으로 파고든 놈이 그림자가 돼서 저 멀리 달아나고 있었다.
귀찮게.
그런데 그것보다 이상한 것은.
어째서 아직까지 놈은 놈이 만든 이 아공간을 해제하지 않고 있는 걸까. 바깥의 손영혁과 최찬규 때문에?
문득 찜찜한 기분이 들었다. 지금까지 바깥에서 특별한 조치가 없다는 건 거기서도 전투가 벌어지고 있다는 말인데.
그때였다. 파동에 걸리는 기운이 있었다. 예상대로 놈이 반격을 시도했다.
사지를 옥죄는 가시가 밑에서 다리를 타고 기어 올라왔다. 몇 번의 경험으로 알고 있었다.
전염병에 감염되듯, 이 가시가 내 몸 안에 침투하면 나 또한 놈의 부하가 되는 것이다.
악랄한 놈의 가시덩굴을 끊어내자, 이번에는 사마귀형 몬스터 멘티스가 튀어 나왔다. 멘티스를 베고 나자, 이번엔 오크 무리가 나타났다. 그것들마저 죽이고 나자, 갑옷을 두른 기사들이 쏟아졌다.
서걱-! 서걱-! 서걱-!
베고 베도 우후죽순 튀어나오는 그림자 군단이 끝도 없었다. 그것들이 짜증날 무렵, 넓게 퍼트렸던 파동이 쉐도우 나이트의 본체를 특정했다.
콰아앙-!
나를 에워싸던, 주인이 도망갈 시간을 벌어주던 것들이 그렇게 한순간에 밀려났다.
땅밑으로 꺼진 그림자 하나가 그때 모습을 드러냈다. 훤하게 드러난 놈과 나 사이의 공간을 도약했다. 그대로 땅을 찍었다.
콰직!
그렇게 땅 밑에 묻혀있던 놈을 강제로 바깥으로 끄집어냈다.
-히히힉!
쉐도우 나이트는 부들부들 떨어대면서도 나를 조롱하듯 웃어댔다. 그래. 놈도 알고 나도 안다. 조만간 2차전이 시작된다는 것을. 그리고 반드시 둘 중 하나는 죽는다는 것을.
그때는, 내가 아드레날린 부스트를 시전할 것이고 놈은 아마도….
까드득.
-너랑 노는 것도 재밌지만, 나도 할 일이 많아서 말이야.
그럴 줄 알았다. 놈이 이제껏 숨겨뒀던 각성제를 씹어 삼켰다.
그리고 사건은 그 직후 일어났다. 놈이 전과 마찬가지로, 그림자 몬스터 하나를 내게 던졌을 때였다.
빠르게 뛰어오는 그림자가 이상하다고 느껴졌을 때는 이미 늦었다.
폭발?
다가오는 그림자 덩어리를 양단하려 했던 마음을 접었다. 그 대신 두 팔을 교차하며 몸을 웅크렸다.
콰아앙!
“크윽!”
내게 달라붙은 몬스터가 그때 폭발했다. 극렬한 화염과 함께 이명이 덮쳤다.
조금이라도 방어를 지체했었다가는 끔찍한 화마에 당할 뻔했다. 그만큼 예상하지도 못했던, 강력한 공격이었다.
-히히힉!
놈이 비웃음을 흘리며 다시 거리를 벌렸다.
-가, 각성자들이…. 야, 야, 약에 환장하는 이유를 이제 알겠나?
등급이 높아질수록 각성제가 그 효과를 더 크게 증폭시킨다더니. 놈은 제정신이 아니었다. 떠듬떠듬 말을 더듬는 것하며, 이상하게 부풀어 오르는 놈의 몸뚱이도 그랬다.
-히히히힉!
입이 붙어있어야 할 자리에 뚫린 하얀 구멍이 쭉 찢어졌다. 놈이 웃어댔다.
-그 거추장스러운 갑옷은 이제 치우고 본격적으로 놀아보자!
덜렁거리던 헬리오스의 심장을 두고 한 말이었다. 어처구니없지만, 조금 전의 폭발 한 번으로 헬리오스의 심장이 벗겨졌다.
[아드레날린 부스트를 시전합니다!]
놈의 말대로였다. 우리는 2차전에 돌입했다.
***
베고, 쓰러트리고, 그림자가 나를 덮치고, 폭발하고, 두 팔을 교차하고, 주먹을 뻗고, 중력 마법으로 놈을 다시 끌어당겨 가격하고.
난타전도 이런 난타전이 없었다. 놈도 나도, 케이지 안의 격투가들처럼 방어를 도외시했다.
놈에게 공격을 적중시킬 때마다 놈은 비명에 찬 웃음을 내질렀고, 그때마다 나는 이를 악다물었다.
오로지 검신의 축복이 그려내는, 전투의 마지막 순간만을 위해서였다.
쿠웅! 쿵! 쿵!
놈의 표정이 점점 썩어들어가고, 웃음 같은 비명소리가 절망으로 바뀔 때쯤이었다.
-기다려! 기다려라! 이태진!
놈이 악에 찬 비명을 질렀다. 놈이 협상을 시도하려 했다. 듣지 않았다. 그럴 시간에 주먹을 한 번 더 뻗는 게 이득이었다.
빠악!
-커럭!
놈의 몸이 뒤로 기울었다. 그러면서도 놈이 내게 대화를 시도하고 있었지만 그런 허튼 소리를 들어줄 필요도 없었다.
생포?
그런 안일한 방식은 내 스타일이 아니다. 검신의 축복이 지금이라고 가리키고 있었다. 놈을 죽이려면 지금이 적기였다.
콰앙!
놈이 발악하듯 마지막으로 던진 그림자조차 성냥불처럼 사그라들었을 때.
서거거걱-!
놈의 경악스러운 얼굴과 함께 쉐도우 나이트의 목이 떨어졌다. 놈의 죽음이 명백했다. 후두둑. 천장에서부터 금이 간 아공간이 깨져나갔다.
쩌저저적!
유리가 깨지듯 암흑이 와르르 부서졌을 때, 신선한 공기가 나를 반겼다.
항구의 짠내가 훅 코를 찌르고 지나갔다. 바깥에서는, 나를 바라보고 있는 손영혁이 있었다.
예상했듯 안에서 흐른 시간은 바깥과 달랐다. 바깥은 여전히 밤이었다. 다만 전투의 흔적이 이곳저곳에 뿌려져 있었다.
움푹 파인 컨테이너 박스와 지친 표정의 손영혁이 그 증거였다. 상처 하나 없는 손영혁이 경계의 눈빛을 띠며 물어왔다.
“놈은?”
혹여나 내가 놈에게 사로잡혔다면, 그림자 군단 중 한 놈이 되었다면 망설이지 않고 죽일 수 있게끔, 손영혁의 눈빛이 날카롭게 벼려져 있었다.
“죽였습니다.”
그렇게 말하며 주위를 둘러봤다. 이번에는 내가 손영혁에게 턱짓했다. 아까부터 찜찜했던 것.
최찬규는 어디 있지?
손영혁이 작게 고개를 저었다.
“여기도 공격이 있었다.”
손영혁이 고개를 저으며 비켜섰다. 거기에는, 미동도 없이 심장이 꿰뚫린, 최찬규가 싸늘하게 누워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