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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터는 미래를 본다-103화 (103/170)

103화 레인 우버 (3)

쉐도우 나이트의 능력은 익히 알고 있을뿐더러, 여기까지 오면서 한 번 더 확인했었다.

사람이든 몬스터든, 시체를 그림자로 만들어 제 부하로 만든다지. 여타의 레인 우버 일곱이 그렇듯 놈도 특이 각성자였다. 그런데 내가 확인한 능력 중에 이런 건 없었다.

눈을 깜박인 직후였다. 앞뒤 양옆, 주위 사방으로 칠흑 같은 어둠이 덮쳐왔다. 도무지 피할 수 없는 속도였다. 자정을 넘겨 까맣게 변해버린 동해가 쓰나미처럼 나를 덮친 것만 같았다.

눈을 한 번 더 깜박였다. 이윽고 나는 완전히 세상과 차단됐다.

아무것도 안 보였고, 응당 들려야 할 파도 소리나, 악을 지르며 달려가던 최찬규의 고함도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그것은 감각을 확장 시키거나, 헬리오스의 심장을 착용해도 마찬가지였다. 잠깐 금빛이 세상을 밝혔을 뿐, 곧장 어둠이 빛을 잡아 삼켰다.

희한한 기분이다. 우주 한가운데 떨어진 느낌이었다.

그러나 이런 유형의 공격은 유치할 만큼 익숙하다. A급을 넘어선 각성자에게 이런 장난질이라니. 코웃음을 치며 파동을 퍼트렸을 때였다.

어?

느껴지지 않는다. 생명체라면 당연히 품고 있어야 할 기운의 파장이 그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았다.

검신의 축복을 얻고 나서 처음 겪는 일이었다. 느껴지는 감각은 오로지 나 자신이 존재한다는 감각뿐. 그래서 이상했다.

앞을 휘적거려 봐도 허공만 잡힐 뿐 컨테이너의 차가운 쇠가 전혀 만져지지 않았다.

정말 우주에 떨어진 게 아닐까? 하고 착각이 들 무렵.

카가각-

날카로운 뭔가가 내 어깨를 스치는 느낌이 들었다. 잠깐이나마 불똥이 튀며 세상이 밝아졌다.

그림자?

안면부에 흰색 구멍 세 개가 뚫린 인영이었다. 쉐도우 나이트가 아니었다. 놈이 부리는 그림자 중 한 명이었다. 죽은 시체로 된.

곧바로 어둠이 찾아왔고, 동시에 롱소드를 휘둘렀다. 아니, 휘둘렀을 것이다. 젠장할. 감각이 차단됐기 때문에, 팔을 움직이면서도 확신할 수 없었다.

검 끝으로 물컹거리는 무언가가 닿았다. 와르르, 쉐도우 나이트의 그림자 하나가 그렇게 바닥으로 쏟아졌다.

앞으로 뛰쳐나갔다.

카가각-

불꽃을 일으키고자 일부러 헬리오스의 심장을 손으로 긁었다.

하!

찰나 간에 밝아진 전방으로 우후죽순 일어나는 인영들이 보였다.

검을 들었거나, 스태프나 활을 들고 일어나는가 하면, 오크의 형상을 한 것들도 있었다. 소문으로 들었던 놈의 그림자 군단이었다.

그 와중에도 쉐도우 나이트라 할만한 놈을 특정할 수 없었다. 아니, 당장 앞에 있는 이것들의 숫자조차 헤아릴 수 없었다.

파동. 내 힘의 근간 중 하나인 상대를 파악하는 능력이 봉인됐기 때문이었다.

마력을 터트리면서 두 손에 힘을 실었다.

어라. 잠시만. 그런데 얼마나 힘을 줘야 하지?

제각각의 군단들은 생김새만큼이나 가진 능력도 다를 터. 다수를 상대하는 전투인 만큼 힘의 배분이 중요하다.

잠깐 본 놈들만 해도 백여 마리였다. 그 전부를 전력으로 상대할 수는 없었다.

그제야 쉐도우 나이트가 처음부터 노린 바가 이 점이었음을 깨달았다. 놈은 장기전을 원하고 있었다. 내 체력이 다하기를 기다리면서, 아주 천천히 갉아먹으려고.

푸른빛 오러로 그림자 하나를 베자마자 후회가 됐다.

빌어먹을. 힘을 과하게 낭비했다.

검에서 뿜어져 나오는 푸른 오러가 옅어졌다. 그와 함께 반동을 이용해 좌에서 우로 검을 그었다.

콰득!

검과 대상이 부딪치면서 불꽃이 튀었다.

이번에는 아까와 반대다. 힘을 아꼈더니, 오크 형상을 하고 있던 개체가 비릿하게 웃는 것이다.

등잔불 밑에 진 그림자처럼 놈의 입꼬리가 희미하게 번졌을 때였다. 내 몸이 어딘가로 날아갔고 있었다.

그림자 오크가 들고 있던 망치가 내 후두부를 갈겼다는 것은 벽 같은 것에 부딪혀 튕겨 나온 후에야 알았다.

정신이 어지러운 가운데에서도 바닥에서 올라오는 꿈틀거리는 무언가의 움직임이 생생했다. 뱀이었다.

메두사의 머리카락처럼 꾸물거리는 그림자 뱀이 내 사지를 속박하려 들었다.

근력을 폭발시키는 것만으로도 그림자 뱀들은 사그라들었지만. 다가오는 저 그림자 군단은 어떻게 할 것인가.

심장 속 아락투스의 마기를 끄집어냈다. 아끼고 아끼려 했건만 어쩔 수 없었다.

곧이어 중력 마법이 공간을 지배하기 시작했다.

생경한 감각이 느껴졌다. 마치 내가 거대한 인간이 돼 손바닥으로 개미 떼를 누르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잠시 후, 저항하는 개미 떼 숫자가 전해졌다. 총 230마리. 쉐도우 나이트가 나 하나만을 상대하기 위해 꺼낸 군단의 수였다.

더불어, 마나 자체가 가지고 있던 속성을 끌어냈다.

푸른 불꽃이 어둠 속을 비추었다. 저벅저벅 걸어오는 흑빛 군단이 더욱 선명해졌다.

짐승이 포효하듯 소리를 지른 후 앞으로 달려갔다. 심장의 마나를 뽑아 쓴 건 굉장히 훌륭한 선택이었다.

중력 마법이야말로 놈들 하나하나의 힘을 파악할 수 있는 매개체였다.

부들부들 떨며, 두 손을 번쩍 들며 고통스러워하는 놈이 있는가 하면, 강한 압력에 어떻게든 저항하며 다가오는 놈들도 있었다.

지금부터는 간단했다. 중력 마법을 기어코 파훼하는 놈들에게만 전력을 다하면 된다.

인영 중 하나가 검을 들고 느릿느릿 전진해왔다. 기사 같은 투구를 쓴 놈이었다.

붉은 안광이 투구 사이로 번뜩인 것과 동시에 그림자 기사의 목이 날아갔다.

앞으로 남은 놈은 229마리. 희망이 보였다.

***

아마 졸음을 이겨내지 못했을 것이다. 고개를 꾸벅 숙인 순간 머릿속에서 번개가 쳤다.

곧바로 칼을 휘두르자 그림자 하나가 스러졌다. 이번에는 정말 위험했다. 한치라도 늦었다가는 죽었을 것이다.

의식적으로 헉헉댔지만, 그런다고 청각이 돌아오는 것이 아니었다. 다리에 힘이 풀렸다.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지만 한시도 긴장을 풀 수 없었다. 점점 눈꺼풀이 무거워졌다. 까딱 잘못하면 죽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몰려오는 수마를 쫓아낼 수 없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체감상으로는 일주일은 흐른 기분이다. 쉐도우 나이트는 영악한 놈이었다. 중력 마법의 존재를 알아챈 놈이 어느 순간을 기점으로 군단을 회수했다.

그에 따라 내가 힘을 풀어버리면. 다시 놈의 군단이 찾아오는 것이다. 이런 게릴라 전술이 전투를 지금과 같은 초장기전으로 흘러가게 만들었다.

체감상으로 이틀 전, 놈에게 휘말려 앞뒤 안 가리고 심장의 마기를 모두 터트려 버린 때가 후회됐다. 때문에 지금은, 심장 안에는 티끌만큼도 마기가 남지 않았다.

그 와중에 바깥의 상황이 궁금했다. 분명 쉐도우 나이트는 내게 온전히 집중하고 있을 텐데. 최찬규와 손영혁은 대체 뭘 하는 것일까.

하아.

한숨을 터트렸다. 아니, 터트렸을 것이다. 빌어먹을 감각이 모두 차단돼 있으니까.

이곳은 던전보다 더 지독한 곳이었다. 감각도 봉인되고, 파동도 느낄 수 없는 곳이라니.

이대로 나는 죽는 걸까?

후회가 몰려왔다. 조금 더 준비하고 왔어야 했는데. 지원을 요청했어야 했는데.

그와 동시에 몸을 일으켰다. 내 자신의 움직임조차 느낄 수 없었지만, 쉐도우 나이트의 패턴을 알고 있기에 할 수 있는 행동이었다.

아마 내가 앉아있던 자리에 날카로운 무언가가 바닥을 긁었을 것이고, 검은색 인영이 갸웃거리고 있겠지.

그르륵-

역시나였다. 소리가 들린 게 아니다. 피부로 전해지는 소리의 파동이 그랬다. 롱소드를 종으로 쳐올리자 슬라임을 베듯 미끌거리는 감각이 느껴졌다.

이로서 남은 숫자는 80마리. 남은 마나는 10%에 불과했다.

***

분명 방법이 있을 텐데. 체감만으론 열흘이 흘렀다.

비로소 확실해졌다. 이곳은 시간이 흐르지 않는 곳이다. 쉐도우 나이트는 S급이 아니다. 협회에서 결론 내린 분석에서도 그랬고, 내가 체감하기로서도 그랬다. 심지어 놈은 A급 말엽에도 미치지 못한다.

그저 머리가 좋고, 애초부터 가진 능력이 사기일 뿐 쉐도우 나이트 자체로서는 별것 없을 가능성이 높다는 게 내 결론이었다.

남은 개체수를 파악하자면 50마리. 열흘이나 싸웠다. 놈도 나를 파악했고, 나도 놈을 파악했다.

예상하기로, 본체가 슬슬 나타날 때였다.

-이태진.

예상은 곧 현실이 됐다.

으스스한 목소리가 뒤편에서 울렸다. 곧바로 놈의 목을 노리고 횡으로 검을 휘둘렀다.

오러 사이로 보이는 덜렁거리는 쉐도우 나이트의 목이 떨어질 듯 말 듯했다. 놈의 몸은 찰흙으로 이루어진 걸까.

덜렁거리고 있는 놈의 목 위로 검은색 기운이 주르륵 돋아났다.

코웃음을 쳤다. 놈이 바라는 점을 깨달았다. 놈이 아드레날린 부스트의 사용을 유도하고 있었다. 말했듯, 내가 놈을 파악하고 있는 만큼 쉐도우 나이트도 나를 파악한 것이다.

아마 아드레날린 부스트를 쓴 즉시 놈이 자취를 감출 것이다. 그리고 스킬의 반동으로 지쳐 쓰러졌을 때 다시 나타나겠지.

오러를 일으킨 검을 회수했다. 놈의 안면부, 눈이 위치해야 할 곳에 뚫려있는 하얀색 불빛이 흔들거렸다.

놈이 다시 사라졌다. 성과가 있다. 쉐도우 나이트가 인내심의 한계를 느끼고 먼저 모습을 드러냈으니까.

자리에 다시 앉았다. 그리고 마나회로에 마나를 흘려보냈다. 곧 마나를 돌린 효과가 나타났다. 정신이 맑아지며 생각의 흐름이 이어졌다.

검신의 축복을 얻은 이후로 내 전투의 근간이 되는 것은 파동이었다. 생명체라면 응당 가지고 있는 에너지의 흐름을 읽어 약점을 공략하고 힘을 배분하는 것.

파동이 없는 나는 뭐지?

눈먼 봉사가 지도를 가지고 길을 찾는 것. 딱 그 꼴이었다. 때문에 파동이 없는 전투는 낯설다 못해 두렵기까지 한 것이다.

웃긴 일이었다. 언제부터 내가 그렇게 싸웠다고. 아카데미에서 전투했던 나날들은 헛된 것이었나? 검신의 축복이 없는 나는 헌터가 아닌 건가?

문득, 허둥지둥대는 내 꼴이 우스웠다.

그래서 눈을 감았다. 의식적으로 파동을 퍼트리는 짓거리는 그만뒀다. 점차 어둠의 현혹에서 빠져나오는 듯했다. 수면에 빠져들 듯 스르륵, 몸에 힘이 풀렸다.

긴장을 놓으면 이대로 죽을 것 같다는 두려움까지 떨쳐냈다. 역설적이게도, 의식적으로 무아지경의 상태에 들어갔다.

신기한 일이었다. 비단이 움직이듯 부드럽게 몸이 움직였다. 내 의지이되, 내 의지가 아니었다.

초조함을 놓는 게 정답이었던 걸까? 공간의 끄트머리였을 것이다. 미약하게나마 잔잔한 기운 하나가 느껴졌다. 허탈한 기분이 든 것도 잠시.

그런데 이상했다.

아프다?

그 순간 찾아온 고통은, 끔찍한 것이었다.

아악!

분명 이 공간 밖이었다면 소리를 질렀을 것이다. 부처의 손바닥이 손오공을 짓누르듯 전신의 근육이 뒤틀렸다. 내게 중력 마법에 당한 놈들이 이런 기분이었을까 싶었다.

위아래로 짓눌러 대는 압력이 혼백마저 찢어버리는 느낌이었다. 언젠가 아락투스의 마법사전을 열었을 때가 생각났다. 그때와 비견할 수 있을 정도의 고통이었다.

대체 이 고통을 주는 주체가 누구지?

쉐도우 나이트가 아닌 것은 분명한데!

투두둑-

마치 그런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몸이 이리저리 튕겨대며 날아갔다. 그것 하나에만 집중했다. 고통을 조금이라도 의식하면 혼절할 것만 같았다.

지금 이 순간 쉐도우 나이트는 어째서 나를 공격하지 않는 걸까? 손영혁, 최찬규는 대체 어디서 뭘 하길래 날 구하지 않는 걸까. 한석훈에게 부산항에 오라고 언질이라도 줬어야 했는데!

온갖 상념이 머릿속을 헤집었다. 하지만 그런 잡념을 억지로라도 구석으로 밀어 넣었다.

아아아악!

내면에서부터 고통으로 인한 비명이 솟구치는 듯했다. 소용없었다. 의식하지 않을수록 고통이 생생했다.

근육의 움직임이 점점 더뎌졌다. 그렇다고 기뻐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곧이어 전신의 뼈가 재정립되는 느낌이 이어졌기 때문이다.

아니, 느낌이 아니라 실제로도 그런 작업이 진행 중이었다.

이 고통은 대체 언제 끝나는 것일지 의구심이 솟구치던 그때.

화악!

아!

자살을 생각할 때쯤이었다. 그제야 고통이 끝에 다다랐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기쁜 감정을 담아 속으로 마음껏 소리쳤다.

이윽고 천천히 사그라드는 고통 앞에서 모든 것이 맑아졌다. 기분도, 감각도 제자리를 찾기 시작했다.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도 내 시야는 밝은 대낮처럼 선명했고, 몸도 이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가뿐했다.

[검신의 축복 숙련도가 대폭 상승했습니다!]

[환골탈태에 진입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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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골탈태가 진행 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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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행도 : 100%]

그제야 보이는 시스템 메시지였지만, 그보다 반가운 얼굴이 내 앞에 보였다. 바로 당혹으로 일그러진 쉐도우 나이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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