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8화 조사단. (6)
멈추라고 말할 틈도 없었다. 진한 향기를 풍기며 박지현이 내 옆을 스쳐 지나갔다.
“이름이?”
“이, 이지은입니다!”
“아까 슬쩍 봤는데 버프보다는 회복 계열 중심이더라? 내가 한번 봐줄까?”
이지은이 쉼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지은의 눈동자 속에는 마치 우상이라도 만난 듯 무한한 경외가 담겨 있었다.
불현듯 찾아온 기회를 혹시라도 놓칠세라, 두 손을 꼭 모으기까지 한다.
지금 이게 뭐지?
생각하고 있는데 박지현이 웃는 낯으로 내게 물었다.
“얘한테 가르쳐줘도 돼요?”
된다. 되지. 아니, 오히려 내가 바짓가랑이를 붙잡아서라도 매달려야 할 일이지. A급 힐러 박지현이 내 팀원을 손봐준다는데.
그런데 어째선지 고맙다는 생각보다, 이 여자가 무슨 꿍꿍이가 있는지가 더 궁금했다. 환장할 ‘그것’ 때문에 생긴 의심증이었다.
아니, 이 상황에서 드는 의심은 합리적이다. 전부터 박지현이 알 수 없는 호의를 베풀고 있어서 도통 찜찜했던 게 아니었다.
지금에 와서야 내 입지가 조금 더 단단해졌다지만, 얼마 전만 해도 박지현과 나의 위치는 하늘과 땅 차이였다.
10년간 일성의 공주님 소리를 들으며 모두의 기대주로 자라온 박지현과, 이제 막 두각을 드러내는 1년 차 신입 간에는 겨우 무력으로 넘어설 수 없는 벽이라는 게 있는 것이니까.
그럼에도 박지현은 아무 조건 없이 내게 팀장 자리를 넘겼다. 깽판을 치고자 했다면 내가 팀장이 되는 것을 막을 수 있었을 텐데도.
“혹시 저 좋아해요?”
그렇기에 지금 내가 묻는 것은 합리적이었다.
그런데 박지현이 대단한 개그라도 들은 것처럼 깔깔대기 시작했다.
다른 애들도 마찬가지였다. 내가 뭘 들었나, 하는 얼굴로 나를 쳐다봤다. 가시처럼 쏟아지는 시선들 속 황당함이 가득했다.
“저게 왜 웃겨?”
오로지 임한나만이 나를 대신해 의문을 표해줬지만 되려 역효과가 일었다.
“왜 웃기냐니요. 저 오빠 그렇게 안 봤는데 완전 자의식 과잉이네.”
“지현 선배가 좋아할 사람이 없어서 왜 팀장님을 좋아해요?”
김세린과 박하영이 앞다퉈 혀를 찼다. 이지은마저 그건 아니지 하며 주먹을 꽉 쥔다.
나로서도 억울하다. 아니, 분명 저번 회의 때 나한테 관심 있다고….
“아. 생각해 보니까 이 팀장님한테 관심 있는 거 같아요.”
“헉!”
“네?”
“거봐. 맞잖아!”
반응이 확 갈렸다. 이지은은 입을 틀어막고, 김세린은 이게 말이 되냐며 황당함을 표했으며, 임한나는 자기 말이 맞지 않냐며 의기양양하다가 잠깐만, 하며 눈을 번뜩였다.
“지, 진짜요? 저 오빠, 아니 이태진 팀장님한테 관심 있다고요?”
“응. 있는데?”
“어….”
뭔가를 골똘히 생각하던 김세린이 내 앞을 막아섰다.
“호, 혹시 저희 팀장님을 뺏으려고 그러시는…!”
그러고는 박지현을 향해 나름대로 눈을 부라리기까지 한다.
“그건 안 돼!”
“뭐? 내 럭키 박스를 뺏길수는 없지!”
무슨 박스?
되물을 새도 없이 전용철, 박하영, 이지은까지 가세해 내 앞을 가로막았다. 뒤에서는 임한나가 흐뭇하게 지켜보고 있었다.
머리가 지끈거린다. 어디에 내놔도 부끄러운 우리 팀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더불어 B-2팀 단체 인터뷰를 반드시 취소해야겠다는 생각도 함께.
“저한테 관심 있다고요?”
“네. 그런데 생각하시는 그런 쪽은 아니고.”
그러면?
“회장님한테 받은 게 있어서요. 당신한테 좀 잘해주는 대가로.”
회장님? 받아?
내가 모르는 뭐가 있었던 건가?
“어. 그러니까 팀장 자리도….”
“그 비싼 자리를 그냥 건네줬게요? 누구 좋으라고. 이쪽 세계가 다 그래요. 기브 앤 테이크. 받은 게 있으니까 깔끔하게 넘겨준 거예요. 아 참. 이건 백인호 팀장한테는 비밀.”
시원하게 웃던 박지현이 한쪽 눈을 찡긋했다. 임한나가 벌떡 일어났지만 그보다 머릿속으로 상황을 정리하는 게 우선이었다.
그러니까 최태성이 나를 위해 박지현에게 뭘 건네줬다? 그리고 그 대가로 B-2팀의 팀장 자리를 내게 양도했고.
최태성이 대체 왜 나를 위해, 그리고 무엇을 건네줬길래 일성의 공주께서 이 막강한 권력을 포기했는지는 모르지만.
어찌 됐든 말만 들어보면 아귀가 맞아떨어진다. 또한, 굳이 발각될 거짓말을 박지현이 할 필요가 없다는 점도 한몫했다.
생각을 마치고 옆을 돌아보자 애들 표정이 말이 아니다. 박지현의 등장에 놀랐다가, 안심했다가, 다시 놀라기를 반복하는 중이었다.
지켜보는 내가 진이 다 빠질 정도인데, 정작 사고를 친 당사자인 박지현은 그게 퍽이나 재밌었던 모양이다.
“혹시 모르지. 다른 쪽으로도 관심이 갈지.”
박지현은 그러면서 내 어깨를 슬쩍 만졌다.
다른 건 몰라도 하나는 알겠다. 이 사람, 사람 다루는 데는 아주 도가 텄다.
“불여시.”
임한나 또한 고개를 끄덕였다.
***
며칠이 지났다. 검술을 다시 점검할 수 있는 시간이었으며, 마기의 충전도 끝나 있었다. 또한 마침내 기다리던 연락이 왔다.
-보고서다.
손영혁의 문자와 함께였다. 김주현을 통해 1급 기밀이라는 협회장의 직인이 찍힌 서류를 건네받았다.
몇 겹이나 둘러진 보안 마법을 해제한 후, 서류 봉투 안의 보고서를 확인했다.
줄줄이 나열된 글보다 여러 장의 사진이 더 눈에 띄었다.
뉴 에볼루션의 건물 구조와, 거기에서 나온 몇 종류의 각성제, 그리고.
살아남은 뉴 에볼루션 직원들을, 특히나 임원급들을 어떻게 심문, 또 고문했는지에 대한 상세한 내용이 적혀 있었다.
협회의 방식이야 익히 알고 있었다. 비각성자들은 차마 이해하지 못할 야만적인 방법을, 우리들은 서슴없이 행한다.
그렇기에 고문 자체보다는 거기에서 얻은 결론에 집중했다.
요지는 다음과 같다.
각성제가 유통되는 구조는 도급에 도급을 거치는 과정이 아니었다. 레인 우버의 수뇌부라 추정되는 놈이 중앙에서 직접 관리하며 공급하는 것이다.
“이래서 반년 동안 코빼기도 안 보였던 거구만.”
점조직처럼 흩어져, 공급자인 레인 우버가 아니면 정확히 어디에 얼마나 유통되는지를 파악하기 힘든 것이다.
또한 레인 우버는 간악한 것만큼이나 철두철미했다. 공급업체를 선정하는 것도 굉장히 까다로우며, 조금이라도 잘못 보였다가는 각성제 공급이 중단된다는 것이다.
마약을 유통하려는 기업들이 레인 우버에 잘 보이려 부단히도 애쓰는 이유도 그 때문일 것이고.
웃기는 일이었다. 각성제를 갈급하는 놈들이 약의 부작용을 모를까?
놈들은 몸이 망가지고 뇌의 사고체계가 망가진다는 것을 알면서도 구하는 것이다.
그래서 놈들을 가만둘 수 없었다.
처음 시작했던 마음이 그저 백인호를 견제하기 위함이라면, 지금은 놈들을 싸그리 잡아 지옥으로 던져버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다음 장으로 넘겼다. 결론 이후로 이어진 첨언들은 다음 조사를 위한 힌트 같은 것이었다.
여러 기업의 이름이 거기에 적혀 있었다.
삼정, 조양, 관문….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그저 그런 길드급이 대다수였다. 마음 같아서는 이것들을 죄다 들쑤시고 싶지만.
-여기 나온 길드들. 확실한 겁니까?
레인 우버가 공들여 만든 점조직이 이렇게 허술하게 뚫릴 리가.
-지켜보고 있다만 각성제에 대한 정황은 딱히 안 보여.
돌아온 대답도 예상과 다르지 않았다. 위에 나온 이름들은 고문을 못 견딘 뉴 에볼루션 대표의 헛소리라 봐야 했다.
처음으로 돌아간 기분이었다. 어디서부터 다시 조사를 시작해야 할지 감도 안 잡힌다.
그래도 걱정은 없었다. 근거는 없지만, 때가 되면 ‘그것’이 다시 신호를 보낼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러니까 지금 내가 할 일은.”
며칠 전 깨달았던 것을 내 것으로 승화시키는 것.
기억을 되새겼다.
박지현이 이지은의 훈련을 도와줬을 때로.
-꺄악!
-치료해 봐.
다짜고짜 박지현이 이지은의 팔을 칼로 그었을 때는 내심 나도 놀랐었다. 그런데 더 놀라운 건 따로 있었다.
-이, 이렇게….
-아니지. 그렇게 막무가내로 갈겨버리는 게 아니야. 스킬이라는 게임 같은 명칭은 떼버리고. 치유 마법이 발현될 때의 마나 이동에 집중하는 거야. 이렇게.
A급 힐러가 작정하고 쓴 회복 마법은 경이로웠다. 겨우 이지은의 자상이 치유된 것을 말하는 게 아니라, 그 현상이. 검술과는 다른 의미로 내게 충격적이었다.
“이런 식이었나?”
박지현의 머리에서 시작된 마나흐름을 되새겼다. 그렇게 단전의 마나를 움직이려 했는데.
“안 되잖아.”
이맛살이 찌푸려졌다. 브레이크가 걸린 듯 뭔가 턱턱 걸렸다. 숙련도의 문제가 아니라, 애초에 내게 허락되지 않은 듯한 느낌이 들었다.
마치 게임 속 전사 캐릭터가 마법을 배울 수 없듯이. 처음부터 그런 식으로 설계가 된 듯했다.
그런데 이대로 포기하기에는, 그때 뇌리를 강타한 충격이 너무 아쉬웠다.
잠깐만.
문득 좋은 생각이 들었다.
“마기라면.”
심장에 꿈틀대고 있는 다섯 개의 고리는 마나와 그 성질이 비슷하다.
두근대는 가슴을 진정시키고 겹겹이 쌓인 고리를 순환시켰다. 머릿속으로는 그때의 마나 흐름을 수없이 되새겼다.
따끔한 기운이 머리를 훑고 갔지만 기분 좋은 예감이 들었다.
이거다! 싶은 기분이 들던 찰나.
“……!”
머릿속이 번쩍였다.
‘그것’이 신호를 보내고 있는 것이다. 젠장할. 욕지기가 흘러나왔다. 성공할 듯 말 듯한 찰나간의 깨달음이 그 순간 사라졌다.
하필 이때.
속에서 짜증이 치밀었지만 애초부터 내게 선택권은 없었다.
아쉬운 마음을 접고 검신의 축복을 껐다. 직후, ‘그것’이 나를 미래 속으로 날렸다.
***
정면에 카메라가 보였고, 옆에는 소파에 앉은 인터뷰어가 있었다. 곧, 유명한 토크쇼 진행자의 얼굴을 기억해낼 수 있었다.
그러고 보니 지금 내가 있는 곳도 방송 세트장이었다. 웬일인지, 시기도 알 수 있었다.
휙휙, 초조하게 돌아가는 시선 속 컴컴한 세트장 뒤로 붉은 디지털 시계가 보였다. 시계에 표기된 시간과 날짜는 현재로부터 두 달 뒤였다.
“그래서. 일성입니까? 대현입니까? 네로드의 잔당이 숨어있는 곳 말입니다.”
“두 곳 다입니다.”
내 입술이 열렸다. 떨리고, 초조한 음성이 바깥으로 튀어나왔다.
“대현에 대한 의문은 조사단장, 정정하겠습니다. 이태진 전 조사단장님께서 꾸준히 제기하셨는데요. 그런데 일성에도 레인 우버에 결탁한, 그러니까 불법 각성제 유통에 가담한 사람이 있다는 말씀이십니까?”
그때쯤 나는 이곳이 어떤 미래인지 알 수 있었다. 호랑이에 잡아먹혀 버린, 그러니까 백인호의 함정에 빠져 망가진 미래의 연장선이라 할 수 있는 곳이었다.
진행자가 말을 이었다.
“강력하게 확신하시는 근거가 있으신가요?”
“일성과 대현에서 네로드와 접촉한 정황이 제 보고서를 통해 보고됐죠. 그게 증거입니다.”
“그런데 그 증거는 법원에서도 증거불충분으로 기소되지 않았던 것 아닌가요?”
“…….”
나는 할 말을 잃은 듯 입술을 깨물었다. 그리고 한다는 말은 더 가관이었다.
“제가 제출한 증거의 원본이 훼손됐습니다. 그 또한 일성의 배신자가 한 일이겠죠.”
정확한 사건의 전말을 모르는 내가 듣기에도, 미래의 내 주장은 얼토당토않은 것이었다. 아까부터 초조한 듯 손톱을 물어뜯는 이놈은 대체.
이 미래의 나는 대체 어디까지 망가진 걸까.
“좋습니다. 방금 일성의 배신자라고 하셨는데요. 내부 고발이라 봐도 되겠습니까?”
“지금은 일성을 나왔습니다.”
얼씨구.
“그러면 이태진 씨가 주장하는 일성의 배신자가 누구입니까? 누가 레인 우버에 가담한 거죠?”
진행자는 그렇게 물으면서 웃음을 참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 얼빠진 놈은 그것을 분간할 여유도 없었다. 기회가 왔다는 듯 신나게 대답할 뿐.
“B팀의 팀장 백인호. 그리고 부팀장 이현수. 놈들입니다. 확실해요!”
더 이상 볼 것 없다. 할 수 있다면 티비 전원을 끄듯 미래에서 빠져나왔을 것이다.
이 미래의 나는 갈 데까지 가고만, 쓸모없이 추락해버린 놈에 불과했다.
설령 미래의 내가 주장하는 대로 백인호가 네로드와 결탁했다 한들, 이런 식의 대응은 옳지 않다.
쯧.
이 미래 속 나는 백인호에게 완벽히 패배했다.
그럼에도 집중해서 미래를 살펴보는 이유는 ‘그것’이 이런 찜찜한 미래를 보여주는 이유가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인터뷰가 막바지로 흘러가고 있었다.
“다시 이야기를 처음으로 돌아가 보죠. 뉴 에볼루션을 잡을 때만 해도 이태진 씨는 일성에는 불법 각성제를 투여한 헌터가 없다 못박았는데요. 그러면 언제 그런 확신을 얻으신 겁니까?”
“대양 에너지. 놈들을 잡고 나서부터요. 거기서부터 줄줄이 끄나풀들이 연결된 겁니다. 젠장할. 곧장 대현을 덮치지만 않았어도, 차근차근 끄나풀을 잡아나가기만 했어도 내가 지금…!”
덜떨어진 패배자의 변명이 거기서 끊겼다. 하지만 원하는 정보는 충분히 얻었다.
‘그것’에게 고마웠다. 그리고 패배한 이태진에게도.
그 생각과 함께 의식이 멀어지는 게 느껴졌다. 곧 빛이 시야를 가득 채웠다.
화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