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6화 조사단. (4)
직전.
덩치 큰 사내의 동공이 붉게 빛났을 때 기시감이 들었다. 먼 옛날처럼 느껴지는 과거, 임형원이 저랬었다.
보고서에서 읽었던 각성제의 부작용 중 하나다. 능력치 펌핑을 대가로 뇌의 한 부분이 맛이 가버리는 것이다. 더불어 수명도 죽죽 닳고.
어찌 됐든.
이렇게나 빨리 증거를 찾을 줄은 몰랐다. 오늘은 위협만 준 후 돌아가려고 했는데.
아무래도 일이 커진 듯했다. 나로서는 잘된 일이었다.
여기까지 생각을 마친 후 앞을 봤다. 놈의 주먹이 나를 향해 느릿하게 다가오고 있었다.
전력을 다하지도 않았다. 그러기에는 마나가 아까웠다. 그럼에도 놈에게는 내 주먹이 사라진 것처럼 보였을 것이다.
쾅!
슬그머니 뻗은 주먹에 놈의 얼굴이 함몰됐다. 단번에 놈의 코뼈가 주저앉고, 치아가 우수수 빠져나왔다.
방금까지 내 앞에서 폼 잡던 덩치의 육신이 그렇게 허물어졌다.
“이런 미친 새끼가!”
곧장 반응이 뒤따랐다. 놈의 동료들이었다. 방금 무너진 덩치처럼 눈깔이 붉게 변한 것은 아니어도.
이성을 잃은 것이 분명했다. 열댓 명쯤 되는 놈들이 나를 향해 저마다의 무기를 뻗어 왔다.
놈들에 대한 수준은 진즉에 파악해 뒀다. 그래봤자 C급, 혹은 D급들.
저 뒤에서 눈을 부릅뜨고 있는 간부들도 마찬가지로 B급이 한계선이었다.
몇 번이나 이야기 한 것이지만.
일정 수준에 이르면 숫자의 의미가 퇴색되기 마련이다.
A급에 다다른 나다. 군단 단위로 달려드는 것이 아니라면 낮은 등급이 떼거지로 달려들어도 소용없는 일이다.
지금 내게 몸을 던지는 놈들도 그것을 모르는 바가 아닐 텐데도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내게 달려들고 있었다.
이는 둘 중 하나라는 뜻이었다.
놈들의 전우애가 일성만큼이나 뛰어나든가, 아니면 뭔가 믿는 구석이 있든가.
확인해 보면 될 일이다.
헬리오스는 착용하지 않았다. 롱소드를 꺼내지도 않았다. 놈들이 숨긴 꿍꿍이가 있다면 살살 달래서 그것을 꺼내게 만들어야 한다.
감각을 최고조로 활성화시켰다. 잠시 후, 물에 잠긴 듯 귀가 먹먹해졌다.
내게 달려오는 놈들의 괴성도 한 음절 한 음절 길게 늘어졌다.
그렇게 나를 중심으로 시간이 느리게 흘러가기 시작했다.
제일 앞에서 달려오고 있는 사내가 팔을 뻗어왔다. 내 얼굴에 닿기 전, 사내의 팔에 내 팔을 걸었다. 그대로 놈의 팔을 꺾었다.
우드득!
기형적으로 팔이 돌아간 놈은 비명도 지르지 못했다.
그것과 동시에 남은 놈들의 눈이 붉은색으로 변한 것이 확인됐다.
웃음이 나왔다. 이렇게 노골적으로 각성제를 처먹었다고 티 내는데, 잘도 안 들키고 숨어 있었구나 싶어서.
너덜거리는 어깨를 감싸 쥐며 컥컥대는 놈을 그렇게 지나쳤다. 다음은 창을 쓰는 놈이었다. 헌데 하나가 아니었다.
쌍둥이처럼 녀석과 꼭 닮은 놈이 동시에 달려들었다. 또한 좌로 10미터 부근. 불꽃을 담은 화살이 내 관자놀이를 노리며 날아오고 있었다.
오랜 연습으로 만들어진 합공이었다.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내 상하단을 노려오는 것에 합격의 박수를 쳐 주고 싶었지만.
그 대신 검신의 축복이 가리킨 대로 고개를 슬쩍 틀었다.
날아오는 화살이 아슬아슬하게 나를 지나쳐 갔다. 그 궤적을 따라 고개를 돌리자 스쳐간 화살이 창을 든 쌍둥이 중 한 명의 눈에 꽂히고 있었다.
놈이 눈에 화살을 단 채 뒤로 넘어갔다. 남은 형제는 그것을 보며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그러면서도 상단을 노리며 질러온 창을 회수하지는 않았다.
왜 그런가 했더니.
도화지에 물감을 떨어뜨린 듯, 놈의 동공을 중심으로 붉은 기운이 퍼져 나가고 있었다. 증거 확보는 이쯤 하면 됐다.
직후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창을 뻗어오는 놈의 육신을 쓰러트렸다.
많은 일을 했지만 이 모든 일들이 1초도 안 되는 시간 사이에 벌어졌다.
잔뜩 조인 감각을 원래대로 돌려놨다. 빨리감기를 누른 듯 느려졌었던 세상이 원래 속도로 돌아왔다.
먹먹했던 고막으로 온갖 소음들이 겹쳐 들어오고 있었다.
고통에 울부짖는 비명, 내게 달려드는 놈들의 악에 바친 목소리, 그리고. 부하를 말리는 정장 입은 장발의 사내!
40대쯤 되었을까. 본능적으로 파동부터 퍼트렸다. 안 좋은 예감이 맞았다.
놈은 나와 동급이었다. A급, 220레벨, 근육의 상태로 보아 근접전에 특화된 타입.
허나 분석을 채 끝내기도 전에.
“쯧.”
혀를 찬 사내의 신형이 갑자기 시야에서 사라졌다.
머릿속이 달아올랐다. 감각을 최고조로 높이는 건 당연하고,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야 했다.
그런데 장비가 착용되기까지 잠깐의 딜레이는 어쩔 수 없는 것이어서, 당장은 뻗어오는 사내의 주먹을 막을 대안이 필요했다.
직후, 단전의 마나를 전신에 퍼트렸다. 특히 주먹에 집중시킨 다음이었다.
머리 위에서 태산이 짓누르듯 거친 풍압이 나를 삼키려 하고 있었다. 거대 운석이 떨어지는 착각이 들 만큼. 사내의 주먹이 커다랗게 보였다.
겁먹을 것 없었다. 검신의 축복이 결과를 알려주고 있었다. 내가 이긴다고.
떨어지는 운석을 향해 오른쪽 주먹을 뻗음과 동시에!
놈은 공중에, 나는 바닥에서.
감히 B등급 이하 것들은 인지하지 못하는 속도로.
우리의 주먹이 그렇게 부딪혔다.
쿠웅!
무려 A급 각성자 둘의 전력(全力)이 맞붙었다. 지진이 일어난 듯 건물이 흔들리고, 우리 힘에 휘말린 것들이 이리저리 날아다녔다.
원래라면 건물이 주저앉고도 남을 충격량이었다. 건물에 담긴 방어마법이 상당하다는 뜻이었다.
뒷일은 생각하지 않고 혼신의 힘을 다 해도 괜찮을 것 같았다.
공중에 떠오른 먼지 더미가 훅 걷혔다. 놈이 연거푸 공격을 시도해왔다.
그 순간.
[헬리오스의 심장을 착용합니다!]
[신성한 파괴자의 롱소드를 착용합니다!]
[신성한 파괴자의 검술을 시전합니다!]
[아드레날린 부스트를 시전…!]
[일점폭발…!]
시스템 메시지와 함께 태양신의 힘이 내게 깃들었다.
놈으로서는 패색이 짙은 얼굴이 될 수밖에 없었다.
방금 전 일격에서도 호각을 다투었는데, 아이템에 스킬까지 무장한 지금은?
“죽어라!”
오러 블레이드가 흉흉한 기운을 품고 놈을 집어삼켰다.
두 번째 격돌이었다. 빛이 번쩍거렸다.
***
우리의 몸이 바닥에 착지했다. 승부는 정해졌다.
놈은 만신창이가 된 반면, 나는 그럭저럭 살만했다. 곧 있을 아드레날린 부스트의 반동을 생각한다 해도 결과는 마찬가지다.
“커헉!”
놈이 가슴에 뚫린 커다란 구멍을 짚으며 쓰러졌다. 사내의 죽음은 그렇게 확정됐다. A팀의 박지현이 온다 해도 놈을 살릴 수는 없다.
“부대표님!”
그래서 녀석들 중 힐러로 보이는 것들이 장발 사내에게 치료 마법을 쏟아붓는 것을 가만 놔뒀다.
또한.
거기에 여력을 쏟을 정신도 없었다. 뉴 에볼루션의 대표도 놈이 죽어가는 것을 모를 리 없었다.
건물의 꼭대기에서 빠른 속도로 내리꽂히는 강한 기운이 그 증거였다.
“이 천둥벌거숭이 같은 놈!”
쿠웅!
사자후와 함께 노인이 바닥에 떨어졌다. 눈빛도 흉흉하다. 비록 S급처럼 보이지는 않는다 해도. 대표와 나와의 힘 차이가 명확했다.
째깍거리는 초침 소리에 따라, 아드레날린 부스트의 발동 시간이 다 돼가고 있었다.
슬그머니 옆에 있는 최찬규를 보자 최찬규도 패배을 직감한 모양이었다.
“설마 여기서 죽는 거냐? 우리?”
일성의 전우애는 저것들과 다르다. 한낱 각성제로 인한 분노가 아닌, 진정으로 생사를 공유한다.
죽으면 죽었지, 줄행랑은 생각도 않는 최찬규만 봐도 그렇다.
“깜빡하고 유서도 안 적어놨는데.”
최찬규의 말에 대꾸할 틈도 없었다. 대표 주위로 기류가 형성되고 있었다. 끔찍하리만큼 살벌한 기세다.
분석을 끝낸 검신의 축복이 대표의 수준을 명확히 제시해왔다.
굳이 따지자면 한석훈, 백인호, 김석환 라인과 동급.
대표가 비릿하게 웃으며 말했다.
“네가 자초한 일이다. 애송아. 아무리 일성이라 한들 각성자끼리의 다툼에서 어떻게 죄를 물을 수 있을까. 최 회장에게는 내가 잘 말하지.”
그 말이 끝나자마자였다.
나를 죽일 듯 노려보던 회장의 몸이 사라졌다.
즉시 세포 하나하나가 거기에 반응했다.
지금!
막았다고 생각했던 것도 잠시. 살갗이 뜨거웠다. 롤러코스터에 몸을 맡긴 듯 전신이 사방으로 요동쳤다.
갈피를 못 잡는 시야를 되찾고 나서야 정문까지 밀려난 내 몸을 확인할 수 있었다.
몸을 일으킬 새도 없었다.
대표는 잠깐의 틈도 주지 않았다. 본능적으로 검을 휘둘렀다.
콰아앙-!
검을 휘감은 충격이 두 팔을 타고 올라와 전신을 강타했다. 뭐가 어떻게 된 건지 분간할 수도 없었다.
“크윽-!”
검신의 축복이 시키는 대로, 아락투스의 마기를 끌어올리는 수밖에 없었다.
대표의 몸을 특정해 중력을 역전시켰다.
제발 이것이 통하기를 바랐지만. 결과가 어떻게 될지는 처음부터 정해져 있었다.
“네 잡술은 이미 파악해뒀다!”
대표가 자신에게 작용하는 미지의 힘을 털어냈다. 사지를 찢을 듯 대표를 옥죄던 아락투스의 마기도 곧바로 흩어졌다.
아드레날린 부스트의 시간이 끝나간다. 채 3초도 남지 않았다.
“곧 죽는 마당에도 그 오만한 표정하고는.”
대표가 또다시 빠른 속도로 접근해 왔다. 아까와 비교해도 격이 다른 대표의 주먹이 보였다.
순간, 감각의 최대화로 인해 느릿해진 세상 속. 대표의 눈동자 속에 비친 내가 보였다. 곧 죽는 마당에 오만한 표정이라 그랬나?
그럴 만하니 그런 것이다.
여기까지 오면서 아무런 대책 없이 이곳에 왔을 리가.
“지금!”
그렇게 외친 후였다. 방금까지도 이겼다는 듯 비릿하게 웃던 노인의 표정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나 때문은 아니었다. 차마 내가 인지할 수 없는 속도로 다가오고 있는 손영혁 때문일 것이지.
대표의 눈이 확대됐다. 거기에 읽히는 감정도 느껴졌다. 깊은 고민이었다.
대표의 주먹이 내 바로 앞에 있다. 여기서 이대로 주먹을 뻗는다면? 아마 나는 죽을 것이다.
그런데 그 후가 문제다. 직후에 나타난 손영혁이 대표를 죽일 것이다.
비슷한 기량을 가질 때. 전투는 바둑에서처럼 수싸움이 되는 것이다. 대표가 내게 힘을 쓰면, 빈틈이 나타날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뻗어오는 주먹을 거두고 다시 전열을 가다듬으면?
대표의 스킬이 신성한 파괴자의 검술 정도가 아닌 다음에야. 대표는 반작용으로 인해 죽음과 비슷한 고통을 얻을 것이다.
대표의 고민이 깊어지고 있었다. 다만 마음이 한쪽으로 기우는 것이 느껴지기는 했다. 어깨를 축으로 한 마나의 구심점이 단전으로 거둬지고 있었다.
그런데 어쩌지. 생각이 너무 길었다. 그러기에 하나라도 선택했어야지.
느려진 세상에서 대표의 목에 실선이 그어졌다. 그어진 실선을 따라 핏물이 조금씩 흘러내린다.
뉴 에볼루션 대표의 허망한 얼굴이 전투의 끝을 알려 왔다.
그때까지도 나는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인식하지 못했다.
상황을 인식하게 된 때는 아드레날린 부스트가 약속했던 시간이 모두 지나간 후였다.
화악!
겹겹이 쌓인 긴장이 풀렸다. 온몸이 나른해졌다. 고개를 들어보니 손영혁이 무정한 눈빛으로 검을 들고 있었다.
서걱-!
그 순간 회장의 목이 바닥에 떨어지고, 손영혁이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방금 내 검술은. 조금 어색했나.”
평가를 바라는 학생 같은 얼굴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