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4화 조사단. (2)
움켜쥔 주먹을 폈다. 테이블에 놓인 냉수를 들이켜도 뜨거운 가슴이 영 식지를 않는다.
미치겠다.
일이 꼬였다. 꼬였는데, 어디서부터 잘못됐는지 모르니 환장할 노릇이었다. 떠올릴수록 살벌한 기억들만 가득했다.
비굴하게 사과하고, 팀장 자리에서 내려오고, 일성의 법무팀부터 협회, 대현까지 나를 벼르고 있는 중이었지.
심지어 최태성은 나에 대한 징계를 백인호에게 맡긴다고 했고.
너무 어이가 없으니까 헛웃음이 나올 지경이다.
대체 뭔 짓을 벌여야, 아니, 뭔 짓을 당해야 사람이 그렇게까지 추락할 수 있지?
“그럼 다음 안건은….”
한창 회의가 진행 중이었다. 회의실에 앉은 모두가 힐끔힐끔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이뤄져서는 안 될 미래와는 달랐다. 은근한 기대가 대다수였다. 알게 모르게 내 활약을 바라는 눈치도 몇 있다.
원래라면 쾌재를 불렀어야 할 일인데 이제는 그 모든 것들이 부담으로 다가왔다. 찬물을 뒤집어 쓴 기분이다.
어쩐지 일이 술술 풀린다 했다. 팀장이 되고, 아이템으로 직원들의 환심을 사는 동안 백인호 또한 손 놓고 있었을 리 없었다.
그는 명색이 일성 최고 간부 중 한 명이다. 외부 일에 별 관심이 없는 김석환 때문에 일성과 일하려면 반드시 백인호를 통해야 한다는 말까지 있다.
백인호는, 물리적인 힘뿐 아니라 업계에 미치는 영향력도 나와는 비교할 수 없는 자다.
다시 한번 찬물을 들이켰다. 옅은 미소를 띠는 백인호를 마주 노려봤다. 강력하게 확신했다.
내가 몰락한 원인에 저 인간이 깊숙하게 개입했을 거라고.
그러며 속으로는 두 가지를 되뇌었다.
호랑이를 잡으려면 호랑이 굴로 들어가야 한다.
호랑이 굴에 들어가도 정신만 차리면 산다.
‘그것’이 나를 도와주면. 어쩌면 호랑이를 잡을 수도 있고.
***
회의가 끝난 후였다.
보기 싫은 얼굴이 내 쪽으로 다가왔다. 제 졸개들을 줄줄이 뒤에 달고서.
“네가 그랬지? 반년 동안 한 것도 없었다고. 그러면 인수인계도 필요 없겠네.”
백인호가 비웃듯 말했다. 오히려 내가 먼저 거절하려고 했던 것이다. 백인호의 함정이 뻔할 자료를 받을 바에야, 백지 상태로 출발하는 게 맞았다.
“네. 필요 없습니다. 인수인계는 받은 걸로 치겠습니다.”
“…필요 없다고? 자존심 부릴 때가 아닐 텐데.”
“자존심 아니고요. 필요 없어서 필요 없다고 말씀 드리는 겁니다.”
“하! 건방진 새끼. 그래, 잘해 봐라 어디.”
백인호의 얼굴을 계속 보고 있으면 나도 모르게 감정이 조절될 것 같지 않았다.
이어서 쏟아지는 저주 섞인 말을 뒤로하고 빠르게 자리를 벗어났다.
곧장 집무실로 간 이후였다.
“주현 씨.”
“네.”
“협회에 연락해서 손영혁 과장이랑 연락 좀 닿게 해주세요.”
네로드 및 레인 우버 조사는 협회와 일성의 공조로 진행되고 있었다. 협회 쪽은 손영혁, 일성은 백인호로.
그런데 말만 공조였지, 이제껏 둘은 따로 움직였다. 헌터 회사와 협회와의 관계를 생각해 보면 그럴 만도 했다.
그런데 나까지 그래서는 곤란하다. 백인호 말대로, 쥐뿔도 없는 것이 자존심 부릴 때가 아닌 것이다. 감찰과장인 손영혁의 도움이 필요했다.
“하아.”
그런데 가빠진 숨은 도무지 진정이 되질 않았다.
일이 꼬인다면…. 같은, 쓸데없는 잡상이 머릿속을 쥐고 흔드는 기분이다.
때문에 단련실에 가서 땀이라도 빼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얼굴을 한 번 쓸어내리고 옷을 갈아입었다. 그렇게 개인 단련실로 가던 중.
뚝 하고 걸음을 멈췄다. 그러고 보니 미래의 백인호가 그런 말을 했었다.
[김세린인지 뭔지 하는 것들도 싹 다 짐 싸라고 하고. 그 자격 미달인 것들은 왜 데려왔어?]
소꿉놀이도 끝났다는 말도 덧붙였었지.
나 하나 믿고 와준 팀원들이다. 이후에 들어올 팀원들보다 당연히 특혜를 주는 것이 맞았다.
아이템은 당연하고, 성장에 도움이 될만한 것들은 전부. 감히 누구도 무시하지 못할 만큼 말이다.
곧장 팀원들이 있을 단체 연습실로 발길을 돌렸다.
단련실에 들어선 직후였다. 고향에 온 듯, 익숙한 장면이 눈에 들어왔다.
쾅! 쾅!
온갖 소음이 겹쳐져 귓가를 때렸다. 마법이 날리고, 화살이 빗발치고 있었다.
격전의 중심지에는 전용철이 방패를 들고 쏟아지는 공격을 방어하고 있었다.
그를 보조하는 이지은도 마찬가지였다.
살벌한 마법이 쏟아지는 와중에도 전용철 옆에서 침착하게 버프를 거는 것이다.
한석훈식 훈련이었다. 일명 실전만큼 살벌한 훈련. 동시에 한석훈에게 당했던 아찔한 기억 몇 개가 지나갔다.
그때와 달라진 점이 몇 개 있었다. 내 레벨, 저들의 레벨. 그리고 내 안목.
내 성장이 S급, 그러니까 250에 가까워질수록 검신의 축복 또한 덩달아 껍질이 벗겨지고 있는 중이었다.
그래서 보이는 것들이다. 박하영이 활을 쏘는 자세, 전용철이 방패로 막는 자세.
지금도 나쁘지 않지만 어떻게 수정하면 더 좋아질지가 너무 훤히 보였다. 심지어 김세린의 스킬을 어떻게 하면 더 성장시켜 줄지도.
거기까지 생각하고 박수를 짝 쳤다. 모두가 나를 돌아봤다. 숨기고 있던 비밀을 들킨듯한 김세린의 표정이 압권이었다.
그런데 그만큼이나 나도 놀랐다. 이들에게서 느껴지는 파동.
얘들 원래 이렇게 잠재력이 높았었나?
***
“자세를 이렇게 해 보시죠.”
“이, 이렇게?”
“네. 방패는 그렇게 들고 보폭은 조금 더 뒤로요. 딱 그거예요.”
전용철이 엉거주춤하게 서고선 정말 이게 맞냐며 물어왔다.
“그 상태에서 마나를 불어넣는 겁니다. 발바닥에 30퍼센트, 날개뼈에 50퍼센트로.”
“발바닥? 날개뼈? 방패는?”
“나머지 20퍼센트가 거기 들어가는 거죠.”
“허어.”
정석과는 완전히 다른 방법이다. 굳이 따지자면 전용철에게만 특화된 자세라 할 수 있었다. 더불어 마나가 흐르는 길까지 체크해 줬다.
미심쩍어하면서도 전용철이 재깍재깍 시키는 대로 했다. 잠시 후 전용철의 마나가 움직였을 때였다.
전구에 빛이 들어오듯 전용철의 방패가 환해졌다.
그 순간 내 주먹이 전용철의 방패를 후려갈겼다.
쿠웅!
지축을 뒤흔드는 소리가 울렸다. 전용철의 발이 사정없이 뒤로 밀려났다.
그러면서도 끝끝내 쓰러지지는 않는다.
연무장 끝까지 뒤로 밀려난 전용철이 고개를 들었다. 눈이 휘둥그레진 채였다.
“어, 어떻게.”
전용철이 자신의 두 손을 들여다봤다.
“핵심은 등과 발바닥이에요. 지금은 대충 밸런스 맞춰준 거고, 아마 직접 맞추셔야 할 겁니다.”
전용철의 고개가 사정없이 끄덕거렸다. 명심하겠단 말이 뒤따랐다.
옆에 있던 김세린이 귀신에 홀린 듯한 얼굴로 나를 바라봤다.
“저도! 저도 가르쳐 주세요!”
“야. 저 둘은 몸 쓰는 거니까 그렇다 쳐도, 널 어떻게 가르쳐 줘? 내가 더 급해. 나와. 오빠. 저번에 보니까 활도 잘 쏘던데. 저도 좀 봐 주시죠.”
김세린과 박하영이 투닥거렸다. 몸 쓰는 게 아니라서 못 가르친다?
검술만큼이나 빠르게 성장하는 게 마법이었다. 쓸 줄 아는 게 중력 마법뿐이라서 그렇지. 마법에 대한 이해도가 급격하게 상승하고 있었다.
문제는 이지은인데. 얘는 내가 어떻게 건드려야 할지 모르겠다. 버프와 힐 같은 스킬의 구조는 도저히 내가 파악할 수가 없어서.
거기에 대한 고민을 하던 중이었다.
타다다닥-!
김주현이 다급하게 뛰어오고 있었다. 표정이 영 좋지 않았다. 예전 기억이 떠올랐다.
옛날에 손영혁이 갑자기 들이닥쳤을 때 꼭 저런 얼굴이었다.
“주현 씨?”
왜냐고 묻기도 전이었다. 연무장의 문이 벌컥 열리면서였다.
“이태진!”
손영혁이 가벼운 목소리로 나를 불렀다.
김세린이 맹해 보인다 해도 일성의 헌터다. 동작은 빨랐다. 금붕어 셋과 곰 하나가 무기를 꺼내 들어 손영혁에게 겨눴다.
손영혁이 들고 있는 검 때문에라도 김세린 등의 얼굴은 잔뜩 굳을 수밖에 없었다.
팀원들의 무기 끝에는 웅웅거리며 푸르고 붉은 마나가 모이고 있었다. 공격하란 한마디만 떨어지면 당장 온갖 스킬이 손영혁에게 날아갈 것이다.
기특한 그 모습을 더 두고 볼까 생각하던 것도 잠시,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그만. 내가 불렀어.”
팀장이 이래서 좋다. 가타부타 다른 부연 설명을 하지 않아도 된다.
지금도 그랬다. 금붕어들은 묻고 싶은 게 많은 얼굴로 나를 바라 봤지만 입술만 달싹일 뿐 곧장 무기들을 거뒀다.
그때까지도 손영혁의 시선은 다른 곳은 안중에도 없는지 온전히 나에게 향해 있었다.
눈빛에 어린 열망이 노골적이었다. 당장 나와 검을 겨뤄보고 싶어 안달이 난 손영혁은 바깥에 알려진 이미지와는 영 딴판이었다.
한숨을 쉬며 말했다.
“가시죠.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빨리 올 줄은 몰랐지만.
***
그에게 아락투스의 마기가 담긴 아이템을 받은 적이 있다. 아피아의 반지. 그러며 그런 약속도 했었다. 검을 가르쳐 주겠노라고.
그런데 도통 시간이 나야지. 더불어 앞으로는 더 바빠질 예정이었다.
“언제 부르나 기다렸다. 당장 시작해도 좋다만.”
그런 내 속도 모르고 손영혁은 소풍 나온 초등학생처럼 설레는 얼굴로 나를 쫓아왔다. 그때부터 그의 입이 쉴새 없이 움직였다.
“네 BTO를 얼마나 머릿속에서 복기했는지 모를 거다. 그 염동력은 뭐지? 설마 새로 얻은 스킬이냐?”
둘만 있을 때의 그는 가면을 벗은 철부지 소년과 비슷했다.
“그보다 검술이 더 깔끔해졌더군. 마치 네 몸에 꼭 맞는 것처럼. 그걸 알려줄 수는 없겠지? 그래. 나도 거기까지 욕심내는 건 아니야. 아참. 최근 새로 만든 검술이 있다. 쾌검을 기반으로 한 것인데….”
마치 성적표를 받는 학생처럼 손영혁의 얼굴은 긴장이 역력했다.
하고 싶은 말이 어지간히 많았나보다, 생각하며 집무실의 문을 열었다. 아무도 출입하지 말라는 명령을 내린 후였다.
“검술은 조금 이따가 보기로 하고. 일단 다른 문제가 있습니다. 레인 우버 공조 수사 말입니다.”
곧장 손영혁이 자세를 고쳤다. 소풍 가는 초등학생에서 협회 감찰과장으로.
“조사단장이 된 건 들었다. 어떻게 할 거냐. 백인호를 제치는 게 네 목표인가 보지?”
협회의 정보력은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손영혁을 우습게 봐선 안 된다는 걸 여실히 느낄 수 있었다.
단순히 검술뿐만 아니라 얽히고설킨 세력구도를 파악하는 정치력만 봐도 그는 나보다 몇 수나 위다.
때문에 솔직하게 말했다.
“예. 도와주십시오.”
“무엇을, 어떻게?”
“협회에서는 네로드 수사에 대해 반쯤 손을 놓고 있다 들었습니다.”
감찰과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산재된 다른 일이 많다. 뭔 말인지 알겠군. 네 권한을 더 강하게 만들어 달라는 거냐?”
“예.”
“그럼 협회가 얻게 될 건?”
“공로를 나눠 드리죠.”
손영혁이 피식 웃었다.
“협회는 물론이고 마당발로 통하는 백인호 팀장도 반년간 꼬리도 못 잡았다. 그런데 네가 무슨 수로?”
나도 모른다. A급 두 거물도 해결하지 못한 네로드의 꼬리를 내가 무슨 수로.
다만. 믿는 구석이 있기는 하다. 그것도 꽤나 강력하게 믿고 있다.
‘그것’이 이대로 발을 빼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다. 나를 곤궁에 빠트리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
‘그것’을 끊임없이 경계하면서도 이렇게까지나 신뢰한다는 게 우습게 느껴질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과 지난 1년간 소통 아닌 소통을 해온 경험으로 미루어보아.
애초부터, ‘그것’이 내게 조사단장에 대한 미래를 보여준 이유가 그런 것일 테지.
자신에게 더 의지하게 만들도록.
‘그것’의 최종 목표를 당장 생각할 필요는 없다. 놈도 원하고 있는 것이다. 내가 이름을 떨치기를.
“그래서 검술은 언제 알려줄 건데?”
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