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3화 조사단. (1)
팀장에 오른 직후, 산재한 적, 혹은 적이 될 만한 것들을 체크해 봤었다.
1년 후 나를 쫓으러 오는 괴한, 시타둠, 하오란, 네로드….
A급이 됐는데도 한없이 힘이 부족했다.
그게 문제였다. 필요보다 한참이나 모자란 능력이 나를 초조하게 만들고 있다.
조금이라도 성장이 멈추면 죽을 것만 같은 기분.
특히 화신과의 결전 이후. 그때의 나는 눈이 돌아가 있었다.
빨리 던전에 들어가야 하는데, 여기서 시간이 더 줄어들면 큰일 나는데.
그런 생각이 나를 좀먹었다.
지금 생각해 보니 강제로 경호 임무로 떠밀었던 김석환의 판단은 옳았다.
그 상태로 던전에 들어갔었다가는. 조급함의 대가를 치렀겠지. 던전은 그런 곳이니까.
그리고 지금도 조급함은 여전히 가슴 깊숙한 곳에 남아있다. 그것이 호시탐탐 때만 노리고 있었다. 언제든 나를 잡아먹을 수 있게.
그래서 당분간 던전 공략은 멈추기로 했다. 성장이 멈춘다는 생각만으로도 가슴이 뜨끈했지만 던전에서 개죽음을 당하는 것보다는 낫다.
그런 생각으로 머릿속에서 던전이란 단어를 지웠다. 그러고 나니 두 가지가 남더라.
일성에서 내 입지를 더욱 공고히 하든가, 아니면 사이비 종교의 실체를 파헤치든가.
내가 선택한 것은 전자였다.
타깃으로 삼은 사람은 백인호였다. 그를 밟고, 올라선다.
“네로드 조사단의 단장 교체를 원합니다.”
“뭐?”
곧장 반응이 날아왔다.
백인호가 미친놈 보듯 나를 쳐다봤다. 이놈이 아주 죽기로 작정했구나 하는 눈빛이었다.
백인호뿐만 아니라 다른 간부들의 반응도 똑같았다. 말은 안 했지만 황당하다는 얼굴로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나를 껄끄러워하는 B-1팀원들은 당연했고 한석훈과 김석환조차도 자제하라는 듯 손을 내저었다.
“태진아. 어…. 지금 무슨 기분인지는 알겠어. 알겠는데. 그건 따로 나랑 이야기하자.”
바로 옆에 있는 김석환이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한석훈 또한 마찬가지다. 조용히 고개를 젓는 그의 뜻이 명백했다.
‘아직 네 상대가 아니다.’
가볍게 그런 시선들을 무시하고 정철규에게 무언의 눈짓을 보냈다.
뜨악한 얼굴로 헛기침을 하던 정철규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첫 번째 안건은 아시아 태평양 불법 각성제 조직 수사단장 건에 대해….”
“뭐하는 짓이야!”
짜증 섞인 소리가 튀어나왔다.
“이게 보자 보자 하니까. 팀장 달았다고 기싸움 한번 하자는 거야?”
“아닌데요.”
“아니긴! 하. 설마 내가 레인 우버 뒤 캐고 다니는 거 모른다고 하게?”
“알고 있습니다.”
“아는데. 아는 놈이 지금 조사단장을 교체하니 마니 떠들어? 나랑 한번 붙고 싶다는 거지? 오냐. 따라와 이 새끼야. 내가 정식으로 교육시켜 줄 테니까.”
백인호가 당장 달려들 듯 주먹을 부르르 떨었다. 모션을 취하는 게 아니다. 진짜 조금만 툭 건들면 달려들 기세였다.
그래서는 곤란하지. 한석훈이 고개를 저은 이유처럼, 아직은 저 양반을 이길 자신 없거든.
대신 백인호가 내게 늘 그랬던 것처럼, 똑같이 돌려주기로 했다.
“백인호 팀장이 레인 우버를 조사한 지 벌써 반년입니다. 그런데 그간 어떤 성과가 있었습니까?”
“넌 레인 우버가 어떤 놈들인지 알기는 아냐? 던전밥 먹은 지 1년이나 됐어? 이게 아주 잘한다 잘한다 했더니 세상이 쉬운 줄 알아.”
햇병아리 보듯 백인호가 나를 쳐다봤다. 기가 찬다는 얼굴이었다.
개 짖는 소리를 무시하며 다시금 최태성에게 말했다.
“당위성도 제게 있습니다. 플래터에게 목숨을 위협당하고, 네로드의 부하였던 임형원이 저를 납치하려 했습니다. 아마 그때 제가 그 계획을 눈치채지 못했다면 저는 지금 이 자리에 없었겠지요.”
임형원의 이름을 꺼냈다. 한때 백인호의 라인을 탔던 놈을 거론하자 백인호가 입을 들썩였다. 굉장히 불편해 보이는 기색이었다.
반면 최태성은 무표정으로 일관하고 있었다. 계속 말해 보라는 무언의 지시였다.
“그간 제 성과가 어땠습니까? B팀 다수와 A팀의 정철규 윤진아를 구하고 화신과의 대결에서도 작지 않은 성과를 냈습니다. 또한 단신으로 서울역의 게이트를 막아냈습니다.”
“그래서 팀장 자리 줬잖아!”
“대가를 말하는 게 아닙니다. 회장님. 한번 믿고 맡겨보셔도 좋다는 말입니다.”
그렇게 말한 후 다시 입을 다물었다. 백인호가 노발대발해댔다. 어디서 하룻강아지 같은 게 기어오르냐며, 당장 따라 나오라고 한다.
예상 못 했던 일도 아니고. 오히려 바라던 일이기도 했지.
이럴수록 사람들의 뇌리에는 나와 백인호의 라이벌 구도가 형성될 것이다. 그것이야말로 내가 바란 것이다.
‘한 번쯤 믿고 맡겨도 되지 않나? 이태진의 그간 성과를 보면.’
‘애송이 새끼한테 레인 우버 조사를 맡기라고? 회사 망신당할 일 있냐?’
‘저 새끼 저러다가 한번 큰코 다친다.’
“정철규. 뭐하고 있어? 다음 안건으로 안 넘겨?”
백인호가 그렇게 말했어도 정철규는 침묵을 지키고 최태성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그러던 것도 잠시. 회의장에 침묵이 내려앉았다. 모두의 얼굴이 최태성을 향해 있었다.
맞다. 어디까지나 결정권자는 최태성이었다. 그가 하라면 하고, 말라면 마는 거다.
그리고 최태성의 입이 열렸다.
“그러면 투표로 진행해 봐.”
“회장님!”
“후.”
나는 쾌재를 불렀고 백인호는 죽을상을 지었다.
겉만 보면 공정한 판단처럼 보인다. 그런데 속을 들여다보면 조금 다르다.
백인호가 말한 하룻강아지 팀장이 투표라는 케이지로 백인호를 끌고 나왔다. 결과는 상관없다. 그를 끌고 나온 것만으로 오늘 내 목표는 달성했으니까.
투표결과는 볼 것도 없지. 내가 참패할 거니까.
다수표를 받기에 내 입지가 백인호보다 너무 좁았다.
그러나 사람들의 뇌리에 똑똑히 박혔을 것이다. 백인호가 열불 내는 모습, 내가 당당히 요구하는 모습, 그리고 최태성이 투표를 명령한 것까지. 그런 것들이 쌓이고 쌓여 입지를 만드는 것이다.
흐뭇하게 팔짱을 끼며 투표 결과를 기다리고 있는데. 문득 백인호의 표정이 묘하게 바뀌었다.
어라. 좀 이상한데.
마치 함정에 빠진 사냥감을 보는 듯 그의 만면으로 옅은 웃음이 떠올랐다.
백인호가 피식 웃으며 입모양만으로 내게 뜻을 전해왔다.
“하. 애송아. 대가리는 너만 굴릴 수 있을 줄 알았지?”
뭐?
직후였다. 개표를 마친 정철규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결과를 발표했다.
“…투표결과 단장 교체 찬성 19표, 반대 15표로…. 이태진 팀장이 새로운 레인우버 조사단장으로 결정됐습니다. 백인호 팀장은 이태진 팀장에게 조속히 담당 업무를 인계해 주십시오.”
뭐라고?
고개가 자동으로 휙, 돌아갔다. 백인호 쪽이었다. 그가 비릿하게 웃고 있었다.
“한번 자알 해봐. 어디 네 맘대로 되나 그게.”
백인호가 물고기를 낚은 표정으로 날 보고 있었다. 그것도 아주 대어를 낚은 듯 뿌듯해 보였다.
그때 뭔가 잘못됐다고 느껴졌다.
뭐지? 왜 나한테 단장 자리를 넘긴거지?
이유는 몰라도 하나는 확실하다. 내 생각과 달리 일이 잘못되고 있다.
팔짱을 끼며 잘 걸렸다는 듯 B-1팀의 얼굴들이 보였다.
“이의 있으십니까?”
정철규가 나직하게 물어봤다.
순간 나도 모르게 손을 들 뻔했다. 지금이라도 무를 수 있나?
그럴 리가. 차라리 적당한 핑계를 만들어 최태성에게….
그때, 시야가 번쩍거렸다. 동시에 온 세상이 회색빛으로 물들어갔다.
시간이 멈추고 있었다. 나를 중심으로 김석환, 최태성, 저 멀리서 찜찜하다는 얼굴로 이쪽을 바라보는 임한나까지 마찬가지였다.
곧이어 푸른빛이 넘실대는 마나 줄기가 하늘 위에서 줄기줄기 뻗어 나왔다.
다행이다. ‘그것’이 나타났다.
저 마나가 ‘그것’의 실체라는 걸 어렴풋이 알 수 있었다. 의식이 미래로 넘어가기 전에는 꼭 이랬다.
조만간 저 마나 줄기가 내 몸에 닿을 것이다. 그리고 잠시 후 내 의식은 미래로 건너갈 것이다.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그것’이 날 도와주려 한다. 어쩌면 백인호가 파놓은 함정이 무엇인지 알 수 있을 것이다.
또 한 가지. 검신의 축복이 ‘그것’의 마나를 분석하고 있었다. 지금까지 수없이 많이.
딱 한 번 남았었다. 지금 넘실대는 저 마나 줄기만 분석하면. 완전히 ‘그것’의 정체를 알아낼 수 있을 것이다.
확신했던 대로 시스템, 혹은 시스템과 관련 있는 인격체인지, 아니면 전혀 새로운 존재인지.
그러니 자. 어서 와라.
그렇게 팔을 벌렸다.
그런데 이상하다. 푸른 빛줄기는 좀 전부터 엿가락처럼 넘실거리기만 할 뿐, 도통 내게 다가오질 않았다.
한 번도 없던 일이었다. ‘그것’의 능력에 문제가 생겼나?
그럴 리가.
그것보다는….
아!
그제야 알 수 있었다. 말로 하지는 않았지만, 놈이 내게 협박하고 있었다.
-선택해라. 내 정체를 확인할 것이냐, 아니면 모른 채 덮고 미래를 확인할 것이냐.
이렇게.
왜인지 모르지만 놈은 제 정체를 밝히는 걸 싫어하고 있다.
빌어먹을.
시스템이 아니었나?
억지로라도 정체를 확인하고자 한다면 그럴 수 있다. 단지 저 넘실대는 마나를 만지기만 하면 되니까.
그런데 그렇게 하지 않았다. 아니, 못했다. 그랬다가는 놈이 내게 벌을 줄 것이니까. 이후로 다시는 미래를 보지 못할 수도 있다.
결정했다.
당장 정체를 알아서 어디에 쓴다고. 비릿하게 웃는 백인호가 무슨 함정을 숨겨놨는지가 더 중요했다.
선택을 내리자마자, 넘실거리던 마나가 언제 그랬냐는 듯 내 몸에 빨려 들어왔다.
약속대로 검신의 축복은 잠시 꺼두었다. 직후, 무색무취의 마나가 온몸을 뒤덮었다.
그와 함께 세상이 거꾸로 뒤집어졌다.
화악!
***
“그러게 내가 뭐랬어.”
곧장 백인호의 목소리가 울렸다. 미래의 어느 시점인 듯했다.
내 수그린 고개가 들렸다. 회사 안이었다. 백인호뿐만 아니라 모두가 날 바라보고 있었다.
한심함, 동정, 짜증.
온갖 불쾌한 감정들이 사정없이 내 얼굴에 꽂혔다. 내 얼굴은 잔뜩 일그러진 상태였다. 아니, 기가 죽었다고 해야 하나.
“적당히 나대라고 했지?”
비릿한 미소를 짓는 백인호가 내 어깨를 두드린다. 뭔진 몰라도 하나는 확실했다. 이건 내가 바라던 미래는 아니었다.
“너 때문에 우리 회사 이미지 먹칠한 거. 어떡할래?”
그리고 내 입에서 나도 놀랄만한 말이 튀어나왔다.
“죄송, 합니다.”
뭐? 죄송?
지금 내가 백인호한테 죄송하다고 한 건가?
“죄송? 이게 죄송하다고 해결될 일이야?”
아주 의기양양해있다.
“내가 아니라고 몇 번을 말했어. 그런데도 알아서 한다고? 알아서 한 결과가 이거냐?”
그때쯤 나는 몸을 일으켜 세웠다.
“어디가? 아직 말 안 끝났는데.”
“회장님 뵈러 갑니다.”
백인호가 정신 차리라며 다시 나를 앉혔다.
“회장님이 네가 보자면 봐야 하는 사람이냐? 안 그래도 그러시더라. 네놈 징계는 온전히 나한테 맡긴다고.”
조소를 짓던 백인호가 내게 턱짓했다.
“당장 팀장 자리부터 내려놓을 준비해. 2팀 팀장은 새로 뽑을 거니까. 김세린인지 뭔지 하는 것들도 싹 다 짐 싸라고 하고. 애초부터 자격 미달인 것들은 왜 데려왔어?”
백인호가 연이어 말했다. 모처럼 아주 신나 보였다.
“네 같잖은 소꿉놀이는 끝났다고. 왜, 불만 있어? 내 밑으로 들어오고 싶다면 지금이라도 받아줄 용의가 있다만.”
“그럴 바에 퇴사하고 말지.”
“퇴사? 그래. 해 봐. 그런데 감당해야 할 거다. 우리 법무팀부터 협회고 대현이고 죄다 너 벼르고 있다는 말은 들었…?”
미치겠네.
아직 아무 단서도 얻지 못했는데, 의식이 옅어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