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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터는 미래를 본다-92화 (92/170)

92화 B-2팀. (5)

일성 사내 장비보관소는 소문만큼이나 보안이 삼엄한 곳이다.

전용 엘리베이터를 타고 사용자 인지 마법이 걸린 카드키로 숨겨진 지하 버튼을 누르는 건 시작일 뿐이다.

지하에 도착해서는 차단문이 겹겹이 세워져 있고 S급의 동작 감지 마법이 곳곳에 설치돼 있다.

최태성의 말로는, 허락되지 않은 자가 접근했다가는 살아서는 못 나갈 것이라 했다.

자신들이 어디에 발을 들여놓은지 이제야 실감이 나는 걸까. 금붕어 세 마리와 곰 한 마리는 가는 동안 말 한마디 못하며 얼어 있었다.

마지막 차단문에 카드키를 꽂은 순간이었다. 차단문이 올라가며 마침내 일성 사내 장비보관소가 본모습을 드러냈다.

창고형 마트를 연상케 하는 이곳은 아이템 마트라 불려도 손색이 없었다.

수천개의 캐비닛이 끝도 없이 진열돼 있었다.

캐비닛 하나마다 아이템이 있다.

무기는 무기끼리, 액세서리는 액세서리끼리. C등급부터 A등급까지 정렬된 아이템의 숫자는 3천 개 이상이었다.

아락투스의 아이템 박물관처럼 S급 아이템이 있는 것은 아니어도.

김세린 등에게는 이곳이 별천지처럼 보였을 것이다.

잠시 동안 팀원들이 천천히 그곳을 둘러봤다. 차단문이 올라간 그곳에 멈춰서서 눈으로만. 첨단 문명을 처음 본 유인원 같은 그 모습에 퍽 웃음이 나왔다.

“세상에…. 맙소사….”

“딸꾹!”

김세린이 꿈벅꿈벅 눈을 깜박이며, 이건 꿈일 거라고 홀린 듯 중얼거렸다.

박하영은 인상을 찌푸리더니, 자신이 환영마법에 걸린 것 같다며 이지은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김세린이 툭툭 나를 건드렸다. 멍한

“저기. 팀장님. 아니, 오빠. 아니 팀장님. 여기가….”

“아이템 창고. 뭐해. 안 고르고.”

평소에도 덤벙대던 김세린이 오늘따라 더했다. 낯선 곳에 떨어진 어린 아이처럼, 내 소매를 잡고 놓질 않았다.

“그쵸. 골라야죠. 골라야 하는데…. 그러니까 뭘 골라야 하는 거죠?”

“아오. 이 답답아. 비켜. 내가 먼저 간다.”

잔뜩 쫀 김세린을 대신해 박하영이 나섰다.

“…….”

그런데 정작 손목을 걷어붙인 박하영마저도 몇 걸음 걷더니 멈칫했다. 그녀의 시선은 어떤 아이템에 고정되어 있었다.

B등급, 그레고리우스의 워보우.

그렇게 적힌 활이었다.

“그러니까 이걸…. 제가 이거를.”

더듬거리는 녀석을 대신해 결국 내가 나섰다. 캐비닛을 열어 워보우를 꺼내 박하영에게 건네줬다. 그런데도 박하영은 뚫어져라 아이템을 쳐다만 보고 있었다.

“아!”

보는 내가 답답해서 억지로 무기를 쥐여 줬더니 박하영의 손이 심하게 떨렸다.

“다음.”

“네, 네? 저요?”

김세린이 자신이 맞냐며 몇 번이나 제 얼굴을 가리켰다. 그대로 놔두면 도저히 움직일 것 같지 않았다. 김세린의 뒷목을 잡고 이리저리 끌고 다녔다.

“이거?”

“아.”

“이건?”

“아.”

뭔 아이템을 들이밀어도 좋다는 건지 안 좋다는 건지 분간이 안 갔다.

“너무 다 좋으니까 고를 수가 없어요!”

“그럼 다 가져.”

그렇게 말해주자 김세린이 기절할 듯 고개를 뒤로 떨궜다.

그렇게 몇 번이나 생쇼를 반복한 김세린이 마침내 고른 아이템은 무기였다.

“나, 난 이거.”

기다란 나무 스태프를 집은 김세린이 슬쩍 내 눈치를 살폈다. 캐비닛 밑에 설명이 써 있었다.

칼 융스 제 상급 마법사 전용 지팡이. 등급은 B. 나쁘지 않은 아이템이다.

아니, 나쁘지 않다는 기준은 여기 창고 수준에서나 그렇지.

바깥에서는 돈이 있어도 수량이 한정되어 있어 보기도 힘든 아이템이었다.

“또?”

“또, 또요? 뭘 또…. 저, 전 이걸로 충분한데요!”

진짜 환장하겠네.

***

그나마 아이템 세트를 빨리 맞춘 건 이지은과 전용철이었다, 특히나 이지은은 굉장히 의외인 게.

“다 골랐어요.”

서늘한 눈빛으로 이리저리 이동하더니 나한테 왔다. 여기까지 채 5분도 안 걸렸다.

남들은 혼수 장만하듯 심사숙고를 하는데 얘만 마실 갔다 온 듯 얼굴이 엄청 편해 보였다.

정작 고른 아이템들은 살 떨릴 만큼 대단한 것들로만 알뜰히 챙겨왔다.

월계관 형태로 만들어진 저건 B급 중에서도 최상위 아이템, 완드는 A급, 반지, 목걸이, 신발, 심지어는 양말까지.

하나하나가 상호작용을 하며 시너지를 내게끔 맞춰왔다.

그 짧은 시간에.

“지은아. 너 여기 와봤었어?”

“아뇨?”

“어. 그래.”

고맙다며 고개를 꾸벅 숙인 이지은이 묵묵히 아이템을 점검하기 시작했다. 가만 보면 얘가 조용한 것 같아도 제일 기 센 것 같단 말이지.

“야. 이지은. 너, 너 뭐냐? 얌전한 고양이가 먼저 부뚜막. 그거야?”

“저, 저 고얀!”

김세린과 박하영이 억울하단 표정으로 이지은을 쳐다봤다. 이지은은 심드렁하게 웃을 뿐이었다.

“언니들도 골라.”

“뭐? 이게 진짜. 우리가 못 고를 줄 알아?”

“야. 딱 기다려.”

직후, 둘의 표정이 돌변했다. 김세린의 눈에서 불꽃이 튀었다. 백 미터 달리기를 하듯 두 녀석이 전속력으로 창고 안을 뛰어다녔다.

“이거. 이거 좋아 보이더라.”

“난 이거. 태상왕의 힘줄로 만든 팔찌.”

한참을 꾸물거리던 김세린과 박하영이 순식간에 풀세트로 착장을 마쳤다.

아이템을 보며 침을 줄줄 흘리던 것도 잠시.

문득 김세린이 풀죽은 얼굴이 됐다.

“왜. 또 뭐.”

“오빠. 그런데 이것들 던전 갈 때만 쓸 수 있는 거죠? 아쉽다. 사진이라도 찍어야 하는데.”

“맞네. 이지은! 지금 쥐고 있는 것들 싹 다 제자리로 갖다 놔!”

그 순간 이지은의 얼굴이 충격으로 바뀌었다. 허걱, 하며 나를 쳐다봤다. 이거 다시 다 내려놓냐는 눈빛과 함께.

그러고 보니 그런 조건이 있었지. 아주 옛날에.

“다시 집어. 반납 안 해도 되니까.”

부서트리면 어쩌냐고, 분실하면, 혹은 몰래 갖다 팔면 어쩌냐고 최태성 앞에서 백인호가 노발대발했었다.

“그럼 어쩔 수 없는 거지.”

그에 대한 최태성의 답이었다.

***

며칠 후.

이제는 익숙해진 집무실에서 여러 결재서류를 확인하고 있었다.

그 와중에 직원들이 두서없이 떠드는 말을 들은 것은 예민해진 감각 때문이었다.

“그래봤자 둘 뿐이잖아. 걔네들 둘이서 B급 던전 돌 수 있어?”

“둘이 아니라 여섯. 김세린이랑 같이 다니는 애들 거기로 갔대. 땡잡은 거지. 지나가는데 아이템 하나하나가 빛이 나더라.”

“흥. 그래봤자 던전 제대로 돌 수 있는 건 둘 뿐인데. 뭐 어쩌려고? 용병이라도 뛸 거야?”

아래층이었다. C팀이었나?

“둘 뿐이라기엔 둘 다 A급이지. 임한나도 요즘 상승세 장난 아니라더라. 생각해 보면 무려 B팀 팀장, 부팀장인데. 못 뛸 것도 없지. 당장 A팀에서도 쌍수 들고 환영할걸?”

“야 이 더러운 새끼야. 너 이태진한테 벌써 넘어갔냐?”

“팩트만 보자는 거지. 감정에 휩쓸리지 마. 지금 대세는 백인호 팀장님이 아니라 이태진이니까.”

“그까짓 아이템 좀 뿌리는 거. 치사해서 안 간다.”

치사해서 안 간다고 하는 저 녀석이야말로 어젯밤 문자 열 통을 보냈었다. 제발 좀 팀으로 받아달라고.

이들뿐만 아니라, 사내 곳곳에서 비슷한 이야기가 퍼지고 있었다.

주제는 온통 B-2팀에 관해서였다.

호재였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몇 명이나 지원할지로 내기나 하던 직원들이 지금은 꿀먹은 벙어리가 됐다.

심지어 보관소에서 얻은 아이템을 반납 안 해도 된다는 소식에 벙어리는 더 늘어났다.

김세린이 SNS에 풀옵션 아이템을 장착한 사진을 올린 것을 본 녀석은 저게 원래는 자기가 가져야 했다며 노발대발했다는 얘기도 있다.

탄식은 양반이고 눈물은 옵션이었다. 한 번만 다시 기회를 줄 수 없냐고 매달리는 직원들까지 있는 판이다.

오늘도 그랬다. 하도 매달리는 통에 간부 회의장으로 가는 길이 길어졌다.

“조만간 다시 공고 모집 올릴 거니까요. 기다려 주세요.”

웃으며 말했다.

물론 당분간 팀원을 받을 생각은 없지만, 그럼에도 내 말에 안도감을 느낀 직원들은 앞으로 내 눈치를 보기 바쁠 것이다.

나그네의 옷을 벗기는 건 태풍이 아니라 따뜻한 햇살인 법이다.

정말로 더 높은 자리로 올라가기 위해서는 다른 직원들과 굳이 척질 필요도 없었다.

“결국 한다는 게 그거냐? 아이템으로 사람 휘어잡는 거?”

이 사람만 빼고.

정면에 백인호가 서 있었다. 굉장히 심기가 불편해 보였다. 남의 시선을 엄청 신경 쓰는 백인호한테서 똥 씹은 표정은 어지간해선 볼 수 없는 건데.

“그게 얼마나 갈 것 같아? 1년? 2년?”

“글쎄요. 두고 보면 알겠죠.”

백인호가 픽하고 바람 빠진 소리를 냈다.

“네 아이템도 아닌 걸 가지고 그따위로 써먹어? 팀장으로서 충고하는데, 리더가 그런 식으로 환심만 사서 일이 될 것 같아?”

“쓰기 나름 아닐까요.”

“그걸 못 쓰니까 하는 말이야. 건방진 놈아.”

“글쎄요. 팀장님도 팀원 관리 잘하셔야겠는데요.”

“뭐?”

“팀장님 밑에 있는 애들도 여기 오고 싶다고 문자 보내던데. 그것도 열 통씩이나. 남의 사람 빼 오는 것 같아 거절하긴 했습니다. 아, 비밀로 할 걸 그랬나?”

최대한 곤란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게 더 백인호를 열 받게 할 수 있을 것 같아서.

과연 백인호의 표정이 볼만했다. 붉게 달아오른 백인호가 이를 꽉 깨물기도 잠시.

“누가…. 누가 그랬어!”

“실명을 밝히는 건 아무래도 좀. 저는 먼저 들어가 보겠습니다.”

그 말을 끝으로 회의실의 문을 열었다. 왜 이렇게 웃음을 참을 수 없는지.

B팀에서 지원한 사람? 당연히 아무도 없다.

***

간부 회의장은 기본적으로 B급 이상, 혹은 부팀장 이상 직급은 되어야 참여할 수 있는 자리였다.

일성에 들어온 사람은 누구나 이곳에 참석하길 바란다. 일성이 앞으로 나아갈 방향을 제시하고, 거기에 반대나 찬성에 대한 의결권을 가지는 영광스러운 자

원형으로 구성된 회의장 테이블에서 내 자리는 최태성의 자리에서 두 칸 떨어진, 그러니까 상등급 좌석이라 할 수 있었다.

조용히 착석했다. 뒷통수가 따가워 뒤를 돌아보자 박지현이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안 그래도 저 사람이랑도 담판을 지어야 하는데. 왜 나를 도와줬는지, 원하는 게 뭔지.

그런데 박지현이 다시 시선을 돌렸다. 내게는 더 이상 관심이 없어진 듯 이후로 나를 쳐다보는 일도 없었다.

젠장. 저게 더 찜찜하다.

최태성을 제외한 모두가 모인 후였다.

“회장님 입장하십니다. 모두 자리에서 일어나 주십시오.”

정철규의 말과 함께 전원이 일어났다.

34명의 일성 간부가 천천히 걸어오는 최태성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럼에도 최태성은 오연한 시선 그대로 자리에 착석했다.

“시작하지.”

마나를 싣지도 않았는데 낮게 울린 그의 목소리가 회의실 전체로 퍼져 나갔다.

A급에 올라선 지금에 와서도 최태성의 힘이 도무지 가늠되질 않는다.

나머지 서른넷 전부가 그에게 달라붙어도 이길 수 있을 것 같지가 않다. 한 칼에 심장이 베이지나 않으면 다행이지.

잡생각에서 빠져나올 무렵. 이럴 때가 아니었다. 이곳에 온 이유가 있었다.

“첫 번째 안건에 대해 말씀해주실 분은 거수…. 이태진 팀장님?”

“레인 우버 및 네로드 조사단장 건에 대해 건의하고자 합니다.”

전부터 생각해온 안건을 들이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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