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화 B-2팀. (4)
커다란 창문 너머로 보이는 한강 둔치는 계절의 흐름을 알려주고 있었다. 고개를 빼꼼 내미는 새싹과 함께 봄이 태동하고 있었다.
공고문을 올린 지 일주일이 지난 날이기도 했다.
“오늘도 그대로예요?”
“그게….”
별생각 없이 물었는데 김주현에게는 추궁하는 것처럼 느껴졌나 보다.
“죄송합니다.”
면목 없다며 김주현이 고개를 숙였다. 그러고도 그녀는 벌게진 얼굴을 숨기지 못했다.
지난 일주일간 김주현은 무던히도 뛰어다녔다. 일성 내 헌터들은 물론이고 자유계약 신분의 각성자를 수소문해 가면서 내 팀을 홍보하고 다닌 것이다.
결과는 대실패.
비웃음만 당하면 다행이었고 쌍욕이 날아온 경우도 부지기수였다.
“그러게 하지 말라니까요.”
죽을상을 짓는 그녀에게 작게 웃으며 말했다.
“…죄송합니다.”
“이제 어쩌지. 내 이름 팔아 가면서 영업했는데 죄다 까였으니.”
“죄송…, 죄송합…….”
김주현의 고개가 점점 숙여진다.
저러다 바닥을 뚫고 들어가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자신 있다며 호기롭게 가슴을 탕탕 치던 일주일 전과 비교하면 확연한 차이였다.
아주 울겠네.
“죄송할 거 없어요. 잘했으니까.”
목소리 톤을 다정하게 바꾸며 말했다.
“……네?”
김주현이 슬그머니 고개를 들었다. 여전히 얼굴은 울상인 상태였다.
“사람들한테 매몰차게 거절당하는 거. 생각해보니까 그편이 더 좋을 것 같아서요. 그렇게까지 매몰차게 까이고 다닐 줄은 몰랐지만.”
“…….”
김주현이 다시 고개를 푹 숙였다.
그러면 그렇지. 신랄하게 욕하기 위한 빌드업이었구나. 그녀의 정수리에서 그런 감정이 여실히 느껴졌다.
“칭찬이에요.”
“그냥 욕해 주세요. 전 죽일 년이에요.”
김주현이 기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이럴 수가. 김세린만큼 놀리는 재미가 있는 사람이 또 있다니.
한 번 더 골릴까 하는 충동을 참아냈다. 내 말대로 안 하고 이리저리 설친 대가는 충분히 치른 것 같으니까.
“이거 한 번 보세요.”
그렇게 말하며 김주현에게 모니터를 가리켰다.
쭈뼛쭈뼛, 한참을 머뭇거리던 김주현이 내 쪽으로 다가왔다. 그때까지도 어깨는 축 처져있고 눈에는 눈물이 그렁그렁 맺혀 있었다.
“하아.”
갑갑한 한숨을 내쉬던 김주현이 모니터를 쳐다봤다.
직후였다.
“어라…?”
김주현이 멈칫했다.
고개를 갸웃하던 그녀가 눈을 비비고 다시 모니터를 바라봤다.
시선은 모니터 한가운데 고정된 채였다.
흠칫하다, 숨을 크게 들이마시다, 아예 눈을 부릅뜬 채로 굳기까지. 일련의 과정들이 김세린 못지않게 호들갑스러웠다.
그러다가 휙! 고개를 내 쪽으로 돌렸다. 김주현이 부릅뜬 동공만큼이나 덜덜 떨리는 손으로 모니터를 가리켰다.
입술을 뻐끔뻐끔 거리는 게 이게 진짜냐고 묻고 싶은데, 차마 말이 안 나오는 듯했다.
그녀의 손가락 끝이 가리키는 곳에는 업로드 직전의 짧은 글이 있었다.
-팀 복지 사항 : 사내 장비 보관소 內 장비 무기한 대여권 일괄 공유.
“티, 팀장님. 이거 잘못 쓰신 것 같은데요.”
“제대로 쓴 거예요.”
사내 장비 보관소.
검신의 축복을 처음 얻었을 때 받은 선물이었다. 물론 아직까지도 요긴하게 사용하고 있다.
그런데 받은 선물을 남들과 공유하는 것은 또 다른 문제라 최태성의 허락이 필요했다.
이걸 미끼로 쓰고 싶다 했더니 최태성이 고개를 끄덕였었다. 마음대로 하라고.
“일성 장비 보관소라면…. 거기는.”
김주현이 홀린 듯 중얼거렸다.
비각성자인 김주현조차도 일성의 장비 보관소가 어떤 곳인지 알고 있었다.
그럴 만도 하다.
소문이 그렇게 났다. 일성의 장비 보관소에는 젊은 시절 최태성이 사용한 무기부터 아끼는 장구류까지 죄다 있다고.
나조차도 갈 때마다 깜짝 놀란다. B급에서 시작된 아이템 행진이 A급까지 끝이 보이질 않았다.
헬리오스의 심장이 있는 나조차도 그런데 다른 각성자들은 오죽할까.
이 글이 올라가면 어떤 반응이 올라갈지 안 봐도 뻔했다.
“업로드해 보세요.”
“제, 제가요? 제가 이걸 올리라고요?”
김주현의 목울대가 움직였다.
“네. 그리고 다시 한번 반응 봅시다. 김주현 씨한테 꺼지라고 했던 놈들. 이제 어떻게 나오나.”
김주현이 질끈 눈을 감고 [등록] 버튼을 누르려던 차였다.
띠링, 하는 알람이 울렸다.
***
한석훈은 공석으로, 이태진은 팀장으로, 김세린과 박하영, 이지은, 전용철은 각각 C-1, 2, 3팀으로.
1년 전 D-2팀이었던 멤버들은 뿔뿔이 흩어졌다.
그럼에도 남아 있는 단체대화방은 늘 시끄러웠다. 오늘도 그랬다. 언제나처럼 김세린이 재잘거리기 시작했다.
-우리라도 오빠 팀에 들어가 줄까? 한나 언니 빼고 아무도 지원 안 했다며. (☍﹏⁰)
-들어가 주는 게 아니라 들어가고 싶어도 못 들어가는 거야 바보야. 우리가 거기 간다고 뭐 할 수 있냐? 너 B급 던전 공략할 수 있어?
-뭐래! 이태진 팀장님이 그러셨거든? 등급이랑 상관없이 뽑겠다고. 넌 한글도 못 읽냐?
-문맥을 읽어 등신아. 등급 안 본다는 말이 뭐겠어. 최소한 키워볼 만한 놈으로 뽑겠다는 거지.
-그런가. ( ・ั﹏・ั)
-어휴. ㅋ 근데 사실 난 지원했음.
-뭐야! B급이고 어쩌고 할 때는 언제고!
-너도 하든가.
-나도 당근 해놨지! 헤헤.
-나도 사실 지원…했어.
-나도.
뒤이어 이지은과 전용철이 이실직고했다. 모두가 황당하다는 듯 웃음을 터트렸다.
-이제 우리 어떡하지?
-어떡하긴. 이태진 팀장님한테 가서 싸바싸바 해야지. 제발 좀 합격시켜 달라고.
-그러면 잘도 합격하겠다.
-난 귀여워서 합격할걸?
-그렇게 따지면 난 반찬 잘 만들어. 그 오빠 자취 중이지? 됐네 그럼. 나도 합격.
-뭣하면 스트레스 해소용 샌드백도 되는데 난.
그렇게 각자의 장점을 어필하던 중이었다.
-뭐야. 너희들이었어?
이태진의 이름 석자가 채팅창 하단에 박혔다. 시끌벅적하던 채팅창이 한순간 정적에 휩싸였다.
-뭐지? 내 채팅 안 보여?
이태진이 그렇게 되물었어도 답하는 이가 없었다. 도둑질하다 걸린 것처럼 채팅방에 정적이 흘렀다.
그것도 잠시.
-…들어오기 싫으면 말고.
-들어가고 싶어요!
-저도요!
-저도요…!
-나도!
-내가 먼저 말했어! 오빠! 전 귀여워요!
-저런 정신 나간 발언보다는 제 밥반찬이 더 쓸모 있을걸요?
-난 샌드백.
스트레스가 쫙 풀릴 거라는 전용철의 채팅 이후, 다시금 정적이 일었다. 모두가 이태진의 대답을 기다렸다.
-다들 앞으로 잘 부탁한다.
김세린은 순간, 그 말이 무슨 뜻인지를 생각해야 했다.
‘잘 부탁드려? 뭘? 불합격인가? 아니지. 합격 아니야? 합격? 합격이라고? 내가 B팀?’
섬광처럼 김세린의 손가락이 움직였다. 육성으로는 환호성을 지르면서였다.
-정말요? 정말이죠? 우리도 B팀에 들어간다고? 꺄! 무르기 없어요!
-뭐야. 진심이에요?
-헉!
박하영은 물론이고 한참 동안 매력 어필할 거리를 찾던 이지은도 반짝반짝 빛나는 이모티콘을 보냈다. 전용철은 [나도?] 하며 쭈뼛댔고.
-아. 그전에 다들 나 좀 보자. 인트라넷에 공고문 하나 올렸으니까 보고 오면 더 좋고.
***
김도윤은 오늘따라 들떠 있었다. 뭐랄까. 설명할 수 없는 통쾌함이었다. 사촌이 땅을 샀는데 하필 그 땅이 개발제한구역이 된 느낌이 이런 걸까.
한껏 업된 김도윤의 목소리가 프라이빗룸을 가득 채웠다.
“그랬더니 한석훈이 그러더라니까. 정말 후회 안 하겠냐고. 그것도 두 번씩이나.”
“그래서 뭐라고 했는데?”
“수고하라고, 그건 아닐 것 같다고 뺀찌 줬지.”
“큭. 그 양반이 자존심 상하는 날이 다 있네. 일성에서 한석훈 건드린 놈은 네가 처음일 거다.”
“한석훈이 뭐. A팀 있었던 것도 옛말이지. 지금은 한 팔 잘린 노땅 아니야?”
취기가 올랐지만 굳이 술기운을 내몰지 않았다. 오늘만큼은 잔뜩 취하고 싶었다.
“그나저나 그 아이템은 어떻게 됐어? B등급 반지라고 했나? 블랙마켓에서 발견했다며.”
그런데 이렇게 좋은 날 꼭 초를 친다. 김도윤이 혀를 차며 말했다.
“그 자식 얘기는 꺼내지도 마. 죽어도 그 가격에는 안 팔겠대. 5억이나 더 얹어줬는데도 요지부동이야.”
“돈에 환장한 놈이군.”
“그럴 만도 해. 그거. 근력이랑 감각 수치 세트로 달린 거거든.”
“휘유. 그 정도면 빚내서라도 살만한데?”
“안 그래도 그럴 생각이다. 당분간은 죽었다 생각하고 던전만 돌 거야. 그래도 부족해. 반지만 30억인데 검이랑 갑옷은? B팀 들어가려면, 그것도 백인호 팀장님 눈에 들려면 최소 B등급으로 풀세트는 맞춰야 할 텐데.”
“이태진 그놈이 부럽다. 회장님 창고를 마음대로 쓸 수 있다며?”
“그놈 아이템 봤어? 갑옷이며 반지며 목걸이에. 젠장할. 내가 괜히 싫어하는 게 아니라니까? 나한테도 그렇게 지원해줘 봐. 나도 걔만큼 해!”
“에이. 아무리 그래도 그건 아니지. 그놈 특성이 성요한이랑 같은 거잖아.”
“말이 그렇다고 말이. 쯧. 어쨌든 오늘은 마시고 뒤지자. 건배!”
그렇게 양주를 한입에 털어 넘긴 김도윤이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킥. 지금쯤이면 모집 공고 끝났으려나?”
이태진이 망신살 당하는 것만 생각하면 그만한 술안주가 따로 없었다.
그 생각과 함께 인트라넷에 접속했을 때. 김도윤은 자신이 취했다고 생각했다.
[B-2팀 모집 공고 마감.]
[팀 내 복지 사항 : 사내 장비 보관소 內 무기한 대여 일괄 공유권.]
김도윤은 눈을 비볐다. 그러고도 모자라 취기까지 몰아냈다. 순식간에 알코올의 잔향이 김도윤의 몸을 빠져나갔다.
그런데 또렷해진 눈으로 봐도 바뀐 건 없었다.
“어?”
아침에 자신과 같이 이태진을 씹던 녀석과 순간 눈이 마주쳤다.
그때였다.
자신과 같이 휴대폰을 들여다보던 동료들, 혹은 갑자기 누군가의 전화를 받은 헌터들이 부리나케 술집을 뛰쳐나가기 시작했다.
“나, 나 먼저 가볼게!”
심지어 방금까지도 옆에서 맞장구를 치던 녀석까지도 사색이 된 채 룸을 빠져나갔다.
끝끝내 김도윤이 멍한 얼굴로 자리를 일어나려던 때였다.
휴대폰이 진동했다.
발신자 불명의 메시지 한 통이 와 있었다.
-진짜 후회 안 해?
***
아까부터 휴대폰이 아우성치고 있었다. 알람을 꺼둔다는 걸 깜빡했다.
-D-2팀 김요셉, 지원합니다!
-C-3팀 윤정연, 지원합니다!
-B-1팀 박현영, 늦지 않았다면 지금이라도…!
그들뿐만이 아니었다.
한 번쯤 들어본 헌터들의 이름이 메시지 목록에 줄줄이 박혔다.
자신이 김주현과 만나 커피 한 잔을 마셨다는 자유계약 신분의 헌터는 지금 당장 이쪽으로 올 수 있다고까지 말했다.
우웅!
휴대폰 진동이 서른 번쯤 울렸을 때였나. 전원을 껐다. 애 좀 태우라고.
나도 자존심이 있지. 여기서 굽히고 받아줬다가는 결국 아이템 때문에 B-2팀에 들어온 꼴이 된다.
내가 원하는 팀은 그게 아니거든.
거기다 당장 필요한 멤버수를 다 채우기도 했고.
“마침 왔네.”
얼떨떨한 표정의 병아리 셋과 곰 한 마리가 쭈뼛쭈뼛 다가왔다.
금붕어 같은 눈을 꿈벅꿈벅 뜨는 김세린과, 아직도 이 상황이 미심쩍은지 심각한 표정으로 중얼거리는 박하영, 그리고 창고, 아이템 같은 단어를 주절거리는 이지은까지.
유일하게 침착함을 유지하고 있는 사람은 전용철이었다. 아니, 지금 보니 평소보다 다리를 심하게 떨고 있긴 했다.
“이게 꿈이야 생시야? 오빠! 이게 꿈이에요?”
“꼬집어줄까?”
“아뇨! 현실이에요! 무조건 현실이에요! 꿈이어도 현실이야!”
김세린이 행복한 비명을 질렀다. 박하영도 마찬가지였다. 좀처럼 표정을 드러내지 않는 이지은마저도 헤벌쭉한 미소를 감추지 못했다.
이렇게 좋아할 줄 알았으면 진작 데려올 걸 그랬나.
두근두근.
기대 가득한 녀석들의 귀에 원하는 말을 꽂아줬다.
“따라와. 오늘 아이템 풀세트로 한번 맞춰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