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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터는 미래를 본다-89화 (89/170)

89화 B-2팀. (2)

잠시만. 뭐라고? 필요가 없다고?

그럴 리가 없는데. 나도 박지현과 같은 A팀이다. 그래서 박지현이 어떤 성격인지 알고 있다.

일성의 공주님이라는 별명답게 능력은 끝내준다.

최상위 계열의 회복 스킬을 뿌려대고 버프, 디버프, 저주까지 다양한 계열에서 높은 수준의 능력을 보여줬다.

그런데 그만큼 그녀의 단점도 명확했다. 능력이 아니라 성격 쪽으로. 괜히 공주님이란 별명이 붙은 게 아닌 것이다.

독단적이고, 김석환도 컨트롤 못할 정도로 고집 세고 이기적이기까지.

그 웃음 많은 정철규가 ‘아주 지밖에 모르는 기지배’ 라는 평을 남길 정도였다.

그런 인간이 갑자기 팀장 자리를 거절한다?

이걸 누가 순수하게 감사하다고 넙죽 받아먹어?

무슨 꿍꿍이가 있다고 생각하는 게 합리적이다. 풀어진 긴장을 바짝 조였다.

“피, 필요가 없어?”

“네. 필요 없어요.”

백인호가 와락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꼴을 보니 전혀 예상하지 못한 모양이었다.

반면 박지현의 고운 미간은 한점 흐트러짐이 없었다. 되려 내 어깨에 손을 올리며 힘을 주는 자세를 취했다.

그때였다. 저 멀리 앉아있던 임한나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당장 여기 앞으로 뛰쳐나올 표정을 지으면서.

주먹을 부르르 떠는 것을 보면 무슨 일이라도 벌일 것만 같았다. 임한나가 저런다는 건 정말 화났다는 건데.

갑자기 쟤는 또 왜 저래?

백인호와 내가 한판 벌일 때도 가만있던 애가 일이 잘 풀리려니 화를 낸다. 임한나에게 간절하게 눈빛을 보냈다. 제발 다시 앉으라고.

다행이었다. 내 간절함이 닿은 모양이었다. 참을 인 삼천 번쯤 쓴듯한 표정으로 임한나가 다시 착석한 것을 확인한 후였다.

한숨을 나직이 쉰 다음, 박지현이 벌여놓은 일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빠르게 분석했다.

그렇게 나온 결론은 다행히도 나에게 나쁜 상황은 아니라는 것이다.

이후에 박지현이 내게 무엇을 요구하든 손해 볼 건 없었다.

“왜? 지현아. 너 팀장 하고 싶었잖아. 그것도 B팀 자리인데.”

표정을 바꾼 백인호가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박지현을 불렀다.

“생각해보니까 귀찮을 것 같더라고요.”

“귀찮아? 뭐가 귀찮아. 언제는 시켜만 달라며?”

“그랬죠. 그런데 지금은 아니에요.”

백인호의 인내심이 한계치에 달한 모양이었다. 그의 얼굴에 쩍쩍 금이 갔다.

“그러니까 왜!”

“귀찮은 데 이유가 어딨어요? 그냥 하기 싫은 거지.”

“…뭐?”

“백 팀장님. 더 묻지 마세요. 하기 싫으면 하기 싫은 거니까.”

“너, 너. 이태진한테 뭐 받기로 했냐? 그런 거야?”

“받긴 뭘 받아요. 얘랑 지금 처음 대화하는 건데.”

맞다. 평소에는 같은 A팀 취급 못 해주겠다며 나를 시체 취급하던 박지현이었다.

당연하겠지만, 백인호는 그녀의 말을 믿지 않았다.

백인호는 아예 작정한 듯 나를 노려봤다. 살기가 흉흉했다.

슬그머니 나도 마력을 끌어올렸다. 백인호의 상태를 보니 언제든 나를 덮쳐도 이상할 것 없어 보여서.

그러던 백인호가 최태성을 슬쩍 바라봤다. 최태성은 이 순간에도 늘 그렇듯 잔잔한 미소를 띠고 있었다.

“하!”

백인호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회장님, 급한 일이 있어서 먼저 가봐야 할 것 같습니다. 양해해 주시길 바라겠습니다.”

백인호의 말에 최태성은 작게 끄덕였다. 결국 얼굴이 터질 듯 붉어진 백인호가 회의실을 떠나갔다.

회의실 문이 다소 큰 소리를 내며 닫혔다.

최태성이 기다렸다는 듯 말했다.

“그럼 다들 납득한 걸로 하고. 회의는 이쯤 하지.”

“예. 회장님. 회의 종료하겠습니다. 착석한 순서대로 회의실을 나가 주시면 감사드리겠습니다.”

그렇게 최태성이 내 청문회를 끝냈다. 곧장 축객령이 날아왔다.

이게 끝이라고?

잘못 들었나 싶어 최태성을 쳐다보자 지그시 눈을 감고 있었다. 제대로 들은 게 맞았다.

사람들이 우르르 빠져나갔다. 지나가면서 축하한다는 말과 함께.

한숨이 터졌다.

솔직히 말하자면, 너무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라 내가 무슨 말을 했는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애써 의연한 표정으로 사람들과 악수하고는 있는데 정신은 멍했다.

찬물이라도 한번 뒤집어쓰고 싶었다.

그래. 당장은 괜히 유난 떨 것 없다. 조용히 얻을 것만 얻었으면 그걸로 족했다.

터질듯한 머릿속을 일단 비운 뒤 유유히 집무실을 빠져나왔다. 나를 졸졸 따라오는 중년의 남자 둘을 데리고서.

***

“어이구! 이태진 팀장님! 저는 앞으로 존댓말을 해야 할까요?”

한석훈이 퍽 재미없는 농담을 던지더니 혼자 낄낄거렸다.

그의 장난을 받아줄 정신이 아니었다. 당장 해야 할 일이 산더미처럼 쌓였다. 생각해야 할 것도 한두 가지가 아니었고.

“이게 맞나 싶다. 아직 내 밑에서 배워야 할 게 산더미처럼 남았는데 벌써 팀장에 올라? 나도 납득이 안 되는데. 태진아. 어떻게 반년만 내 밑에 있으면 안 되겠냐?”

김석환은 못내 아쉽다는 듯 쩝 거리며 아련한 눈빛을 보내왔다.

중년의 털복숭이 남자에게 그런 눈빛을 받는 게 굉장히 부담스러워 서둘러 자리를 피했다. 더 있다가는 내가 저 얼굴에 주먹질을 할 것 같았다.

“이 새끼가. 출세하더니 지엄한 스승의 은혜는 잊었지 아주.”

“…태진아. 삼 개월. 삼 개월은 안 되겠니?”

꼬장꼬장한 외팔이와 치근덕대는 털복숭이를 제쳐두고 엘리베이터 문을 닫았다.

“아침부터 이게 무슨.”

고개를 휘젓고 휴대폰을 열자 벌써 메시지 수십 개가 쌓여 있었다. 어디서 냄새를 맡았는지 언론사며 기자며 난리도 아니었다.

모조리 삭제 후 휴대폰을 꺼놨다. 때마침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감회가 새로웠다.

내가 이 층수에 서게 될 줄은 몰랐다. 온다 하더라도 한참 뒤일 줄 알았다.

총 23층의 일성 사옥 중 무려 20층에 위치한 곳이다. 이제부터 이곳이 내 집무실이다. 층 하나가 통째로 내 차지였다.

뭐가 됐든 박지현의 일은 추후에 생각하자. 지금은 팀장으로서 해야 할 일에 집중할 차례였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자마자였다. 눈앞에 임한나가 서 있었다. 엄청 굳은 얼굴로.

“축하해.”

전혀 축하하지 않는 투로 내게 악수를 건네온다. 그런데 고맙다고 하기도 전이었다. 손을 휙 빼낸 임한나가 내게 턱짓했다.

“걘 누구야?”

“누구?”

“박지현.”

임한나가 박지현의 이름을 꺼냈다. 뇌에 새기겠다는 듯 또박또박 몇 번이나 중얼거리면서였다.

일성의 공주님을 몰라서 이럴 리는 없고. 어깨를 으쓱였다.

“나도 몰라. 아직 어안이 벙벙하다.”

“모르는 거 맞아? 혹시 이상한 거래라도 한 거 아니야?”

마치 철없는 자식이 사기라도 당한 걸까 우려하는 목소리였다.

“내가 걔랑 무슨 거래를 해?”

“…예를 들어 자기랑 결혼 안 하면 죽이겠다든지.”

“뭐?”

예를 들어도 꼭 이상한 예시를 가져왔다.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아니야?”

“당연히 아니지.”

“아니면 왜….”

그걸 나도 모른다. 몰라서 고민 중이었다. 대체 박지현이 나한테 왜 저러는 걸까.

그런데 대답도 하기 전에.

“어쨌든 넌 모른다는 거지.”

굉장히 수상쩍은 얼굴로 임한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뭔가 대단한 음모를 꾸미는 것처럼 눈썹을 까딱거리면서.

이 타이밍에 이런 생각을 해도 되는지 모르겠는데.

그런데 이 녀석.

이성적 호감 같은 것이 아니라, 순수한 의미 그대로 외모가 좀.

예뻐졌다. 그것도 연예인 뺨치게.

도자기를 연상케 하는 피부며 윤기 나는 단발머리며. 전보다 눈빛도 더 깊어진 것 같았다.

받은 월급을 성형외과에 다 갖다 바치는 게 아닐까 의심이 들 무렵.

“팀장님.”

임한나가 갑자기 공손한 얼굴이 돼서는 나를 올려다봤다.

임한나와 시선이 마주치자 왠지 오한이 드는 기분이었다.

심지어 목소리도 어딘가 비음이 섞인 듯했다. 아름다운 외모와 별개로 이 녀석의 평소 성격을 생각해 보면 도저히 매칭이 되지 않았다.

“팀장님!”

내가 못 들었을까 봐 한 번 더 말해주기까지 한다.

“…….”

“원하는 게 뭔데. 빨리 말해.”

저 부담스러운 눈빛을 더 받고 있다가는 그대로 아예 닭이 될지도 모르니까.

“쳇. 눈치 빠르기는. 네 팀 말이야. 거기 나도 끼워 달라고. 설마 잊진 않았겠지? 내가 널 위해서 얼마나 큰….”

“넌 안 온다고 해도 억지로 끌고 올 생각이었다. 나도 네 도움이 필요해 임한나.”

거짓말이 아니다. 임한나에게 아무리 캐물어 봐도 답해 주지 않았지만, 이것 하나만은 명확했다.

임한나의 폭발적인 성장이 나 못지않다는 것. 그리고 이 추세대로라면 조만간 임한나 또한 A급 고지에 오를 수 있다는 것.

더군다나 오대산 던전에서 맞췄던 호흡을 생각하면 어지간한 A급 각성자보다 임한나가 나을 게 분명했다.

“…어?”

임한나가 게슴츠레한 눈으로 나를 쳐다봤다. 그러더니 갑자기 몸을 비틀어댔다. 아니, 배배 꼰다고 하는 게 정확한 표현 같았다.

“그럼 난 이만.”

원하는 말을 들었는지 뒤도 안 돌아보고 임한나가 가버렸다. 나야 성가신 인간들을 모두 내쫓았으니 불만은 없다만.

“조금 황당하기는 하네.”

더 이상 올 사람이 없는 걸 확인하고 나서야 집무실의 문을 열었다.

들어서자마자 그윽한 피톤치드 향이 코끝을 간질였다.

더불어 통창 너머로 한강이 훤히 보였다. B팀장 집무실답게 끝내주게 좋은 방이었다.

“이런 것도 좋기는 한데.”

그런데 그것보다 급한 게 있었다. 굳이 팀장 자리에 올라서려 했던 이유.

곧장 컴퓨터를 켜고 인트라넷에 접속했다.

원래부터 읽을 수 있었던 별 하나짜리 보고서는 넘겼다. 던전 출몰이나, 간단한 임무에 대한 것들이니까.

“여기 있네.”

별 세 개짜리 보고서. 사내에서도 특급 기밀로 취급되는 자료들이었다. 이런 정보들은 돈 주고도 못 구하는 것들이다. 오로지 팀장직 이상들만, 그것도 B급 이상만 열람할 수 있는 정보들이다.

두근대는 심정으로 오늘 업데이트된 문서를 클릭했다.

[작일 신흥종교 ‘시타둠교’, 대전시에 위치한 아카데미 졸업식 습격. 게이트를 통해 출현. 자세한 사건 개요는 별도 첨부.

+현장에 있던 이태진의 활약으로 한 명의 피해자도 없이 방어 성공. 이에 따른 보상은 아카데미 및 사내에서 책정 후 지급할 것.

+독일, 프랑스, 미국, 일본 등등 각국 주요 아카데미 또한 동일한 습격을 받았음. 피해 규모 현재 추산 1조 4천억 원 이상.

+현재까지 파악된바, 정식 교도는 3천 명 이상으로 추정되며 다수가 C급 이상의 전문 각성자로 이루어짐. 구체적인 교단 위치 파악 중.]

[5일 전 미 시카고 미시간호 부근 S급 던전 발발, 현재 2개 팀 도전 후 전멸. S급 레인저 도날드 맥에 의하면, 제3 마군단장 아락투스의 권역 아래 놓인 던전으로 추정됨.

+캘리포니아 공과대학 제임스 맥컬린 교수 ‘타차원 이론’과 연관 지어 다른 우주의 존재 가능성을 조사 중.]

[친 악순청 파 주요 인사 15명을 하오란이 모두 숙청한 것으로 파악됨. 결전 이후 와해 직전의 화신 그룹을 일시에 장악, 회장직에 오름.

+능력이 있다면 어떤 범죄 이력도 개의치 않겠다는 파격적인 인사 원칙 수립.

+상하이를 넘어 남중국 전역에 영향을 끼치는 중. 중국 주석의 총애를 받는 것으로 보임. 간간이 이태진에 대해 부정적인 언급을 한 것으로 보임.

+주의 깊은 경계가 필요함. 필요 시, 명분 확보 후 제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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