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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터는 미래를 본다-88화 (88/170)

88화 B-2팀.

[인사이동, A팀 사원 이태진 → B-2팀 팀장.]

김현주가 더듬더듬 설명하는 걸 간단하게 축약하자면 이랬다.

B-2팀의 팀장으로 내정됐던 정철규가 그걸 거절했다.

“왜?”

곧장 의문이 튀어나왔다. 다른 자리도 아니고 B팀의 팀장이다. 정철규가 평소 바라마지 않던 위치.

“어차피 뺏길 자리, 지금 넘겨주는 그림이 더 예쁘다…라는 말을 전해 주라고 했습니다.”

너무 어처구니가 없으면 말이 안 나온다더니. 기가 막힐 따름이었다.

그런데 기막힐 일이 하나 더 있었다.

“마찬가지로 윤진아 씨도 같은 이유로 거절했습니다. 두 분 모두 이태진 팀장님을 강력하게 추천하면서요.”

“지금 이거 실화냐?”

한석훈이 나를 쳐다보면서 말했다. 오랜만이다 저 표정. 한창 그 밑에서 검술을 배울 때 저렇게 징그러운 괴물 바라보듯 바라봤었다.

이 기분을 뭐라고 해야 할까.

“…좋긴 한데.”

복권에 당첨된 기분이다. 현실이 아닌 느낌이었다.

이래도 되나 싶을 정도로 필요할 때 원하는 게 들어왔다.

지금 가장 필요한 게 뭐냐고 물으면 사회적으로 높은 위치였으니까. 그런데 얼떨결에 그걸 얻었다.

그것도 일성에서 세 번째로 높은 권력을.

***

정철규, 윤진아를 만나러 갈 시간도 없었다. 곧장 최태성에게 불려 올라갔다.

일성의 대회의장이었다. 정신이 없는 와중에도 표정을 갈무리했다. 상황이 좋게 돌아간다 해서 헤벌쭉할 때가 아니었다.

회의실에 최태성만 있지는 않을 것이다. 아마 다른 고위 각성자들이 이를 갈며 나를 기다리고 있겠지.

아무리 능력주의를 표방하는 일성이라 한들 무려 B팀의 팀장 자리다. 입사한 지 겨우 1년 된 애송이에게 맡길 자리는 아무리 생각해도 아니다.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해야 할 때였다. 칼날을 벼리는 기분으로 엘리베이터를 내렸다.

크게 심호흡을 한 뒤 지체하지 않고 대회의실에 들어갔다.

역시나였다. 곧장 시선들이 쏟아졌다.

먼저 도착한 한석훈과 김석환, 백인호를 위시로한 일성의 A급 헌터들과, 그 뒤에는 백인호의 졸개들, 그러니까 B급 헌터들이 줄줄이 자리 잡고 있었다.

제각기 의미가 담긴 눈빛을 던져왔다. 강자들다웠다. 흥미, 실망감, 질투 섞인 솔직한 감정이 여실히 느껴졌다.

“…….”

내 자리는 좌석의 정 중앙이었다. 반원으로 구성된 회의장 중 가장 앞에 있는 좌석. 청문을 받으러 온 공직자의 모습과 다르지 않았다.

가볍게 쏟아지는 시선들을 무시하고 자리에 앉았다.

이 정도는 아락투스의 던전에서 겪은 리저드 퀸의 눈깔에 비하면야 아무것도 아니었다.

누군가 헛웃음을 터트린 직후였다. 최태성이 나직하게 물어왔다.

“소식은 들었을 테고.”

“예.”

신기하게 최태성을 면전에 두고도 옛날처럼 긴장된다거나, 얼어붙지는 않았다.

억지로 쿵쾅거리는 심장을 숨기던 전과는 달랐다. 여유롭게 차를 마시는 최태성의 눈빛을 오롯이 받아냈다.

“심정이 어때? 내가 말하기엔 뭣하지만 꽤 큰 자리에 앉은 것 같은데.”

“기분 좋습니다.”

마음 같아서는 춤이라도 추고 싶었지만 막상 말은 건조하게 나갔다. 무표정한 얼굴은 덤이었다.

협상의 기본이다. 부동산에 집 보러 갈 때도 함부로 잇몸을 드러내는 건 하수들이나 하는 짓이다. 좋을수록 평정을 유지해야 하는 법.

“멍청해서 그런 건지 실감이 안 나는 건지. 건방지긴.”

곧장 비방 섞인 말이 튀어나왔다. 슬그머니 시선을 돌리자 반대쪽에 앉은 백인호가 쌍심지를 켜며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뒤에서는 비웃음이 날아왔다. 앉아있던 백인호의 졸개들이었다.

저 양반은 저럴 줄 알고 있었다. 그가 라인으로 삼았던 김찬현과 임형원을 내 손으로 날리고, 또 B팀에 들어오라는 제안을 매몰차게 거절했다. 이후로 우리 사이는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게 됐다.

“다시 생각해 보는 건 어떠냐. 네가 감당하기엔 그 자리가 보통 큰자리가 아닌데.”

백인호가 팔짱을 끼며 넌지시 물어왔다. 여유 있는 태도는 어디까지나 상급자의 그것이었다.

그럼에도 최태성은 백인호를 제지하지 않고 있었다. 그 말이 무엇을 뜻하냐면, 나를 시험대에 올려세웠다고 봐야 했다.

어디 이 청문회에서 인정받아보라고.

“회장님.”

이어서 백인호의 졸개들이 최태성에게 간청하기 시작했다.

“인정할 수 없습니다. 회장님. 이태진이 최근에 보여준 성과가 대단하다고는 하나 B팀의 팀장이라니요.”

“C팀도 아니고 새로 창설될 B팀입니다. 재고해 주십시오.”

“누가 입사 1년 차 된 신입사원을 믿고 B급 던전에 들어가겠습니까?”

졸개들은 나를 쳐다보지도 않은 채였다. 풋내나는 애송이와는 말 섞기도 싫다는 거겠지.

그사이 나는 회의실을 천천히 둘러봤다. 아군과 적군을 확실히 하기 위해서.

아군은 한석훈과 김석환, 내가 속한 A팀과 나와 아락투스 던전을 함께 들어갔던 몇몇 B팀원들. 적군은 그 외 나머지 전부.

아니.

생각을 달리해야 한다. 지금만큼은 아군이 없다고 봐야 했다. 스스로를 증명하는 자리다. 그 증거가 명확했다.

평소라면 나를 변호하고 나섰을 김석환과 한석훈마저도 그저 조용히 나를 응시하고만 있다.

온전히 내가 증명해야 하는 자리였다.

그래.

증명하라면 증명해야지.

“내가 누구의 인정을 받아야 하는지 말해봐 이현수.”

내게 인정 운운하던 녀석의 이름이 이현수다. B팀의 부팀장이자 최근 백인호가 힘껏 밀어주고 있는 헌터. 차기 A급이 될 것이 확실시되는 스타 헌터였다.

“…뭐? 너 뭐라고 했냐? 다시 말해봐.”

“내가 누구의 인정을 받아야 하냐고.”

한동안 눈을 깜박거리던 이현수가 코웃음을 쳤다.

“하. 이 새끼 이거 이때까지 가면 쓰고 다녔네? 선배님, 선배님 하면서 굽실댈 때는 언제고.”

“굽실댄 건 너지. 대결 한 번만 해달라고 문자 한 거. 여기서 다 까발려줘? 아, 너희 팀장님한테는 비밀이라고 했었나?”

“…너 진짜 미친 거냐?”

그렇게 말하는 이현수의 낯빛이 사색으로 물들어갔다. 정면을 보자 백인호가 나와 이현수를 번갈아 가며 쳐다보는데, 눈빛만으로 사람을 목 졸라 죽일 것처럼 보였다.

다른 사람들의 얼굴도 볼 만했다. 얘가 오늘 뭘 잘못 먹었나, 하며 인상을 잔뜩 찌푸렸다.

원래 회사에서 내 이미지가 그랬다. 착하고, 우쭐대지 않고 겸손한 이미지.

그런데 오늘부터는 그것들 모두를 버려야 한다. 겸손을 떨어대는 순간 눈앞의 것들에게 물어뜯길 것이다. 이곳까지 올라오면서 다짐한 것들을 되새기면서 말했다.

“아니면 지금 한 판 붙어서 증명해줄 수도 있고.”

쐐기를 던졌다. A급에 올라선 나다. B팀에 있는 것들 중 순수무력으로 나를 이길 녀석은 아무도 없었다.

졸개들이 움찔하며 얼굴을 일그러트릴지언정 덤벼들지 못하는 이유였다.

그때쯤 백인호가 팔짱을 풀고 나섰다.

“왜. 나랑도 한 판 붙어 볼래? 그건 못 하겠어?”

못할 게 뭐 있다고.

어깨를 들썩이며 말했다.

“원하신다면.”

“이태진!”

“놔둬요. 앞뒤 없이 까부는 것 같은데 세상 무서운 것도 알려줘야지. A급 올라섰다고 세상이 네 거 같지? 따라와. 내가 오늘 제대로 교육시켜줄 테니까.”

백인호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 또한 물러서지 않았다. 당장 일어나 백인호의 눈을 응시했다. 우리 둘의 시선이 공중에서 맞부딪쳤다.

알고 있다. A급 중에서도 최상단에 위치한 백인호다. 지금 나와 백인호가 맞붙는다면 백 중 구십은 내가 지겠지. 불 보듯 뻔하다.

그런데 그런 계산이 섰다. 백인호와 싸워서 지는 그림이, 이 자리에서 물러나는 것보다 훨씬 보기 좋다고.

내가 아는 최태성은, 그리고 일성은 이런 이미지를 더 좋아한다. 부러질지언정 굽히지 않는 기세.

나로서는 져도 이득이고, 이기면 대박이었다. 뭘 해도 나는 손해가 없었다.

“이 애송이 새끼가.”

문득 혀를 차던 백인호가 다시 자리에 앉았다. 바람 빠진 웃음을 흘리면서였다. 그러나 끝내 숨기지 못한 짜증이 백인호의 얼굴을 스쳐 지나갔다.

백인호도 알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애송이라 부르는 놈 조금 주물러줘봤자 득될 게 없다는 것을.

“푸핫!”

앞에서 영화 감상하듯 우리를 지켜보던 플래시가 대뜸 웃음을 터트렸다. 그리고는 작게나마 내게 엄지를 날려왔다.

팽팽해진 긴장감이 그 순간 풀어졌다.

“멤버 구성은 생각해 본 적 있고?”

최태성이 맥을 끊듯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내게 말했다.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테스트를 통과했다는 말과 다르지 않았다.

백인호의 허탈한 한숨을 무시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있습니다.”

솔직하게 답했다. 팀장이 된 지 이제 겨우 한 시간도 안 됐지만, 그 전부터 구상해 온 것들이 있었다.

“그래서 부탁드리고 싶은 게 있습니다.”

“어떤?”

“새로운 팀에 들어갈 팀원들. 제 입맛대로 꾸리고 싶어서요.”

“그렇게 해.”

곧장 최태성의 허락이 떨어졌다. 여기까지는 문제없다. 말에 박차를 가했다.

“일성 외부의 사람일 수도 있습니다. 등급이 C, D등급일 수도 있고요.”

“그래. 그런 건 따로 보고할 필요 없고. 또 불편한 점 있으면 바로 말해.”

“네.”

단칼에 거절할 줄 알았는데 너무 쉽게 받아들여진다. 끝에는 어지간한 건 다 지원해 준다는 말도 덧붙였다. 즉, 내게 힘을 팍팍 실어준다는 말이었다.

테스트를 통과한 대가였다. 칼을 쥐여줄 테니 마음껏 휘두르라는 뜻이었다.

때문일까. 백인호를 포함해 아직 나를 인정하지 못한 나머지 녀석들이 곧장 눈썹을 꿈틀거렸다.

특히나 백인호는 내가 B팀의 장이 된 것보다, 최태성의 라인에 올라탄 것이 더 분한 듯했다.

“회장님!”

“상 줄만 하니까 상 주는 거야. 화신 때도 그렇고, 이번 던전 공략에서도 그렇고.”

“팀장 된 것만 해도 과분합니다. 이건 불합리하지 않습니까.”

잠자코 있던 김석환이 그때 나섰다.

“뭐가 불합리해? 줄만 한 것 같구만. 이태진 아니었으면 너도 나도 사표 쓰고 나갔어야 해. 저놈이 전주 던전에서 살린 인원을 생각해라.”

“그래서 팀장 자리 만들어 준거잖아요! 아닌 말로 정철규, 윤진아가 거절했으면. 그다음 순서는 박지현이 맞죠. 제 말이 틀렸어요? 박지현. 네 생각도 그래? 저놈한테 팀장 자리 뺏기고도 가만 있을거야?”

A팀 박지현.

천재들만 모인 일성답게 나와 같은 나이에 A급을 달성한 천재였다. 헌터로서 경험만 따져도 나보다 10년은 더 많은 선배다.

더군다나 그 희귀하다는 최상위 힐러에 속했다고 하니. 비록 여자라고 할지라도, 정통성으로 치자면 박지현이 B-2팀의 팀장에 올라서는 게 맞다.

아마 그랬다면 지금 같은 청문회는 열리지도 않았을 것이었다.

그래서였다.

그녀는 이 자리에 오기 전 내가 가장 경계하고 있던 인물이었다.

한 방 먹었다. 빌어먹을 백인호가 이 타이밍에 박지현을 들먹인 건 최고의 한 수라고 할 만했다.

모두의 시선이 박지현에게로 향했다. 일성의 공주님이라는 별명이 맞았다.

금발을 길게 늘어뜨린 박지현은 그 많은 눈짓에도 태연했다.

“팀장요?”

박지현이 귀족처럼 우아한 몸짓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더니 천천히 내 쪽으로 다가온다.

저 여자 왜 저래?

표정이 심상치 않았다. 웃는 건지 인상을 쓰고 있는 건지 분간이 가지 않았다.

어떡하지?

확실한 건, 백인호에게 들이받듯 굴면 안 된다. 그래서는 역효과가 날 것이다.

그녀의 자리를 내가 빼앗은 것처럼 보이면 안 되는….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던 그때. 내 옆으로 다가온 박지현이 나긋나긋하게 말했다.

“팀장 자리는 필요 없고. 난 오히려 이쪽한테 관심이 있는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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