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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터는 미래를 본다-87화 (87/170)

87화. 개안.

우연에 우연이 겹쳤다. 방금 내게 죽은 놈은 엄연히 B급 각성자였다. 아무리 힘의 격차가 있다 한들 이렇게 쉽게 죽일 수는 없었다.

대상으로 특정한 놈이 전투 중이라서, 시타둠 교도들이 끈질기게 시선을 방해하고 있어서, 놈이 나를 경계할 틈이 없어서.

겹겹이 겹친 우연 속에 예상치 못한 공격이 들어갔다.

그러나 그 모든 것들을 감안해도 고양감이 치솟았다. 능력의 한계를 뚫은 기분이었다. 직접적인 스탯을 올린 건 아니었지만 활용도를 높였다는 측면에서 그만한 가치가 있었다.

투시를 통한 체내 장기를 건드린다니. 이와 연계한 활용방안이 머릿속에서 주르륵 떠올랐다.

아마 시스템이 정해놓은 힘이었다면 분명 이런 메시지가 떴을 것이다.

[스킬 : 아락투스의 중력마법의 숙련도가 상승했습니다! B→A!]

“감사합니다. 이런 식의 활용은 생각도 못 했던 거라서. 잘 쓰겠습니다.”

진심을 담아 고개를 숙였더니 민수정이 되려 인상을 찌푸렸다.

“나 놀리는 거니?”

“예?”

민수정은 입을 뻐끔거렸다. 할 말이 있는데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될지 모르겠다면서.

그쯤에서 전투는 막바지로 흘러가고 있었다.

“전원 앞으로! 죽음을 두려워 하지마라! 시타둠께서 우리와 함께하신다!”

“우워어어!”

전세가 교단 쪽으로 기운 모습이었다. 멕시코 측은 대장을 제외하고는 차례차례 부하들이 무너지고 있었다.

광신도들의 죽음을 각오한 공격은 불법 각성제라도 먹은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살벌했다. 멀리서 보는 나까지 살 떨릴 정도로.

“전투는 끝난 것 같네요.”

“전투고 나발이고.”

민수정을 안전지대로 이동시키려는데 그녀가 내 손을 붙잡았다.

“어떻게 한 거야? 투시 스킬이 있었나? 아닌데. 그런 마력 패턴은 확인 못 했는데.”

기다렸다는 듯 우수수 질문이 쏟아졌다. 전투상황은 안중에도 없어 보였다.

“대답 좀 해줄래? 나 지금 심각한데.”

민수정이 내 손을 덥석 잡았다. 자세히 보니 손은 물론이고 눈 밑까지 파르르 떨리고 있다.

처음 봤을 때처럼 여유로운 얼굴도, 은근히 나를 무시하는 태도도 아니었다. 자존심이 잔뜩 구겨진 아카데미의 총장이 앞에 있었다.

“비밀입니다.”

이걸 뭐 어떻게 설명하라고. 그냥 되니까 한 건데.

한참을 뚫어져라 쳐다보던 민수정이 문득 허탈한 웃음을 터트렸다.

“…할아버지가 네 얘기를 그렇게 한 이유를 알 것 같다. 역시 늙은이가 감은 좋아.”

의미심장한 말을 하더니.

후우웅!

민수정이 천천히 마력을 일으켰다. 양으로 보나 깊이로 보나, 한 방에 남은 것들 전부를 날려버릴 의도인 듯했다.

아직 한창 전투중인 팔장로를 보며 순간 고민이 됐다.

저것들을 살릴까 말까.

알량한 동정심 따위가 아니다. 어느 쪽이 내게 더 이득이 될지를 계산하는 것이다. 과거의 나라면 고민할 것도 없이 싹 다 죽이고 봤겠지만.

앞으로 있을 갖가지 사건들 속, 내 추종자가 있다는 건 아무리 생각해도 좋을 것 같았다.

-도망가라. 살려줄 테니.

그렇게 음성을 날린 것으로 충분했다. 힐끔 나를 보던 팔 장로가 감격에 겨워했다. 울먹이던 팔 장로가 남은 교도들에게 외쳤다.

“후퇴한다!”

말이 끝나자마자였다. 팔 장로의 정면에서 기이한 징조가 일어났다. 생전 처음 보는 마력 패턴이었다. 바로 다음이었다.

쩌적!

몬스터 게이트처럼 세로로 길게 찢어진 공간이 펼쳐졌다. 놀라운 이적이었다.

동시에 머릿속에서는 방금 펼쳐진 공간 마법의 마력 패턴이 뇌리에 각인됐다.

아락투스 마법의 숙련도가 올라가면서 가능한 일이었다. 어쩌면. 아락투스의 마법사전을 통하지 않더라도 마법을 배울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명령이 떨어지면 그대로 이행하는 로봇처럼 교도들이 게이트 안으로 우르르 들어갔다.

어디로 향하는지 익히 예상이 갔다. 놈들의 거점이라고 할 수 있는 신전.

“어어?”

한껏 힘을 모으던 민수정이 어처구니없다는 얼굴로 교도 무리를 쳐다봤다.

“뭐야 이게. 쟤, 쟤들 왜 저래?”

민수정이 황당하다는 얼굴로 사라진 게이트를 손짓했다. 그러고는 나를 쳐다본다.

“설마 네가….”

“했을 리는 없죠. 작전상 후퇴…같은 게 아닐까요?”

나 또한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으며 어깨를 몇 번 으쓱였다. 최대한 능청스럽게. 가만 보면 레벨업하는 만큼 연기력도 느는 것 같다.

한참을 나와 사라진 게이트 쪽을 왔다 갔다 쳐다보던 민수정이 한숨을 푹 쉬었다.

“안 되겠다. 너희가 대신 죽어라.”

콰드드득-

민수정의 몸에 잔재하던 마나 덩어리가 멕시코 놈들에게 쏟아졌다.

안 그래도 헥헥거리던 놈들이 일시에 굳었다.

특히 대장으로 보이는 놈은 헐떡거리는 호흡을 가다듬지도 못한 상태로 눈만 부릅뜨고 있었다. 즉, 놈들로서는 눈뜨고 죽음만 기다리고 있는 꼴이었다.

싹둑!

허무하게 임무를 완수했다.

***

“가타부타 귀찮은 건 딱 질색이라 쓰잘데기없는 건 넘어가고.”

어지러운 강당 내에는 민수정과 나밖에 없었다. 그녀는 덩그러니 놓인 수십 구의 시체에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끝내 비서마저 물린 민수정이 나를 쳐다봤다. 아니, 쳐다보는 건 임무가 시작했을 때부터였지.

흥미로운 애송이를 바라보던 것에서, 경계대상으로 쏘아보는 것만 달라졌다.

“너 혹시 회사 차릴 생각 없니?”

이런 말을 들을 줄은 몰랐는데. 그것도 아카데미 총장한테는 더더욱. 한동안 아무 반응 못 하고 가만있자 민수정이 저 좋을 대로 해석한 모양이었다.

“이미 이곳저곳에서 비슷한 제안 받아봤지?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자존심 상하네. 내가 푸쉬해 준다는데 고민씩이나 하고.”

BTO를 치르기 전, 몇몇 정체불명의 사람들이 찾아오기는 했었다.

혹시 자금을 대주면 독립할 생각이 없느냐고. 그때마다 단칼에 거절해 왔었고.

“너무 갑작스러워서.”

“생각은 있는 거지?”

당연하다. 그게 모든 헌터들의 꿈일 테니까. 나만 해도 언젠가 최태성처럼 기업을 일구는 게 목표다.

같잖은 인터뷰도 참여하고, 마뜩잖은 행사에도 몇 번 나간 게 그런 이유 때문이었다.

고개를 끄덕이자 민수정이 한시름 놨다는 얼굴로 한숨을 쉬었다.

“민정락 알지?”

“예. 알긴 아는데….”

그녀가 동네 똥개 부르듯 여당 4선 의원을 꺼냈다.

“그 할아버지가 요즘 경계하는 게 있어서 말이야. 처음에는 뭔 개소리를 하나 했지. 그런데 찾아보니까 내가 보기에도 영 심상치 않더라고.”

“무슨 말입니까?”

“각성자 협회.”

협회?

되물을 새도 없이 그녀가 말을 이었다.

“대현이 협회 쪽에 붙었어. 대현 밑에 있는 잔잔바리들도 당연히 협회 밑으로 갔고. 가만 보니 어지간히 규모 있는 기업은 전부 그런 제안을 받았더라고. 천문학적인 돈을 안겨주거나, 혹은 원하는 아이템을 제안하거나. 대신 의결권을 넘기라 이거지. 어때. 넌 이게 정상적이라고 생각하니? 협회가 민간기업에 관여한다?”

천년대계니 어쩌니 하던 협회장의 말이 곧장 떠올랐다. 모든 각성자를 협회 아래에 둔다던 그 헛소리.

“국회에서도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어. 손정연 그 늙은이가 노망이 나서 쿠데타를 생각하는 건지, 아니면 다른 뜻이 있는 건지 아직 확신이 서질 않았거든. 손정연은 거기에 완강하게 부정 중이고.”

“이걸 저한테 말해주는 이유가 뭡니까?”

민수정이 살짝 웃더니 대답했다.

“그 와중에 정치 짬밥 좀 먹은 너구리들이 생각해 낸 게 이거야. 협회를 견제하기 위한 기관을 만들자는 거지. 정부산하로 넣기에는 협회 눈치가 이만저만이 아니라 자본은 민간에서 대는 쪽으로 하고. 감동해도 좋아. 민정락 의원이 그 기업 경영자 후보 중 하나로 너를 뽑았거든.”

“저보고 바지사장이 되라고요?”

“바지도 바지 나름이지. 천문학적인 지원이 들어갈 거다. 일성에 있을 때와는 비교도 안 될걸? 돈이든, 부릴 수 있는 사람이든. 하다못해 같잖은 명성까지 말이야.”

그럴싸하게 들리기는 한다. 아니, 절호의 찬스였다. 무려 네 번이나 국회의원 해먹고 있는 양반이 나를 지원해준다고 한다. 돈을 끌어모으는 것쯤은 일도 아닐 테지.

짧은 시간 고민해 봤다. 이 제안을 수락했을 때와 거절했을 때를.

눈 딱 감고 허수아비 노릇 몇 번 해주면 취할 수 있는 이득이 한두 가지가 아니기는 하다.

그런데. 이상하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왜인지에 대해 생각해 보면 답은 뻔했다. 일성 참사. 그 하나가 발목을 잡고 있었다.

눈만 감으면 한석훈이 죽는 모습이 그려진다. 예전에는 분명 그런 생각을 했었다. 나만 일성에서 사라지면 참사는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그런데 과연 진짜 그럴까?

정말 나 하나가 일성에서 사라진다고 그 사건이 벌어지지 않을까?

지금에 와서는 무엇도 확신할 수 없었다. 아이러니하게도, 강해질수록 더 그랬다. 심지어 지금 내가 신념이라 부르는 생각들마저도 확신할 수 없는 지경이다.

불과 1년 전만 해도 기필코 죽이고 봤을 사이비 교도들을 살려준 것부터, 이미 나는 전과 다른 사람이 돼 있었다.

예상했듯, 이런 순간에는 ‘그것’이 나타나지 않는다. 더군다나 지금만큼은 나 또한 놈에게 도움받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어차피 후회할 것이라면,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한다.

결심했다.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일성에서 일어나는 참사를 막아보겠다고.

그런 미래를 봐놓고도 같은 길을 가냐고 욕하지 마라. 분명히 바꿀 테니까. 그런 자신감이 있었다.

“거절할게요.”

“똑똑하네.”

뭐?

“그래. 협상은 그렇게 해야지. 무슨 바지 좀 입혀 주는 걸로 차기 S급한테 족쇄를 씌우려고 해. 잘 생각했어.”

“예?”

“이거 수락했으면 정치권 목줄 달고 이리저리 휘둘렸을 거야. 선배 헌터로서는 잘했다고 칭찬해주고 싶어서.”

민수정이 씨익 미소를 지었다. 아까보다 한결 가벼운 얼굴이었다.

“그럼 이만 가봐. 볼 일 끝.”

그러더니 나를 쫓아냈다. 바쁘니까 다시 너희 회사로 돌아가라며. 강당에 쓰러진 시신은 자기가 알아서 처리한다는 말이 마지막이었다. 마지막까지 종잡을 수 없는 사람이었다.

***

회사에 도착하자마자였다. 일주일도 아니다. 삼 일 만에 임무를 완수했다. 그러고도 돈은 더 벌어왔다.

그래서일까. 사람들의 표정이 묘했다. 더 이상한 것은 사원들의 태도였다.

“수고 많으십니다.”

마치 상관을 대하듯 나를 향해 고개를 꾸벅 숙이는데 무슨 일인가 했다. 화신을 무너뜨렸을 때도 이런 대우는 못 받았는데.

“부팀장님이시네.”

“네?”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지금 지나가는 남자는 나와 자주 농담 따먹기를 하던 C팀의 원거리 딜러였다. 그런데 지금은 고개를 꾸벅 숙이며 존칭을 써 왔다.

“누가 부팀장인데요?”

“예? 누구냐니요?”

원거리 딜러가 눈을 꿈벅거렸다.

“어이쿠 우리 부팀장님!”

언제 나타났는지 모를 한석훈이 어깨를 툭툭 쳤다. 아주 흐뭇하다는 듯 내 옷을 가지런히 정리해주기까지 했다.

“부팀장님? 제가요?”

“뭐야. 못 들었어?”

한석훈이 스마트폰을 들었다. 어떻게 이걸 아직 확인 못 했냐는 말을 덧붙이며.

“공고. 어쩌구저쩌구 자질구레한 내용은 스킵할게. 결론은 B-2팀이 신규창설 됐고, 이태진이 부팀장이라는 내용.”

그러면서 인트라넷이 켜진 휴대폰을 내게 건네왔다. 보기 전까지 반신반의했는데.

-B-2팀 부팀장, 이태진.

진짜 그렇게 적혀 있었다. 민수정에게 독립 제안을 받았을 때보다도, 어째선지 지금이 더 떨린다.

“뭘 그렇게 놀라? 때 되면 진급하는 거지.”

옆으로 다가온 최찬규가 싱글벙글 웃으며 말했다. 그러더니 흘끔, 자신도 C팀 팀장이 됐다며 자랑을 해대는데 지금 내게는 그런 것들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B팀 부팀장이라니.

이거 꿈 아니지?

생각해보면 최찬규의 말이 틀린 건 아니다. 레벨로만 따지면 충분히 B급 던전에서 부팀장을 맡아도 손색이 없기는 하다. 그래, 레벨로만 따졌을 때는.

그런데 그걸 빼면 가진 게 없다.

아직 던전 내부에서 오더할 능력도 갖추지 못했다. 이 결정을 내린 게 누군지는 몰라도 아주 단단히 미친 게 분명했다.

“부, 부팀장님!”

그때 저 멀리서 김현주가 뛰어왔다.

왜. 또 뭔데.

“지금 이것 좀 확인하셔야 할 것 같은데요.”

그때 김현주가 건네준 휴대폰에는 더 어처구니없는 말이 적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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