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6화 경호 (5)
그러고 보니 이것들이 나를 부르는 호칭이 교주였다.
마녀 일 장로도 그렇고 심지어 나를 죽이려 했던 팔 장로조차도 교주니 소교주니 했었다.
이제야 보였다. 아까부터 안절부절못하던 여자의 얼굴은 공격을 준비하던 게 아니었다. 여자는 날 두려워하고 있었다.
그러는 한편, 저 여자가 육성으로 내게 교주라 부르면 어떻게 될지를 생각해 봤다.
생각할수록 가관이다.
BTO를 통해 쌓은 명성은 물론이고 서울역의 영웅이라느니, 제2의 검신과 같은 호칭들도 순식간에 거품처럼 사그라들겠지.
대신 협회의 상징과도 같은 감찰과에서 포승줄을 들고 나를 잡으러 올 것이다.
당장에 민수정도 염력을 일으켜 내 모가지를 비틀지 않을까?
그렇듯 시스템을 신으로 섬기는 행위는 국회에서도 초당적인 사안이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긴장되지는 않는다. 신성한 파괴자의 롱소드에 비친 내 얼굴도 다르지 않았다. 같잖은 연기가 아니라 실제로도 그랬다.
그러면 뭐 어쩌라고.
2년이었던 내 수명이 1년으로 줄어든 이후부터였다. 아무리 노력한다 해도 벗어날 수 없다는 기분이다.
그러자 마음이 가벼워졌다. 이렇게 죽나 저렇게 죽나.
마음이 가벼워서일까.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위기는 기회라고. 어쩌면 무탈하게 사건이 끝날 수도 있겠다 싶었다.
시선은 여전히 덜덜 떨고 있는 여자를 향해두면서 말했다.
“제가 저것들이랑 대화해 볼게요.”
“네가? 왜?”
“그냥요. 혹시 모르잖아요. 그냥 가라고 하면 갈지.”
민수정의 만류를 뿌리치고 성큼성큼 강당의 입구 쪽으로 걸어갔다. 장내의 모두가 어어하며 어쩔 줄 몰라 했다.
민수정은 멀어지는 나를 보며 머뭇거리고 있었고, 반대로 교단 쪽에서는 다가오는 나를 죽일 듯 노려보면서도 어쩔 줄 몰라 했다.
특히나 가장 뒤에 있는 여자는 기겁하며 주춤댄다. 아무리 봐도 나한테 적의를 가지고 있는 건 아닌 것 같다.
단전의 마나를 끌어모았다. 음성에 마나를 싣는 게 아니다. 마나에 음성을 싣는 느낌으로 입술을 뗐다.
-이렇게 하는 건가?
입술은 움직이는데 소리는 전파되지 않는다. 오로지 여자의 귀에만 내 음성이 들어가는 것이다.
원리는 대충 알겠다. 숙련도가 높아지면 입을 벌리지 않고도 할 수 있지 않을까. 꼭 무협지에서 본 전음 같은데.
잡생각을 지우며 여자를 바라봤다.
-너는 누구지?
그러면서 말투를 바꿨다. 최대한 미래에서 봤던 기억을 끄집어냈다. 정말 내키지 않지만, 교주가 된 나를 대입하면서였다.
-거기 서서 대답해.
여자는 당장 무릎을 꿇으려다 내 눈치를 보며 오들오들 떨어댔다.
-시타둠은 위대하시다! 파, 팔 장로 유정화가 위대하신 교주님을 뵙습니다!
-팔 장로?
-예! 교주님!
고개가 갸웃거려진다.
-팔 장로가 두 명이었나?
-아, 아니옵니다! 교주님을 보위하는 장로직은 오로지 여덟뿐입니다!
그러면 얼마 전 나를 공격했던 그 창백한 피부의 남자는.
여자는 눈치가 빨랐다. 내가 뭘 물으려는지 알아채고 먼저 입술을 열었다.
-존귀하신 교주님께 어떻게 거짓을 고하겠습니까? 전 팔 장로가 감히 교주님을 시기해 불경한 짓을 저질렀다 알고 있습니다. 일 장로가 교주님을 대신해 단죄한 후, 제가 장로직에 올라섰습니다.
팔 장로라 자칭한 여자가 허겁지겁 변명했다.
유정화가 말한 불경한 짓.
그때가 떠올랐다. 소교주라 부르더니 나를 흠씬 두들겨 패고 침대 위에 가지런히 올려뒀던 사건 말이다.
이제 보니 아귀가 맞아 떨어진다. 전혀 고맙지 않지만, 돌아가는 정황상 일 장로가 나를 살려준 듯했다.
그 와중에 유정화는 내가 원하는 게 어떤 것인지를 깨달은 모양이었다.
-제 불경을 용서하지 마십시오!
그러던 그녀가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손에 쥔 스태프도 꾹 잡는데, 비록 나와 눈을 마주치지는 못했어도 남들이 보기에 우리는 대립하는 것처럼 보일 것이다.
비록 적이라지만 방금의 행동은 칭찬해 주고 싶을 정도다.
-이 남자도 장로였나?
굴러다니는 남자의 시신을 보며 말했다.
-놈은 장로를 보좌하는 사제직에 있었습니다. 교주님! 감히 교주님께 칼을 겨누었으니 놈의 처분은 응당 죽음이 마땅했습니다.
-…전부터 교주, 교주. 왜 나를 교주라 부르는 거지?
사실 진짜 궁금한 건 이거다. 잔챙이들의 반응을 보면 저것들은 나를 모르는 눈치였다.
당장 죽일 듯 노려보는 시선들만 봐도 그렇고. 사제라고 불린, 이미 죽어버린 남자도 마찬가지였다.
그렇다면 장로 직위를 가진 여덞 명만 나를 두고 교주 놀이를 하고 있다는 건데.
-교주님은 시타둠께서 약속하신 구원자입니다.
-무엇을 근거로?
-경전에 기록된바, 시타둠께서 예비하신 구원자에 합당합니다. 이것에 이견은 있을 수 없습니다.
-내가 네놈들을 죽이고 다녀도?
굳이 일부러 한 번 더 떠봤다. 어디까지 반응하나 싶어서.
-저희 모두 시타둠과 교주님께 종속된 자들입니다. 저희를 어찌 쓰시든 교주님이 이루실 큰 뜻의 조각으로서 생을 다 할 수만 있다면, 그저 황송할 따름입니다.
허. 21세기 대한민국에 이런 사상이 남아 있다니. 정말 놀라운 따름이다.
-그 경전이라는 거 가져와 봐.
뭐라 적혀 있길래 저것들이 나를 특정해서 교주로까지 추대하는지 궁금했다. 필히 ‘그것’과 관련 있으리라는 확신도 함께.
-경전은 교좌 앞에 놓여 있습니다. 부디 저희와 함께 동행해 주신다면…!
팔 장로가 열렬한 눈빛을 보내왔다. 호의를 넘어선, 그래. 이렇게 말해도 될지 모르겠지만 전능하신 교주를 만난 기쁨에 어쩔 줄 몰라 하는 것 같았다.
내가 혐오하는 감정 중 하나 말이다. 그럼에도 내 마음에 큰 동요가 없는 것은, 되려 이것들을 어디에 써먹을 수 있을까를 고민하는 것을 보면.
나도 이 세계에 어지간히 물들었다는 뜻이다.
조만간 나를 찾아오라고 말하려던 그때였다.
콰앙!
큰 폭음과 함께 몇 겹의 강화마법이 중첩된 대강당의 문이 송두리째 날아갔다. 거친 바람이 나를 훑었다.
바깥의 풍경이 훤히 보이던 것도 잠시, 이것도 시타둠 교도들의 짓인가 싶어 팔 장로를 쳐다보는데 녀석도 어안이 벙벙한 것은 마찬가지였다.
뿌옇게 올라간 먼지가 흩어지고 나타난 것은 웬 중남미 계열의 남자들이었다.
웬 놈이냐!
…그런 말은 필요 없었다. 놈들의 적의 어린 시선이 내 뒤에 있는 민수정을 특정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원래 여기에 왔던 목적. 멕시코 청부 살인업자들의 등장이었다.
그러고 보면 민수정이 한 말이 맞았다.
놈들은 유치하게 독살 따위를 준비하지 않았다. 화끈하게, B급 각성자 일곱과 A급 각성자 하나를 보낸 것이다.
때마침 뒤쪽에서 꽥하는 고함이 터졌다.
“진짜 오늘 개 지랄맞네. 야 이 새끼들아. 문을 부수긴 왜 부숴? 이게 얼마짜린데! 그냥 노크했으면 열어줬어!”
민수정이 이게 얼마짜린 줄 아냐며, 버럭버럭 고성을 터트렸다. 전부터 느끼는 거지만 이 여자도 어지간히 겁이 없는 것 같다.
어쨌든.
차라리 잘됐다 싶었다. 시타둠에게 쏠린 관심을 돌릴 필요가 있었다.
앞으로 나서면서 말했다.
“동공에 힘 좀 풀자. 누가 보면 사람 하나 죽이러 온 줄 알겠다.”
곧장 민수정을 뚫어져라 노려보던 놈들의 시선이 내 쪽으로 바뀌었다. 저들끼리 중얼거리던 것도 잠시, 고개를 갸웃하던 놈들이 눈을 부릅떴다. 특히 시가를 물고 있는 대장의 눈에 불꽃이 튀었다.
“이태진.”
대장이 어설픈 발음으로 내 이름을 불렀다. 얼씨구. 태평양 너머에서 온 놈이 내 이름도 알고. 감격할 일이었다.
놈이 그다음으로 지껄이는 소리는 알아듣지 못했다. 대충 느낌만 생각해 보자면 네 이름을 들어 본 적 있다, 여기서 만날 줄은 몰랐다 등등의 쓸데없는 말 같았다.
뒤이어 대장 놈이 내게 손짓한 직후였다. 살수 여덟이 동시에 고개를 끄덕인 순간.
피슛-!
놈들이 내 앞으로 돌진했다. 팔방으로 달려드는 B급 일곱과 하늘에서 쏟아지는 대장 놈은, 이전에도 수없이 합을 맞춰본 듯했다. 어디에도 빈틈이 없다.
그러면 힘으로 부수지 뭐.
그렇게 롱소드에 오러를 쑤셔 넣었을 때였다.
-교주님!
어느샌가 달려온 팔 장로가 내 앞에서 팔을 벌렸다. 짧은 시간 청부업자들과 같이 베어버릴까 생각하다가 그만뒀다. 팔 장로 앞에 나타난 반구형의 방어막을 보고 나서였다.
콰앙! 콰과광!
방어 스킬의 한 종류로 보였다.
멕시코인 여덟이 뿌려대는 살벌한 공격이 이곳저곳에서 터져대는데, 하나도 빠짐없이 팔 장로가 만든 방패 앞에 막혀버렸다.
붉고 푸른 마나 파편만 흩날릴 뿐이었다.
“What the…!”
공격한 당사자들마저 놀랄 정도의 방어막이었지만. 스킬의 반동으로 진탕이 돼버린 팔 장로의 내부가 내게는 훤히 보였다.
“커륵!”
쯧, 하고 혀를 찰 무렵 팔 장로가 각혈했다. 그러면 그렇지.
-교주님! 괜찮으십니까?
그러는 와중에도 팔 장로는 내 안위부터 챙겼다. 이걸 감동해야 할지 헷갈릴 지경이다.
뒤이어 팔 장로의 살벌한 음성이 교도들에게 퍼졌다.
“다 죽여!”
곧장 그녀를 호위하듯 옆에 붙어 있던 B급 교도들이 무기를 들고 달려갔다.
“우와아아! 시타둠은 위대하시다!”
“위대하시다!”
나를 죽이려는 멕시코 놈들은 졸지에 사이버 광신도들을 상대하게 됐다.
콰득! 콰드드득!
죽고 죽이는 혈투가 이곳저곳에서 벌어졌다. 거센 돌풍이 휘몰아쳤지만 이 정도는 괜찮다. 전투의 여파를 못 견딜 아카데미 풋내기들은 뒷문으로 빠져나간 지 오래였으니.
한껏 강당 입구를 바라보며 짜증 내던 민수정도 어이없는 상황에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슬그머니 뒤로 빠져 민수정 옆으로 다가갔다.
“이게 뭐니?”
“글쎄요.”
“저 여자는 뭔데 갑자기 쟤들이랑 싸운대?”
“글쎄요. 좋은 게 좋은 거 아닐까요?”
어깨를 으쓱하고 다시 전투로 눈길을 돌렸다. 남의 집 불구경이 제일 재밌다더니. 전투가 재밌게 돌아가고 있었다.
팔 장로 쪽이 밀린다 싶으면서도 잘 버티고 있었다. 사이비 특유의 독기 때문인가?
그래도 이대로 가다가는 팔 장로가 질 것 같기는 한데.
“음?”
따끔한 시선이 이어졌다. 옆을 보자 민수정이 여전히 나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이럴 때 좋은 방법이 있다. 글쎄 하는 얼굴로 어깨를 으쓱이면 된다. 이제껏 가장 많이 써먹은 수법이고, 효과도 좋다.
“……?”
봐라.
그러면 이렇게 멍청한 얼굴로 잠시 있다가, 골똘히 눈을 굴리며 멋대로 해석하기 마련이다.
뭐 어쩔 건데. 내가 모른다는데.
“그렇게 바보같이 서 있지 말고 같이 싸우죠. 적의 적은 동료라던데.”
민수정의 황당한 얼굴을 뒤로하고 심장 속 고리를 맹렬히 회전시켰다.
쿠드득!
강력한 인력이 놈들 중 하나를 특정해 바닥으로 내던졌다.
“억!”
처음 당해보면 대부분이 이런 반응이다. A급도 어쩌지 못한 마법을 겨우 B급 따위가 막을 수 있을 리가.
많이 도와줄 필요도 없었다. 팔장로가 보인 호의에는 이 정도면 충분했다.
“다 좋은데. 염동력 기반 스킬 치고 꽤나 과격해.”
생각을 다 정리한듯한 민수정이 의기양양한 얼굴로 다가왔다. 난데없이 무슨 훈수를 두나 했더니.
“파워도 좋고 정확도도 좋은데. 네 염동력에는 디테일이 없어. 괜히 걱정했네. 나랑 같은 스킬인 줄 알고. 나보다 하위호환이었어.”
콰득!
민수정의 말이 끝나자마자였다. 한창 전투를 벌이던 남자 중 하나가 풀썩 쓰러졌다. 고통스러운 표정과 함께 제 심장을 움켜쥐면서였다. 사인은 심장 폭발이었다.
“보호 마법은 그렇다 쳐도 가죽은 어떻게 뚫고 들어간 겁니까? 투시라도 한 건 아닐 테고.”
아니지. 굳이 투시까지는 필요 없겠구나. 옅게 퍼트린 파동을 한 사람만 특정시킨 후에 다시 두껍게 바꾼 마나 파장을 통해 체내 장기 위치를 확인한 후….
백문이 불여일견. 해 보는 게 더 빠를 것 같았다.
“투시 맞는데? 너는 못 쓰는 기술… 어?”
콰직!
“이렇게 하는 겁니까?”
정확히 한 놈을 특정해 놈의 심장을 건드려봤다. 쿵쾅대며 세차게 피를 이동시키던 그것이 한순간에 터졌다.
눈으로 직접 본 게 아니다. 드론으로 촬영하듯 마나를 따라간 감각이 마지막으로 사진을 찍은 게 지금은 터져버리고 만 놈의 심장 한 가운데였다.
“하위호환 뭐라고요?”
영문을 몰라 하는 민수정에게 그렇게 물어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