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5화 경호 (4)
문득 뜨끔한 기분이 들었다. 이 사이비 놈들이 설마 날 찾아서 여기까지 왔다는 말인가?
A급에 올라선 이후부터. 내가 어디서 무얼 하는지는 일성 내부에서도 극비로 취급되고 있다.
때문에 내가 여기에 있다는 건 김석환과 최태성이 아니라면 누구도 알 수 없었다.
시타둠 교도 중 일성의 데이터 센터를 해킹할 능력자가 있다면 말이 달라지지만. 그것만큼은 고개가 저어진다.
일성의 데이터 서버는 협회조차 혀를 내두를 정도니까.
마나를 끌어 올리며 짧은 시간 놈들의 동태를 살폈다. 직후였다. 놈들의 눈깔이 민수정을 특정했다.
내가 아니라 민수정에게 볼일이 있었던 것이다.
“시타둠?”
그런데 민수정조차 그 이름을 처음 듣는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더 생각할 것 없었다. 몸을 뻗고 볼 일이었다.
빠른 속도로 졸업생들을 가로지르며 놈들 앞에 섰을 때였다.
위이잉-!
선두에 있던 C급 다섯의 전신이 붉게 물들어가기 시작했다. 본능적으로 멈칫하고 말았다.
겨우 C급이라 무시하기에는 심상치 않은 마나 기류가 그쪽에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척 보기에도 그랬다. 타들어 가는 도화선처럼 놈들의 안면이 붉다 못해 시뻘겠다. 마치 자폭을 준비하는 테러리스트 같은 비장한 표정은 또 어떻고.
머릿속에 비상등이 켜졌다. 직후에 일어날 일이 그려졌다. 이슬람 극단주의자들이 그랬듯 놈들이 제 한 몸 바쳐 현장을 쑥대밭으로 만들고 말 것이다.
어떡하지?
생각할 시간이 필요했다. 동시에 감각이 극도로 예민해졌다. 직후, 세상이 느려졌다.
터질 듯 붉게 타오르는 시타둠 교도들의 얼굴도, 어어 하며 나를 쳐다보는 졸업생과 교관들도, 동영상의 배속을 느리게 한 것처럼 보였다.
생체 시계를 극도로 빠르게 만든 효과였다. A급에 올라선 후 얻은 능력 중 하나. A급을 B급과는 차원이 다른 등급으로 상정하는 이유였다.
어쨌든.
느려진 세상 안에서 나와 같은 속도로 움직일 수 있는 건 셋뿐이었다.
민수정과, 그리고 제일 뒤에 있는 A급 두 놈들. 플레이트 아머를 입은 젊은 남자와 로브를 뒤집어쓴 젊은 여자였다.
이곳이 던전이라면 저것들이 보스몹이었다. 놈들 또한 즉시에 내 존재를 알아챘다. 걔 중 남자와 눈이 마주쳤을 때였다. 남자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방해하지 마라.’
그런 뜻이었다.
검신의 축복이 찰나에 보여주는 그림도 똑같았다. 놈들이 자폭하기 전에 죽이거나, 폭발을 온전히 나 혼자 감당하거나.
둘 다 환장할 선택지였다.
전자를 선택하기에는, 가장 뒤에서 느긋하게 상황을 지켜보는 A급 두 명이 심하게 거슬린다.
일격에 다섯의 목을 베는 건 어렵지 않지만, 그 후가 문제였다. 동시에 날아오는 온갖 스킬에 의해 나도 죽는 것이다.
폭발이 터진 후를 노린다면?
이제 갓 졸업을 앞둔 살갗 야들야들한 애송이들이 받아내기에는 C급 각성자 다섯의 자폭은 너무 가혹하다.
대부분이 죽을 것이다. 그렇기에 나홀로 화마를 감당해야 하는 것이다. 아니, 정확히는 혼자가 아니라 나를 지키는 태양신과 함께.
결정은 빨랐다. 검집에서 빠져나온 롱소드가 새하얀 검신을 드러냈다.
또한 최대 감각을 오래 유지한 부작용이 찾아오고 있었다.
압력 프레스가 내 머리를 짓누르는 것 같았다. 더 이상 이 상태를 유지했다가는 뇌가 터져버릴지도 모른다.
바짝 조였던 생체 시계를 원래대로 돌린 후였다.
“시타둠은 위대하시…케륵!”
싹둑!
그게 다섯 테러리스트의 유언이었다. 일렬로 늘어선 놈들의 몸이 도미노를 건드린 듯 순서대로 바닥에 떨어졌다.
남은 몸뚱이는 뇌관을 건드리기 전 도화선이 꺼진 폭탄처럼 푸쉭 소리를 낼 뿐이었다.
나쁘지 않았다. 다른 게 아니라 경험치가.
[경험치 회득 : 500exp!]
[경험치 회득 : 537exp!]
[경험치 회득 : 550exp!]
.
.
.
휙!
문제는 그 다음이다.
예상했던 바, A급 두 놈이 대번에 내 쪽으로 뛰어왔다. 가공할 만한 마나를 품은 제각각의 무기를 쥐고서.
아예 막무가내로 일을 벌인 것은 아니다. 어느 정도 믿는 구석이 있었다.
“총장님!”
내 입에서 민수정의 이름이 튀어나오자마자였다. 뒤쪽에서 쏟아지는 마나 기류가 가히 폭발적이었다.
강력한 염력이었다. 내가 가진 아락투스의 마법과도 비교할 수 없었다.
몰빵충이라고 자조 섞인 말을 했지만, 저 염동력의 소용돌이에 빠져들면 누구라도 생존을 장담하기 힘들 것이다.
콰드득!
민수정의 스킬이 작렬하자마자 좌우에서 달려들던 A급 두놈이 공중에 뚝 멈춰 섰다. 그러는 한편 놈들의 경악어린 눈깔이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조금만 늦었어도 내 목이 잘려나갔을 것이다. 부들부들 떨리는 놈들의 검과 스태프가 내 목 한 치 앞에 자리 잡고 있었다.
뒤쪽으로 몸을 빼면서 아락투스의 흑마법을 시전했다. 다섯 고리가 힘찬 동력을 받으며 세상 밖으로 튀어나왔다.
민수정에 비하면 작고 귀여운 힘이 분명했지만, 그래도 놈들의 전진을 막는 데는 충분했다.
“호오! 그거였구나.”
때아닌 민수정의 감탄사를 뒤로했다.
[아드레날린 부스트를 시전합니다.]
힘을 아끼지 않았다. 곧이어 있을 큰 충격에 대비해야 했다.
몇백 번 검을 맞부대끼고, 3일 밤낮을 다투는 혈전은 민간인들이 만들어 낸 상상이다. 가진 힘의 양이 비슷할수록 단기전을 띄는 양상이 잦다.
지금처럼.
순간적으로 힘의 방향이 전환됐다. 공중에 누워있는 남자의 몸이 한순간 내 쪽으로 쏠렸다.
“흡!”
쏟아지는 인력을 견디지 못한 젊은 남자의 얼굴이 크게 확대됐다.
타이밍을 맞췄다.
[신성한 파괴자를 시전합니다.]
우측 상단에서부터 검을 휘둘렀다.
콰드드득!
먼저 피부 바깥으로 겹겹이 둘러싼 놈의 방어마법이 차례대로 부서졌다.
남자는 그때까지 중첩된 염동력을 파훼하지 못했다. 그저 부들부들 떨며, 필사적으로 저항하는 놈의 두 눈에서 핏물이 뚝뚝 떨어졌다.
놈의 발악은 다섯 겹의 방어막이 모두 벗겨졌을 때까지도 계속됐다. 녀석의 왼쪽 어깨를 지켜주던 갑옷도 폭풍에 휘말리듯 날아갔다.
드디어 남자의 피부가 검 끝에 걸렸다. 곧이어 근육과 어깨뼈를 가르고 깊숙한 곳으로 들어가자 세차게 맥동하는 심장이 느껴졌다.
두근! 두근!
망설이지 않았다. 연이어 심장까지도 두동강 냈다.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남자는 A급이다. 죽일 것이라면 확실하게 해야 했다.
검에 맺힌 오러에 박차를 가했다. 그것은 녀석 또한 마찬가지였다. 고통에 울부짖으면서도 제 단전의 모든 마나를 끌어올린 것이다.
실로 감탄이 나왔다. 내가 놈이었다 해도 심장이 갈라진 채로 움직이는 건 불가능했을 것이었다. 놈은 그것을 해내고 있었다.
곧 죽음을 직감한 남자가 모든 마나를 끌어모아 검을 내질렀다.
“흐아아압!”
엄청난 힘의 충격을 예상했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검과 검이 닿기 직전 남자의 몸이 균형을 잃고 쓰러졌다. 마나를 잔뜩 담은 녀석의 검과 같이.
쿠웅!
남자의 몸이 양단된 채 허물어졌다. 옆에서 같이 돌격하던 여자는 남자의 희생으로 말미암아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계집이 틈을 타 마법을 파훼해낸 것이다.
허나 패색이 짙은 모습이었다.
“뭐, 뭐시여.”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상황과 전혀 맞지 않은 짜증나는 사투리였다.
“이태진이 아니여?”
검술교관이 나를 보며 허탈하게 웃는데, 반가운 기색이 묻어 나왔다.
“소식은 들었으. 떼놈들 뚝배기를 깨버렸던디. 아주 멋이 철철 흘러나오더만. 내가 잘 가르치긴 했지?”
“…….”
“으잉? 성공하더만 아는 척도 안 하는 거여?”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뭐라 반박하는 게 더 추한 꼴을 보일 것 같아서.
내가 이래서 검술교관을 싫어한다. 아주 사람을 우습게 만드는 데 일가견이 있다.
“이태진? 이태진이라고?”
“진짜 그 이태진이라고?”
“저 사람이 여기 왜 있어?”
졸업생들의 대화였다. 테러리스트를 예의주시하면서도, 힐끔힐끔 나를 살펴보는 얼굴에서 깊은 흥미가 느껴졌다.
어쨌든.
지금은 앞에 있는 테러리스트를 어떻게 진압할지가 더 중요했다. 승기는 우리 쪽으로 넘어왔다.
A급의 머릿수가 하나라도 앞서는 이상, 자의로 이곳을 빠져나갈 수 있는 광신도는 없다.
그래선지 남은 A급 테러리스트 여자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 특히 나를 보고 입술을 뻐끔뻐끔거리는 게 상태가 심상치 않았다.
“아…!”
작게나마 탄성까지 터트리는데, 순간 좋지 않은 생각이 들었다.
자폭 스킬. 앞에 있는 여자가 사용하면?
자세한 스킬의 원리까지는 모른다. 대충 전신의 모든 마나를 터트려 극한의 폭발을 일으키는구나 추측할 뿐.
C급 각성자들의 자살 폭격도 가슴이 뜨끈한데 만약 시전자가 A급 각성자라면.
보호 마법이 강하게 펼쳐졌다 한들 아카데미가 날아가는 건 당연지사고, 도시 전체가 파괴될 수도 있다.
작정하고 남은 조무래기들이 지키고자 한다면, 계집이 잠깐의 틈을 버는 건 일도 아닐 터였다.
정말 무서운 건 이것들이 진짜 일을 벌일 것 같아서다. 목숨을 초개같이 여기고 던지는 게 사이비들의 본성이니까.
생각이 이어지던 중, 뒤쪽에서 또각또각 발소리를 내며 민수정이 걸어왔다. 그녀는 그때도 한 치의 표정 변화도 없었다.
“보니까 한국인인 것 같은데. 타코 냄새가 안 나. 그렇다고 나랑 척 진 기억도 없는 놈들이고. 너희 어디서 온 잡것들이니?”
사람 머리 여섯 개가 굴러다니고 있는데도 민수정의 시선은 젊은 여자에게 향해 있었다.
“이 이상 다가가시면 안 됩니다.”
내가 팔을 치켜들며 그녀를 만류했다. 거침없이 걸어오던 민수정이 의외로 내 말은 곧장 따랐다. 군말 없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제자리에 서서 팔짱을 꼈다.
“시타둠? 처음 듣는 테러 단체인데. 신고식으로 아카데미를 선택한 거야?”
“…….”
“왜 대답이 없어? 네 친구 때문에 그러니?”
민수정이 내게 죽은 A급 각성자의 머리를 발로 걷어찼다. 당장 교도들이 죽일 듯 으르렁거렸다.
그러면서도 끝끝내 달려들지 않는 것은 두려움 때문이 아니었다. 아까부터 나를 노려보던 여자가 기겁하며 제지하고 나섰다.
“…….”
무슨 고민을 하는 걸까. 여자가 아무 말 없이 우리를 뚫어져라 노려 보고 있었다. 정확히는 나를.
그 사이 머릿속이 맹렬하게 돌아갔다.
냉정하게 이성을 지켜야 한다. 정말로 상황이 극으로 치닫는다면. 도시가 날아가도 민수정 한 명을 살리는 게 맞다.
방금과도 상황이 다르다. 내가 막을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공간이동 같은 건 못 씁니까?”
“그거 쓸 줄 알면 여기 말고 일성 회장 자리에 앉아 있지.”
혹시나 물어봤지만 돌아오는 대답이 부정적이었다.
“여기서 도망치게? 그건 좀 그런데.”
“아까 자폭하려는 거 봤죠? 그거 막을 수 있어요?”
“못 막지.”
“그러면 도망쳐야 할 것 같은데요.”
혹시라도 민수정이 아카데미 졸업생들을 지켜야 한다고 하면 어쩌려나 싶었는데.
“그래. 우선 살고 봐야지.”
당연하다는 듯 민수정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나저나 너는 알고 있는 것 같다? 쟤들 누군지.”
“시타둠교라고. 새로 발족한 종교단체입니다. 시스템을 모신으로 섬기는 것들이에요.”
“어쩐지. 눈깔들이 훽 돌아있더라. 얘! 너도 자살할 거니? 그러면 지금 좀 말해 줄래?”
민수정이 손을 모아 여자에게 소리쳤다. 다정한 목소리와 달리 눈빛은 서늘했다. 틈을 보이면 그녀의 스킬이 여자의 사지를 찢어놓을 것이다.
“8장로님! 어서 명령을!”
그에 반응한 걸까. 여자를 호위하던 놈 중 하나가 답답한 듯 호소했다. 그럼에도 여자는 잠잠했다. 아니, 정확히는 나를 노려보며 어떤 말을 중얼거렸다.
-교, 교주님을 몰라뵀습니다! 죽을 죄를 지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