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3화 경호 (2)
“그래도 몸은 좋네. 멍청한 손영혁이나 털보도 짜임새 있다고는 느꼈는데. 합격.”
다짜고짜 내뱉는다는 게 이런 말이다.
“성희롱입니까?”
“패기도 있고. 너 내가 누군지는 알지?”
“민수정.”
그래서 반말로 돌려줬다. 뭣하면 깽판치고 던전이나 들어갈 속셈으로.
“…잘 아네.”
심드렁하게 나를 보던 그녀가 눈썹을 꿈틀거렸다. 그런데 돌아가라는 말은 안 한다.
뭐 어쩌라는 건지. 지금까지 미래가 나타나지 않은 걸 보면 나에게 그리 중요한 사람. 경호 대상이라 해도 그렇다.
비단 감정적인 이유 때문이 아니라, 일성 내에서 올라간 입지 때문에도 그렇다.
내가 업신여김당하면 일성이 무시당하는 것과 같다. 그래서 억지로 싸가지 없어 보이도록 가면을 썼다. 정말 억지로.
“듣던 대로 까탈스럽네. 너 오기 전에 네 기록 한번 찾아 봤어. 아카데미 때부터 상당한 노력파더라. 아, 뒷조사 좀 했다고 불쾌한 건 아니지? 이래 봬도 아카데미 관계자라서.”
“네, 뭐.”
“그런데 몸보다도 느껴지는 기운 말이야. 심장에 고리로 맺혀있는 이거. 아까부터 거슬리는데 대체 뭐야?”
“……!”
순간 뜨끔했다. 순전히 궁금해서 묻는 투인데 나한테는 추궁하는 것처럼 들렸다.
대체 심장의 고리는 어떻게 안 거지?
“아. 이게 그거구나. 악천후 그 대머리 멈추게 한 거. 무슨 스킬인가 했더니. 나도 염동력 계열이기는 한데 이건 구조가 되게 신기하네. 톱니바퀴처럼 된 건가? 마나 냄새가 나기는 하는데 또 완전히 같지도 않고. 이런 신기한 건 어디서 얻었니?”
“…….”
그런 게 보인다고?
정말 상상도 못 해 본 일이다. 레인저인 김석환은 물론이고 최태성도 별말 안 했던 거라서.
당연히 아무도 모를 줄 알았다. 중력마법이 뭔지 물어보는 사람들한테도 그저 스킬 하나 얻은 거라고 설명한 게 다였으니까.
후웅!
본능적인 반응이었다.
혹시나 해서 민수정의 파동을 읽어봤다. 역시나 예상했듯 나보다 윗급의 각성자였다. 김석환, 손영혁과 같은 레벨로 봐야 했다.
230레벨대.
등급이 올라갈수록 레벨 하나 하나가 유의미해진다. 특히나 A급부터는 더 그렇고.
즉, 내가 전력을 다한다 해도 이길 수 없는 여자라는 말이다.
“어라? 이제는 내 속까지 들여다보네?”
심지어 내가 관찰하는 걸 알아채기까지 한다. 뭐라 변명할까 하다가 그냥 가만있었다.
설마 죽이기야 하겠나 싶어서. 또, 사실 이런 경우가 처음이라 당황해서 입이 떨어지지 않는 것도 있었다.
민수정은 날 빤히 보더니 주황빛 단발을 시원스레 넘기면서 말했다.
“내가 마나 냄새를 좀 잘 맡는 편이라. 원래는 이런 짓 하다 걸리면 바로 반 죽여놓는데. 한 번만 봐줄게. 잘하자?”
화끈하게 말하는 성격이 한석훈과 비슷한 듯하면서도 달랐다. 묘하게 이쪽이 더 쿨하다고 해야 하나.
어쨌든. 상대가 이렇게 나오자 마음이 좀 편해진다. 또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도 알 것 같았다. 이쪽으로는 이미 이골이 났거든.
악수하자며 건네는 손을 무시하고 꾸벅 인사했다. 확실하게 선을 그었다. 어떤 빌미도 주기 싫었다. 괜히 엮여서 좋을 게 없다는 생각이 퍼뜩 들었다. 한석훈은 한석훈 한 명으로도 충분히 차고 넘친다.
“하!”
“여기 총장님 일정입니다.”
코웃음 치는 민수정을 무시하고 비서가 건네는 종이 한 장을 받았다. 기밀이라며, 보고 곧장 태워버리라는 말과 함께.
일주일 치가 맞나 싶을 정도로 빡빡한 일정이 적혀있는 종이였다.
사장단 회의, 아카데미 졸업식 참여, 교무실태감사….
끝도 없이 이어지는 스케줄이 진절머리가 날 정도였다.
“대충 이야기는 들었지? 시비 잘못 걸린 거.”
차로 이동하면서 대화가 이어졌다. 자연스럽게 말을 놓은 민수정이 웃으며 사건의 발단을 꺼냈다. 핑계든 뭐든, 민수정이 경호를 붙인 이유는 있었다.
사건은 심플했다.
얼마 전 미국에서 정기적으로 열리는 학회에 민수정이 아카데미 대표로 참여했었다.
각국의 아카데미 장부터 어지간한 대기업들의 수장들까지 모이는 자리답게 인맥을 만들려고 혈안이 된 버러지들이 많았다는 게 민수정의 설명이었다.
그런데 문제는 거기서 옆에 있던 남자에게 성희롱을 당했다고 한다. 한 성깔 하는 민수정은 당연히 참지 않았고.
“때린 건 먼저였다고 들었습니다.”
“어머. 그러면 그 말을 듣고 참니?”
“수프 접시에 코를 뭉갰다던데.”
“그렇긴 하지.”
피식거리던 민수정이 말을 이었다.
“안 그래도 그 새끼가 복수하겠다고 난리 피우더라.”
“복수라 함은?”
“뭐긴 뭐야, 사람 보내서 죽인다는 거지.”
“접시물에 코 좀 박았다고 그렇게까지 합니까?”
“명분이야 만들어내면 그만이고. 의도적으로 접근한 거야. 애초부터 목적이 나였어. 너랑 화신처럼.”
나와 화신이라. 문득 하오란과 ‘그것’을 떠올리다, 본론을 이어나갔다.
“이유가 뭡니까?”
“걔네 집안이 멕시코에서 마약 팔던 것들이거든. 저번 학회였나. 내가 한소리 했어. 학회 질 떨어지게 웬 잡것들까지 불렀냐고.”
뭐가 나랑 화신이라는 건지. 이 여자가 먼저 시비건 거 맞잖아.
“근본이 없어도 너처럼 재능이라도 있든가. 안 그래?”
칭찬인지 욕인지 모르겠다. 황당한 얼굴로 쳐다보자 민수정이 낄낄거리며 웃었다. 앞으로 자기 목숨 잘 부탁한다며.
슬쩍, 운전하는 비서를 쳐다보다 다시 고개를 돌렸다.
“그러면 진짜 청부업자가 오는 겁니까?”
“그럴걸? 걔 눈빛이 진짜 살벌하더라. 그러니까 나 좀 잘 지켜줘.”
며칠 쉬다 오라는 김석환의 말과 내용이 전혀 달랐다. 쉬기는 개뿔.
아마 민수정의 목숨을 노리려면 A급 각성자 정도는 올 터. 그 싸움에 휘말렸다가 나도 죽을지도 모른다.
개죽음 당하기 싫으면 항상 긴장 상태를 유지해야 하는 것이다.
때마침 비서가 약속장소에 도착했다며 차를 세웠다.
높으신 나으리들이 모이는 장소가 맞았다. 나도 못 가본 5성급 호텔이었다.
“의례적인 자리입니다. 반경 5미터를 벗어나지 않는 선에서 계셔주시면 됩니다.”
차가운 표정의 비서가 그렇게 말했다. 사장단 점심식사 자리였다. 그러니까 아카데미를 운영하는 높으신 분들끼리 밥도 먹고 차도 홀짝이는 시간이라는 말이다.
“다른 경호원은 없습니까?”
“총장님이 거추장스러운 걸 싫어하셔서요.”
곧장 수긍했다. 국내는 당연하고 각성자 전체를 통틀어도 그녀를 죽일 수 있는 사람은 별로 없어 보인다.
그건 그거고. 받은 돈을 생각하면 하는 시늉이라도 내야 할 판이었다.
인벤토리에서 꺼낸 롱소드를 허리춤에 장착했다. 언제든 대응할 수 있게끔 손잡이에 한 손을 가져다 댄 채
아카데미에서는 온갖 것을 다 가르친다. 그중에서는 요인 경호도 있었다.
VIP를 일정 거리 안에서 사람들에게 노출시키지 않는다거나, 총이나 칼 맞을 일이 있으면 대신 맞아주고. 또 누가 주머니에 손을 넣고 있으면 예의주시한다거나.
숨을 들이켰다. 동시에 옅은 파동이 내 몸을 중심으로 뻗어 나갔다.
반경 5키로미터 이내, 개미 새끼 한 마리도 내 레이더를 벗어날 수 없다. 마나 활용도가 그 정도에 이르렀다.
“다시 봐도 신기한 운용법이네. 나도 마나 다루는 센스는 뛰어나다고 생각하는데 그건 도저히 못 따라하겠는걸?”
앞에서 걸어가던 민수정이 눈을 크게 뜨며 되물었다.
“뭐 별거라고.”
어쩐지 속이 개운하다. 근본 어쩌고 하던 여자에게 한 방 먹인 느낌이라 그런 걸까.
귀엽네, 하고 피식 웃은 그녀가 다시 발을 옮겼다.
호텔 안은 조용했다. 이미 대관을 한 듯 1층 식당은 정장 입은 사내들이 출입을 제한하고 있었다.
“총장님.”
당연히 민수정은 보자마자 프리패스였고.
한없이 가벼운 말투를 써서 그렇지, 이 사람 영향력을 보자면 손영혁보다도 위에 있다.
각성자 아카데미의 중요성은 겨우 학교장이라고 표현하기에는 부족함이 있으니까.
헌터 산업의 총본산이 협회와 아카데미다. 모르긴 몰라도 정재계에서 그녀와 엮이지 않은 사람을 찾기가 더 힘들 것이다.
어쨌든.
보기만 해도 체할 것 같은 인테리어의 레스토랑은 이미 사람들로 가득 찬 상태였다.
자리에 앉기도 전 한 여성이 다가왔다. 곧장 파동을 살펴봤다. 민간인이었다. 지근거리에 있다 한들 안심해도 좋았다.
“총장님. 늦으셨어요.”
나무라는 게 아니라 언제 오나 목 빠지게 기다렸다는 투였다. 그러며 여자가 자연스럽게 민수정에게 물잔을 건넸다.
이미 만찬회는 한창인 듯했다. 이곳저곳에서 식사와 다과를 즐기는 사람들이 보였다.
“주인공이 뭐 그렇지.”
별생각 없이 물잔을 받아든 그녀가 술 마시듯 벌컥벌컥, 감탄사까지 내뱉으며 잔을 털어낸 직후였다.
“커헉!”
뜬금없이 민수정이 각혈을 한다.
어? 이게 무슨 상황이지?
의문과 동시에 손이 자동으로 나갔다. 민수정을 뒤로 물린 즉시 물잔을 건넨 여자를 칼로 벴다.
서걱-!
곧장 여자의 목이 나가떨어졌다. 죽는 그 순간에도 여자의 얼굴은 한 점 후회 없어 보였다. 쓰러지는 여자의 망막 위로 황당함을 감추지 못하는 내 얼굴이 비쳤다.
이런 미친.
무슨 독인지 몰라도 민수정 정도 되는 A급 각성자가 힘도 못 쓰고 컥컥대며 무너져 내렸다.
“힐러 있습니까?”
침착하게 힐러부터 찾는 비서에게 뭐라고 말해줘야 할지 모르겠다. 목을 부여잡고 켁켁대던 민수정이 끝내 죽어버렸다.
경호 임무 한 시간 만에 의뢰인이 죽었다.
내 바로 앞에서.
그리고 그다음 순간.
화악!
“다시 봐도 신기한 운용법이네. 나도 마나 다루는 센스는 뛰어나다고 생각하는데 그건 도저히 못 따라하겠는걸?”
민수정이 내 앞에서 눈을 크게 뜨고 묻고 있었다.
뭐라고?
“…네?”
“뭐야. 너한테는 쉽다 이거야?”
“그게 아니라….”
“의외로 겸손한 구석이 있네.”
돌연 민수정이 다시 레스토랑 쪽으로 발을 돌렸다. 아까랑 똑같은 장소로.
빠른 상황판단이 요구됐다. 상황을 복기해봤다.
민수정이 내 앞에서 죽었고, 나는 과거로 돌아왔다.
아니. 과거로 돌아온 것이 아니다.
더 깊숙한 무의식으로 몰입했다.
언제부터였지?
생각해보니 어느 지점부터 내 몸의 통제권을 잃었었다. 정확히 여자가 민수정에게 물을 건넨 순간부터.
확신했다. ‘그것’이 수를 쓴 것이다. 나도 모르는 새 미래를 보고 온 것이다.
눈을 위로 올리자마자였다.
“총장님. 늦으셨어요.”
내게 목이 달아난 여자가 총장에게 물을 건넨다.
판단은 빨랐다. 그녀의 손에서 잔을 낚아채 곧바로 바닥에 던졌다.
스아악-!
물처럼 보였던 액체가 바닥에 뿌려지자마자 연기가 뿌옇게 올라왔다.
이게 뭔가하며 나를 바라보던 민수정이 얼떨떨한 얼굴로 나를 바라봤다.
“이런 미친…!”
여자가 곧장 품에서 단검을 꺼내 달려들었다. 망설일 것 없었다. 의뢰를 맡은 이상 그녀의 생존이 내 최우선 사항이다.
서걱-!
민간인의 목은 A급 전사의 검을 감당할 수 없었다. 또다시 허공으로 날아간 그녀의 얼굴이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일그러졌다.
‘퉁’ 거리는 소리와 함께 여자의 목이 땅에 떨어졌을 때도. 민수정은 오롯이 나만 응시하고 있었다.